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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 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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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3-13 14:09 조회1,54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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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5권> 충숙왕 忠肅王.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여름 4월에 전왕이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부처의 화상[?佛]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6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적신(賊臣) 조적(曺?)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원 나라의 명을 받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에, 간신의 잔당들이 근거없는 말을 꾸며 내어 국가의 변란을 음모하였으나, 시종하였던 신하들은 종시 한결같은 충절로 과인의 몸을 보좌하여 그 공이 막대하였으니, 영원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ㆍ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좌사(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判密直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환(尹桓)ㆍ박청(朴靑),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ㆍ안천길(安千吉)ㆍ노영서(盧英瑞)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 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봄 2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행하여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 왕이 김영후(金永煦)와 함께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셨는데, 영후가 취하여 드러누우니, 왕이 측근자를 시켜서 부축하여 말을 태워주고, 따라온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이미 나에게 타던 말을 주었다." 하니, 영후가 마침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임오일에 원 나라에서 내주(乃住) 등 8명을 보내어 왔는데, 이들은 거짓말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갑신일에 대경(大卿) 타적(朶赤), 낭중 별실가(別失哥) 등 6명이 와서 교외에서 사면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왕이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 마중하지 않으려 하니, 용보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일찍이 나에게 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만일 마중하러 나가지 아니하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하여질 것입니다." 하여,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을 입고 교외에 마중나가 조서를 정동성(征東省)에서 듣고 있는데, 타적ㆍ내주 등이 왕을 걷어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니 용보가 그를 꾸짖었다.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서 왕의 시종들을 붙잡으니, 여러 불량배와 백관들은 모두 달아나 숨었다. 좌우사 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 2명이 피살되고, 칼이나 창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복병을 두고 밖을 방어하여 그들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왕후(王煦)를 우정승에, 김륜(金倫)을 좌정승에, 김영후(金永煦)ㆍ강윤성(康允成)을 찬성사에, 전사의(全思義)ㆍ강우(姜祐)를 참리(?理)에, 이천(李?)을 정당문학에, 권적(權適)을 판밀직사사에, 허백(許伯)을 밀직사사에, 봉천우(奉天祐)ㆍ안축(安軸)을 지밀직사사에, 민사평(閔思平)을 감찰대부에 임명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 忠穆王.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여름 4월에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에,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전사의(全思義)ㆍ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에, 이천(李?)ㆍ이몽가(李蒙哥)ㆍ장항(張沆)을 참리(?理)에, 정을보(鄭乙輔)를 정당문학에, 인당(印?)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12월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왕후(王煦)를 파면하고, 김영후를 우정승에,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에, 이곡(李穀)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왕후는 정방을 폐지하고 과전(科田)을 폐지한 까닭에 욕심 많고 나쁜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파면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 忠穆王.병술 2년, 원 지정 6년
우정승 김영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편에 황제가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 恭愍王一.병신 5년(1356), 원 지정 16년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공신호를 내려 준 것을 사례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졸하였다. 김영후는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침착하여, 친척이나 친구 중에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 주었다. 그의 손자 김사안(金士安)ㆍ사형(士衡)은 모두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혹 김영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느냐." 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자제들이 참으로 어질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쓸 것이요, 어질지 않으면 벼슬을 구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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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태서씨  이렇게 자주 뵈니 반갑습니다.  언제 한번 얼굴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아저씨,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