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자주정신의 발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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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2-20 09:19 조회1,979회 댓글0건본문
(이 글은 후미 출전에서 추리고 앞부분에 약간의 윤색을 가하였음)
30년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 그동안 몽고군은 6차례에 걸쳐 고려의 전국토를
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으며 죄없는 무수한 백성을 살해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수십만명의 포로가 그들의 나라로 잡혀갔고 따라서 대동강
이북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되고 논 밭은 묵어 수목이 우거졌으며 함락된 성곽
아래에는 시체가 더미를 이루고 비릿한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듯 30년 전쟁의 참화는 참혹함 그것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백성
을 위하는 또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그래도 체면은 살려 항복아닌 강화를 하
였다. 전세계를 정복한 원 세조 쿠빌라이도 감지덕지 고려의 화의요청을 받아
드렸다. 그러면서 이제껏 그 어느 민족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특혜(?)를 고려에
베풀었다.
첫째, 기한내에 모든 몽고 군대는 압록강 밖으로 철군한다.
둘째, 정해진 사신이외의 몽고인이 함부로 재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셋째, 강화도에서의 개경환도는 국력이 회복될 때까지 유보한다.
넷째, 고려는 독자적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도 좋다.
전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원제국의 동쪽 끝에서
고려는 그나마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에는 삼별초라는 고려 최강의 군대가 있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세력이었다. 초기에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맹렬하였는지 개경
정부군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진압할 수가 없었다. 몽고군이 들어왔으나 몽고
장수 아해조차 일찌감치 도망가고 김방경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길 정도다.
진도뿐아니라 밀양, 개경, 대부도 백성들 조차 삼별초와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전쟁기와 같이 백성이 피폐해지고 고려의 국권마저 위태
로워 진다. 삼별초가 누구인가? 무인 집권자들은 정권을 잡자 삼별초를 친위세
력으로 만들고 많은 봉급과 사사로이 혜택을 주고 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삼별초는 권신들이 하라는대로 하고 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앞다투어 힘썼다.
김준이 최의를 죽인 것.
임연이 김준을 죽인 것.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인 것.
이 모두가 삼별초의 힘을 빌려 한 짓이다.
고려사에서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뒷받침하고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적인 무
력집단이란 평이다. 고려사는 누가 지었나. 바로 고려조를 폄훼하는 조선의 사
관에 의해 지어졌다. 조선의 사관들 조차 이렇게 삼별초를 평가했다. 따라서 삼
별초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에
대하여 해산명령을 내리고 명부를 가져갔다. 명부가 무엇인가 삼별초는 그들을
죽이려는 살생부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대의명분이 필요했다. 몽고와의 굴욕적
인 강화에 저항하여 봉기하는 것으로 자주정신의 발로요 민족사적인 대몽항쟁
의 기치아래 봉기하는 것으로 그러나 그들의 대몽항쟁은 대의명분이 약한 반란
이었다. 고려사 반역자 열전에는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뿐 아니라 배중손이
들어있지 않은가?
첫째, 고려는 이미 11년전에 몽고와 강화를 맺었다. 그때 삼별초는 별장 김준을
추종하여 무인 집권자 최의를 제거하고 태자가 몽고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1268년 12월 임연이 김준을 죽일때는 어떠하였나? 당시 몽고에서는 개경
환도를 강요하고 일본원정에 필요한 군대와 선박 등을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등
고려를 심하게 압박하였다. 국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준은 몽고 사신을 죽이고
다시 항전에 돌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던 원종은 무장 임연
의 힘을 빌려 김준을 제거하고 삼별초는 약간의 머믓거림 끝에 결국은 임연을
무인정권의 집권자로 인정하고 김준 일당을 소탕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셋째, 더욱이 봉기하기 불과 한달전에 임유무를 죽인 것은 봉기의 원인을 순수
한 자주의식에서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임유무는 몽고군을 이끌고 돌아
오는 원종에 대항하여 대몽항전에 돌입할 것을 꾀하던 집정자였다. 임유무는
삼별초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다시 산성과 섬으로 들여보내게 했었다. 그러한
임유무를 삼별초가 제거한 것이다. 계속 강화도에 있으면서 권력의 원천으로
활동을 하였다면 과연 삼별초는 대몽항전에 돌입했을까? 몽고군이 주둔한 개경
으로 나아가면 삼별초의 특권과 정체성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런데 해산령이라니, 살생부라니 그들은 외길의 수순을 걸을 수 밖에 없
었다. 삼별초의 항쟁원인을 이렇게 분석해 보는 것도 전혀 타당성이 없지는 앓
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지난 1970년대, 1980년대 삼별초를 추앙하는 열기는 대단했다.
첫째, 제주 항파두리성에 항몽순의비를 건립하고 성터를 복원했으며,
둘째, 진도의 용장성도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삼별초는 독립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자주의 표상, 구국의 화신으로 추앙되었
고 원종은 정권을 위해 나라를 송두리째 몽고에 내맡기고 몽고와 야합한 비굴
한 존재로 격하되었다. 한편에는 자주의식으로 무장한 삼별초가 있고, 한편에는
비열한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명쾌한 평가는 어딘
지 석연치 못하다. 원종과 쿠빌라이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분명 야합이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합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임연과 그를 추종한 삼별초
였다. 권신에 의해 충성하지 않는 군대에 의해 강제로 폐위 당한 왕에게 야합
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게다가 복위 직후 봉고에 간 원종은 몽고 관리들이 종이와 붓을 쥐어주자 "중
풍으로 손이 떨려 쓰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폐위 이유
를 묻자 "내가 중풍이 들어 물러났다가 차도가 있어 복위했다."고 대답했다.
고려 내부의 일에 몽고가 깊이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훗날 신하들이
늙은 원종에게 시류를 쫓아 몽고옷을 입고 몽고식으로 머리를 깍자고 권했을
때도 "내가 죽거든 자네들이나 그렇게 하게나"하고 끝까지 고려옷을 입고 상투
를 풀지 않았다. 고려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반면 , 임연은 몽고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원종을 폐위한 것이 아니었다. 임연은
이미 몽고에 맞서 다시 항쟁하자고 주장했던 김준을 죽인 경력이 있다. 고려사
는 말한다. 임연은 삼별초를 동원하여 원종을 폐위시킬 당시 "내가 왕실을 위
해 권신을 제거했는데도 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니 내가 어찌 손을 놓고 죽임을
당하겠는가" 라고 했다고 한다. 임연은 자구책으로 원종을 폐위시킨 뒤 몽고
황제의 동의를 구하려 계획했고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는 임연을지지
한 것이다.
삼별초는 반몽항쟁을 표방하면서 봉기에 돌입했고 그것은 분명 고려인의 꿋꿋
한 자주의식을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봉기의 원인을 설명
하고 찬양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역사를 이용하기는 쉬워도 역
사를 사실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출전 : 모반의 역사(역사는 그들을 역모자라 불렀다)/한국역사연구회/2001 중 -------반란과 대몽항쟁의 갈림길에서/서울대강사 이종서)
이와 관련하여 재야 사학자 이이화는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1994년)"에서
충렬공 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충렬공(김방경)은 고려의 버팀목이었다고,
그분은 1283년 충렬왕 9년 70이 넘은 나이로 퇴직하여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가
89세로 파란많은 삶을 마쳤다. 그런데 그분의 공적과는 달리 나라에서는 예장
을 해주지 아니하여 쓸쓸한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고.
이제 그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정리해 본다. 그분는 무신이면서도 무신정권
에 가담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대몽항쟁을 철저히 벌였다가 뒤에 삼별초를 토
벌하는데 동원되었고, 고려 왕실을 위해 몽고에 외교 솜씨를 보이며 일본정벌
에 나셨다.
그런 속에서 그분은 심한 갈등을 겪으며 몽고의 장수들과 계속 알력을 벌여 여
러번 문초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늘 민생문제와 국가 피폐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신명을 바쳤다. 그분은 항목과 부몽사이에서 눈물을 가슴속
에 묻어두고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 힘을 다썼다. 그러하니 그분은 비겁하거나
눈치를 살피는 타협주의자가 아닌 고려의 버팀목이었다. 뒷날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의 행동과 아주 그럴싸하게 비교된다고. "끝"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 김주회 -
▣ 김영환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영환
▣ 김항용 - 훌륭한 자료의 발굴과 평론에 또 감탄을 했습니다.
▣ 김은회 - 끝없는 자료발굴에 감탄합니다
30년 기나긴 전쟁이 끝났다. 그동안 몽고군은 6차례에 걸쳐 고려의 전국토를
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으며 죄없는 무수한 백성을 살해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수십만명의 포로가 그들의 나라로 잡혀갔고 따라서 대동강
이북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되고 논 밭은 묵어 수목이 우거졌으며 함락된 성곽
아래에는 시체가 더미를 이루고 비릿한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듯 30년 전쟁의 참화는 참혹함 그것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백성
을 위하는 또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그래도 체면은 살려 항복아닌 강화를 하
였다. 전세계를 정복한 원 세조 쿠빌라이도 감지덕지 고려의 화의요청을 받아
드렸다. 그러면서 이제껏 그 어느 민족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특혜(?)를 고려에
베풀었다.
첫째, 기한내에 모든 몽고 군대는 압록강 밖으로 철군한다.
둘째, 정해진 사신이외의 몽고인이 함부로 재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셋째, 강화도에서의 개경환도는 국력이 회복될 때까지 유보한다.
넷째, 고려는 독자적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도 좋다.
전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원제국의 동쪽 끝에서
고려는 그나마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에는 삼별초라는 고려 최강의 군대가 있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세력이었다. 초기에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맹렬하였는지 개경
정부군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진압할 수가 없었다. 몽고군이 들어왔으나 몽고
장수 아해조차 일찌감치 도망가고 김방경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길 정도다.
진도뿐아니라 밀양, 개경, 대부도 백성들 조차 삼별초와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전쟁기와 같이 백성이 피폐해지고 고려의 국권마저 위태
로워 진다. 삼별초가 누구인가? 무인 집권자들은 정권을 잡자 삼별초를 친위세
력으로 만들고 많은 봉급과 사사로이 혜택을 주고 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삼별초는 권신들이 하라는대로 하고 그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앞다투어 힘썼다.
김준이 최의를 죽인 것.
임연이 김준을 죽인 것.
송송례가 임유무를 죽인 것.
이 모두가 삼별초의 힘을 빌려 한 짓이다.
고려사에서 삼별초는 무신정권을 뒷받침하고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적인 무
력집단이란 평이다. 고려사는 누가 지었나. 바로 고려조를 폄훼하는 조선의 사
관에 의해 지어졌다. 조선의 사관들 조차 이렇게 삼별초를 평가했다. 따라서 삼
별초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에
대하여 해산명령을 내리고 명부를 가져갔다. 명부가 무엇인가 삼별초는 그들을
죽이려는 살생부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대의명분이 필요했다. 몽고와의 굴욕적
인 강화에 저항하여 봉기하는 것으로 자주정신의 발로요 민족사적인 대몽항쟁
의 기치아래 봉기하는 것으로 그러나 그들의 대몽항쟁은 대의명분이 약한 반란
이었다. 고려사 반역자 열전에는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뿐 아니라 배중손이
들어있지 않은가?
첫째, 고려는 이미 11년전에 몽고와 강화를 맺었다. 그때 삼별초는 별장 김준을
추종하여 무인 집권자 최의를 제거하고 태자가 몽고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1268년 12월 임연이 김준을 죽일때는 어떠하였나? 당시 몽고에서는 개경
환도를 강요하고 일본원정에 필요한 군대와 선박 등을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등
고려를 심하게 압박하였다. 국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준은 몽고 사신을 죽이고
다시 항전에 돌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던 원종은 무장 임연
의 힘을 빌려 김준을 제거하고 삼별초는 약간의 머믓거림 끝에 결국은 임연을
무인정권의 집권자로 인정하고 김준 일당을 소탕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셋째, 더욱이 봉기하기 불과 한달전에 임유무를 죽인 것은 봉기의 원인을 순수
한 자주의식에서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임유무는 몽고군을 이끌고 돌아
오는 원종에 대항하여 대몽항전에 돌입할 것을 꾀하던 집정자였다. 임유무는
삼별초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다시 산성과 섬으로 들여보내게 했었다. 그러한
임유무를 삼별초가 제거한 것이다. 계속 강화도에 있으면서 권력의 원천으로
활동을 하였다면 과연 삼별초는 대몽항전에 돌입했을까? 몽고군이 주둔한 개경
으로 나아가면 삼별초의 특권과 정체성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런데 해산령이라니, 살생부라니 그들은 외길의 수순을 걸을 수 밖에 없
었다. 삼별초의 항쟁원인을 이렇게 분석해 보는 것도 전혀 타당성이 없지는 앓
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지난 1970년대, 1980년대 삼별초를 추앙하는 열기는 대단했다.
첫째, 제주 항파두리성에 항몽순의비를 건립하고 성터를 복원했으며,
둘째, 진도의 용장성도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삼별초는 독립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자주의 표상, 구국의 화신으로 추앙되었
고 원종은 정권을 위해 나라를 송두리째 몽고에 내맡기고 몽고와 야합한 비굴
한 존재로 격하되었다. 한편에는 자주의식으로 무장한 삼별초가 있고, 한편에는
비열한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명쾌한 평가는 어딘
지 석연치 못하다. 원종과 쿠빌라이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분명 야합이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합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임연과 그를 추종한 삼별초
였다. 권신에 의해 충성하지 않는 군대에 의해 강제로 폐위 당한 왕에게 야합
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게다가 복위 직후 봉고에 간 원종은 몽고 관리들이 종이와 붓을 쥐어주자 "중
풍으로 손이 떨려 쓰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폐위 이유
를 묻자 "내가 중풍이 들어 물러났다가 차도가 있어 복위했다."고 대답했다.
고려 내부의 일에 몽고가 깊이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훗날 신하들이
늙은 원종에게 시류를 쫓아 몽고옷을 입고 몽고식으로 머리를 깍자고 권했을
때도 "내가 죽거든 자네들이나 그렇게 하게나"하고 끝까지 고려옷을 입고 상투
를 풀지 않았다. 고려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반면 , 임연은 몽고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원종을 폐위한 것이 아니었다. 임연은
이미 몽고에 맞서 다시 항쟁하자고 주장했던 김준을 죽인 경력이 있다. 고려사
는 말한다. 임연은 삼별초를 동원하여 원종을 폐위시킬 당시 "내가 왕실을 위
해 권신을 제거했는데도 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니 내가 어찌 손을 놓고 죽임을
당하겠는가" 라고 했다고 한다. 임연은 자구책으로 원종을 폐위시킨 뒤 몽고
황제의 동의를 구하려 계획했고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는 임연을지지
한 것이다.
삼별초는 반몽항쟁을 표방하면서 봉기에 돌입했고 그것은 분명 고려인의 꿋꿋
한 자주의식을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봉기의 원인을 설명
하고 찬양하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역사를 이용하기는 쉬워도 역
사를 사실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출전 : 모반의 역사(역사는 그들을 역모자라 불렀다)/한국역사연구회/2001 중 -------반란과 대몽항쟁의 갈림길에서/서울대강사 이종서)
이와 관련하여 재야 사학자 이이화는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1994년)"에서
충렬공 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충렬공(김방경)은 고려의 버팀목이었다고,
그분은 1283년 충렬왕 9년 70이 넘은 나이로 퇴직하여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가
89세로 파란많은 삶을 마쳤다. 그런데 그분의 공적과는 달리 나라에서는 예장
을 해주지 아니하여 쓸쓸한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고.
이제 그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정리해 본다. 그분는 무신이면서도 무신정권
에 가담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대몽항쟁을 철저히 벌였다가 뒤에 삼별초를 토
벌하는데 동원되었고, 고려 왕실을 위해 몽고에 외교 솜씨를 보이며 일본정벌
에 나셨다.
그런 속에서 그분은 심한 갈등을 겪으며 몽고의 장수들과 계속 알력을 벌여 여
러번 문초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늘 민생문제와 국가 피폐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신명을 바쳤다. 그분은 항목과 부몽사이에서 눈물을 가슴속
에 묻어두고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 힘을 다썼다. 그러하니 그분은 비겁하거나
눈치를 살피는 타협주의자가 아닌 고려의 버팀목이었다. 뒷날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의 행동과 아주 그럴싸하게 비교된다고. "끝"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 김주회 -
▣ 김영환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영환
▣ 김항용 - 훌륭한 자료의 발굴과 평론에 또 감탄을 했습니다.
▣ 김은회 - 끝없는 자료발굴에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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