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묘지명(鄭仁卿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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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3-13 06:43 조회1,428회 댓글3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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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묘지명(鄭仁卿墓誌銘)
정인경(鄭仁卿 : 1237~1305)은 청주 부성현(淸州 富城縣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사람인데, 아버지 표(彪)는 벼슬이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이었고, 어머니 오씨(吳氏)는 승동정(丞同正) 영노(永老)의 딸인데 정인경으로 말미암아 고창군대부인(高敞郡大夫人)에 봉해졌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그의 부친의 이름을 신보(臣保)라고 하였는데, 원래 중국사람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하였고, 그의 아들인 정인경은 서산 정씨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옹립하려 하였을 때에 이를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이 도첨의시랑(都僉議侍郞)으로 물러났으나, 1305년(충렬 31)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 도첨의중찬(壁上三韓 三重大匡 推誠定策安社功臣 都僉議中?)을 더하여 주었는데, 이 해 12월에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시호는 양렬공(襄烈公)이다. 먼저 예빈윤(禮賓尹) 진수(陳琇)의 큰딸과 결혼하여 한 아들을 두었으며, 뒤에 그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다. 묘지는 조의대부 판예빈사사 충사관수찬관 지내지(朝議大夫 判禮賓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內旨)인 방우선(方于宣)이 지었다.
시대 고려
연대 1306년(충렬왕32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가로 38.5cm, 세로 78.5cm, 두께 3.4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방우선(方于宣) / 미상 / 미상
<判讀文>
朝議大夫判禮賓寺事充史館修撰官知 內旨方□宣述」
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上護軍判典理事致仕鄭公墓誌銘」
公諱仁卿淸州富城縣人也考諱彪皇官至刑部員外郎以公貴追贈門下侍郎平章事母吳氏丞同正永老之女也以公故累封至高敞郡大夫人公之桑梓本爲縣令以公立功加?」
爲知官改爲瑞州公生而有雄偉之量策名山西越丙辰年 大朝軍馬?入我圻公年甫十九應募從軍斬首虜多得孝溫下隊正又解習兩國言語至至元六年己巳」
今上親朝公以攝校尉扈從是年七月還至婆娑府聞林衍廢立事議欲還赴 朝廷左右侍從不能無懷土之心或勸涉鴨江公確擧大義奉 乘輿 □至 闕庭先赴帝所奏陳 元王復位 釐降公主遣兵討賊等數條事一皆 ?可此則萬世之功也七年庚午拜散員兼御牽龍行首八年辛未拜郎將兼世子府右指諭是年 今上率衣冠胤胄入質欲以公從」
行固請於 元王王素愛公之奉職無他不欲斯?暫離於左右故不允之自此常出入禁?眷注益厚九年壬申別批授將軍兼入內侍十一年甲戌 元王賓天 今上來襲寶位因被」
疑投閑數四年 上心不欲遐?擬將大用十五年戊寅復授將軍兼典法?郎十九年壬午加大將軍累轉至?三年丙戌拜攝上將軍翌年丁亥留授鷹揚軍上將軍兼軍簿判書是」
年特下 綸旨以公爲一等功臣賜丹?蓋賞其前功也二十六年己丑授三司使未幾遷密直司副使兼典法判書秋部爲左執法必擇人而授故三兼是職累遷至知司事尋遷右常適有內?權倖者來請通婚公以義拒之由是蓄憾 上訴至於落職有識者皆嘆之至大德三年己亥三月 上念其勞舊授判三司事復起視事七」
月授知都僉議司事九月授?理十二月授?成事不數月間四加寵奬其 上如此是年以賀正使入聘詳聞 都堂議論許多條?奏 上聰有?於當時」
謀臣之意卽珥僉議侍郎致仕不復朝請公?性公正苟可以利於國家則直陳無隱人多忌之因以再有歇官之厄然恭巳守分不以苟進爲念故略無?色理」
鶯溪別業怡神自適者有年矣至九年乙巳九月 上追紀前勞陞加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都僉議中?以榮之是年九月有疾十二月十七日」
卒于第享年六十九 上聞訃甚悼命有司襄後事以十年丙午十二月十九日葬于樸峴贈諡曰襄烈公先娶禮賓尹陳琇之一女生一男曰?今爲僉議舍人後娶其二女生四男二女」
男曰信英今爲版圖正郎曰信丘投曹溪剃髮曰信和今爲都染署令曰信綏今爲懷陵直長女適三司右尹蔡宗瑞次女適司僕官佐郎金光軾皆相門之貴胄也銘曰」
英英鄭公 人中之龍 性寬膽大 色溫?恭 克勤乃職 惟正之供 四方奔命 一節匪躬 功高壁上 位極侍中 富貴壽考 哀榮始終」
門庭赫赫 蘭玉?? 餘芳不盡 百福攸同 宜刻厥石 傳於無窮」
大德十年二月 日墓誌」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해석문>
조의대부 판예빈시사 충사관수찬관 지내지(朝議大夫 判禮賓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內旨) 방우선(方于宣)이 지음
벽상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상호군 판전리사(壁上三韓 三重大匡 推誠定策安社功臣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護軍 判典理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정공(鄭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인경(仁卿)으로, 청주 부성현(淸州 富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표(彪)는 관직이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인데 공이 귀해지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오씨(吳氏)는 승동정(丞同正) 영로(永老)의 딸로서, 공 때문에 여러 차례 봉해져서 고창군대부인(高敞郡大夫人)이 되었다. 공의 고향에는 원래 현령(縣令)이 파견되지만, 공이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호칭을 승격하여 지관(知官, 知郡事)을 파견하고, 이름을 고쳐 서주(瑞州)라고 하였다.
공은 나면서 씩씩하고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서 무반직[山西]에 이름을 올렸다. 병진년(고종 43, 1256)에 대조(大朝, 蒙古)의 군마가 우리 서울지역까지 난입하였을 때, 공은 겨우 19세였지만 모집에 응하여 종군하였다.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자가 많았는데, 효온(孝溫)의 휘하에서 대정(隊正)이 되었다. 또한 두 나라의 언어를 훤하게 익혀서, 지원(至元) 6년 기사년(원종 10, 1269)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몸소 원(元)에 조회하러 갈 때 공이 섭교위(攝校尉)로 호종하였다. 그 해 7월에 돌아오다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러 임연(林衍)이 임금을 폐립(廢立)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원으로 돌아가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좌우에서 시종하는 사람들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어서 혹자는 압강(鴨江, 鴨綠江)을 건널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공이 굳게 대의를 들어 임금의 수레를 받들고 □ 원의 궁궐로 돌아와 먼저 황제에게 나가 원종(元宗)을 복위시키고,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며, 군사를 파견하여 역적을 토벌할 것 등의 몇 조목의 일을 아뢰게 하였는데, 하나 같이 모두 허락을 받았으니 이는 만세에 남을 공적이다.
7년 경오년(원종 11, 1270)에 산원 겸 어견룡행수(散員 兼 御牽龍行首)에 임명되고, 8년 신미년(원종 12, 1271)에 낭장 겸 세자부우지유(郎將 兼 世子府右指諭)가 되었다. 그 해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의관자제들을 이끌고 볼모로 들어가면서, 공을 데려가고자 하여 원종(元宗)에게 굳게 청하였다. 임금이 평소 공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아껴서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 하였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항상 궁궐[禁?]을 출입하니 임금의 은총이 더욱 두터웠다. 9년 임신년(원종 13, 1272)에 특별히 비(批)를 내려 장군(將軍)을 제수하고 겸하여 내시(內侍)에 들어가게 하였다.
11년 갑술년(1274)에 원종이 승하하고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원에서) 돌아와 왕위를 잇게 되자 의심을 받아 4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임금이 마음 속으로는 오래 버려두지 않고 장차 크게 쓰려고 하여서, 15년 무인년(충렬 4, 1278)에 다시 장군 겸 전법총랑(將軍 兼 典法摠郞)에 임명하였다. 19년 임오년(충렬 8, 1282)에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옮겨 23년 병술년(충렬 12, 1286)에는 섭상장군(攝上將軍)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해년(충렬 13, 1287)에는 응양군상장군 겸 군부판서(鷹揚軍上將軍 兼 軍簿判書)로 뛰어 올랐다. 이 해에 특별히 윤지(綸旨)를 내려 공을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삼고 단권(丹卷)을 하사하였는데, 대개 그 전의 공(功)을 포상한 것이다.
26년 기축년(충렬 15, 1289)에 삼사사(三司使)에 임명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밀직사부사 겸 전법판서(密直司副使 兼 典法判書)로 옮겼다. 추부(秋部, 刑部)는 법을 지키고 집행하는 곳이어서 반드시 적임자를 골라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세 차례나 이 직책을 겸하였다. 여러 차례 옮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얼마 뒤 우상시(右常侍)로 옮겼다. 그 때 내환(內宦, 內侍)으로 권세가 있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가 와서 통혼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의(義)로써 거절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분한 감정을 가지고 임금에게 호소하여 해직되게 하니 식자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대덕(大德) 3년 기해년(충렬 25, 1299) 3월에 임금이 옛날의 공로를 생각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제수하고 다시 나와 근무하도록 하였다. 7월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되고, 9월에는 참리(?理)가 되었으며, 12월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몇 달이 되지 않은 동안에 네 차례나 관직을 올려주고 총애하고 장려하였으니, 임금의 은혜가 이와 같았다. 이 해 하정사(賀正使)로 원의 조정에 들어가 도당(都堂)에서 의논한 많은 조목을 상세히 듣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하였으나, 당시 모신(謀臣)의 뜻에 거슬려 도첨의시랑(都僉議侍郞)으로 물러나 은퇴하고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공정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로운 것은 바르게 말하고 숨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꺼렸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관직에서 물러나는 액운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공손하고 분수를 지키면서 구차하게 행동하려 하지 않았으며, 거의 화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앵계리(鶯溪里)의 별장[別業]을 다스리며 즐겁고 여유롭게 지낸 지 몇 년이었다. (대덕) 9년 을사년(충렬 31, 1305) 9월에 임금이 이전의 노고를 뒤이어 기념하면서 벽상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 도첨의중찬(壁上三韓 三重大匡 推誠定策安社功臣 都僉議中贊)을 더하여 영예롭게 하였다. 이 해 9월에 병이 들어 12월 17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 일을 돌보게 하였다. 10년 병오년(충렬 32, 1306) 2월 19일 박현(樸峴)에 장례지냈는데, 추증된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공은 처음 예빈윤(禮賓尹) 진수(陳琇)의 큰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유(유)로 지금 첨의사인(僉議舍人)이다. 뒤에 그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신영(信英)은 지금 판도정랑(版?正郞)이고, 신구(信丘)는 조계종(曹溪宗)에 투신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신화(信和)는 지금 도염서령(都染署令)이며, 신수(信綏)는 지금 회릉직(懷陵直)이다. 장녀는 삼사우윤(三司右尹) 채종서(蔡宗瑞)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복관좌랑(司僕官佐郞) 김광식(金光軾)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재상 집안의 귀한 자손들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지혜롭고 뛰어나도다, 정공(鄭公)이여, 사람 중의 용(龍)으로
성품은 너그럽고 담대하며 기색은 온화하고 태도는 공손하도다.
직책을 맡아 부지런하고 오직 옳은 것만을 받들었으며
명령에 따라 사방을 바삐 다니며 한결같은 절조로 자신을 돌보지 않았도다.
공훈은 벽상(壁上)에 높았고 지위는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니
부귀와 장수를 누리며 생애가 한결 같도다.
가문은 밝게 빛나고 자손[蘭玉]은 창성하니
꽃다운 남은 향기는 가시지 않고 백 가지 복이 함께 하도다.
마땅히 저 돌에 새겨 무궁하게 전하리로다.
대덕(大德) 10년(충렬 32, 1306) 2월 일 묘지(墓誌)를 짓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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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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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할아버지와 동시대의 분이시고, 앵계리(鶯溪里)가 눈에 띄어 옮겨 보았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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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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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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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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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앵계리... 가보고 싶은 곳... 근처에 있는 철동(수철동)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