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양간공(良簡公-휘 承澤). ? --1358(공민7)
고려의 문신. 중시조 방경(方慶)의 손자, 판서공 선의 아들.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지고, 1342년(충혜왕 복위3)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어 전(田) 70결과 노비 5구를 받았다. 1352년(공민왕1) 8월 이제현(李齊賢)·한종유(韓宗愈)등과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입시해서 시독(侍讀)할 때마다 칭찬을 받았다. 이어 10월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묘소는 실전이며 단소는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정 내에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1일이다.
가)영단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단)

<단소>
나)영단 묘비문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호는 大菴,諱는 承澤이니,고려국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의정승 永昌君 致仕하고 諡는 良簡이시다. 고조는 상서상 우복야공 휘 敏成이요 증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공 한림학사 휘 孝印이며, 조는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중찬 諡 忠烈公 諱 方慶이고,祖女比는 냉평국부인 竹州朴씨이니라.
서기 1580년 宣祖朝에 충렬공을 吾門 안동김씨의 世祖로 創譜하였으니,考2세는 전법판서 상장군 휘 小宣이요, 女比는 순창군부인 순창설씨이다. 三世 長은 대호군 도첨의사사 제조공 휘 資인바 공의 증손인 밀직부사 휘 精에이르러 내서사인 재당숙 휘 齊顔과 더불어 申頓謀朱死에 괴로역살되니 오안동김씨종가종손은 탈보되어 수안김씨로 이적하고 휘제안공의 후손계는 사천김씨로 각각 분관하니라. 三世 仲은 보문관대제학 시충숙공 휘 승용인바 기후손은 판밀직사사공 휘칠우,개성윤공 휘칠림,군사공 휘칠양, 공조전서공 휘성목,밀직부사공 휘천순으로 각각 분파하고 次가 오파계조 양간공 휘승택이며, 季가 상서공 휘승우계인바 장손 현감 휘 윤계는 청주 김씨로 분적하고 차손이 대호군공 휘 유계로 분파하니라. 오조 양간공의 배위는 시 충선공 휘 흔 지녀이니 낭랑국부인 경주 김씨요, 그 조는 추밀원 부사공 휘 경손이요, 증조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시 문장공 휘 태서이니라.
양간공께서는 충렬왕 대에서부터 충정왕까지 고려 6대왕 100년간의 원몽지속하의 조정이 남으로는왜구의 침입을 방어해야하고, 북으로는 배원정책과 舊疆회복에 진력하여야 하는 국가 수난기 중의 재상이시었다. 고려 전통 유가에 태어나신 유신으로써 서리 1342년 6월에는 종형제인 상락부원군 시문숙공 휘 영돈과 복창부원군 시 정간공 휘 영순 그리고 계림부원군 이제현 제공등과 더불어 적신 조적의 구난을 평정하여 이등공신에 훈봉되고, 서기 1352년 충혜왕 8월에는 이재현, 한희유, 안진, 백문보, 정간공 영순 등 제공과 함께 서연을 열어 경일시덕함에 원로대신들과 논차로 입시하야 경사법원을 증강하시었다. 부군께서는 천품이 엄의관후하시고, 자혜애인 하시었으며 박학호문 경청경지하고 법도계리 강유상제 하시었는지라 백성이 권세가의 수탈당한 전답 노비와 적년의 송사와 면체한 옥사등은 공평히 양찰하여 국정을 치적하신 명정승이라 쓴 고려사 세가재38을 써 옮겨준다. 10월에 첨의찬성사의 승서되시고, 공민왕 7년 서기 1358년 7월 태백성이 3개월이나 나타났을 때 서거하시니, 양간공의 후손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과 52인 무과 4인이 배출되어 혁혁명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부군의 장자는 숭정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상낙군 휘 昴요, 차자는 안렴사공 휘 冕이니, 차계는 도평의사사 소경공 휘 九鼎계로 분파하였다. 오호라! 양간공 승하가 630여년이라. 원래 유택이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이었으나 창상이 이변하고 병난이 중첩되어 후손이 선조의 체혼을 실전한지 오래였었다. 이에 늦게나마 촌마두인의 정성으로 이 곳 취백림 금수단에 설단하고 궐향 점황의 옷깃을 여미며, 국궁 혜배 하오리니 이 어찌 오문의 일대 경행이 아니리요. 언간에 본역 삼위지설단 추진사업에 포천의별제공 후손 종중의 협찬이 지대하였음을 치사하면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졸문이나마 불사음기로서찬하노라.
서기 1990년 3월
양간공 22세손 재승 근찬 양간공 22세손 재홍 근서
2)상락군공(上洛君公-휘 昴)
가)영단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단)

나)영단 묘비문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 휘는 昴이니 관은 고려국 숭정대부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의정부 찬성사요, 상락군의 치사하였다. 고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仁이요, 증조는 선충현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 상낙군 개국공 첨위령 시충렬 휘 方慶이며, 조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휘 小宣 이요, 考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이정정승 영창군 치사 휘 承澤이시다. 부군께서는 서기 1315년 1월 신유에 대과 방안랑에 등제하시니 천품이 박학호문 자혜애민 하고 견방공덕 법도계리 하며 이정지화 유덕안중하고 경신고명 온양호학 하시었으니 공사가 천덕하시고 제자 예우는 공손히 외경존중하여 환대교우하시니 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으시었다. 배는 삼한국부인 여흥 민씨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연관 대제학 시 문온공 호 及菴 휘 思平之女요, 祖는 판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대사헌 여흥군 시 문순공 휘 적이며, 증조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복창군 시 충순공 휘 종유요, 외조는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언양김공 윤이다.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명가의 출생하시어 부도를 익히시었으니 그 자녀서들은 자당의 법도를 본받아 환중일지라도 조석문안을 궐하지 않고 부모의 효를 다 하였었다. 급암 선생은 무남 절손 하시었으나 출가지녀 여흥 민씨께서는 생 男三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영가화문의 품성이 유유초연하고, 기백이 호호강의함은 낙강 상낙대에 비롯하니 망망차해를 건너 사사독강의 순국하신 조상의 얼이 스며서인가 경향의 종인들이 힘을 모아 늦게나마 삼위지단을 설하여 세 일제를 봉사하니 개경의 충혼은 이제 영원히 이 곳에 안면하리다.
서기 1990년 3월
상락군 21세손 在承 謹撰. 상락군 21세손 在洪 謹書
다)상락군(휘 묘)의 장인인 민사평의 묘지명 (2005. 3. 9. 발용(군) 제공)
민사평묘지명(閔思平墓誌銘)
묘지명은 이달충(李達衷)의 문집 『제정집(霽亭集)』 권3과 『동문선(東文選)』 권125에 실려 있으며, 1359년(공민왕 8)에 이달충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사평(閔思平 : 1295~1359)의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적(?)이다. 어머니 김씨는 흔(?)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는 종유(宗儒), 증조부는 황(滉)이다. 시호는 문온공(文溫公)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민사평은 1315년(충숙왕 2) 과거에 급제한 이후 충숙왕·충혜왕·충목왕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묘지명 찬자는 민사평을 선비 즉 유사(儒士)의 면모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김묘(金昴)에게 시집갔다.
참고로 조부 종유(宗儒), 아버지 적(?) 및 부인 김씨, 김묘(金昴)의 처인 딸 민씨의 묘지명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59년(공민왕8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달충(李達衷) / 미상 / 미상
<判讀文>
高麗故輪誠秉義協?功臣重大匡都僉議?成事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贈諡文溫公閔公墓誌銘(幷 序)
余少遊大人先生之門獲侍話言每論士風必??嘆息曰今不如昔余竊以謂固矣何必爾旣閱事多姑信其爲然也前輩風流日以淪謝顧寥寥無所矜式則求舊之懷隨感而興可勝嘆哉余於及菴公深有族姻情好之敦故其卒痛悼滋甚而夫人銘墓之請再至則敢以陋辭焉公諱思平字坦夫號及菴忠州驪興人考諱?匡靖大夫密直司使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諡文順?金氏宣授鎭國上將軍管高麗軍萬戶重大匡上洛君金?之女封永嘉郡夫人祖諱宗儒重大匡都僉議?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諡忠順曾祖諱滉朝散大夫戶部侍郎蓋其先世種德滂仁培植悠久自九代祖諱稱道奉御公而下代有碩輔其功烈位號磊落相望家有譜國有史?而不書公生於元貞乙未十二月戊辰五歲而喪?長于忠順資超然有器度大宰金貞烈公素號知人妻公以女貞烈喜賓客一時名勝多從之游因有所觀感學日進試補奉先庫判官轉右列爲散員加別將且不樂虎資讀書益力延祐乙卯吾東菴文定公主禮?考閱甚精所取不滿常額選無匪人公中之由是學問優游十年之久時毅陵久於上國至泰定乙丑正位東還愼簡庶僚公拜藝文春秋二脩撰歷左右二正言獻納服賜銀緋金紫視其品庚午永陵卽位頗不喜儒苟非有得於中者惟虎是?爲之媚悅公時以軍簿正郎藝文應敎亦出入王府與議選授其操守不小變至順壬申毅陵復位大明黜陟公拜衛尉少尹知製敎階奉善丙子加奉常以版圖摠郎出爲慶尙道監鐵使民便之召以典校副令右文館直提學復版圖摠郎館職改藝文進成均祭酒遷左司議大夫階以中顯陞中正館改進賢出爲全羅道按廉使惠化敦洽入拜成均大司成充春秋館脩撰官由正順進奉翊至正壬午以判典校掌成均試取金仁琯等九十三人甲申明陵卽政授典理判書轉監察大夫乙酉入密直爲提學帶上護軍歷副使知司事明年封驪興君越己丑聰陵入朝公從之旣踐位以其勞授僉議?理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號輸誠秉義協?功臣進?成事商議會議都監事退而閑居者八年至正己亥年六十五秋七月戊申病卒于私第訃聞上嗟悼賜諡曰文溫公於戱公奕世衣纓事業昌熾未嘗?有矜色性資溫雅處親姻雍容敦睦雖有拂戾不以爲言終必?服善交遊嘗與拙齋崔先生友善尤篤喜其文出力?行其敦信樂善類如此居官處事不爲崖異一循義理而己以詩酒自娛坦蕩蕩君子人也以公觀之未必士風今不如昔公旣歿矣所遇日新則余亦不覺??歎息曰今不如昔此余所以信其大人先生之言爲然也生一女適世家子弘福都監判官金昴孫男二人公愛之敎養有方皆登科曰齊閔德寧府注簿曰齊顔直翰林院孫女四人長適世家子監門衛?軍事金士安餘皆未?齊閔昆季主喪盡禮是庚申葬于大德山感應寺之南麓其銘曰
如公之裕如公之粹人所歆兮靡底于?靡胤厥後天難諶兮有女之懿有甥之美慰我心兮詩有旨味文有高致?余長吟兮中而不倚群而不類一以?兮念言宛爾於乎巳矣嗟歲月之??兮
〔출전:『霽亭集』권3〕
<해석문>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시문온공 민공묘지명 병서(高麗 故 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贈諡文溫公 閔公墓誌銘 幷序)
내(묘지명 찬자 : 李達衷)가 젊어서 대인(大人)선생의 문하에서 노닐 때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다. (선생은) 사풍(士風)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시기를, “지금 세상이 옛날만 못하다.” 하셨다. 나는 그 때 홀로 말하기를, “너무도 통하지 않는 말씀이다. 어찌 반드시 그러하랴”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세상 일을 많이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전배(前輩)들의 풍류가 날로 줄어들어 다만 고요할 뿐 뒷 사람이 본받을 곳이 없다. 옛 사람을 아쉬워하는 회포가 솟아오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급암공(及菴公)과는 인척사이로 두터운 정의가 있어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부인으로부터 묘지명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누추하다고 하여 사양하리오.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이다. 아버지 적(?)은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시호가 문순(文順)이다.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 管高麗軍萬戶 重大匡 上洛君)인 김흔(金?)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종유(宗儒)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장군 판총부사(重大匡 都僉議贊成事 上將軍 判摠部事)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증조(曾祖) 황(滉)은 조산대부 호부시랑(朝散大夫 戶部侍郞)이다. 대개 선대에 덕을 심고 인을 베풀어 심고 가꾼 지가 오래되었다. 9대조인 이름이 칭도(稱道)인 봉어공(奉御公)부터 대대로 큰 신하가 있어 그 공로와 이름이 매우 많아 서로 바라보기에 이르렀으나, 집안에 족보가 있고 나라에 사서(史書)가 있으므로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공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12월 무진일에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충순공(忠順公 : 閔宗儒) 집에서 자랐다. 자질이 뛰어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재상(大宰)인 김정렬공(金貞烈公 : 金倫)이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름이 있어, 자기 딸을 공의 처로 삼았다. 정렬공은 빈객을 좋아하여 일시의 명사들이 그를 따라 놀았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배움이 날로 진보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무반으로 바꾸어 산원이 되고 별장에 올랐다. 그러나 무반직을 좋아하지 않고 책 읽기를 더욱 힘써 하였다. 연우(延祐) 을묘년(충숙왕 2, 1315)에 우리 동암 문정공(東菴 文定公 : 李?)이 예부시를 주관하면서 과거 심사가 매우 엄하여 선발한 인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은 적절치 못한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여기에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에 힘써 10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의릉(毅陵 : 충숙왕)이 오래 원나라에 있다가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 왕위를 회복하였다. 귀국하여 신하들을 신중히 뽑았는데, 공은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의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좌우정언(左右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은비(銀緋)와 금자(金紫) 색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경오년(충숙왕 17, 1330) 영릉(永陵 : 충혜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아, 마음 속에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로지 무반들이 하는 것을 본받아 아첨하였다. 공은 그 때 군부정랑 예문응교(軍簿正郞 藝文應敎)의 벼슬로 왕부(王府)에 출입하며 인사를 함께 의논하였으면서 그 분수를 지킴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순(至順) 임신년(충혜왕 2, 1332) 의릉(毅陵 : 충숙왕)이 복위하여 관리의 출척(黜陟 : 승진과 퇴출)을 밝게 할 때, 공은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少尹 知製敎)에 임명되었고, 관계(官階)는 봉선대부(奉善大夫)였다.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봉상대부(奉常大夫)를 더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郞)의 관직으로 으로써 경상도염철사(慶尙道鹽鐵使)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전교부령 우문관직제학(典校副令 右文館直提學)으로 소환되어 다시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고 관직(館職)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다시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승진하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다. 관계(官階)는 중현대부(中顯大夫)에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직(館職)은 진현관(進賢館)으로 바뀌었다.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교화하여 다스렸고, 들어와 성균관대사성 충춘추관수찬((成均大司成 充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다. 정순대부(正順大夫)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지정(至正)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를 관장하여 김인관(金仁琯) 등 93인을 뽑았다.
갑신년(충혜왕 복위5, 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을유년(충목왕 1, 1345) 밀직사(密直司)의 밀직제학이 되고 상호군을 겸직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해를 넘겨 기축년(충정왕 1, 1349) 총릉(聰陵 : 충정왕)이 원나라에 갔을때 공이 시종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그 공으로 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參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에 책봉되었다.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로 승진하고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지 8년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공민왕 8, 1359) 65세로,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고 시호를 문온공(文溫公)이라 하였다.
아! 공은 대대로 내려온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이 번성했으나, 일찍이 자랑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성품과 자질이 온아하였으며, 친인척을 대함에도 온화하고 화목하였다. 비록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부끄러워 하고 심복하였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졸재 최선생(拙齋 崔先生 : 崔瀣)과 친분이 돈독하였고 그의 문장을 좋아하여 힘을 내어 간행하였다. 믿음을 두터이 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변덕스럽거나 기이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의리를 쫓을 뿐이었으며, 소탈하게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겨하는 마음이 넓은 군자였다.
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의 사풍(士風)이 반드시 옛만 못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죽었고 만나는 것은 날로 새로운 것들이니,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지금이 옛만 못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대인선생(大人先生)의 말이 옳다고 믿는 까닭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세가(世家) 자제인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김묘(金昴)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인이다. 공이 사랑하여 도에 맞도록 가르쳤다.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제민(齊閔)은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이고, 제안(齊顔)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다. 손녀가 4명이다. 맏이는 세가자제(世家子弟)인 감문위참군사(監門衛參軍事) 김사안(金士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제민 형제가 상례를 주관하며 례를 극진히 하여, 이 달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록(南麓)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
공같이 부유하고 공같이 순수함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인데,
어찌 명이 길지 못하였고 어찌 뒤를 이를 아들이 없었던가, 하늘도 믿기 어렵구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아름다운 사위를 맞았으니, 나의 마음을 위안하네.
시는 맛이 있고 문장은 높이 이르름이 있어 나로 하여금 오래 음미하게 하네.
바로 서서 기대지 아니하고 뭇 사람과 어울리되 같이 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였나니,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데,
아! 끝났구나. 슬프다, 쏜살같이 달리는 세월이여.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라)배위 여흥군부인 민씨 묘비명(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2005. 발용(군) 제공)
(출전 : 문온공파 파보 122page.목은집,동문선)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9와 『동문선(東文選)』 권128에 실려 있으며, 1379년(우왕 5)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씨(閔氏 : 1324~1379)는 김묘(金昴)의 처이다.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종유(宗儒), 조부는 적(頔), 아버지는 사평(思平)이다. 외조(外祖)는 김윤(金倫)이다.
아들이 3명으로, 장남은 구용(九容), 차남은 제안(齊顔), 구덕(九德)이다. 딸은 9명이다. 각각 김사안(金士安), 이창로(李彰路), 최유경(崔有慶), 허호(許灝), 허의(許誼), 이존사(李存斯), 김첨(金瞻)에게 출가했다. 나머지 둘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참고로 민씨의 증조부 종유(宗儒), 조부 적(頔), 아버지 사평(思平) 및 처 김씨의 묘지명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79년(우왕5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색(李穡) / 미상 / 미상
<判讀文>
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吾友金九容氏以今年閏五月甲辰葬其母驪興郡夫人閔氏于祖母金氏之塋直其西十數步旣而走其子叅軍事明善求銘予義不辭按其狀輪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溫及菴先生諱思平其考也匡靖大夫密直司使諡文順諱迪其大父也僉議贊成事諡忠順諱宗儒其曾大父也都僉議政丞諡貞烈竹軒金公諱倫其外祖也內外赫然一國所慕而夫人生於其問習熟見聞凡所當爲壹是皆以母則爲本事父母甚孝朝昏定省不以疾病廢宗族稱之辛丑冬避賊南遷奉母以行母安焉如在室中其後居驪興十有餘年事之益勤母旣歿矣夫人之子壻每請還京夫人涕泣曰吾母葬於斯吾去矣拜掃闕矣吾何忍焉吾何忍焉五月癸巳以病歿年五十六九容氏又曰吾父淸德畏人之知喜於晦養母今亡焉嗚呼奈何穡曰賢哉金母也文溫公雖無子有是女以生九容氏宅相成遷史傳可不謂賢哉男三人長九容前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脩官次齊顔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校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次九德前左右衛保勝散員女九人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副令許誼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瞻次未適其銘曰物歸其根其生不窮驪興閔氏葬于其中江之沄沄曷其有終與之俱長永嘉之風
〔출전:『牧隱文藁』권19〕
<해독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해독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3)문온공(文溫公-휘 九容) 1338(충숙왕 복위7)∼1384(우왕10).
고려말 학자. 초명은 제민(濟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進士)가 되고, 그 후 문과(文科)에 급제,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겸 성균 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일으키고 척불양유(斥佛揚儒)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親明派)로서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이숭인·정도전(鄭 道傳)·권근(權近)등과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우왕7) 다시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 이어 판 전교시사(判典校侍事)가 되었다.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1382년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남경(南京)으로 압송된 뒤 대리(大理)로 유배되어 가다가 노주 영녕현(濾州永寧縣)에서 병사했다.
유고 시문집인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으며, 공의 시문집을 연구한 논문 서적인 <척약재 김구용 문학세계>(성범중저. 울산대 출판부. 1997)이 있다.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조선 현종 신축년)에 충렬공(휘 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됨. 단묘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金水壇에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1일이다.
■ 연보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육우당(六友堂).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1338년(충숙왕복위7) 태어나서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민사평(閔思平)에게 수학하였다.
16세 1353년(공민왕2) 송천봉(宋天奉)이 감시한 진사시에 합격하고, 친시에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장원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24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하였다. 26세 1363년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30세 1367년(공민왕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었다. 31세 1368년 전교부령이 되었다. 동생 김제안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33세 1370년 외조부 閔思平의 문집 <급암집>을 편찬 간행하였는데, 보물 제708호로 지정되어 있다. 34세 1371년 민부의랑 겸성균직강이 되고,
35세 1372년 총부의랑이 되고,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 전교령에 제수되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뒤에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 한거하였는데 이때 여강어우(驪江魚友)라 자호하고 강호에 노닐면서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六友堂은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에 있었는데, 외가가 있던 곳이다---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침류정(沈流亭)---川寧 金沙里에 있었다--- 승산(勝山)---주 남쪽 5리에 있다---, 보은사(報恩寺)---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는데 옛 신륵사이다---, 여강(驪江) 등지를 다니면서 읊은 시문이 그의 문집 <척약재학음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다.
44세 1381년 다시 풀려나와 나라에서 그 풍의를 숭상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제수하였다. 왕의 절제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45세 1382년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47세 1384년(우왕10)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고,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운남 대리위(大理衛)로 유배가던 중 사천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 객사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전장(典章)을 널리 구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고 이름지었고, 또 고금의 시문(時文) 몇 권을 모아 『선수집(選粹集)』이라고 했다. 유고 문집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다.
1400년 아들 明理가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초간본은 보물 제10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84년(고종21) 17세손 相元이 문집을 개간하고, 1964년 영천에서 문집이 개간되었으며, 1997년 그의 시문집을 연구한 논문 서적인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성범중, 울산대 출판)이 출간되었다.
1600년대 중반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고조부 김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현재는 훼철되었고, 현재 전북 남원의 <용장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가)영단

<단소>
나) 사적 비문
고려조 후기에 성리학이란 思辨哲學이 도입된 이래, 斯界에는 여러 명현들이 잇달아 나왔으며, 士論 또한 첨예하여 이단과 부조리 배격에도 앞장 섰었다.
대체 이들이 당시의 학계와 사상계를 지도하는 역할을 다하였으니, 그중의 한분이 철학자요, 정치가요, 동국시인이라 숭앙받으시던 金九容선생이시다.
선생의 貫은 安東이요, 諡號는 文溫 字는 敬之 號는 小易若齋 諱는 九容이시니 선생의 高祖는 고려국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 중찬 시호 忠烈公 字 本然 諱 方慶이요, 曾祖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諱 小宣이며 祖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영창군 시호 良簡 諱 承澤이요, 祖女比는 낙랑국부인 경주김씨이다. 考는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삼중대광 중서평장사 上洛君 諱 昴요, 女比는 삼한국부인 驪興閔氏인바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시호 文溫 號 及菴 諱 思平之女이며 配는 봉익대부 부밀직사사 진현관 제학 동지춘추관상호군 통직랑 예의정랑 南陽洪公 義元之女 당성군부인 南陽洪氏이다. 선생은 충숙왕후 7년(1338년)12월 1일 개성에서 출생하시니, 天稟이 聰敏하여 16세에 진사하고, 18세에 등제, 34세에 민부의랑겸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균관에는 巨儒 이색이 대사성에 그리고 선생을 비롯하여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등의 쟁쟁한 名儒 교관들이 관생을 지도강론하니 학교가 다시 부흥하고 성리학이 점차 성황을 이루었다. 이해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에 부임하시어 선정을 베풀고 이듬해 8월에 서장관으로 明京에 봉사하여 문물제도를 두루 시찰후 귀국하셨으며, 우왕원년 서기 1375년에는 삼사좌윤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원의 패배정권인 북원사신의 영접을 강경반대 상소하여 이숭인 제공들과 같이 유배되니 선생은 처음에 죽주로 갔다가 다시 母鄕 여주로 이배되어 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정에 거소를 두어 江山雪月風花와 산다고 하여 六友堂이라 불러 7년간이나 自娛하면서 때로는 同山麓江邊의 목은선생거소인 沈流亭과 시문을 교환하시었다. 1381년에 再起되어 좌사의대부에 올라 우왕의 방종을 누차 극간한바 있었으나 허사였었다. 서기 1382년 3월에 대사성에 오르고 이듬해에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는데, 시국은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난하여 갔었다. 특히 밖으로는 왜구의 창궐과 元 明 양국과의 까다로운 국제적 외교는 고려의 큰 두통거리가 되어, 마침 요동도지휘사에 대한 외교차 선생이 행례사로써 예물과 봉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시니 요동총병 반경등은 人臣義無私交라 하여 선생을 명의 서울 경사로 집송하였다. 명제 주원장은 貢馬 遲援을 이유로 전년의 김유 이자용 사건처럼 선생을 대리위에 유배하니, 도중 사천성 노주 영녕현 강문참에 이르러 와병 순국하시니 때는 우왕10년 서기 1384년 47세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한많은 그의 순국 애석하도다. 그의 나이와 才分, 그의 學問과 詩文은!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숨졌지만 영령은 날아와 길이 고국에 머무르니 후일 명제의 명으로 의관을 보내와 초혼하여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 불당현에 위패를 안치하였으며 후손들이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종산에 설단 향사하여 오다가 다시 이곳에 이단하였으며 유림들이 예천 물계서원과 남원 용장서원에 배향하였느니라.
회고컨대 선생의 철학과 經學 그리고 시문은 모두 탁월하여 排佛揚儒하고 東方理學을 始한 공이 컸고 격조높은 시인은 당대 제현들이 숭앙하여 동국시인이라 불러 흠모하였었다.
또한, 저서에는 의전제도에 관한 "주관육익" 과 역대 고금의 명시를 발췌한 "선수집" 이 있었고 기타 창작 시문이 많았으나 대부분 연멸되고 "척若齋學吟集" 만이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선생이 서거하신지 600여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후손들이 조상의 史實을 경모하고 그 얼을 이어받기 위하여 사적비를 建竪함에 있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여 왔다. 나는 일찍부터 선생의 숭고한 학문과 도덕관을 추모하고 있는 터이라 불문이나마 사양치 않고 삼가 약술 하노라.
문학박사 학술원회장 李丙燾 謹撰. 20세손 在洪 謹書
다)김구용 열전
출전 : 고려사 권 104. 열전 권 17
김구용의 字는 敬之, 初名은 齊閔이다. 공민왕때 16살로 진사에 합격하였다. 왕이 "牧丹"시를 짓도록 하여 김구용이 1등을 차지하자 왕이 기특하게 여겨 散員직을 하사하였다. 登第하여 德寧府主簿를 除授하였고, 여러번 옮겨 民部議郞 兼 成均直講이 되었다. 후학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휴가로 집에 있어도 여러 생도들이 질문하는 자가 서로 끊이지 않았다.
우왕 원년에 三司左尹이 되었는데 이때에 北元이 使者를 보내 말하기를 "백안첨목아왕이 (공민왕)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돌아감으로 너희나라가 왕을 弑害한 죄를 赦免한다."하니 이인임, 지윤이 그를 맞이하고자 하거늘 김구용은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과 더불어 高堂에 上書하기를, "만약 이 使臣을 맞이하면 한나라의 臣民이 모두 亂賊의 죄에 빠질 것이니 훗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공민왕)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하니 경복흥, 이인임 이 그를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諫官 이섬, 전백영 등이 상소하여 이인임의 죄를 논하고 그를 죽이기를 청하니 이인임이 간관을 杖流하고 또 김구용, 이숭인등이 자기를 모해한다 하여 함께 유배하니 김구용은 죽주에 유배되었다가 얼마후 여흥으로 옮기니 江湖에 放浪하여 매일 詩酒로써 自樂하고 그 居所에 '六友堂' 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7년에 우왕이 불러 左司議大夫를 삼으니 이에 上書하기를, "지금 왜구가 침범하여 사방이 적을 만나 干戈가 쉬지 않으니 백성은 그 생업을 잃고 饑饉으로 유의하여 貢賦와 軍旅를 調發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變故가 자주 일어나니 진실로 마땅히 두려워하여 닦고 살펴서 천심에 보답해야 하는데, 전하는 興이 나면 節度가 없고 醉하면 閭巷사이에서 말을 달리니 만약 한번 실족하면 毁傷될까 두렵습니다. 전하는 비록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만 종묘사직을 어쩌려고 하십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데 祖宗의 艱難한 업을 생각하고, 皇天이 諭告하는 마음을 살펴서 날마다 대신을 접하여 치도를 강론하고, 출입하는 위의는 대개 舊章에 따르십시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듬해 成均大司成으로 옮기고 이어서 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처음에 義州千戶 조계룡이 요동에 이르니 도지휘 매의 등이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에 매양 마음을 다하여 행하는데 나희 나라는 어찌 치사치 않느냐?" 라고 했다. 10년에 김구용을 행례사를 삼아 그를 받들고, 겸하여 白金 백량, 細苧. 麻布가 50필을 가지고 요동에 가니 총병 반경과 엽왕이 매의와 함께 말하기를 "人臣은 의리상 私交가 없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붙잡아 경사로 돌아가니 황제가 대리위로 유배를 명하여 노주 영녕현에 이르러 병사하니 나이 47세였다. 뒤에 우왕이 조계룡이 매의의 말을 잘못 전한 것을 추궁하여 그를 유배하였다.
김구용은 詞章을 잘하여 "小易若齋集" 이 세상에 유행되었다. 아들은 明善, 明理, 明允이다.
라)영정

마) <척약재 학음집>
(1)초간집 (조선 태종원년. 서기 1400년. 보물 1004호로 지정)

<척약재학음집>(조정 종손가소장본(趙靖 宗孫家所藏本)
(2) <재간본>

<재간본>(조선 고종21년. 서기 1884년. 포천 종손가에서 재간)
(3) <3간본>
(4) <4간본>

<4간본>(1997년. 울산대학교 출판부에서 한글번역본 출간)
(5)<정신문화원 본>

<척약재 학음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 연구원)
(6) <석판 미농지본 소개> (2006. 3. 28. 항용(제) 제공)
* 입수일 : 2006. 1. 23. *입수처 : 대구 고서점. *입수자 : 김항용
*내용 : 석판본, 미농지 인쇄. 1884년 이후 전라도에서 출판한 것으로 추정




<학음집 재간본이 나온 1884년경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것으로 추정됨>
바) 문온공시비 (금수정 경내에 있음)

前面 <小易若齋先生 詩碑>

<확대 모습>

<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전면 하단)

<후면>

<文溫公 小易若齋 安東金公 諱 九容 略史> (후면 하단)
사)친필 암각문 (2002. 1. 23. 주회(안) 제공)
* 소재지;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아) 용장서원과 문온공 봉안 위패 (2004. 4. 29. 영환(문) 제공)
(1)명 칭 : 용장서원(龍章書院)
(2)지정별 : 전북 문화재자료 제53호(1984. 4. 1지정)
(3)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군 주생면 상동리 644
(4)연 혁
고려 충렬왕(忠烈王)28년(1302) 남원(南原) 수지(水旨)에 건립하였는데 당시(當時)에는 용성사(龍城祠)라 칭하였다. 선조(宣祖)30년(1597) 정유재란시(丁酉再亂時)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정조(正祖)때 현위치로 이축(移築)하였다. 고려 성종대(成宗代) 병부랑중(兵部朗中) 벼슬에 있다. 목종대(穆宗代) 김치양(金致陽) 일파의 난으로 운둔생활을 한 양능양(梁能讓)을 주벽(主壁)으로 고려 원종시(元宗時) 삼별초란(三別抄亂) 평정 공으로 용성군(龍城君)을 봉하고 남원부(南原府)를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은 양주운(梁朱雲)과, 고려말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구용(金九容)과 임진왜란(壬辰倭亂)시 공훈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고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한 양대박(梁大樸)을 봉안(奉安)하였다
(5)주변현황
남원시내에서 순창간 국도 4㎞거리에서 좌측 진입로로 1㎞들어가면 상동리(上洞里)마을이 위치하며 서원앞에는 전라선 철도가 지나가고 전면에는 넓은 평야가 트여 있으며 배면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다. 서원의 배치는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두고 건물 외곽에는 토석담장으로 둘렀다. 서원 입구에 관리사가 있고 외삼문을 지나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로 퇴칸을 둔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경의당(敬義堂) 배면에 높은 견치석 석축과 12계단위에 내삼문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숭덕사(崇德祠) 건물이 있다.
(6)사진 소개 (2004. 5. 6. 강진 시제 참예시 방문단 답사. 김발용(군), 김윤식(문) 제공)





8) 범급 시비 책자

帆急 (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책자
9) <국역 둔촌 문집>

<국역 둔촌문집>(약40여수의 척약재시가 실려 있음)
4) 판결사공(判決事公-휘 明善)
<판결사공 휘 명선[문온공(휘 구용)의 장자] 동년록> (2004. 4. 23. 윤식(문) 제공)
국조방목에 기록된 판결사공(휘 명선) 할아버지 동년록
◇우리 족보 기록 : 辛禑 壬戌 文科
◆壬戌年榜 : 洪武十五年 辛禑八年
◇乙科三人 : 知貢擧順興君安宗源 同知貢擧判府事尹珍
柳亮(文化人) 張子崇(미상) 韓尙敬(淸州人)
◇丙科七人
李薈(泰安人) 禹洪富(丹陽人) 裴秬(星山人) 李升啇(慶州人)
李之剛(廣州人) 崔闗(海州人) 鄭擢(淸州人)
◇同進士 二十三人
鄭悛(미상) 金綮(미상)
前司宰主簿 金明善 安東人 止判事 父九容
李百全(미상) 辛權(미상)
前別將 趙撲 雨亭 平壤人 思濂之子集矢殿 戶判書開國功臣平原君具削 雨亭
梁需(미상) 權幹(미상) 金剛(미상) 洪尙賓(南陽人) 卞昌(미상) 姜淮仲(晋州人) 尹莘老(미상)
都衍(星山人) 朴貫(미상) 李堂(慶州人) 權瑗(安東人) 邊賢(原州人) 趙璥(淳昌人) 鄭尙(미상)
李種善(韓山人) 許昡(陽川人) 郭悰(玄風人)
※평양인 조박은 우리 문중과 관계가 밀접하여 참고하기 위해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壬戌同年監試第一人
李升啇
◇十韻詩第一人
閔壽山(呂興人)
◇十韻第詩二人(十韻詩第二人의 오자)
太宗諱 時年十六歲
◇生員第一人
鄭龜進(미상)
◇生員第二人
權遠(미상)
※십운시 차상 급제자로 이방원을 특별히 기록하고자 한 때문인지 생원시에도 차상 급제자가 장원 급제자 하단에 기록되어 있음.
5) 부사공(副使公-휘 明理) 1361(공민왕10)∼1438(세종20)
문온공(휘 九容)의 아들이다. 15세에 진사급제하고, 부친(척약재 휘 구용)께서 명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갔다가 귀양길에 돌아가시자 슬픈 상중에서도 생원과에 급제함. 그 후 낭장, 중랑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 진양대도호부 판관, 옥주군사. 경창부 소윤. 성천도호부사 등을 거침. 만년에 경기도 광주의 탄곡리에 퇴거하여 사심.
지난 1989년 경, 공의 묘를 경기도 광주읍 목리에서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의 선친 묘역으로 이장할 때, 분묘 속에서 분청상감으로된 원통형의 묘지(아래 사진)가 발견되었는데, 음각으로 묘지 내용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제작연대는 1439년(正統四年이라 새겨짐. 세종 21년)이며, 제작기법이나 상감기법, 제작연대, 글씨나 형태, 온전한 보존 상태 등으로 보아 우리나라 도자기사에 중요한 사료로 보인다. 국가 문화재 또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귀중한 우리 문중의 유물이다.
가)묘소 사진

<묘소>
나)국보(보물)급 분청사기 묘지호(墓誌壺) 소개 (2001. 8. 27. 영환(문) 제공)

<묘지호>
(1)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히 발전된 도자기로서 골동품세계시장인 [소더비] 경매장에서도 그보다 더오래된 고려청자보다도 더 높게 평가되며 질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기법이 우리 민족을 닮은 듯 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분청사기로 된 지석은 별로 발견 된 일이 없는데 문온공의 아드님이며 성천도호부부사를 지내신 휘 明理 선조의 묘지가 있어 이에
소개합니다.
우선 분청사기에 대하여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실물은 문온공파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아직 문화재계나 도자기학계, 금석문학계 어느곳에도 보고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선하여 우리 홈페이지 가족에게 먼저 사진으로나마 공개합니다.
(2)紛靑象嵌正統4年銘圓筒形安東金公明理墓誌銘 해설
(1)유사한 도자기 묘지로 정통14년(1449년)에 제작된 "분청삼감정통14년명원통형묘지"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매우 조잡하다.
이를 보고 우선 이름지었다.
(2)粉靑沙器=紛粧廻靑沙器의 줄인말로, 이말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우리나라 유일의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 선생께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지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3)紛靑沙器 陶磁器史=고려말 퇴락해가는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이어발생하였고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하였다. 세종대왕 때에는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그 절정기에 이른다.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官窯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에 들어와 점점 백자에 흡수된다. 14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약 200년간 조선 도자기 공예 중 독특한 아름다움을 생산해 낸다. 다른 나라에서는 청자에서 백자로 곧바로 이행되는데 우리나라만이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중에 분청사기를 갖고 있으며 귀족적이며 섬세한 청자, 유교적 이념을 내포하고 풍만한 기형의 백자와는 달리 해학적이며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힘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제작시기=銘文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正統四年은 서기 1439년이며 세종 21년이다. 분청사기의 절정기인 중기에 제작되었다. 그 중기중에서도 가장 발전기(1420-1450년)에 해당하며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과 업적을 남긴 세종(1418-1450년)때이다.
(5)제작장소="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가 139개,도기소가 185개 모두 324개소가 있다고 되어있다. 분청사기는 자기소에 속하며 지금 현재 확인된 곳으로는 약 10여개소가 있는데, 가마터로서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수리, 관음리, 중부면 번천리, 남종면 삼성리, 초월면 학동리,충남 공주군 의당면 가산리, 중흥리, 연기군 창라리, 기룡리, 쌍류리, 공주군 반포면 온천리,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경남 진양군 효자리, 사천군 구암리, 고양군 송전리, 양산군 화제리, 가산리 등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자기의 질을 상품,중품,하품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경기도에서는 광주군 중부면 번천리가 상품 생산지에 해당된다. "김명리 묘지"가 어느곳에서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묘지의 내용이나 도자기 표면에 기법(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번천리, 퇴촌면 도수리의 가마터에서 나오는 陶片는 주로 象嵌, 印花 문양이 주를 이른다.)을 볼 때 경기도 광주일원에서 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6)제작기법=몸체에는 글씨를 상감하고, 윗 부분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따로 만들어 붙였으며, 연잎으로 추측되는 삼각형의 문양을 투각하고 그 주위에 삼각 모양을 따라 음각선을 넣었다.
(7)상감기법=12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13-14세기를 거처 15세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까지 적용되는 기법이며 한국의 대표적이고 독특한 무늬기법이다. 조각한 음각선에 정선된 백토를 넣어 다시 깎아내고 도자기 표면과 같이 다듬는다.
(8)원통형 묘지가 온전히 발견된 예가 없고 기면 전체에 작고 정갈한 글씨를 상감한 예도 드물다. 陶磁器史 編年으로나 또 글씨체나 기형, 기법으로 상당히 중요한 도자기로 사료되어 史界에 공표하여 문화재로서 지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 분청사기의 자료는 도자기사 및 국립중앙박물관 발행도서, 이조도자백자편,이조도자분청사기편(계간미술 발행)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으나 잘못된 점은 연락하여 주시면 다음에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李朝도자기,李朝백자등 李朝를 붙이는 것은 일제가 朝鮮의 권위를 낮추기 위해 써온 말로서 朝鮮도자기, 朝鮮백자, 朝鮮왕조등으로 써야 합니다. 다만 책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 (그것도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계간미술"에서 그렇게 쓰다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용하였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3) 묘지호의 모처 특별 소장 실물 확인 장면 (2003. 1. 15. 영환(문), 항용(제) 제공)

(4)경기도박물관 방문기 (2007. 1. 8. 윤식(문) 제공)
◆일시 : 2007년 1월 4일(목)
◆장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95번지 경기도박물관
◆참석 : 영환, 영윤, 윤만, 발용, 윤식(무순, 경칭 생략)
평일 낮시간, 모처럼 여유로움을 만끽한 날이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서울시 모처에 모셔 둔 부사공(휘 명리) 할아버지 묘지호와 관련해 영환 종친과 함께 경기도박물관 장덕호 부장(유물관리팀장)과 송미경 박사(보존과학실 복식담당)를 만났습니다.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철원부사공(휘 확) 할아버지 묘소 출토 의복에 대한 보존처리를 완료하고 도록 발간을 앞둔 상태에서 이와 관련해 협조 요청을 해 왔습니다.
출토 의복은 2001년 4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의 철원부사공과 배위 동래정씨 할머니 묘소를 가양리 선영으로 천봉하는 과정에서 총 102점(의복 99점, 신발 2점, 이불 1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때 철원부사공 묘소에서 총 10매의 묘지석이 수습되었습니다.(이 가운데 2점은 내용이 같은 것으로 묘지석은 9매가 한 쌍입니다.) 이 출토 의복은 수습 당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등 내로라 하는 박물관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철원부사공께서 상의원 정을 지내셨기에 더욱 큰 관심을 끌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포천시 관계 당국의 간곡한 요청 등으로 인해 수습 의복 전체를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 천봉한 철원부사공(휘 확) 묘소. 포천 가양리
그 동안 발견된 출토 의복은 20~30점이 출토된 경우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부부 묘에서 각각 50여 점씩 100여 점이 동시에 대량으로 출토된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출토 의복의 수가 워낙 많아 경기도박물관에서는 근 6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훈증처리 등 보존처리를 실시한 다음 최근에야 작업을 마치고, 도록(圖錄)을 발간하기 위해 사진촬영에 착수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아울러 도록에 수록하기 위해 부사공 할아버지의 묘지호에 대한 촬영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이에 따라 문온공파종회에서는 서울시 모처에 특별 보관 중인 묘지호를 경기도박물관으로 임시로 옮기게 되었고, 박물관 담당자들의 안내를 받아 사진촬영 작업 중인 출토 의복 일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경기도박물관 가는 길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신갈인터체인지 → 예전 출구 못미처 새로 생긴 용인向 출구로 우회전 → (100여 미터) 우회전 → 3~5분 직진, 고가도로에서 좌회전(한솔학원 앞) → (50여 미터) 좌회전 → 좌회전 하자마자 바로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박물관 측에서는 부사공 묘지호의 중요성을 감안해 무진동 차량까지 동원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진동 차량은 5톤 차량으로서 용차 비용이 막대한 것을 감안해 문온공파종회에서는 박물관 측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서 박물관 측의 차량으로 옮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충격을 받지 않도록 겹겹이 둘러싸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지만, 장덕호 부장의 차량에 동승해 박물관으로 가는 동안 내내 신경이 쓰이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오후 3시 정각,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 용인의 박물관까지 대략 1시간 남짓인데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장덕호 부장도 운전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도 여러 차례 비상등을 켜면서 조심스레 박물관으로 모셔왔습니다. 박물관으로 오는 도중 영윤, 윤만, 발용 종친께서 박물관 정문에 이미 도착하셨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문중 귀중품이라 기다리시는 동안 마찬가지로 애가 타셨을 것 같습니다.
오후 4시 박물관에 도착, 기다리시던 종친들과 합류해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가서 묘지호 인계인수 서류를 작성하고 간단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묘지호를 살펴보는 박물관 직원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박물관 수장고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지역으로 입구에서 신원확인을 한 다음 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장고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한 철문만 보였습니다.
부사공 묘지호는 곡식을 되는 말[斗]을 뒤집어놓은 형태와 유사한데, 크기는 그보다 약간 작습니다. 윗부분은 원추형 투각인데, 이 부분을 살펴본 박물관 직원들은 “청자”라고 입을 모읍니다. 아랫부분은 새우젓 옹기처럼 두툼하며, 속은 비어 있습니다. 몸체는 분청이며, 부사공 묘지문이 상감(象嵌)으로 기록돼 있습니다.(부사공 묘지문 내용은 우리 홈을 참조하시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박물관 직원들은 몸체 부분을 가리키며 조선 청화백자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박물관 직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의 양식이 모두 나타난 특이한 형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려 청자의 전통과 조선조의 새로운 청화백자 양식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만큼 부사공 묘지호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인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묘지문 내용이 더 소중했지만, 박물관 직원들은 “그릇 자체로도 보물급 이상의 가치가 있다.”며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우리 문중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이상인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 도자기를 전공한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 더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섭섭했습니다.






묘지호 촬영을 위해 인계인수서를 작성한 다음, 보존처리실로 자리를 옮겨 송미경 박사의 안내로 철원부사공 묘지석을 살펴봤습니다. 이 묘지석은 청화백자로서 수습 당시 두어 장이 깨졌는데, 완벽한 보존처리로 말끔히 수리가 돼 있었습니다. 다만, 수습 초기에 우리 문중에서 응급조치를 한 것이 미숙해 묘지석 한 장에서 약간 티가 났습니다.(묘지석 내용 역시 우리 홈을 참조하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하략>
다) 副使公 墓誌銘 번역 및 해설 (2002. 영환(문) 제공)
成川都護府副使 安東金公 明理 墓誌銘
朝鮮國 奉政大夫 成川都護府副使 兼 勸農副使 安住 左翼兵馬團鍊副使 金公 明理 墓地銘
공의 성은 金이요, 諱는 明理이니 安東인이시다. 신라 경순왕 김부의 15대손인 고려국 문하시중 상락군개국공 金方慶1)의 5대손이시다. 증조의 諱는 金承澤이시니 직량동덕좌리공신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諡 良簡公이시며,할아버지의 諱는 金昴이시니, 추봉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중대광 上洛君이시며, 아버지의 諱는 金九容2)이시니,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이시다. 어머니는 추봉 봉익대부 밀직부사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 통직랑 예의정랑 南陽 洪義元의 따님니시다. 공은 1361년(고려공민왕10년)에 태어나시었다. 나이 9세에 음보로 총릉직에 출사하시었고 15세에 이승상과 같이 진사시에 급제하시었으며, 서기 1384년(고려우왕10년)4월1일에 아버지 척약재께서 전교시판사의 신분으로 요동도사에 행례사로 가시었다가 명나라 조정에서 고려의 세공마가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황제의 명으로 대리위에 귀양되어 가시는 도중에 병환으로 돌아가시었다.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픈 상중에도 생원과에 황현등과 함께 제4등으로 급제하시어 낭장에 제수되시고 이어 중랑장에 승진하시었다. 사헌부 감찰,호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하시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하신뒤 진양대도호부 판관을 거치시고 옥주군사에 나가시었다. 공은 백성을 다스리시매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관대하시고 또한 사랑하시니 만기가 되어 떠나실 때 백성들이 길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여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관과 정랑에 잠깐 계시다 호조의 군자소감에 오르시었는데 다시 경기 및 경상도의 경력을 지내시고 경창부 소윤을 하시다가 경기도 탄곡리에 퇴거하시어 호를 炭谷野 라 하시었다. 이로부터 여러차례 조정에 나오시기를 권고 받았으나 사양하시다 서기 1427년(조선세종9년)가을에 성천도호부부사를 역임하시었는데 또다시 사임을 청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더니 겨울에 질병을 말하여 사임되시니 다시 탄동에 되돌아오시었다. 서기 1438년(세종20년)12월 23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이때 나이 71세이시었다. 부인 경주이씨께서는 공에 앞서 서기 1409년(태종9년)겨울에 돌아가시었으니 묘를 광주 둔촌 목동의 산기슭에 모시었는데, 1439년(세종21년)12월16일에 탄동소재 공의 묘소 남쪽에 이장하시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라 행한 것이다.
공의 천성은 관후하시었고 풍의가 엄중하시었으니 타인의 실수를 탓하지 않고 부귀만을 탐하는 것은 대장부답지 못하다하였으며, 자제의 실수가 있었어도 즉시 질책하지 않으시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시었으며 의복은 필히 검소하고 음식은 정선하여 드시었으며 겨울에도 아무리 추워도 난로를 멀리하시고,여름에 무더위에도 부채를 쓰지 아니하시었으며, 틈만 나면 독서하시고 스스로 꽃씨를 뿌려 조석으로 손수 물을 주시며, 또 좋은 때 친구를 맞아하셔 술상을 극진히 대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늙어서는 마땅히 물러나야 하며 재산을 불리려고 함은 곧 원수를 기르는 일인지라 이를 구하지 말고 또 출세하려 발버둥 치지 말라"하시었다.
부인 이씨게서는 당성보리익찬공신 중대광 계림군이시며 시호는 文靖公 호는 霽亭이신 李達衷3)의 따님이시니 3남 4녀를 낳으시었다. 장남은 金孟獻4)이니 조봉대부 전농시 소윤 겸 지제교이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은 金仲舒5)이니 승사랑 전구서 부승이니 무오년에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삼남은 金季友6)니 무공랑 예문관 봉교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사재감 직장 權煊7)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좌군사직 南景福8)에게, 삼녀는 사선서 직장 金鐵山9)에게, 4녀는 중군 부사직 崔善文10)에게 각각 출가하었다.
소윤 맹헌의 부인은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李思儉11)의 딸로서 3남3녀를 낳으니 金自정12),金自壤13),金自堉14)이고 장녀는 尹흔15)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부승 金仲舒의 부인은 중훈대부 합천군사 金礎16)의 딸로 1남을 낳으니 金自완17)인데 아직 어리다. 봉교 金季友의 부인은 선략호군 郭仲義18)의 딸로서 1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金自均19)이요, 딸은 아직 어리다. 큰사위 權煊은 5남을 낳으니,생원 權국20, 權擴21), 權塡22), 權抱, 權추이며 장녀는 별시위 李孟智에 출가하였고, 둘째사위 좌군사직 南景福은 3남을 낳으니 南문, 南暲, 南暖이고, 3녀중 큰딸은 郭伸餘에게 출가하였다. 셋째사위 사선서 직장 金鐵山은 4남을 낳으니 생원 金國光23), 金謙光24), 金廷光, 金景光이고, 딸 둘은 아직 어리며, 金國光의 부인은 호군 黃保身25)의 딸로서 1남1녀를 두니 아들은 金유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넷째사위 중군부사직 崔善文은 4남3녀를 낳으니 崔漢公, 崔漢侯, 崔漢伯, 崔漢男인데 모두 어리고,장녀는 부사정 呂仁甫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여인보는 1남을 낳으니 呂範인데 아직 어리다.
소윤 金孟獻과 봉교 金季友는 모두 나와 같이 공부한 同年이다. 소윤 金孟獻이 나에게 찾아와 墓誌를 써주기를 극진히 청하여오니 나는 소윤 김맹헌과는 동문수학하고 같이 출사한 아주 교분이 두터운 사이인지라 감히 졸문이나마 사양치 못하고 썼노라.
서기 1439년(조선 세종21년) 10월 하순
중훈대부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세자 우보덕 완산인 柳義孫26) 씀
*주 해설
1)김방경 1212(강종1)-1300(충렬왕26) 고려후기의 명장, 시호는 충렬공 삼별초의 난 평정, 고려와원나라의 연합군 도원수로서 일본 정벌 안동김씨의 중시조
2)김구용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기의 정치가,성리학자,호 척약재,시호 문온공,안동김씨 문온공파 파조.
3)이달충.?--1385(우왕11) 본관 경주 시호 문정공, 호 제정, 계림부원군. 제정집이있음
4)김맹헌. 문과 대과 급제 예문관 직제학 5)김중서. 생원과 급제 호조참의
6)김계우. 문과 대과 급제 의정부 사인 7)권 훤. 안동인 8)남경복. 의령인
9)김철산. 광산김씨. 사헌부지평,광성부원군. 10)최선문. 화순최씨, 시호 문혜공
11)이사검. ?-1446(세종28) 양성이씨,시호 공소공 지중추원사
12)김자정. 직장 13)김자양. 내섬시첨정 호조참의 14)김자육. 무후
15.윤흔. 펴평윤씨. 현령 16)김초.경주김씨. 군수 17)김자완. 사헌 감찰. 임피현령
18)곽중의. 청주곽씨; 호군. 판서 19)김자균. 진천 현감 20)권국. 현감
21)권확. 호군 22)권전. 판서
23)김국광. 1415(태종15)-1480(성종11) 광산김씨.시호 정정공. 좌의정. 광산부원군. 6세손이 사계 김장생
24)김겸광. 1419-1490 시호 공안공. 예조판서. 광성군. 25)황보신. 황희 정승의 아들
26)류의손:1398(태조7)-1450(세종32) 조선 세종때의 문관, 자는 효숙,호는 회헌, 본관은 전주, 세종때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감찰에 이르렀고, 집현전수찬이 되어 1436년(세종18) 중시에 2등 급제, 직제학에 이르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히고,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무고 사건으로 파직되매 세종이 슬퍼한 끝에 예조참판을 내리고 병이 심하여 몸이 쇠약하매 왕이 친히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권했다 한다.
6) 직제학공(直提學公- 휘 맹헌)

▲ 직제학공(휘 맹헌) 묘소. (2006. 7. 8. 발용(군) 제공)
*<직제학공 빙장이신 공소공 묘소 탐방(일부 내용 전재)> (2006. 7. 8. 윤만(문) 제공)
▣ 양성이씨 묘역 ▣
직제학공(휘 맹헌)·첨정공(휘 자양)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와 건너편 산모롱이로 올라서면 문온공파 별제공 문중에서 500여년동안 외손봉사를 하였던 양성이씨 묘역이 나옵니다.
1. 정절공 이옥
2. 공소공 이사검
3. 송죽헌 이휘

▲ 양성이씨 공소공(휘 사검) 묘소.
▣ 아름다운 외손봉사의 전통
공의 휘(諱)는 사검(士儉) 양성(陽城)인이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나시어 세종28년(1446) 졸(卒)하시다. 시호는 공소공(恭昭公)이시다.
태종 5년(1405) 무과에 급제 사직을 지내고 태종 8년(1408)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세자를 보좌, 상호군에 승진하였고 세종11년(1429) 좌군검총제, 세종12년(1430) 경상좌도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 세종16년(1434) 중추원부사, 세종17년(1435) 동지중추원사 세종19년(1437) 경상좌도도절제사를 거쳐 세종21년(1439) 동지중추원사로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비변책을 건의, 병조에서 시행케 하였다. 세종25년(1443) 인순부윤(仁順府尹), 세종26년(1444) 공조참판, 이해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었고 세종27년(1445) 자헌대부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고려의 강릉도절제사 자헌대부 정절공 이옥(李沃)의 아들이시다.
배위(配位) 이천서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한 분 계시는데 휘(諱)가 이휘(李徽 : ?~1456)로 자는 미경(美卿), 호는 송죽헌(松竹軒)이시다. 세조 원년(1455) 세조 즉위에 협조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정되고 동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공조 참의로 있을 때 처남이신 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장녀는 직제학을 지낸 대은암(大隱庵) 김맹헌(金孟獻)에게, 차녀는 현감을 지낸 인동인 장우(張?)에게, 삼녀는 관찰사를 지낸 영월인 신영손(辛永孫)에게 출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8월25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내선(內選)한 처녀(處女) 윤씨(尹氏)는 김맹헌(金孟獻)의 외손인데, 김맹헌의 아내는 곧 난신(亂臣) 이휘(李徽)의 누이이니, 궁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연좌(連坐)된 자도 오히려 불쌍한데 윤씨는 연좌에 관련되지 않았으니, 어찌 이것으로 허물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맹헌의 첫째 딸은 현감(縣監)과 현령(縣令)을 지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기(尹沂)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묘소는 장방형 호석을 둘렀는데 규모는 전면 6.5m, 측면 8.5m, 높이 1길반으로 상당히 큰 편이다. 비갈과 상석이 각각 2개씩이며, 무인석이 1쌍 있는데 왕릉이 아닌 사대부 묘소에 무인석을 쓰는 예가 없는데 특이한 사례다. 이 무인석은 긴 칼을 집고, 머리에 투구를 쓴 형상인데 공께서 세종17년(1435) 동지중추원사로 송골매를 가지고 명나라에 갔는데 가는 도중 이 송골매가 죽었다. 공이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에 도착 황제의 대궐에 절하며 우니 황제가 공의 태도를 가상하게 여겨 장군의 모자를 내렸는데 이 무인석의 머리 모양이 바로 그 투구를 닮았다고 한다.
직제학공(휘 맹헌) 묘소에서 왼쪽 산기슭에 있는 공소공(휘 이사검) 묘소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공의 아버지 정절공(휘 이옥)의 신도비가 있는데 정절공 묘소는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최근에 찾았다.
공소공(휘 이사검)에 대해서는 안동김씨문온공파 직제학공계 별제공(휘 金震紀) 문중(포천)에서 500여년 오랜 세월에 걸쳐 외손봉사를 해 오다가 최근에 양성이씨대종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시제에 참례하다가 수년 전부터 양성이씨대종회에서 향사를 맡아오고 있다고 한다. 추정컨대 외 아드님(이휘)께서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시매 절손이 되어 외손봉사를 하지 않았나 생각되었으나 양성이씨정절공파대종회에서 전하는 말로는 전남 나부지역에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고 신학문을 많이 하여 다수의 학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사육신 사건과 연장선상에 있는 계유정란 때 피살되신 백두산 호랑이 좌의정 시 충익공 절제 김종서(金宗瑞) 장군과 직제학공 김맹헌(金孟獻)과는 사돈지간이시다. 즉, 김종서 장군의 따님이 김맹헌공의 맏아들 김자정(金自?)에게 출가하여 맏며느리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선조님들의 묘소와 유적을 살펴보는데 최선을 다하는 안사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나날이 발전하는 안사연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뒤늦은 후기를 마감합니다.
*<직제학공(휘 맹헌) 동년록> (2005. 8. 21.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조방목에서 발췌
동진사 1등




7) 사인공(舍人公-휘 季友)

▲ 사인공(휘 계우) 단소. (2006. 7. 8. 발용(군) 제공)
*사인공(휘 계우) 동년록 (2005. 8. 21.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조방목에서 발췌
동진사 1등




8) 도사공(都事公-휘 大涉). 1549(명종 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亭). 할아버지는 경상도병마절도사 윤종(胤宗)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질병으로 문과 응시를 단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송응창(宋應昌)이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가 되어 입국함에 이의 접대임무를 맡은 윤근수(尹根壽)밑에서 외교관계의 중요하고 많은 일들을 빈틈없이 수행하다가 격무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象村集. 〈文守弘〉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종-김진기-김대섭-김확-김정지-김환
(1) 묘소

(2005. 8. 7. 발용(군) 제공)

(2006. 7. 8. 발용(군) 제공)
<사마방목>
▣ 김대섭(金大涉) / 宣祖 06 式年 生員
【시험년도】 선조(宣祖) 06 (1573)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6
【본인성명】 김대섭(金大涉)
【본인 자】 사형(士亨)
【본인생년】 기유(己酉) 1549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진기(金震紀)
【부친품계】 승훈랑(承訓郞)
【부친관직】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
<도사공 소개 자료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08
▣ 9월의 문화인물 허균과 안동김씨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 후손인 김성립의 부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허균의 부인 또한 우리 안동김문의 따님이시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아 여기에 소개한다. 허균의 대한 자료는 생략하고, 그의 조강지처인 김씨에 대하여 살펴보면.... 문온공(척약재 김구용)의 8세종손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신 김 대섭이다. 김 대섭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첫딸은 실학자로 유명한 지봉 이수광이고 그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대사성을 지낸 이민구이다. 둘째딸이 바로 교산 허균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 다음의 아들이 철원부사, 상의원정을 지낸 김 확이다..
안동김씨 게시판
■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7/09
문온공 척약재(김구용)의 8세손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신 김대섭인바 그의 외아들 김확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철원부사를 지내셨으며, 큰사위 지봉 이수광과 작은사위 교산 허균은 이곳 금수정에서 처남매부사이를 떠나 당시 사회 개혁을 논의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오늘날 홍길동전이 전해질수 있었던 것은 교산의 첫부인(김대섭의 딸)의 외동딸이 몰래 감추어서 전해진 것으로, 국문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금부도사공묘지명 (2004. 7. 1. 영환(문) 제공)
(1)원문
義禁府都事金公 宜人沈氏 合葬誌銘 幷序
欽早從李公潤卿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食+也)。卽毋不齊整而給也。婢御僮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曁金公歿。聞者咸咨嗟悼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通。來屬壙銘於欽曰。茲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啻忘年。則何敢不敬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活人署別坐。妣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嘖嘖謂曉夕發軔。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兵起。挈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都事。遷造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儐接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戶+又+絲)有餘地。海平公亟稱其才。終以勞勩遘疾。甲午夏。卒于京師旅舍。年僅四十六。因亂權厝于水原。越八年辛丑。移窆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也。公淳愨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蠲潔。節文儀式。畢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及必涕。孼姊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產。唯杜門自適。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老計。公之葆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慧秀愨。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姓一於敦睦而無間也。莅閫能範而肅也。享祀能敬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卹窮匮。各盡其道。而未嘗見其靳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自遭公喪。以死自矢。水浆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墓側。朝夕執奠。擗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痛無節。秪以饘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毀骨立。絶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矱泣諫。奉還京第。而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矱拜參奉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矱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伯德符之裔。華胄燀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公生一男二女。男矱。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參奉不拜。娶議政鄭彥信女。生男幼。女長適李睟光。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迺所謂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洎宜人之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食。賁諸幽。其迹之卓。
(2) 역문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 병서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졌다. 이때에 동정(東征) 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擯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 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 한 신이 없을 것이다.” 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矱)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矱)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 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 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 찬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청파군(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矱)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晬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상촌 신흠 찬
서기2004년 6월 일
김영환 옮김
* <계표>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도사공(휘 대섭) 선조님 생원시 급제 기록 자료 소개 (2005. 2. 28. 윤식(문) 제공)
출전 : 국립중앙도서관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 : 宣祖 6년(1573년)
생원과 25인 명단에 기록됨.
*주 해설 : 우측 사진 우에서 세번째 줄의 기록
영감하'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안행'은 형제간에 급제한 경우를 뜻함
구경하 :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경우
엄시하 : 아버님만 살아계신 경우
자시하 : 어머님만 살아계신 경우
<도사공 배위 심씨 묘지명> (2005, 2, 2, 주회(안) 제공)
象村稿卷之二十三 . 墓誌銘 一十三首.
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 幷序
欽(신흠)早從李公潤卿(이수광)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卽毋不齊整而給也。婢御?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金公歿。聞者咸咨嗟悼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通。來屬壙銘於欽曰。?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忘年。則何敢不敬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活人署別坐。?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謂曉夕發?。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兵起。?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都事。遷造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接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有餘地。海平公?稱其才。終以勞??疾。甲午夏。卒于京師旅舍。年僅四十六。因亂權?于水原。越八年辛丑。移?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也。公淳?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潔。節文儀式。畢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及必涕。孼?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唯杜門自適。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老計。公之?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慧秀?。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姓一於敦睦而無間也。??能範而肅也。享祀能敬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窮?。各盡其道。而未嘗見其?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自遭公喪。以死自矢。水?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墓側。朝夕執奠。?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痛無節。?以?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骨立。絶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泣諫。奉還京第。而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拜參奉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伯德符之裔。華胄?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公生一男二女。男?。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參奉不拜。娶議政鄭?信女。生男幼。女長適李?光。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所謂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宜人之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食。賁諸幽。其迹之卓。
형태서지
권수제 象村稿
판심제 象村稿
간종 활자본
간행년도 1629年刊
권책 年譜, 目錄, 原集 60권, 附錄 합 20책
행자의 수 11행 20자
반곽의 크기 20.6×13.6(㎝)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松D1-A156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71~72
저자
성명 신흠(申欽)
생년 1566년(명종 21)
몰년 1628년(인조 6)
자 敬叔
호 敬堂, 百拙, 南皐, 玄軒, 象村居士, 玄翁, 放翁, 旅菴
본관 平山
시호 文貞
<김대섭 여 (허균 배위) 행장> (2005. 2. 2.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惺所覆?稿卷之十五 文部十二 . 行狀
亡妻淑夫人金氏行狀
夫人姓金氏。上洛大姓也。前朝大相方慶之玄孫?若齋九容。有盛名於麗季。官至三司左使。其四代孫胤宗。武擧官節度。而其子震紀。庚子司馬。筮仕別提。寔生諱大涉。亦司馬癸酉。而筮仕都事。娶觀察使靑松沈公銓之女。夫人卽其第二女也。生隆慶辛未。年十五歸吾家。性謹愿樸而無飾。勤於織任組?無少怠。言若不出口。事母大夫人甚恭。晨夕必親省。食必嘗進。遇節則饋時食甚?。待婢僕嚴。而怒罔?以惡語。母大夫人稱之曰。我賢婦也。余方少年好狎遊。無幾微見於?面。若或少縱則輒曰。君子處己當嚴。古人有不入酒肆茶房者。況甚於此乎。余聞而心愧。少或?焉。常勸余勤學曰。丈夫生世。取科第??仕。可以爲親榮。而私於己者亦多。君家貧姑且老。勿恃才而悠泛度日。光陰迅速。後悔曷追乎。及壬辰避賊之日。方娠困頓至端川。七月初七日。生子。越二日。賊猝至。巡邊使李瑛退守磨天嶺。余侍母?君。達夜踰嶺。至臨溟驛。氣之不能語。時同姓人許珩。邀與俱避海島。不得留。?至山城院民朴論億家。初十日夕。命絶。以牛買棺。裂衣以斂。肌肉尙溫不忍埋。俄聞賊攻城津倉。都事公?命權?後岡。享年二十二。而同住凡八年。嗚呼痛哉。其子以無乳夭。初生一女。長適進士李士星。生子女各一。己酉。余陞堂上拜刑曹參議。以例追封淑夫人。噫。以君之淑行。年不克中壽。且絶其嗣。天道亦難諶矣。方其窮時。對君挑短?。熒熒夜艾。展書讀之。稍倦則君必?曰。毋怠慢遲我夫人帖也。豈知十八年之後。只以一張空誥。薦之於靈座。而享其榮者。非吾結髮之逑。君若有知。亦必嗟悼。嗚呼哀夫。乙未秋。返自吉州。又?於江陵外舍。庚子三月。從先夫人永?於原州西面蘆藪。其原則在先壟之左。寅坐而申向也。謹狀。
惺所覆?稿卷之十五
형태서지
권수제 惺所覆?藁 판심제 없음 간종 寫本 간행년도 筆寫年未詳 권책 26권 8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10행 18자 반곽의 크기 18.5×12.6(㎝) 어미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貴192-한46-가188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74
저자
성명 허균(許筠)
생년 1569년(선조 2) 몰년 1618년(광해군 10) 자 端甫 호 蛟山, 惺所 본관 陽川
<역문> (2005. 7. 31. 윤만(문) 제공)
교산 허균
아내의 성은 김씨로 서울 명문가의 출신이다. 고려 때의 정승 방경의 현손인 척약재 구용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으니 벼슬이 삼사의 좌사에 이르렀고, 그 4대손인 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다. 그 아들 진기가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분이 대섭을 낳으니 그도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또한 都事(도사)가 되었다. 관찰사 심공 銓(전)의 딸에게 장가드니, 나의 아내는 바로 그분의 둘째 따님이다.
아내는 신미년(1571년)에 태어나 나이 열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오니, 성품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에 전념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말은 더듬듯 조심스러웠고, 시어머니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은 맛을 보고나서야 드렸으며, 제철 음식을 아주 넉넉하게 했다.
종을 다루기를 엄격하게 했지만, 용서할 것은 용서해 주었고, 욕설로 꾸짖지 않으니,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라고 칭찬하셨다.
내가 나이 어린 때라 아내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지만, 얼굴에 싫은 기색을 띤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함부로 굴면 문득 이렇게 나무랐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히 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이나 다방에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던데 더구나 이보다 심한 짓이겠습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더러 자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장부가 세상에 한 번 태어나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함은 물론 자기 몸도 또한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다 시어머님은 연만하시니 너무 재주만 믿고 느긋하게 세월을 허송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빨리 흐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여 북으로 가던 참에 아내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몹시 지친 몸으로 단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그 때가 칠월 초이렛날이었다. 이틀이 지나서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순변사 이영은 후퇴하여 마천령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과 아내를 이끌고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에 이르렀는데, 아내는 기운이 다하여 말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다. 그 때 같은 성씨인 허행이 우리를 맞이해 주어서 해도로 피난을 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산성원에 사는 백성 박논억의 집에 도착했다.
그 때가 초열흩날 저녁이었는데, 아내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했다. 그러나 체온이 오히려 따듯해서 차마 그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겨우 스물두 살, 함께 산 세월을 생각하니 겨우 여덟 해에 불과했다.
슬프다. 그 때 태어난 아들은 젖이 없어 끝내 일찍 죽고 말았다. 처음에 난 딸아이는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에 내가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참의로 임명되니 법도에 따라 아내를 숙부인으로 추봉하게 되었다. 아내의 맑은 덕행으로도 오래 살지 못하고, 게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하늘의 도리조차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아내와 마주앉아 짧은 등잔 심지를 돋우고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밝히며 책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반드시 농담 삼아 “게으름을 피우지 마세요. 저의 부인 첩(벼슬한 사람의 부인에게 내리던 첩지)이 늦어집니다”라고 말했는데, 18년 뒤에야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그녀의 영전에 바치게 되었을 뿐,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를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으랴. 만약 저승에서나마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슬프다. 을미년 가을에 길주에서 아내의 뼈를 거두어 임시로 강릉 교외에 묻었다가, 경자년 3월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가시덤불에 길이 묻었다.
그 언덕은 선산 왼쪽에 있으며 묘는 寅坐(인좌) 신향(申向) 寅時(인시) 방향, 즉 4시 방향을 등지고 신시(申時), 즉 16시 방향을 바라보는 자리이다. 삼가 아내의 행적을 쓴다.
원제 - 亡妻淑夫人金氏行狀(망처숙부인김씨행장)
《출처 :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손광성, 임종대, 김경수 옮김/을유문화사/2003》
<김대섭 외손자 이성구 묘지> (2005. 2. 2.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記言別集卷之二十三. 丘墓文. 李相國墓誌銘
公諱聖求。字子異。系出宗室。太宗諸王子敬寧君?之後也。曾祖贈河東君裕。祖兵曹判書贈領議政諱希儉。父吏曹判書贈領議政文簡公諱?光。母安東金氏。義禁府都事諱大涉之女。而上洛公諱方慶之後也。萬曆十二年甲申公生。-----
형태서지
권수제 記言(原集ㆍ別集) 판심제 記言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92年頃刊 권책 凡例, 目錄, 原集 67권, 別集 26권 합 20책 행자의 수 10행 18자 반곽의 크기 22.3×17.9(㎝)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癡庵D1-A371 총간집수
저자
성명 허목(許穆) 생년 1595년(선조 28) 몰년 1682년(숙종 8) 자 文父, 和父 호 眉?, 臺嶺老人 본관 陽川 시호 文正
<역문> (2003. 10. 11. 발용(군) 제공)
李相國(聖求)의 묘지명에 나오는 휘 대섭(大涉) 선조님의 따님 기록 내용
출전 : <미수기언>(眉수記言.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문집)
제목 : 이 상국(李相國)의 묘지명(墓誌銘)
공의 휘는 성구(聖求), 자는 자이(子異)이다. 계보는 왕의 종실에서 갈려 나왔으니 태종대왕의 여러 왕자 중에 경녕군 비(敬寧君?)의 후손이다. 증조는 하동군(河東君) 유(裕),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된 희검(希儉)이고, 아버지는 이조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된 문간공(文簡公) 수광(粹光)이다. 어머니 안동 김씨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대섭(大涉)의 딸이고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중략---- 묘소는 양주군치 서쪽 30리 밖 장흥에 있다.
9)부사공(府使公-휘 矱(확)) 소개 1572(선조 5)--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문온공(휘 구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도사공 대섭(大涉)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하곡 허봉은 허균의 형이인데, 김확은 매부의 형에게서 수학을 한 것이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東洲集. 尙衣院正金公확墓誌銘〈趙啓纘〉<장노현 수정>
[지봉유설]의 이수광과 조선의 혁명가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김대섭의 사위이므로, 이들과 김확은 처남매부 사이이다.
김확의 필적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1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점 (근묵에서 인용)이 소개되어 있다.
(1)묘지 사진 소개 (2004. 6. 1. 발용(군) 제공)





(2) <묘지석(청와백자) 소개> (1차-2002. 3. 12. 2차-2004. 7. 8. 영환(문) 제공)
1) 묘지석 발견일시 : 2001. 4.
2) 발견장소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
3) 발견 경위 : 상기의 위치에서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선영 아래로 이장 과정에서 발견
4) 묘지석 총수 및 상태 : 9개. 양호
5) 사진

<지석1> <지석2>

<지석 3> <지석 4>

<지석 5> <지석 6>

<지석 7> <지석 8>

<지석 9> <지석 전체 사진 9장>
(3)묘지명 소개
(가)원문 (2004. 7. 6. 영환(문) 제공)
舅氏尙衣院正金公配淑人鄭氏墓誌銘 幷序
舅氏金沙公骯髒有奇節。博六而無所成名。敏求嘗從容言。舅氏之年長矣。無肯少留意進取。則奚以開後。時公在酒所。顧而曰。豈不足慁汝誌墓耶。敏求敬謝不敏。其後舅氏用儒科起。歷州府赫赫有聲。然亦公之細也。公沒二紀。敏求老白首。始以不腆之文奉效微言。能不悲哉。公諱矱。字正卿。少受業荷谷許篈。年十八己丑。擧進士。旣而遇亂。奉二親避兵北路。越三年甲午。都事公棄世。沈宜人自誓必殉。麤疏溢糜。哭擗無算。十五年如一日。舅氏左右扶護。不稅帶而養。亦十五年如一日。旣遭喪。自飯斂以往。飾棺反壤。治塋域立墓田。一誠不懈。用是故偃蹇場屋。戊午。始釋褐。隷成均館。兼任廣興奉事。倉官例責日供倉吏。吏倚以爲乾沒。時操長短。公一革其謬。壬戌。赴韓元帥文翼公幕辟。至則江氷合。偵報虜將大搶龍灣。且言其日。一軍咸氣懾。公請自往視師。旣行。元帥牒令毋輕進。公直前不顧。列城已發縣門矣。守陴者呼曰。從事公文吏。猶乘危冒難。介胄者死職耳。公留五日。益雍容曰。我若亟出。士心搖矣。元帥公稱其雅量。聞于朝。癸亥初政。祭酒鄭公曄擧公掌學務。公曰。是無非事者。隨方盡規畫。悉治齋舍頹缺。重建明倫堂。東夾正錄廳。噲然一新。陞拜兵曹郞。及逆适犯京。扈慈殿渡漢。乘輿馬不服驂。公脫所騎以更駕。乙丑。歷直講,司藝,司饔院正。除原州牧使。痛剗刮疵瘼。若瘝在躬。繕廨宇興學校。百爲具擧。事聞賜帛。居一歲。忤方伯罷歸。州人告闕乞留。不報。丁卯胡變。文翼公陪春宮南下。又以公從事。敍司饔,軍資監正。明年。守淳昌郡。其施措方略。視原益密。適歲惡。捐廩以哺餓。賦種以勸稼。郡以大治。龔水衡何人哉。秋以方伯親嫌解任。前後臨二邑。俱未浹歲。其人輒勒石以寓遺愛。逮公喪。淳昌民合土物以賻。小民之有事至京。皆來哭甚悲。是豈有約束期會也。己巳。由尙衣院正知鐵原府。治如其故操。至壬申。疾久不損。道臣擧狀請罷。上惜其治不許。癸酉春。乃免。竟以七月七日卒。葬永平鍾賢山東麓負丁之原。都事公墓直其西。
惟金氏出新羅敬順王。其後上洛公方慶,惕若齋九容爲聞祖。入我朝。直提學孟獻,僉正自讓爲六代五代。高祖諱禮生。淸道郡守。曾祖諱胤宗。慶尙兵使。祖諱震紀。活人署別提。考諱大涉。義禁府都事。妣靑松沈氏。靑城伯德符之後。觀察使諱銓其考也。公體貌魁碩。氣度瑰瑋。不肯隨俗齷齪。不肯置畦畛以接物。遇事當爲。不肯依阿顧望。初許氏姊死。瘞骨北地。一女纔四歲。公躬走數千里。迎葬其夫宗。撫其女長成有家。緩急喜施予不倦曰。不有以狗馬聲色破其先業者耶。南原敗。摠兵楊元軍熸。瘡痍載路。公爲設粥隋城道左。疲兵咸集。平居必有客。必有酒食。日飮爲樂。游閒者以爲歸。就洞陰縣下流臨川結宇。爲近先壟。依依不忍去。在騎省。言者劾郞官謬擧匪人。主薦者媕妸不首實。公笑曰。我亦與聞。寧以我應之。遂坐罷。人服其長厚。原州時。小吏犯法抵罪。其父怒曰。有官如此。汝欺神明。罪一也。爲惡受刑。毀我遺體。罪二也。人將謂某吏之子獲罪於官。今我愧見鄕閭。罪三也。會隣里杖其子。世以方吳祐云。嗚呼。舅氏早遊士林。蔚有令譽。律己以名節自勵。臨政以善敎率物。治身治人。施罔不宜。然而遭逢契闊。百不一試。世方決性命饕富貴。脂韋以取容。而公跡不涉形勢之門。名不絓權要之口。退然自靖。陸沈以沒世。孰執其咎。配東萊鄭氏。右議政諱彥信之女。莊懿靜專。罕言語簡起居。不踰閾不闚戶。自未行時已然。黨親邀請。必以事爲解。至年大猶然。議政公朝衫敝。夜則篝火手製新衣。旣成而天未明。議政公歎其敏。妙擇對歸公。移所以事父母者事舅姑。舅姑宜共養。敏求兄弟與夫人諸姪日在前娛侍。未嘗見一日不執女紅竟晷。出外則賓客滿坐。脯肔酒醪未嘗見一日不在尊俎。蓋議政公性喜客。居恒設饋。以夫人尸之。故習於敎也。晨起理家政。婢僕俯首聽役。指使有方。盈縮有制。始公世儒素。產不中高貲。而家道立。鄕黨爾豪者。以夫人莅梱故也。伯兄都憲公以媵當家。每遇議政公忌辰。具祭品以薦曰。豈可令吾親安僕妾之享也。女弟居貧。使朝夕取資猶寄藏。其子女及庶弟之女。皆育養昏嫁。在夫人爲疏節。年六十四辛未六月卒。祔公葬。有一子生員鼎之。鼎之亦生一子奐。五女。適縣監吳挺柱,士人宋之獻,李成翼,徐文道,洪億。銘
曰。
使公而早遇。優優乎黑頭廟廊。
使公而晩合。亹亹乎黃髮典刑。
早滯公車。晩困簿書。
得之不偶。非人也天也。
失之所在。非我也時也。
惟其責報而收贏闔。胡視似續之蕃昌
甥姪嘉善大夫前吏曹參判李敏求撰
崇禎紀元後三十八年乙巳八月 日
*출전 동주집(이민구 문집)
(나)번역문 (2004. 7. 6. 영환(문) 제공)
상의원정 김공 배 숙인 정씨 묘지명 병서
나의 외숙 금사공(金沙公)이 꼿꼿하여 특이한 지조가 있고 학문을 넓고 크게 닦았으나 이름을 성취한 바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기를, “외숙께서는 장년(長年)이 되었는데도 진취(進取)에 조금도 뜻이 없으니, 어떻게 후사를 열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공이 술자리에 있다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찌 너에게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할 만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기에 내가 불민(不敏)한 것을 사죄드렸다.
그 뒤에 외숙께서는 유과(儒科)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가 지방의 고을을 역임하면서 혁혁(赫赫)하게 명성이 났었다. 그러나 이는 공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된 뒤에 늙어서 백수가 된 내가 비로소 잘하지 못한 글로 공의 은미한 말씀에 따라 묘지명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공의 휘(諱)는 확(矱)이고 자(字)는 정경(正卿)이다. 젊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이 18세에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부모를 모시고 북쪽으로 피난 갔었는데, 3년을 지나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도사공[都事公 김대섭(金大涉)=공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자 심 의인[沈宜人 청송 심씨(靑松沈氏)=공의 어머님]도 스스로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15년을 하루같이 죽을 먹으면서 수없이 통곡하였다.
외숙께서는 허리띠를 풀지 않고 역시 15년을 하루같이 봉양하다가 상(喪)을 당하자 염습(殮襲)하는 것부터 관(棺)을 꾸미고 반장(返葬)하고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제위답(祭位畓)을 비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성껏 하였다.
이 때문에 과거를 보지 못하다가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예속되어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를 겸임하였다. 광흥창의 관원이 으레 날마다 하급 관리에게 물건을 바치도록 하고 하급 관리는 이를 빙자해 사복을 채우거나 때로는 단점을 잡아 조종하기도 하였는데, 공이 잘못된 관행을 일체 개혁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에 원수(元帥) 한 문익공[韓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름을 받아 도착하여 보니, 강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정탐하는 사람이 보고하기를, “오랑캐의 장수가 의주(義州)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하고 그 날짜를 말하니, 온 군영(軍營)이 벌벌 떨었으나 공은 가서 군사를 사열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공이 이미 떠났을 때 원수가 전령을 보내어 경솔하게 진군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나갔는데, 여러 성들의 군사가 이미 고을의 문을 출발하였다. 성가퀴를 지킨 사람이 말하기를, “종사공(從事公)은 문관(文官)이면서도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있으니, 병사가 죽는 것은 직분이다.” 하였다. 공이 그곳에 5일간 머물러 있으면서 더욱더 차분하게 행동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약 빨리 나가면 군사의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 하였는데, 원수가 그 말을 듣고 공의 아량을 칭찬하면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 인조(仁祖)가 막 왕위에 올랐을 때 좨주(祭酒) 정엽(鄭曄) 공이 공을 추천하여 학무(學務)를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는 일 아닌 것이 없다.” 하고 방도에 따라 기획을 짜 허물어진 재실(齋室)을 모두 수리하고 명륜당(明倫堂) 동편 정록청(正錄廳)을 중건하는 등 시원하게 새로 단장하였는데, 그 공로로 병조 낭관(兵曹郎官)으로 승진하였다.
역적 이괄(李适)이 서울을 침범할 때 자전(慈殿)을 호위하고 한강(漢江)을 건너가 수레의 말이 부족하자, 공이 자신이 탄 말로 채워서 자전을 모시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역임하고,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자신의 몸에 있는 병을 제거하듯이 폐막을 통렬히 제거하고 강당을 수리하여 학교를 일으키는 등 온갖 일이 잘 거행되어 조정에 보고되자, 임금이 비단을 하사하였다. 1년간 있다가 관찰사(觀察使)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어 돌아오자, 고을 사람들이 유임(留任)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호란(胡亂)이 일어나 문익공(文翼公=한준겸)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남하(南下)할 때 또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으므로 서용되어 사옹원 정(司饔院正),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여 원주에 있을 때보다 정사를 더 주도면밀하게 거행하였다. 그때 마침 흉년이 들었으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종자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권장하여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니, 공 수형(龔水衡)만 유능한 관리가 아니었다. 가을에 관찰사(金時讓)친척이라는 혐의로 해임되었다.
전후 두 고을에 부임하여 모두 1년이 차지 않았으나 그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선정(善政)을 새기어 추모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순창의 백성들이 토산물(土産物)을 모아 부조를 하였고 일이 있어 서울에 온 그곳 백성들이 모두 찾아와 매우 슬프게 곡하였으니, 이게 어찌 미리 만나자고 약속한 것이겠는가?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있다가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나가 옛날의 소신대로 고을을 다스렸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이르러 병환이 나 오래도록 낫지 않자 관찰사가 상황을 보고하면서 파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치적(治積)을 애석하게 여기어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 봄에 면직되었다가 결국 이 해 7월 7일에 세상을 떠나 영평(永平) 종현산(鍾顯山) 동쪽 산기슭 정좌(丁坐)의 묘원에 묻히었는데, 도사공(都事公)의 묘소가 바로 서쪽에 있다.
김씨(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비롯되었는데, 그 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과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저명하였고, 우리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직제학(直提學) 김맹헌(金孟獻), 첨정(僉正) 김자양(金自讓)이 6대조, 5대조이다.
고조 김예생(金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이고, 증조 김윤종(金胤宗)은 경상 병사(慶尙兵使)이고, 할아버지 김진기(金震紀)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이고, 아버지 김대섭(金大涉)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청성백(淸城伯)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자 관찰사(觀察使) 심전(沈詮)의 딸이다.
공은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위대하여 풍속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을 접할 때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만나면 머뭇거리며 관망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허씨(許氏) 집안으로 출가한 누님이 죽어 북쪽 지방에 묻히었고 그의 1녀는 나이 겨우 4세였는데, 공이 몸소 수 천리를 달려가 그 남편의 묘에다 반장(返葬)하고 그의 딸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펴 출가시켰다.
다급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 주면서 말하기를, “구마(狗馬)나 성색(聲色) 때문에 조상의 유산을 파한 자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총병(摠兵)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서 패배하여 사상자(死傷者)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공이 수성(脩城)의 길 왼쪽에서 죽을 쑤어 구제하자 병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평소에 손님이 오면 반드시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날마다 마시며 즐기었으므로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음현(洞陰縣) 하류의 물가에다 집을 지었는데, 선산(先山)과 가까웠으므로 노닐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병조(兵曹)에 있을 때는 대간(臺諫)이 ‘낭관이 사람을 잘못 추천하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추천을 주관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도 같이 참석하였으니, 차라니 내가 말하겠다.” 하고 이내 실토하여 파직되었는데, 사람들이 장후(長厚)한 기풍에 감복하였다.
원주(原州)에 있을 때는 하급 관리가 법을 범하여 처벌을 받자 그의 아비가 노하여 말하기를, “상관이 그러한데 네가 신명(神明)을 속이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나쁜 짓을 하여 형벌을 받아 내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관리의 아들이 관청에 죄를 지었다고 하면 내가 향리의 사람을 보기가 부끄러울 것이니 그 죄사 셋이다.” 하고, 향리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의 아들에게 곤장을 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오우[吳祐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사람]에게 비유하였다고 한다.
아! 외숙께선 일찍부터 초야의 현인(賢人)들과 노닐어 성대한 명망이 있었다. 자신을 다스릴 때 명절(名節)로 가다듬고 정사를 시행할 때 착한 교화로 사람을 이끄는 등 자신을 다스리거나 사람을 다스릴 때 시행한 바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많지 않아 백분의 일도 시험해 보지 않았다. 세상은 생명을 내놓고 부귀를 탐하여 아부하면서 빌붙고 있는데, 공의 발자국은 세도가의 문전을 밟아 보지 않았고, 공의 이름은 권력자의 입에 오르지도 않은 채 뒤에서 조용히 살다가 침체된 대로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 그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우의정(右議政) 정언신(鄭彦信)의 딸인데,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차분한 데다 말이 적고 행실이 간결하여 대문을 나서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엿보지 않는 등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친척이 초청하면 반드시 일을 들어 못 가는 이유를 해명하였고 나이가 많아서도 여전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의 조복(朝服)이 해어지자 밤에 등불을 켜 놓고 손수 새 옷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이 트기 전에 완성하니, 의정공이 그의 민첩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공에게 시집와서 부모를 섬길 때처럼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그의 봉양에 만족하였다. 나의 형제와 부인의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앞에서 모시고 놀았는데, 어느 날이나 해가 지도록 길쌈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밖에 나가 보면 손님이 자리에 가득 하였으나 하루도 술과 고기가 술동이와 도마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의정공의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평소 술상을 차리는 일을 부인이 맡았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힌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사(家事)를 다스리면 노비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는데,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고 살림살이에 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공은 대대로 선비로 내려와서 가산(家産)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나 가세(家勢)가 성립되어 향리에서 부호(富豪)로 일컬어진 것은 부인이 살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큰오라버니 대사헌공[大司憲公 정협(鄭協)]은 첩실(妾室)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의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어버이로 하여금 복첩(僕妾)이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동생이 가난하여 조석(朝夕)거리를 대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서제(庶弟)의 딸들도 모두 양육하여 출가(出嫁)를 시키었는데, 이는 부인에게 있어서 자잘한 일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6월에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생원(生員) 김정지(金鼎之)이고 김정지도 1남 김환(金奐)을 두었다. 딸은 현감(縣監) 오정주(吳挺柱), 사인(士人) 송지헌(宋之獻), 이성익(李成翼), 서문도(徐文道), 홍억(洪億)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이 일찍이 때를 만났더라면
장년에 여유롭게 조정에서 일을 하였을 것이고,
공이 만년에 합치되었더라면
부지런히 원로로서 전형(典刑)이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는 과거에 침체되었고
만년에는 문서에 시달렸도다.
얻어도 불우한 것은 사람 아닌 하늘 때문이었고
잃었던 이유는 내 아닌 시대 때문이도다.
자신이 보답을 받아 넉넉히 거두었다면
어찌 자손이 번창한 것을 볼 수 있으랴?
숭정기원후삼십팔년을사(서기1665년현종8년)팔월 일
생질 가선대부전이조참판이민구 찬
서기2004년 6월 김영환 옮김
<계표>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4)친필 서찰 소개

(1) 친필 사진 소개 : 2002. 3. 영환 제공. 출전 : 근묵
(2) 서찰 원문 해독문 소개 : 2004. 8. 25. 윤만(문) 제공.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 유물명칭 : 김확 시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조선(朝鮮) ○ 재 질 : 지(紙)
○ 크 기 : 가로 : 28 cm / 세로 : 24.5 cm ○ 작자필자 : 김확 ○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 문헌(文獻) / 서간류(書簡類)
○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 학교(學校) / 성균관대(성균관대)
○ 유물번호 : 성균관대(성균관대) 1163
奉次 狀元令監 瓊韻 呈案下
秋來久斷故人書 薄領關心路自疎
未必重陽爲勝事 前溪何日不觀魚
己巳仲秋上旬 榜下生
(3) 해독 및 해석 : 2004. 9. 1. 익수(제). 재해독 및 해석
奉次 狀元令鑒瓊韻呈案下 (장원 영감의 운으로 올립니다)
秋來久斷故人書 가을이 왔는데도 옛친구의 편지 끊기고
簿領關心跡自疎 문서에 마음이 묶여 거동이 자연 소홀했건만
未必重陽爲勝事 9월 9일에 좋은 일 없다해도
前溪何日不觀魚 앞 계곡엔 아무 날이나 고기를 볼 수 없기야 하겠소.
己巳仲秋上旬 기사년 8월 상순
榜下生 방하생
<주>
狀元... 과거에 일등으로 합격한 사람
瓊韻... 옥같이 아름다운 시, 상대방의 글의 미칭.
簿領.... 장부, 문서
重陽.... 9월 9일. 중양절
榜下生... 과거에 같이 합격한 사람
10) 승지공(承旨公-휘 始慶) 소개. 1659(효종11)∼1735(영조11)
자는 선여(善餘)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659년(효종 10, ☞임신보 효종 11년은 오기이다) 기해(己亥) 11월27일 나시어 1735년(영조 11) 을묘(乙卯) 11월 7일에 돌아가시니 수(壽) 77세이다. 1682년(숙종 8) 임술(壬戌) 24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사마방목, 임신보 및 음성군지에는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증광시(增廣試) 을과5<乙科5-문과방목, 임신보 및 음성군지에는 식년시 을과>로 급제하여 8개 군현의 재(宰)를 지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우승지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右承旨兼春秋館編修官知製敎)에 이르렀다.
증조부(曾祖父)는 좌랑공(佐郞公) 구(?), 조부(祖父) 영희(永熙), 부(父)는 통덕랑공(通德郞公) 두서(斗瑞) 이고, 외조부(外祖父)는 봉산군 이형신(蓬山君 李炯信)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1659년(효종 11) 기해(己亥) 정월14일에 나시어 1716년(숙종 42)에 부군(夫君)의 관직을 따라서 숙부인(淑夫人)의 직첩을 받았고 1724년(경종 4) 갑진(甲辰) 11월 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66세이다. 두광(斗光-朝鮮朝榜目 ☞壬申譜의 斗先은 오기이다)의 따님이다. 3남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통덕랑(通德郞) 남일(南一)이고 다음은 종일(鍾一), 다음은 수일(壽一)이며, 딸은 목조검(睦祖儉)에게 출가하였는데 사천인(泗川人)이다.
공(公)은 학덕(學德)을 겸비한 학자요 또 보기 드문 청백리(淸白吏)로서 선량(善良)한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관원의 비위(非違)를 엄하게 척결하여 기강을 세우고 백성들을 열과 성을 다하여 다스리니 숙종 임금도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보고를 접하고 매우 감탄하여 표창장과 함께 후한 상을 하사(下賜)하여 모든 관원의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공(公)은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만은집(晩隱集)」8권<☞임신보·음성군지p873>을 남겼다.
묘(墓)는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송정뿌리)에 있다. 음성공 묘역 아래이며 안동김씨세장지지 비석 위에 있는 두 묘소 중 위쪽이 승지공의 묘소이다. 예전에는 석물이 없었는데 1990년대 사초를 하면서 새롭게 석물을 세워 단장하였다.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배계절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서있다. 상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李 人 配 之 諱 東 製 修 秋 旨 使 鐘
氏 全 淑 墓 始 金 敎 ? ? 兼 右 城
? 州 夫 坐壬 慶 公 安 知 編 春 承 府
《參考文獻: 國朝榜目·壬申譜/1992·家譜·陰城郡誌/1979,甘谷鄕土誌/2003》 (2002. 5. 25. 윤만(문) 자료 제공)


묘소 (2002. 5. 25. 윤만(문) 자료 제공)
[승지공(시경) 연표(年表)]
1659년(효종11) : 기해(己亥) 11월 27일 生
1682년(숙종 8) : 임술(壬戌) 24세 진사 및 문과급제
1693년(숙종16) : 32세 보령현감, 평안도 도사, 황해도 도사
1712년(숙종38) : 54세 통정대부 종성도호부사
1716년(숙종12) : 58세 밀양도호부사
1722년(경종 2) : 64세 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춘추관·수찬관
1724년(경종 4) : 66세 형조참의·지제교
1727년(영조 3) : 69세 영월도호부사
1834년(영조10) : 76세 우승지
1735년(영조11) : 77세 11월 7일 卒
(1) <만은집 소개>(2006. 3. 24. 윤만(문) 제공)
(가) 조사자 : 김윤만(문)
(나) 소장처 : 경기도 남양주시 만은공 종손가
(다) 현상태 : 총 8책(현재 1책은 종인이 빌려감). 원본 1질만이 필본으로 전하고 있음. 각 책은 약 90-100P임. 표지는 너무 낡아 40여년 전에 새로 제작한 듯함.
(라) 특이점 : <여호록>에는 육우당에 관한 기록이 있음(만은공께서는 생전에 한동안 여주에 사셨는데 육우당 구기를 방문하였음)

<표지 및 전질>


<육우당 기록이 있는 부분>
(2) 친필 서찰 소개 (2002. 12. 21. 윤만(문) 제공)

(가)아트서울 경매 정보 내용--성 명:김시경(金始慶 1659- ?). 품 명:간찰(簡札). 년도:1697 (丁丑) 四月十八日. 크 기:42.8x30.5cm. 가 격:450,000원
(나)매입일 및 매입자 : 2002. 12. 21. 윤만(문) 매입
(다)원문 해독문 및 번역문 : 2002. 12. 25. 익수(제) 제공
본 간찰(簡札)은 1697년(丁丑) 4월18일에 쓴 김시경(金始慶)의 편지로 2002년12월20일 발용(勃鏞-군사공파)님이 인터넷 경매싸이트인 아트서울에 올라온 것을 소개하여 방손(傍孫)인 윤만(潤萬)이 450,000원에 구입하였다. 크기는 : 42.8cm×30.5cm이다.
역문(譯文)과 번역(飜譯)은 항용(恒鏞-제학공파)님에게 부탁하여 제주에 거주하고 계시는 익수(益洙-제학공파)님께서 맡아주셨다.
頃於水閣便中伏承 (경어수각편중복승)
下門書謹審伊時 (하문서근심이시)
萊侍政體神相萬福仰慰不 (래시정체신상만복앙위불)
任區區姪供劇依遣他無足 (임구구질공극의견타무족)
仰喩者凶歲 (앙유자흉세)
撫摩之政非比常年 (무마지정비비상년)
何以敢其苦耶殊用伏慮慮是 (하이감기고야수용복려려시)
?此酷兩麥盡萎公私之憂尤 (재차혹양맥진위공사지우우)
如何也 (여하야)
下勳魚藿等物來人深以見質不 (하훈어곽등물래인심이견질부)
爲傳約此時人心極巧結未信 (위전약차시인심극교결미신)
其必然而然亦可欺以方奈何奈何京? (기필연이연역가기이방내하내하경추)
別無大段可仰者而蒙放諸人還收 (별무대단가앙자이몽방제인환수)
之啓尙未收敎姜尹蔡三人皆死於 (지계상미수교강윤채삼인개사어)
杖下更無濟人 (장하경무제인)
問之端故獄 (문지단고옥)
事等已了尙 (사등이료상)
矣李令?崗 (의이령린강)
有安東府伯鼎 (유안동부백정)
曉旣已辭那李 (효기이사나이)
泊相令亦有呂 (박상령역유여)
牧已赴任了奴 (목이부임료노)
子意以事下去 (자의이사하거)
于平海也故前 (우평해야고전)
修一相使之傳約而未知然旣?習 (수일상사지전약이미지연기혼습)
之弊耶餘萬謹不備伏惟 (지폐야여만근불비복유)
下察謹拜上兼帖 (하찰근배상겸첩)
丁丑四月十八日 從姪金始慶 頓 (정축 4월 18일 종질김시경 돈)
[번역문]
지난번 수각(水閣)편 가운데 삼가 내려주신 글을 받고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때 동래부사를 모시고 다스리시느라고 몸과 마음이 만복하시다니 삼가 위로가 됩니다. 소임을 못한 못난 조카는 받들기가 어려워져 다른 데로 파견됨에 따라 타일러 주실 사람도 없습니다. 흉년에 (백성을) 무마하는 정치는 평년과는 견줄 수가 없으니, 어떻게 그 괴로움을 감당해야 할는지요. 남다른 방법을 써보아도 이번의 재해가 이처럼 혹독하여 보리가 죄다 시들어 버렸으니 공사 간에 너무 걱정이 되어 어찌해야 될는지 삼가 너무 염려됩니다.
물고기와 미역을 은혜로이 내려주셨는데 보내온 사람, 원(源)이 잃어버렸으니 전달할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인심이 아주 묘해서 결국 믿지 못하여 그리 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렇게 또한 방금 속이려드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경추(京? : 중앙에서의 추궁)는 아뢸 것이 별로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방면(放免)을 입었으나, 환수(還收)하라는 계(啓)는 아직 교지(敎旨)를 걷지를 않아 강(姜)·윤(尹)·채(蔡) 세 사람은 모두 매를 맞아 죽었는데, 더 믿어 문초할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옥사(獄事)등은 이미 끝났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인음(李??) 영감은 안동부백(安東府伯)으로 있다가 바야흐로 깨달아 이미 사직을 했습니다. 저 이박상(李泊相) 영감은 역시 여(呂)목사가 있음에도 부임을 했습니다. 종놈<奴子>이 마침 일 때문에 평해(平海)에 내려가기 때문에 앞에 글 한줄 썼는데 서로 시키는 약속이 전달될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문지기의 폐단에 익숙었을런지요.
나머지 여러 가지 삼가 갖추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내려 살펴주시기 바라며 삼가 절을 올리는 겸 메모를 하나이다.
정축(丁丑. 1697) 4월 18일
종질(從姪) 김시경(金時慶) 돈수(頓首)
(3)葛庵先生文集附錄卷之五 [輓章]
[輓章 金始慶 : 김시경을 조의함]
河嶽凝精德?祥。碩儒才合佐皇王。學窮性理淵源邃。位峻賓師望實彰。選部掌銓明似鑑。
하악응정덕협상。석유재합좌황왕。학궁성리연원수。위준빈사망실창。선부장전명사감。
憲臺論事肅持綱。經綸偉業期商鼎。??嘉猷補舜裳。桑海變遷身歷險。風霜?薄髮勝常。
헌대론사숙지강。경륜위업기상정。보불가유보순상。상해변천신력험。풍상감박발승상。
波淸洛水龍閒臥。日暮雲?鳳忽藏。用舍卽關時否泰。死生俱係道存亡。山頹士抱人萎痛。
파청락수룡한와。일모운소봉홀장。용사즉관시부태。사생구계도존망。산퇴사포인위통。
木稼民含國?傷。今代達尊推大老。異辰餘慶屬諸郞。哀榮不到重泉?。英爽猶看列宿光。
목가민함국췌상。금대달존추대로。이진여경속제랑。애영불도중천비。영상유간렬숙광。
公議簡編終考信。高名宇宙永流芳。庸姿幸遂登門願。和氣曾薰滿室香。?闊向來違奉面。
공의간편종고신。고명우주영류방。용자행수등문원。화기증훈만실향。규활향래위봉면。
幽明此別劇?腸。南阡恨負茅鷄奠。千里緘辭淚滿行。
유명차별극최장。남천한부모계전。천리함사루만행。
물과 산처럼 굳은 정기에 덕은 상서로웠고
큰 선비로 재능에 맞게 임금을 보필했네.
성리(性理)를 깊이 공부하여 근원이 깊고 아득하니
높은 자리에 빈사(賓師 1)로서 실로 우러러 드러내었네.
전랑(銓郞)에 뽑혀서는 거울처럼 맑게 처리하고
사헌부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엄숙하고 강직했네.
경륜과 훌륭한 업적은 상(商 2)나라에 알맞고
아름답게 수놓은(3) 훌륭한 계책은 순(舜)임금보다 나았네.
상전벽해의 변천을 험난하게 몸소 겪고
바람서리에 모질게 흔들려도 머리털 하나 끄떡 않더니
한강 물 물결 맑아 와룡(臥龍 4)이 한가하고
구름 낀 하늘에 해지는데 봉황이 홀연히 숨었네.
쓰고 버림이 곧 닫히면서 시대가 태평치 않아
생사에 모두 걸려 존망(存亡)을 말하는데
산이 무너지고 선비는 내팽겨져 사람들이 애통해하고
나뭇가지가 얼어붙고(木稼 5) 백성은 원한을 품어 나라는 초췌하게 시들어갔네.
이제 와선 모든 사람이 존귀하게 여기고 큰 어른으로 추대하니
훗날 여경(餘慶 6)이 전랑에게 돌아가건만
슬픔과 영광은 깊은 저승에도 도달하지 않으니
뛰어난 용모와 깨끗함은 벌려선 성좌의 별빛처럼 보이네.
여론이 되었던 편지와 글들 마침내 고증하여 믿으리니
높은 명성 세상에 영원히 전하여 향기 뿜으며
떳떳한 자태 행여 궁궐 문에 오르는 소원 이루어지면
화기(和氣)가 일찍 훈훈하게 방안에 가득 향기뿜으리.
눈 부릅뜨고 멀리서 오실 적에 얼굴보기에 어긋나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이제 헤어지자니 창자를 에이는데
남쪽 두둑 길에 한을 지고가 모사 술잔을 올리리(茅鷄 7).
천리 밖 함사(緘辭 8)에 가는 길마다 눈물이 가득하네.
1) 賓師(빈사) : 높은 관직에 있으며 임금의 존중을 받는 사람.
2) 商鼎(상정) : 상(商)나라의 조정을 말하며 김시경을 伊尹(이윤)에 비기고 있음.
3) ??(보불) : 옷에 아름답게 수를 놓음.
4) 臥龍(와룡) : 은거하거나 재능을 나타나지 않은 인재에 비유.
5) 木稼(목가) : 나뭇가지에 내린 비나 눈이 얼어붙은 것.
6) 餘慶(여경) : 선조의 덕을 베풂이 자손에게 경사가 오는 것.
7) 茅鷄(모계) : 茅砂(모사)와 계이(鷄伊)로 모사는 혼백, 계이는 술잔을 뜻하며 모두 제사에 쓰이는 도구이다.
8) 緘辭(함사) : 관원의 잘못됨을 묻는 글에 답함. 여기서는 변명하는 말이나 弔辭(조사)의 뜻.
《출전 : 葛庵先生文集附錄卷之五 [輓章]》
☞ 갈암(葛庵) : 이현일<李玄逸, 1627(인조 5)~1704숙종 30)>.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숙종 때 공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조선조 유일의 ‘여성君子’로 불리우는 貞夫人 안동 張씨가 그의 어머니시다.
(4) [輓詞 侍敎生金始慶]
神仙秀格士林魁。玉鏡氷壺絶點埃。閒趣一生山水癖。眞源千古洛濂來。?瓢樂裕身常逸。
신선수격사림괴。옥경빙호절점애。한취일생산수벽。진원천고락렴래。안표악유신상일。
湯幣誠勤志不回。八十全歸公豈憾。可憐吾道落泉臺。
탕폐성근지불회。팔십전귀공기감。가련오도락천대。
??樂道臥丘園。宿望儒林世所尊。八?崇資仁者壽。一生純孝行之源。云亡士抱?樑痛。
효효악도와구원。숙망유림세소존。팔질숭자인자수。일생순효행지원。운망사포최량통。
得正人欽易?言。蟾嶽揷靑江月白。?應千載典型存。
득정인흠역책언。섬악삽청강월백。지응천재전형존。
신선처럼 빼어난 품격 사림(士林)의 우두머리
옥거울 수정항아리처럼 티끌 한점 없어라.
한가한 취향과 일평생 산과 물을 즐긴 성벽
참 근본은 옛날의 낙렴(洛濂 1)에서 유래되었네.
안회(顔回)의 표주박 물로도 즐긴 여유 몸은 항상 한가하고
탕(湯) 임금의 폐백으로 2) 성실히 힘쓰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80에 돌아가시니 누가 공(公)보고 한이 있다 하겠소만
우리의 도(道)가 저승에 떨어진게 가련할 뿐이라오.
차득하며 도(道)를 즐기며 언덕에 누우니
유림(儒林)에 오래 쌓아온 명망 3) 세상에서 귀히 여겨
80 나이 높은 품계 어진이로 장수함은
평생의 깨끗한 효성 행동의 근원으로 삼았음이네.
죽은 선비를 생각하며 말하자니 기둥 부여잡고 마음아파
죽음이 임박했을 때 4)의 말 진실로 남의 흠모를 받았네.
섬악(蟾嶽 5)이 꽂히고 푸른 강에 달빛 밝듯
다만 천년을 전형(典型)으로 응당 남으리.
1) 洛濂(낙렴) :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 1033~1107)형제의 낙학(洛學)과 주돈이(周敦, 1017~1073)의 염계학(濂溪學)
2) 湯幣(탕폐) : 탕(湯) 임금이 이윤(伊尹)을 초빙할 때 폐백을 준 고사로서 맹자에 나온다. 이윤(伊尹)은 은나라 탕왕을 도운 명재상으로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여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하더라도 돌아다보지 않았고,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 주지 않고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탕왕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보내 그를 초빙하니 태연하게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탕왕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겠는가? 내가 어찌 밭 가운데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과 같겠는가?"하였다. 탕이 세 번이나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그때야 태도를 바꾸고서 말하기를 "내가 밭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어찌 이 임금을 요순의 임금으로 만들게 하는 것과 같겠으며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내가 어찌 몸소 직접 보는 것과 같겠는가?····· 내가 그들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출사하였다.
3) 宿望(숙망) : 오래 쌓은 명성.
4) 易?(역적) : 죽음이 임박함.
5) 蟾嶽(섬악) : 섬자가 붙은 산이름.
《출전 : 愚潭先生文集卷之十二 附錄》
☞ 우담(愚潭) : 정시한<丁時翰, 1625(인조 3)~1707(숙종 33)> 본관 나주(羅州). 자 군익(君翊). 호 우담(愚潭).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원주(原州)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進善)에 올라 1691년(숙종 17) 앞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禧賓) 장(張)씨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廣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임오록(壬午錄)》·《관규록(管窺錄)》·《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5) [送關西亞使金始慶 : 관서부사 김시경을 보내며]
秋風馹馬度關山。幕佐今年亦好官。州妓慣飢腰轉細。校生停講務尤閑。珍羞美酒供雖?。
추풍일마도관산。막좌금년역호관。주기관기요전세。교생정강무우한。진수미주공수겸。
快閣名樓過自看。倦?愁呻皆可韻。錦囊詩律不須?。
쾌각명루과자간。권위수신개가운。금낭시률불수산。
가을 바람에 역마는 관산(關山 1)을 지나는데
금년의 막료(幕僚) 또한 훌륭한 관원
고을의 기생은 의례히 굶주려 허리가 더 가늘어지고
교생(校生)들은 글 읽기를 쉬니 더욱 한가하리.
진수성찬에 향기로운 술을 탐하지 않으며
장쾌하고 이름난 누각 지나가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달픈 한 숨 수심 찬 신음 모두가 시가 되어
금낭(錦囊 2)의 시율(詩律)이 한 권 책이 되지 않으랴.
1) 關山(관산) : 요새에 있는 산
2) 錦囊(금낭) : 비단주머니. 훌륭한 시의 뜻. 당의 시인 이하(李賀)가 좋은 시를 지을 때마다 비단주머니에 넣었다.
《출전 : 游齋先生集卷之十一 閑居錄丁丑還京以後作》
☞ 유재(游齋) : 이현석<李玄錫, 1647(인조 25)∼1703(숙종39)>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遊齋), 시호는 문목(文穆), 증조부는 수광(●光), 조부는 성구(聖求), 상규(尙揆)의 아들. 1667년(현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에 보직된 뒤, 3사(3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 우승지(右承旨), 1688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9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1693년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을 거쳐 1697년 우참찬(右參贊), 1700년(숙종26)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안풍군 백곡 김득신의 묘비를 서(書)하였다.
(6) [신장(?章 ; ☞전별하는 글) 승지 김시경 선여(金始慶善餘)]
殊方專對仗才猷 / 전권사신은 재주와 꾀를 갖춰야 하는 것
妙選湖堂第一流 / 묘하게도 호당주(주1)의 첫째 인물 뽑았네
使節曉辭天北極 / 사절이 새벽에 임금께 하직하니
文星夜照日東? / 문창성이 밤에 일본 땅에 비치네
?頭帝女支機石 / 뱃머리는 상제 딸의 베틀 괴던 돌을 향하고
帆外童男採藥洲 / 돛대 밖은 진 나라 동자들의 약 캐던 섬일세
領略海山千萬景 / 산과 바다 천만 경치를 다 거둬 와서
歸來爲我說奇遊 / 나를 위해 그 이야기 들려 주게나
王事驅馳夕飮氷 / 왕사에 분주하여 저녁에 얼음을 마시는데(주2)
異鄕離恨浩難勝 / 타향에 이별의 한 이루 다 견디기 어려우리
當朝望重詩三百 / 온 조정의 덕망이 무거우니 시가 삼백 편이고
許國身輕海萬層 / 나라에 바친 몸이 가벼우니 바다가 만층일세
波送一帆經對馬 / 물결은 돛대를 보내 대마도를 지나는데
風?六月?騫鵬 / 바람은 유월을 장식해 건붕에 대이도다
奇遊最是平生冠 / 이번의 그 행차는 평생에 으뜸이라
快覩扶桑曉日昇 / 쾌히 부상에 뜨는 새벽 해를 보리
承旨金始慶善餘。
주1) 호당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본서의 저자인 임수간(任守幹)이 일찍이 여기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사람이므로 한 말.
주2) 얼음을 마시는데 : 음빙(飮氷)은 ① 얼음을 먹음. 마음이 불안 초조함의 비유. ② 관리가 나라를 위하여 애태움. ③ 곤궁하면서도 깨끗한 절조를 지킴.
《출전 : 동사일기 곤(東?日記坤), 둔와부군(遯窩府君)이 일본에 사신갈 때의 신장(?章) 신묘년(1711, 숙종 37) 》
☞ 둔와(遯窩) : 임수간<任守幹 1665(현종 6)∼1721(경종 1)> 본관 풍천(佯川). 자 용예(用譽). 호 둔와(遯窩). 1690년(숙종 16) 생원, 16
(7) [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79호
○ 명 칭 :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 분 류 : 석비
○ 수 량 : 1기
○ 지정일 : 1978.11.10
○ 소재지 : 경기 안성시 낙원동 609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안성시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오명항(1673∼1728) 선생은 숙종 31년(1705)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평안도 관찰사·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판의금부사로서 죽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을 토벌하였다. 그 공로로 분무공신 1등으로 해은부원군에 봉하여졌고 우찬성·우의정에 승진되었다.
비는 네모진 받침 위에 위가 둥글게 처리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 ·뒤 ·옆면 모두에 글씨를 새겼다. 앞면 비문은 조형명이 짓고 박문수가 썼으며 뒷면은 토벌에 참가했던 장수·군졸 등의 인적사항을 김시경의 글씨로 새겼다. 오른쪽 옆면은 군수민제장을 비롯하여 공을 세운 안성관원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영조 20년(1744) 안성의 군관민들이 세운 것으로, 원래 안성읍 동본동에 있던 것을 1969년 지금의 안성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8) <음성군지> 내 기록내용 (2002. 5. 25. 윤만(문) 제공)
출전 : <음성군지> (음성군지편찬위원회, 1996)
pp 1594. 金始慶(김시경 1659(효종 )∼ ? ) (2002. 5. 25. 윤만(문)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斗瑞자(두서)의 아들이다. 자는 善餘(선여)이고, 호는 晩隱(만은)이라 했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살았다. 1682년(숙종 8)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8곳의 군현의 원을 지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우승지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晩隱集(만은집)》이 있다. 묘는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에 있다. (문헌 : 국조방목, 음성군지)
(9) <조선왕조실록>내의 기록 (2003. 12. 8. 윤만(문) 제공)
1)숙종 046 34/07/15(기축)
김시경(金始慶)을 필선(弼善)으로, 조석명(趙錫命)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2)숙종 046 34/12/17(기미)
남치훈(南致熏)을 도승지(都承旨)로, 조태채(趙泰采)를 판윤(判尹)으로, 이명준(李明浚)을 헌납(獻納)으로, 김동필(金東弼)을 지평(持平)으로, 김시경(金始慶)을 필선(弼善)으로, 이세최(李世最)를 겸사서(兼司書)로, 오명항(吳命恒)을 교리(校理)로, 이관명(李觀命)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삼았다.
3)숙종 047 35/11/28(을미)
김시경(金始慶)을 장령(掌令), 김석연(金錫衍)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4)숙종 048 36/01/11(정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약방(藥房)의 세 전(前) 제조(提調)를 삭출(削黜)하게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啓請)하고, 또 여러 승지(承旨)를 모두 파직(罷職)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여러 승지들은 이미 파직하도록 감죄(勘罪)하였기 때문에, 도로 거둘 것을 청한 것이다.】 임금이 답하기를, “말단(末段)의 일은 도로 거두라는 청을 양사(兩司)에서 모두 내었으니, 지극히 해괴하다. 엄지(嚴旨)를 겨우 내렸는데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며 오직 두둔하기에만 급급하니, 거리낌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에 양사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엄비(嚴批)를 거듭 받았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후일에 부수찬(副修撰) 홍우서(洪禹瑞)가 차자(箚子)를 올려 처치(處置)하기를,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한 일은 대간(臺諫)의 체모를 보존하려는 것으로 계초(啓草)를 가까스로 전하고 비망기(備忘記)를 비로소 내렸을 때에 미처 인피(引避)하지 못하였으니, 형세가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엄교(嚴敎)를 받았으니 스스로 반열에 나아가 <사죄하여야> 할 터인데, 안연(晏然)하게 논계(論啓)하였으니, 대간의 체모를 크게 잃었습니다. 청컨대 사간(司諫) 한배주(韓配周), 헌납(獻納) 심수현(沈壽賢), 정언(正言) 김시환(金始煥)·이단장(李端章)은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하고, 집의(執義) 송유룡(宋儒龍), 장령(掌令) 김두남(金斗南)·김시경(金始慶), 지평(持平) 윤장(尹樟)·최종주(崔宗周)는 모두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개 임금이 처음에 엄지(嚴旨)를 내렸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이미 전계(傳啓)하였으나, 사헌부에서 미처 전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입락(立落)을 구분하였다.
5)숙종 049 36/10/22(계미)
김시경(金始慶)을 장령(掌令)으로, 이조(李肇)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6)숙종 050 37/04/23(신사)
참핵사(參○使) 송정명(宋正明)이 장계(狀啓)하기를, “사관(査官)이 기필코 범월(犯越)한 지방에 가서 조사하고자 하며, 그리고 이르기를, ‘그간 우리 경내(境內)를 따라 작행(作行)하겠다는 뜻을 이미 전번 동지 사신(冬至使臣)에게 효유하였다.’고 하기에, 누누(縷縷)이 힘껏 다투었습니다마는, 끝내 마음을 돌려 따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관(譯官)들이 통관(通官)을 개유(開諭)해서 우선 10일 간을 중강(中江)에서 천천히 기다리겠다는 허락을 얻긴 했으나, 회답을 내리는 명령이 만약 10일에 미치지 못하면 곧장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오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백두산(白頭山)까지 옮겨 간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부터 말해 온 것이나, 피해 지방(被害地方)에 가서 자세히 조사한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이것이 뜻밖입니다. 제의(諸議)가 ‘급속히 저들 나라에 이자(移咨)하면 혹 이로 인하여 중지하는 도리가 없지도 않다.’고 말하며, 여러 신하들이 혹은 말하기를, ‘급속히 이자(移咨)함이 옳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자문(咨文)이 갔다 돌아오자면 그 형세가 반드시 늦어진다.’고 하니, 참핵사(參○使)로 하여금 다시 방알(防○)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은 말하기를, “마이산(馬耳山)을 경유하여 작행(作行)한다는 말도 또한 광유(○誘)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마이산이 중강(中江)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는지라, 그 중강을 건너서 산천(山川)을 넌지시 염탐(廉探)하려는 뜻이 환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엄중히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단지 언어(言語)에만 의거하여 청허(聽許)하면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결단코 다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단지 저들과 다툴 뿐이고,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할 수는 없다.” 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설한령(薛罕嶺)으로부터 직접 삼수(三水)까지 가는 데는 비록 지름길이 있더라도 결코 가르쳐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임신년에 저들로 하여금 설한령(薛罕嶺)의 길을 알게 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 뜻한 바가 있으니, 단연코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추후(追後)에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임신년에는 황지(皇旨)로 이자(移咨)하였으나 회자(回咨)를 들여 보내어 끝내 능히 저지하였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자문(咨文)도 없는데 그들이 오는 것을 가볍게 허락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신년의 자문과 우리 나라의 회자(回咨)를 베껴 보내어 내보이게 하고, 쟁집(爭執)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임금이 근래에 지제교(知製敎)가 대찬(代撰)한 문자(文字)가 지리하고 만연(蔓衍)하기만 한 것이 많고 짐량(斟量)함이 없어서 사체(事體)가 부당한데, 오로지 지난번에 이웅징(李熊徵)이 찬진(撰進)한 이인엽(李寅燁)·권성(權쉓)의 교서(敎書)가 간결하고도 적중(的中)함을 얻었다 하여 특별히 상현궁(上弦弓)을 내려 주었다. 대개 며칠 전에 지제교 김시경(金始慶)이 이만원(李萬元)의 치제문(致祭文)을 제진(製進)하였는데, 그 글이 60여 구(句)에 이르고, 또 산하(山河)·간기(間氣) 등의 어구가 있어 정원(政院)에서 그 말이 너무 외람되다고 하여 개제(改製)하도록 하니, 임금이 명하여 다른 사람에게 분배(分排)하여 개제하게 하고, 이어서 이 명령이 있었다.
7)숙종 050 37/05/16(갑진)
수찬(修撰) 홍중휴(洪重休)가 상소(上疏)하여, 제일 먼저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쌓는 역사(役事)의 온당치 않음을 진달하고, 다음으로 과장(科場)에서의 떳떳하지 못한 점을 논하기를, “올봄의 강경(講經)하는 과거(科擧)에 한 거자(擧子)가 자호(字號)를 바꾸어 제2자(第二字)에 들어와 강하여 13분 반(十三分半)을 얻었는데, 그 뒤에 계속하여 강한 사람이 우획(優劃)을 얻은 자가 아주 적었던 까닭으로 입격(入格)한 일이 있었습니다. 심한 자는 강격(講格)이 너무 가혹하여 실력 있는 재사(才士)가 많이 낙제(落第)하고 있는데, 오로지 한 사람의 연고로 사사로이 바꾼 거자(擧子)에게 제멋대로 허락하였다고 이르기까지 합니다. 해관(該官)에게 죄를 내려 과장(科場)의 엄격한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대개 정석삼(鄭錫三)을 가리킨 것이다.】 또 논하기를, “이조(李肇)가 관동 백(關東伯)이 되어 그의 병든 어미를 데려다가 감영(監營) 아래에 옮겨 두었는 데도 대각(臺閣)에서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慨歎)하는 바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혜랑(惠郞)은 거의 모두 7, 8년, 혹은 5, 6년의 오랜 동안을 웅크리고 있어도 옮기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이미 체차(遞差)되었다가도 도로 제수(除授)하므로, 물의(物議)가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데도 자기 스스로 처리할 도리(道理)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끝으로 한림(翰林) 김재로(金在魯)가 제문(祭文)을 분배한 일을 가지고 상례를 뛰어넘어 아뢴 일을 말하고, 심지어는 말하기를, ‘김시경(金始慶)을 추고(推考)하는 데 지나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무궁(無窮)할 것이다.’ 하고 곧바로 죄(罪)를 청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 대저 김재로(金在魯)는 직장(職掌)으로서 며칠 전에 김시경(金始慶)의 일을 연석(筵席)에서 아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소가 이와 같았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이 성을 쌓는 것은 대계(大計)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별달리 저지하고 방해하는 계략을 내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않으며, 혜랑(惠郞)의 말은 그 논한 바가 적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고, 사필(史筆)을 잡은 신하가 직장(職掌)을 진달(陳達)함이 어찌 옳지 못하겠으며, 이조(李肇)의 일은 네 말이 옳다. 거자(擧子)와 해관(該官)의 한 조항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8) 숙종 050 37/08/10(정묘)
김시환(金始煥)을 사간(司諫)으로, 홍정필(洪廷弼)을 정언(正言)으로, 이의만(李宜晩)을 부교리(副校理)로, 임상덕(林象德)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양성규(梁聖揆)를 헌납(獻納)으로, 권업(權슑)을 집의(執義)로, 김시경(金始慶)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9)숙종 050 37/08/23(경진)
장령(掌令) 김시경(金始慶)이 상소(上疏)하여 괘서(掛書)한 사람을 구포(購捕)하는 일을 논하기를, “수천 금을 쓰는 것도 아까울 것 없고 훈질(勳秩)을 주는 것도 아낄 것 없다.’고 이렇게 고하여 중외(中外)를 용동(聳動)시키는 것이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포청(捕廳)이 줄곧 고요하니, 경책(警責)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흉서(凶書)를 본 자들이 흔히 전하기를, ‘그 종이의 질이 매우 좋아서 저들이 보통 쓰는 물건과 다르다.’ 하는데, 어찌하여 전후에 연경(燕京)에 갔던 상인(商人)·역관(譯官)들에게 내어 보이면서 중률(重律)로 위협하고 후상(厚賞)으로 요구하여 옮겨간 길을 찾지 않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지난번 연신(筵臣)이 각박한 것을 끌어다 빛을 낸다고 한 말은 비유한 것이 적당하지 않은데 책벌(責罰)하지 않으니, 뭇 신하를 책려(責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이진해(李振海)를 형신(刑訊)하기를 청한 것이 옥체(獄體)로서는 당연하긴 해도 한번 평문(平問)하여 찬배(竄配)로 결단하였고, 권설(權卨)은 적도(賊徒)가 모이기로 기약하였다는 말을 방자하게 퍼뜨렸는 데도 지금 신문하는 것은 김부차(金夫差)가 간 곳일 뿐이니, 경중(輕重)이 거꾸로 놓인 것에 가깝습니다. 김부차를 그 집 사람을 시켜 사사로이 찾아 잡게 한다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인 데다가, 더구나 정한 기한이 이미 지났어도 잡아 고하지 않으니, 다시 엄히 국문(鞫問)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괘서(掛書)한 적을 각별히 구포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으니,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處)하게 하라. 이진해의 찬배는 이미 참작하여 처치한 데에서 나왔으니, 다시 의논할 것 없다. 권설의 일은 논한 것이 마땅하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이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10)숙종 050 37/09/05(신묘)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조금 전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기하(李基夏)가 빈청(賓廳)으로 봉서(封書) 하나를 보내왔는데, 바로 전옥(典獄)에 갇혀 있는 죄수 윤진흥(尹震興)의 정장(呈狀)이었습니다. 그 정장에 이르기를, ‘함께 갇혀 있는 죄수 장천련(張千連)이 스스로 괘서(掛書)한 일은 자기와 밖의 사람이 상의하여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했는데, 윤진흥은 바로 인(印)을 위조(僞造)한 죄인이며 장천련은 바로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으로, 모두 오래 갇혀 있는 죄수입니다. 그 말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고한 바가 있으니, 포도청으로 하여금 구문(究問)하여 그 단서를 보아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포도청에 명하여 추문(推問)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김시환(金時煥)이 말하기를, “포도 대장이 이미 대신에게 보고하였고 대신이 또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였으니, 허실(虛實)간에 왕부(王府)로 하여금 구문하여야 하겠고, 국청 설치는 마땅히 그 정절(情節)을 보아가며 차례로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금부(禁府)에 명하여 안치(按治)하게 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갑산(甲山)의 국경을 범한 청인(淸人)을 압송해 와 사정을 물었더니,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국경을 범해 넘어온 적은 없다.’ 하고, 끝에 가서야 비로소 말하기를, ‘길을 잃어 오게 되었는데, 국경을 범해 넘은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그 실상이 이런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자문(咨文) 가운데 짐작하여 말을 만들어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자문은 말을 잘 꾸며서 심장(瀋將)에게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하고, 국경을 범해 넘어온 사람들은 속히 봉성(鳳城)에 교부해야 한다.” 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장령(掌令) 김시경(金始慶)이 괘서(掛書)한 사람을 현상(懸賞)하여 찾는 방법에서, ‘비록 수천금(數千金)의 비용이나 훈질(勳秩)의 상(賞)이라도 어찌 아낄 것이겠습니까?’라고 소론(疏論)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취지(取旨)하여 결정할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훈질은 과중하여 가벼이 시행해서는 안되고, 다시 천금을 더 준다는 뜻을 별도로 반포(頒布)해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김시경의 소(疏) 가운데 종이의 품질(品質)에 대한 것도 말하였다.” 하니, 서종태가 말하기를,
“듣건대 그 종이가 매우 좋다고 하니 반드시 소종래(所從來)가 있을 것입니다. 윤취상(尹就商)이 일찍이 그 종이의 품질을 보고자 하여 아뢰고 떼어 갔으니 지금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역관배(譯官輩)에게 널리 묻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숙종 050 37/09/18(갑진)
양사(兩司)가 권첨(權詹)의 상소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다음날 옥당(玉堂)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고, 단지 대사간(大司諫) 이야(李○)와 장령(掌令) 김시경(金始慶)만은 체직시켰다.【이야(李○)는 신정하(申靖夏)를 처치한 것이 아주 어긋났다는 것을 별도로 아뢰었고, 김시경(金始慶)은 김숙(金淑)을 신구(伸救)하면서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는 것으로 말하였다.】
12)숙종 050 37/10/27(임오)
이돈(李塾)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재(李縡)를 집의(執義)로, 권익관(權益寬)을 지평(持平)으로, 김시경(金始慶)을 필선(弼善)으로, 권첨(權詹)을 부교리(副校理)로, 정찬선(鄭纘先)을 수찬(修撰)으로, 황흠(黃欽)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13)숙종 057 42/06/22(경술)
김시경(金始慶)·이택(李澤)을 승지(承旨)로, 권첨(權詹)을 부응교(副應敎)로, 이정제(李廷濟)를 교리(校理)로, 권세항(權世恒)을 장령(掌令)으로, 양정호(梁廷虎)를 지평(持平)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순(尹淳)·윤성시(尹聖時)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석명(趙錫命)·엄경수(嚴慶遂)를 수찬(修撰)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4)경종 006 02/01/04(경인)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5)경종 006 02/01/10(병신)
정청(庭請)을 의논하여 파(罷)했을 때 경재(卿宰)로서 앞서 귀가(歸家)한 자가 많이 있었는데, 대관(臺官)이 단지 좌목(座目)에만 의거하여 죄를 청해 죄적(罪籍)에 뒤섞어 넣었으며, 또한 혹 이미 순문(詢問)하는 데 참석하고서도 요행히 면한 자가 있기도 하니, 마땅히 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여양 부부인(驪陽府夫人)은 여러 아들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가기도 하여 가사(家事)가 방락(旁落)되었고, 경은 부부인(慶恩府夫人)은 남편이 죽은 뒤로 병이 더욱 깊어졌으니, 마땅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제빈(世弟嬪)의 아버지 고(故)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는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의정(議政)을 증직(贈職)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천승(千乘)의 지위에 계시니 사천(私親)이 낳아 기르신 은혜에 대하여 마땅히 추보(追報)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 조태구(趙泰耉)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지난날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비통(悲痛)함을 깨닫지 못하겠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으니, 신하된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최석항은 따로 사우(祠宇)와 칭호(稱號)를 세워 사체(事體)를 무겁게 하고, 또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김일경이 또 대신이 헌의(獻議)한 뒤에 2품(品) 이상의 관원을 조당(朝堂)에 모아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할 것을 청하고, 판서(判書) 한배하(韓配夏)·김연(金演), 승지(承旨) 김시경(金始慶), 간관(諫官)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 서로 잇따라 ‘재신(宰臣)의 말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진실로 부합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6)경종 006 02/01/18(갑진)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가 앞서 이미 상소하여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예를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이 탑전(榻前)에서 건백(建白)하자 이진유가 다시 잇따라 김일경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형익(鄭亨益)에게 논척(論斥)당한 일로써 인혐(引嫌)하며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진실로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아니한데도 군부(君父)로 하여금 자신을 낳아준 분의 은혜에 대하여 완전히 잊거나 소홀히 하게 한다면, 이것이 과연 인정과 도리에 가깝겠습니까? 제사가 있으면 사옥(祠屋)이 있는 법이니 사옥을 세움에 있어서 새것이나 옛것에 무슨 구별이 있겠으며, 왕자(王者)는 사재(私財)가 없는 법이니 제수(祭需)의 공봉(供奉)에 있어서 대궐 안과 대궐 밖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추보(追報)하는 도리로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공진(供進)하게 함에 있어서, 선왕(先王)의 도(道)에서 고친 것이 어떠한 도(道)이며 선왕의 뜻에서 계승하지 않은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정형익의 말은 감히 선왕을 빙자하여 전하를 조절(操切)하는 계책으로 삼고 전하로 하여금 낳아준 분과 관계를 끊고 돌아보지 않게 하려고 하였으니, 유독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 또한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고, 또, ‘자식은 어머니에 대하여 애초부터 관계를 끊는 도리가 없고, 종묘(宗廟)에서는 은혜로써 의리를 가릴 수 없으며, 규문(閨門)에서는 의리로써 은혜를 능가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살아서는 봉양(奉養)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고 죽어서는 추보(追報)하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만약 정형익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성상으로 하여금 낳아준 분의 은혜를 끊어버리게 한 후에야 바야흐로 마음에 시원하게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 생전 봉양할 때에는 반드시 궁실(宮室)이 있으니, 죽어서 제사지낼 때 어찌 사옥(祠屋)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옛것을 그대로 쓰는 것은 옳고, 새로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른바 칭호(稱號)를 세운다는 것은 따로 제주(題主)의 명호(名號)를 따로 세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개역(改易)한다는 것은 일찍이 마음먹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3년 동안 고치지 않고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의리에 있어서 무슨 서로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왕세자(王世子)의 이름 아래 ‘희빈(禧嬪) 소생[禧嬪出]’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신하[臣隣]에게 반사(頒賜)하여 보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형익이 일찍이 한 마디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전하께서 사복(祠服)하신 뒤 칭호를 정하고 사우(祠宇)를 짓는 것은 정리(情理)에 있어서 반드시 행하여야 할 바이고, 선조의 처분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선왕의 뜻을 어겨 처분을 고치려 한다 하여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성상으로 하여금 감히 손을 쓸 수 없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기를, “거활(巨猾)은 이미 베었지만 흉악한 기세는 더욱 치열해져 남은 위세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므로 온 조정이 관망(觀望)만 하고 있는데, 우러러 믿는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하늘이 주신 지혜와 용기로써 내려 주시고 명철한 슬기를 널리 비추어 주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무너진 조정의 기강(紀綱)을 두려워하여 삼가게 할 수 있고 장차 망하게 될 나라의 형세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처음과 매우 달라져 천지(天地)를 회전시키는 도량(度量)은 거두어 베풀어지지 않고, 번개와 바람처럼 힘차고 신속한 호령(號令)은 위축되어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좌우에서 번갈아 올리는 글에는 선악(善惡)의 분별이 없고 공경(公卿)이 으레 사양하면 비지(批旨)를 언제나 아끼시니, 정석(鼎席)에는 꾀하는 바가 없고 양전(兩銓)은 거의 텅비게 되었습니다. 신은 위아래를 헤아리고 앞뒤를 돌아보며 번민하고 근심한 나머지 찡그린 얼굴로 탄식하고는 크게 울어버렸으니, 다만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고 싶을 뿐입니다. 또 영부사(領府事) 김우항(金宇杭)의 상소를 구해 보았더니, 이른바 ‘작년의 향유(鄕儒)’란 대개 조중우(趙重遇)의 일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조중우의 일에 대하여 심지어 ‘서제(○臍)라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고, 또 휼전(恤典)을 거행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어찌 일찍이 듣고 알지 못하였겠습니까마는, 은연중에 ‘사의(辭義)가 엄정(嚴正)하다.’는 등의 말로 비웃고 모욕하며 우롱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었으며, 반드시 ‘흉당(凶黨)이 조중우를 박살(撲殺)하고 성궁(聖躬)을 핍박한 것’을 마치 큰 의리가 되는 것처럼 여겼으니, 그가 비록 늙어 어긋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진(晉)나라 왕부(王쯖)가 《시경(詩經)》의 ‘슬프다. 우리 부모님. 나를 낳아주시고 수고하셨네.’라는 구절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우니, 문인(門人)들이 육아장(蓼莪章)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된 자들이 비록 왕씨의 문생(門生)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또 어떻게 차마 전하의 지극한 애통(哀痛)과 깊은 슬픔을 야기(惹起)하는 것입니까? 저 무리들이 이미 조중우를 죽이고는 전하의 마음의 깊이를 이미 엿보았다고 생각하고, 윤지술(尹志述)을 종용하여 성궁(聖躬)을 핍박하고 모욕하니, 마음에 놀랍고 보이는 광경이 참혹하여 차마 보고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저 무리들이 공상(空桑)에서 나지 아니하고서야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사친(私親)을 들어 모욕하였으니, 어떠한 수적(?賊)이겠습니까? 다만 이 한 구절만 보아도 저 무리들이 전하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왕께서 만약 성종(成宗)께서 처분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은 것과 같은 유교(遺敎)를 내리셨다면, 군하(群下)의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감히 망령되게 진품(陳?)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제(私第)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신주(神主)에다 ‘빈(嬪)’이라고 써서 진하로 하여금 반우(返虞) 때 가서 곡(哭)하게 하였으니, 우리 선왕께서 전하의 사의(私義)를 펼 수 있는 바탕을 삼으신 바가 진실로 자연히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저 무리들이 논하는 바와 같이 한계를 두고 완전히 가로막았다는 것입니까? 저 재상이 지난번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허둥지둥 올린 한 차자는 책임을 다할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은, ‘이 사람은 양쪽 눈이 실명(失明)하였고 오정(五情)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보통 도리(道理)로는 책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적을 비호하는 차자와 오늘날의 패륜(悖倫)한 의논을 기회를 틈타 불쑥 꺼내어 제멋대로 입을 놀리는 것이 판연히 두 사람의 수단 같으니, 어찌 군부(君父)에게는 느슨하게 하고 사당(私黨)에게는 급급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신은 저윽이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지평(持平) 조원명(趙遠命)이 아뢰기를, “정형익과 박필정(朴弼正)은 억지로 선조(先朝)를 끌어대며 군부(君父)를 위협하고 제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처분이 몹시 엄하였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곧 신하로서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인데, 이 무리들은 감히 쉽사리 말하고 조금도 꺼리거나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근일에 전하의 처분이 윤지술(尹志述)을 즉각 죽였을 때와 다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흉험(凶險)한 상소와 구무(構誣)하는 글을 수십 일 동안 보류해 두고 엄중한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으시어 마치 관대하게 죄주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듯하므로, 이 무리들이 성의(聖意)를 엿보아 헤아리고서 이와 같은 군부(君父)를 무시(無視)하고 핍박하여 모욕하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여항(閭巷)의 경우를 들어 말한다 할지라도, 무릇 선조(先祖)가 화변(禍變)을 당한 집안의 사람에게는 차마 그 자제(子弟)에 대하여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니, 대개 효자(孝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들추어내어 핍박하고 모욕하는 말을 하였으되 군상(君上)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청컨대 정형익은 먼곳으로 찬배(竄配)하고 박필정은 삭출(削黜)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생원(生員) 이기중(李箕重) 등 1백여 명이 또한 상소하여 추보(追報)하는 일을 논척(論斥)하자,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박휘등(朴彙登)·심탱(沈○) 등이 아뢰기를, “이기중 등의 소어(疏語)는 아주 패리(悖理)하여 정형익·박필정과 똑같습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뒤 사우(祠宇)를 짓고 칭호를 세워 고복(顧復)한 은혜에 보답하려 하심은 절로 의리가 분명한 일인데, 접때부터 흉당(凶黨)이 성궁(聖躬)을 조절(操切)하고 조중우를 장살(杖殺)하며 윤지술을 영구(營救)하여, 전하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없게 하여 지금까지 지체시켰습니다. 모자(母子)의 천륜(天倫)은 귀천(貴賤)이 없이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저 무리들에게만 유독 낳아 준 어머니가 없단 말입니까?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이미 ‘희빈(禧嬪)’이라고 쓰고, 상장(喪葬)을 모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한 것은 선왕의 명(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 일이 어찌 선왕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겠으며, ‘삼년 동안 아버지의 한 일을 고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청컨대 귀역(鬼헾)의 정상을 살피시고 특별히 명백한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만 답하고 끝내 이기중 등을 죄주지 아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보(追報)하자는 논의에 있어서 은정(恩情)을 적절히 참작하고 의리를 절충하는 것은 송인명(宋寅明)의 사의(私議)가 옳다. 그리고 대개 그 다투는 바는 다만 칭호와 별사(別祠)를 세우는 데 있을 뿐이니, 정형익의 상소에 이른바, ‘대내(大內)에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수(祭需)를 마련하되, 유사(攸司)로 하여금 공봉(供奉)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너무 각박하다는 점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변론(辨論)한 글을 살펴보건대 모두 터무니없는 억단(臆斷)이어서 족히 정형익의 기세를 꺾고 그 입을 막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진유(李眞儒)는 ‘제사가 있으면 사우(祠宇)가 있으니, 새것과 옛것이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저 쟁론(爭論)하는 자들 또한 사우 없이 제사지내자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별사(別祠)가 예에 어긋난다는 점을 비난한 것일 뿐이었다. 이진유 또한 이미 새것과 옛것이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또 어찌 옛것을 그대로 수식(修飾)하지 않고 반드시 새로 짓기를 도모해 별묘(別廟)를 세운다는 비난을 범하였겠는가? 최석항(崔錫恒)이 인용한 바, ‘천하에 어찌 부모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식은 어머니에 대하여 관계를 끊을 도리가 없다.’고 한 것은 대개 《시경(詩經)》 하광장(河潢章)의 선유(先儒)의 주설(註說)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어머니와 관계를 끊을 도리가 없다.’고 한 것은 단지 문안(問安)하고 봉양(奉養)하는 의절(儀節)에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칭호와 사우를 국중(國中)에 세우는 것을 후세(後世)에 훈계(訓戒)로 삼는다는 것이겠는가? 《선원보략》은 경진년에 완성하였고, 신사년 이후 개수(改修)할 즈음에 일찍이 품지(○旨)하지 않았던 것은 다만 신료(臣僚)들이 두려워하고 꺼렸기 대문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같이 그대로 썼던 것인데, 지금 작호(爵號)를 그대로 쓴 것이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이교악(李喬岳)이 일찍이 염문 서계(廉問書啓)에 ‘희빈(禧嬪)’이란 작호를 쓰자 무거운 견책(譴責)을 내린 일과 같은 경우는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한갓 품지(○旨)하지도 않은 《선원보략》에 중점을 두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는 더욱 창광(猖狂)하고 두서가 없는데, 그가 말한 ‘신주(神主)에 빈(嬪)이라고 썼다.’는 것은 또 더욱 매우 선왕을 교무(矯誣)하는 것이다. 신사년(辛巳年) 제주(題主)하던 날 선왕께서 ‘재유장씨(在幽張氏)’라고 쓰도록 명하셨으니, 대빈(大嬪)으로 숭봉(崇奉)하기 전에 혹시 고치지 않았다면, 김일경의 말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리고 최석항의 차자에 이른바 ‘제주의 명호(名號)를 따로 세운다.’고 한 것에서 또한 제주(題主)에 일찍이 ‘빈(嬪)’이라고 쓰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두 사람의 말이 어찌 심하게 모순되는 것인가? 아! 제주하던 날 칭호를 세우고 ‘이것은 곧 제주의 칭호이지 진짜 작호(爵號)는 아니다.’라고 하였다면, 이것이 엄이투령(掩耳偸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욱이 마침내 이명언(李明彦)의 불학 무식(不學無識)하고 터무니없는 불경(不經)한 말을 채용하여 ‘대빈(大嬪)’이란 칭호를 세웠으니 그 숭봉(崇奉)하는 바가 도리어 인빈(仁嬪)보다 훨씬 더하게 되었다. 전례(典禮)가 이와 같은데도 선조(先朝)의 처분과 무방(無妨)하다고 한다면, 한때의 이목(耳目)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도피할 수가 있겠는가? 선왕께서 막은 뜻이 전후의 사령(辭令)에 보이니 얼마나 엄중(嚴重)했던가? 그러데도 이제 ‘선왕께서 사은(私恩)을 펴도록 허락하셨다.’느니, ‘일찍이 유교(遺敎)와 처분(處分)이 성종(成宗) 때와 같은 것이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선왕을 무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을 용서한다면 무엇인들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이 무리들 또한 스스로 선조의 처분을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짓이 두려운 것일 줄을 알고서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싫어하였으니, 이에 ‘처분이 매우 엄하였다는 등의 말은 신하로서 제기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형익(鄭亨益)의 죄를 구성하고 말을 못하게 할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先祖)가 화변(禍變)을 당하였으면 차마 자제(子弟)를 대하여 배척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거나 ‘저들만 유독 낳아준 어머니가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한 말은 더욱 부녀자나 어린아이의 소견으로, 장획(臧獲)의 패리(悖理)한 말에 가깝다. 저들의 선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높고 빛나는 자리에 있는 자도 도리어 모두 이와 같으니, 허벽(許璧)·신필회(申弼誨)·김시경(金始慶)의 무리야 도리어 어떻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당일의 일은 성주(聖主)께서 공묵(恭默)하지 않고 일절 보파(報罷)하였더라면, 백괴(百怪)가 간요(奸妖)를 부리는 일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17)경종 006 02/02/18(계유)
이때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추보(追報)하는 일로 임금에게 아첨하고 있었는데, 남인(南人)들은 등급(等級)을 더하는 의논을 내어 총애를 구하고 권세(權勢)를 다투려고 하였다. 정운주(鄭雲桂)가 이미 맨 먼저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하다가 탄핵받아 체직(遞職)되자, 승지(承旨) 김시경(金始慶)이 상소하여 정운주를 구원하고 서명균(徐命均)을 배척하기를, “저 서명균이란 자는 윤지술(尹志述)을 편들어 성궁(聖躬)을 업신여기고 모욕하고, ‘사죄(私罪)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군부(君父)께 억지로 더하는 데 이르렀고,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었다.’는 등의 말로 요적(妖賊)을 애도(哀悼)하였습니다. 전하의 사친(私親)께서 모욕을 받으면 이는 전하께서 그 모욕을 받는 것이고, 전하께서 모욕을 받으면 무릇 전하의 신하된 자라도 다른 사람이 이를 죽일 수 있는데, 사죄(私罪)라고 핑계대며 반드시 곡호(曲護)하려고 하는 자는 전하의 신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적(賊)이 있은 이래로 모자(母子)의 천륜(天倫)이 무너지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사라졌습니다. 이 적이 복법(伏法)되어 선비의 기풍이 저상(沮喪)되었다면 이 적이 군부를 업신여기고 모욕한 날에는 과연 선비의 기풍이 흥기(興起)되었다는 것입니까? 신은 적(賊)을 가리켜 선비라 하는 자 또한 하나의 적(賊)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죄는 다만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데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먼 변방으로 내쫓는 법을 시행하여 천륜을 멸절하고 웃사람을 거스리는 의논이 다시는 성명(聖明)의 세상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또 삼사(三司)의 관원(官員)들이 행공(行公)하지 아니함이 많아 토역(討逆)에 대한 계사(啓辭)를 오랫동안 합유(合츖)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배척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청주(淸州) 사람 허벽(許璧)이 또 사주(使嗾)를 받아 상소하여 신사년의 옥사(獄事)를 신설(伸雪)할 것을 청하였는데, 도승지(都承旨) 김시환(金始煥)이 이를 물리치고 아뢰기를,
“허벽이 상소하여 신사년의 일을 말하며 선조(先朝)를 간범(干犯)하였는데,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 전하께서 지난날 당하신 바는 진실로 망극한 변고(變故)이었는데 전하께서 오늘날 대처하시는 도리에 있어서 결단코 털끝만한 의논이라도 이 일에 미치는 것을 용납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신하가 된 자 또한 어떻게 차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제기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 허벽이란 자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귀역(鬼헾)의 무리들이 행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긴 채 은밀히 사주하여 몰래 지시하고 탐시(探試)하여 엿보면서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을 의논하여 우리 전하의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고치지 않아야 하는 효성을 고치려고 하였으니, 그 정상(情狀)을 논하건대 너무나 절통(絶痛)합니다. 또 이덕배(李德培) 등이 소를 올려 또한 신사년의 일을 들추어내려고 하였는데, 의도(意圖)는 현혹시키는 데 있었으니 용의(用意)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장소(章疏)는 모두 마땅히 물리쳐야 할 것이나, 신이 외람되게 출납(出納)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깊이 느낀 나머지 우러러 계품(啓?)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18)경종 006 02/02/27(임오)
조태구(趙泰耉)가 인입(引入)하여 오랫동안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출사를 권면하지 아니하였고, 김시경(金始慶)의 상소가 들어갔는데도 또한 아무런 견책(譴責)이 없었다. 그러나 남인(南人)들이 희기(希쨤)하여,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정언(正言) 신필회(申弼誨)를 사주(使嗾)하여 대각(臺閣)에 나아가 사흉(四凶)을 아뢰어 논핵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합계(合啓)가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지금 요진(要津)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거개가 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대하여 관망(觀望)하다가 도피하려는 자들로서 오로지 고식책(姑息策)을 보신(保身)하는 묘책(妙策)으로 생각하고, 군부(君父)의 안위(安危)와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에 이르러서는 심상한 일로 여겨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당(玉堂)에서는 차자를 올려 힘써 청하거나 연명(聯名)으로 일제히 호소하지 않았고, 양사(兩司)에서도 대부분 한 번도 계사(啓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쓸데없이 세월만 보내며 계청(啓請)을 궐(闕)한채 거괴(巨魁)를 용납·비호하고 있습니다. 권업(權슑)은 일찍이 영번(嶺藩)으로 있을 때 보호하자는 유소(儒疏)를 저지(沮止)하며 공공연하게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고, 서명균(徐命均)은 어머니를 무시(無視)하는 요적(妖賊)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며 성궁(聖躬)을 몹시 비난하였으니, 모두 무장(無將)·부도(不道)한 죄에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들이 흉염(凶焰)에 겁을 먹고, 그 지친(至親)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지신사(知申事)의 청망(淸望)과 기성(騎省)의 화련(華聯)을 제멋대로 검의(檢擬)하였습니다. 청컨대 삼사(三司)의 계사에 참여하지 아니한 여러 신하들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권업(權슑)·서명균(徐命均)은 아주 먼 변방으로 멀리 유배(流配)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는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9)경종 012 03/05/04(임오)
교리(校理) 송진명(宋眞明)이 소(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날 흉당(凶黨)이 국권(國權)을 천단했을 때 수차에 걸쳐 홍문록(弘文錄)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언제나 서너 사람이 권점(圈點)을 쳐서 구차스럽게 끝내곤 하였으니, 심지어는 도록(盜錄)하였다는 설(說)까지 길거리에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지금 신록(新錄) 때를 당하였으니, 청컨대 일찍이 거친 자를 모으되 산질(散秩)된 자를 견복(牽復)하기도 하고 외읍(外邑)에 있는 자를 소환하기도 하여, 충분히 상의하고 자세히 살펴서 그 일을 중하게 다루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지난번 즉위하시던 초기에는 바람처럼 신속하고 우뢰처럼 위엄이 있으시어 정채(精彩)가 대단히 새로 왔으므로, 아침나절이 다 가기도 전에 위험을 안정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처음과 같지 않게 되어, 연대(筵對) 때 침묵이 너무 지나치고 장주(章奏)하는 사이에 비답을 번번이 아끼십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따르실지 않으실지 옳게 여기실지 않으실 지에 대해 모두 분명하게 개시(開示)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또 삼주(三晝)의 법강(法講)도 일체 폐하셨고 하루건너 하는 소대(召對)도 거의 예과(例課)와 같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때때로 법강을 열어 성학(聖學)이 날로 진보되고 치화(治化)가 날로 새로와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하원(李夏源)은 문아(文雅)하고 염정(恬精)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번(嶺蕃)은 본래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고, 또 거듭 흉년이 든 때를 당하였으니, 오활한 선비로는 결코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빨리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신유익(愼惟益)을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차스럽게 의망(擬望)한 잘못을 논하고, 이어서 심탱(沈○)·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의 망중(望中)에서 빼내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고 명백하게 지시한 것은 없었다.
20)경종 012 03/05/18(병신)
심준(沈埈)을 지평(持平)으로,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진유(李眞儒)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21)경종 012 03/05/21(기해)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승지 심중량(沈仲良)은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려 휴가를 받은 것이 두 차례에 이르렀는데, 쓸데없는 말로 번거롭게 품의하여 패초(牌招)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실로 이전에 없던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종중 경책(從重警責)함이 마땅합니다. 김시경(金始慶)은 심지어 벼슬을 삭탈하자고 청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말을 들었는데, 한번 형식적으로 사직하고는 돌아서서 즉시 출사(出仕)하였으니, 염우(廉隅)가 도무지 없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퇴폐한 풍속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파직을 청하는 논의는 너무 지나치다고 비답하였다.
22)경종 013 03/09/14(경인)
이진검(李眞儉)·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광도(李廣道)를 장령(掌令)으로, 심준(沈埈)을 필선(弼善)으로, 유봉휘(柳鳳輝)를 좌빈객(左賓客)으로, 김시환(金始煥)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승원(李承源)을 집의(執義)로, 이광세(李匡世)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23)경종 013 03/10/07(계축)
김시경(金始慶)·이진망(李眞望)을 승지(承旨)로, 이승원(李承源)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24)경종 013 03/11/21(정유)
김동필(金東弼)·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유필원(柳弼垣)을 부응교(副應敎)로, 윤성시(尹聖時)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유수(柳綏)를 필선(弼善)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25)경종 014 04/03/08(임오)
유명응(兪命凝)·김시경(金始慶)을 승지로, 박태항(朴泰恒)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26)경종 014 04/04/03(병오)
유봉휘(柳鳳輝)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박필기(朴弼夔)를 교리(校理)로, 박문수(朴文秀)를 설서(說書)로, 여필용(呂必容)·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27)경종 014 04/04/05(무인)
김시경(金始慶)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진망(李眞望)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진희(趙鎭禧)를 교리(校理)로, 홍정상(洪廷相)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8)경종 014 04/04/12(을유)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29)경종 014 04/05/18(경신)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일경(金一鏡)의 붕당이 매번 역적 토벌을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워 오다가 역옥(逆獄)이 마무리되자 신치운(申致雲)을 사주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가지고 복합(伏閤)의 논의를 주도하게 한 것인데, 복합한 지 날이 오래되어도 끝내 준청(準請)이 어렵게 되자 윤유(尹游)·이진수(李眞洙) 등은 그네들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죄 사직(待罪辭職)하고 물러나 다시 애써 논쟁하지 않았고, 대신들 역시 정청(庭請)을 즐겨 하지 않았다. 이러자 김일경의 일당이 본래 이광좌(李光佐)를 꺼려 오던 터에 드디어 남인(南人)과 합모(合謀)하여 이광좌가 역적을 토죄하는데 늦추고 있다는 이유로 배척하여 버리고 또 구명규(具命奎)를 시켜 다시 복합(伏閤)의 논의를 발동케 한 바, 이광좌가 병을 핑계로 인입(引入)하니, 이석조(李錫祚)가 드디어 소를 올려 극력 이광좌를 비난하고 나섰다.
한편 교리 박필기(朴弼夔)가 본시 김일경의 일당으로서 당직(當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석조의 소를 보고 놀란 나머지 상소하여 이광좌가 실제로 병을 앓고 있음을 진달함과 동시에 이석조의 옳지 못함을 지척하였다. 이석조가 죄를 받게 되자, 김일경의 일당은 박필기를 시켜서 상소하여 구원하도록 했는데, ‘이석조는 충의심이 북받쳐서 과격하였던 것이므로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해야 할 바이며, 의당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일을 중지하여 유생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고 말하였고, 이석조의 일당인 승지 정사효(鄭思孝)·참의 김시경(金始慶)도 서로 잇따라 상소하여 ‘이석조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명을 정침하라.’고 말하였다. 이러자 장령 이중관(李重觀)은 ‘정사효와 김시경이 협잡심을 가지고 박필기를 옹호하려고 앞뒤가 다르게 변환(變幻)하고 있다.’고 아뢰어 탄핵하고, 이들을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응교 유필원(柳弼垣)이 말하기를, “상소한 유생의 죄는 정거(停擧)는 가하나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박필기가 당초 유생의 소를 내려보내려 한 것은 생각함이 좋지 못하였으나, 무릇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라는 특명이 내려짐에 미쳐서는 혹시나 처분이 과중할까 두려워서 계속하여 다시 소를 진달한 것입니다. 정사효는 승지의 직임에 있는지라 소회(所懷)가 있어 상소한 것은 그 죄가 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자, 이중관이 인피(引避)하였는데, 정언 황정(黃晸)·김유(金○)가 이중관의 출사(出仕)를 청하였다. 이에 헌납 서종하(徐宗厦)가 다시 상소하여 이석조를 구원하면서 이중관 및 사간원의 부당한 처치를 지척하여, 이중관·황정·김유가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장령 이정필(李廷弼)은 처음에 이중관과 함께 박필기를 탄핵하는 논계에 같이 참여하였다가 유필원과 서종하의 지척을 받자 김일경의 일당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인피할 즈음에 느닷없이 미뤄 소상히 알지 못하였다며 좌절된 언사로 치사(致謝)하여 마지 않으니, 식사는 이를 더욱 해연(駭然)해 하였다. 이로부터 김일경의 일당이 이중관을 깊이 미워하였는데, 나중에 필선(弼善) 및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서도 명론(名論)이 본래 가벼웠다는 이유로 유필원의 논박을 받고 체직되어 다시는 대각(臺閣)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30)경종 014 04/05/21(계해)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31)경종 015 04/07/11(임자)
김일경(金一鏡)을 판윤(判尹)으로, 유수(柳綏)를 사간(司諫)으로,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진급(李眞伋)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32)영조 006 01/06/12(무인)
“영의정(領議政) 정호(鄭澔)는 나이는 비록 많지마는 정신과 식견은 아직도 왕성하니, 그를 의정부(議政府)에 나오게 하여 치도(治道)를 논하게 함으로써 품은 뜻을 정사에 반영하게 한다면 틀림없이 대천(大川)이나 교악(喬岳)같은 큰 효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봄 강물에 일엽 편주로 호연(浩然)히 멀리 떠나가 산야(山野)에 은거(隱居)하면서 조정으로 나아올 기약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더욱 간곡한 정성을 다하여 기필코 멀리 물러가 있으려는 마음을 되돌리도록 하소서, 찬선(贊善) 김간(金幹)은 일생 동안 실천하여 온 공부가 정숙(精熟)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재(李縡)는 학문을 통하여 도(道)를 깨달아 사학(詞學)이 우수한데, 혹 시골로 돌아가 살기를 결심하고 혹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기를 빨리하여 은혜로운 전지(傳旨)가 내렸으나 한번도 달려오지 않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지성으로 간곡히 부른다면 어찌 감격하여 마음을 바꿀 이치가 없겠습니까?” 하고, 또 논핵하기를, “양구 현감(楊口縣監) 양우전(梁禹甸)은 불효(不孝)하고 부자(不慈)하여 정실(正室)의 아내를 소박해 버렸으며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욕심이 많고 비루하였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영월 부사(寧越府使) 김시경(金始慶)은 아내의 상(喪)을 당하여 백성의 돈을 함부로 징수하였으며 금년 봄 구황(救荒)의 정사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되어 산골 마을들이 거의 텅 비어버렸으며, 평해 군수(平海郡守) 유동무(柳東茂)는 행정(行政)을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뇌물이 기녀(妓女)의 입을 통하여 들어오므로 바닷가 마을의 백성들이 혹독한 침탈을 당하고 있으니, 이들을 모두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영상(領相)과 두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절실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세 고을 수령의 일도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33)영조 013 03/10/20(임인)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윤연(尹○)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34)영조 015 04/02/03(갑신)
정제두(鄭齊斗)를 우참찬(右參贊)으로, 박사수(朴師洙)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문명(趙文命)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시경(金始慶)을 좌승지(左承旨)로, 김집(金潗)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현명(趙顯命)을 교리(校理)로, 황정(黃晸)을 집의(執義)로, 임수적(任守迪)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35)영조 030 07/12/22(신해)
김시경(金始慶)을 승지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삼았다.
36)영조 037 10/02/18(갑자)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 임수간任守幹)을 전송하는 승지공 金始慶의 시 (2006. 2. 17. 영환(문) 제공)
제공자 주 : 숙종 37년 (1711년 )임수간(任守幹)1665(현종 6)∼1721(경종 1)은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때의 기록이 동사일기이다. 1711년 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0개월간의 기록을 건(乾)ㆍ곤(坤)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이 책은 음률,ㆍ상수(象數), 병법, 지리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다. 또 체제도 일기에 소제목을 붙여 일목요연하며, 일기와 중요 기록을 구분하고 일부 기록은 원래 지은 자를 명기하여 혼란이 없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이때 여러문인들이 전별하는 글인 신장(貝+盡 章) 을 지었는데 여기에 김시경 선조님의 글이 있어 소개함.
출전 : <돈와유집> 속의 東사日記 (*사-뗏목 사:木+差). 신장(貝+盡 章) [승지 김시경 선여(金始慶善餘)]. 돈와부군(遯窩府君)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의 신장. 신묘년(1711, 숙종 37)
전권사신은 재주와 꾀를 갖춰야 하는 것 / 殊方專對仗才猷
묘하게도 1)호당의 첫째 인물을 뽑았네 / 妙選湖堂第一流
사절이 새벽에 임금께 하직하니 / 使節曉辭天北極
문창성이 밤에 일본 땅에 비치네 / 文星夜照日東陬
뱃머리는 상제 딸의 베틀 괴던 돌을 향하고 / 사頭帝女支機石 (*사-뗏목 사:木+差)
돛대 밖은 진 나라 동자들의 약 캐던 섬일세 / 帆外童男採藥洲
산과 바다 천만 경치를 다 거둬 와서 / 領略海山千萬景
나를 위해 그 이야기 들려 주게나 / 歸來爲我說奇遊
왕사에 분주하여 저녁에 2)얼음을 마시는데 / 王事驅馳夕飮氷
타향에서의 이별의 한은 이루 다 견디기 어려우리 / 異鄕離恨浩難勝
온 조정의 덕망이 무거우니 시가 삼백 편이고 / 當朝望重詩三百
나라에 바친 몸이 가벼우니 바다가 만층일세 / 許國身輕海萬層
물결은 돛대를 보내 대마도를 지나는데 / 波送一帆經對馬
바람은 유월을 장식해 건붕에 대이도다 / 風摶六月진騫鵬 (*진-쫒을 진. 走+구슬 옥 없는 珍)
이번의 그 행차는 평생에 으뜸이라 / 奇遊最是平生冠
쾌히 부상에 뜨는 새벽해를 보리 / 快覩扶桑曉日昇
주석 :
1)호당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본서의 저자인 임수간(任守幹)이 일찍이 여기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사람이므로 한 말.
2)얼음을 마시는데 : 음빙(飮氷)은 ① 얼음을 먹음. 마음이 불안 초조함의 비유. ② 관리가 나라를 위하여 애태움. ③ 곤궁하면서도 깨끗한 절조를 지킴.
*임수간(任守幹) 소개
1665(현종 6)∼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용여(用汝), 호는 돈와(遯窩). 우참찬 상원(相元)의 아들이다.
1690년(숙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곧 설서가 되었고, 정언을 거쳐 1699년 이만성(李晩成) 등 8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뒤 수찬·교리·정언·부수찬 등을 번갈아 역임하다가 1703년 당쟁의 폐단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시 향리에 은거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지평이 되었고, 1707년 사직으로 문신중시(文臣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이조좌랑 겸 문학·교리·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170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다음해에 통신부사가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계에 속아 투옥, 파직되었다.
1720년에 재기용되어 승지에 올랐다. 그는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음률(音律)·상수(象數)·병법(兵法)·지리 등에도 해박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돈와유집》이 있다.
11) <동방급제자> (2006. 4. 7. 항용(제) 제공)
숙종8년(1682) 춘당대시때는 45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김구(金構) 1649 기축 사긍(士肯) 관복(觀復) 청풍(淸風) 甲科1
김덕기(金德基) 1654 갑오 재이(載而) 선산(善山) 丙科5
김령(金坽) 1647 정해 재원(載元) 삼척(三陟) 丙科8
김만길(金萬吉) 1645 을유 자적(子迪) 광주(光州) 乙科1
김시경(金始慶) 1659 기해 선여(善餘) 안동(安東) 乙科5
김창협(金昌協) 1651 신묘 중화(仲和) 농암(農岩) 안동(安東) 甲科1
김태창(金兌昌) 1632 임신 열지(說之) 경주(慶州) 丙科7
김홍복(金洪福) 1649 기축 자회(子懷) 동원(東園) 김해(金海) 丙科6
김횡(金澋) 1636 병자 중심(仲深) 연안(延安) 甲科3
박규세(朴奎世) 1647 정해 사장(士章) 울산(蔚山) 丙科17
박두세(朴斗世) 1650 경인 사앙(士仰) 울산(蔚山) 乙科4
박익무(朴益茂) 1638 무인 경여(慶餘) 밀양(密陽) 丙科9
성관(成瓘) 1643 계미 옥여(玉汝) 창녕(昌寧) 乙科3
신후(申垕) 1643 계미 중보(重甫) 평산(平山) 丙科23
심권(沈權) 1643 계미 성가(聖可) 청송(靑松) 丙科14
연최적(延最績) 1663 계묘 무경(茂卿) 곡산(谷山) 丙科4
유명웅(兪命雄) 1653 계사 중영(仲英) 기계(杞溪) 丙科4
유명홍(兪命弘) 1656 병신 계의(季毅) 죽리(竹里) 기계(杞溪) 丙科6
유봉징(柳鳳徵) 1649 기축 계숙(季叔) 문화(文化) 丙科7
유수함(柳壽咸) 1663 계묘 형로(亨老) 문화(文化) 丙科16
윤빈(尹彬) 1630 경오 자문(子文) 남원(南原) 乙科2
윤성교(尹誠敎) 1635 을해 행일(行一) 파평(坡平) 丙科13
윤세희(尹世喜) 1642 임오 공도(公度) 해평(海平) 丙科1
이덕성(李德成) 1655 을미 득보(得甫) 반곡(盤谷) 전주(全州) 丙科1
이두악(李斗岳) 1644 갑신 계첨(季瞻) 용인(龍仁) 丙科12
이세기(李世機) 1653 계사 자장(子張) 여흥(驪興) 丙科11
이익수(李益壽) 1653 계사 구이(久而) 전주(全州) 丙科2
이정(李禎) 1645 을유 성서(聖瑞) 경주(慶州) 丙科19
이정겸(李廷謙) 1648 무자 경익(景益) 전의(全義) 丙科24
이제민(李濟民) 1645 을유 홍지(弘之) 연안(延安) 丙科20
이준(李浚) 1644 갑신 이원(而源) 연안(延安) 丙科5
이중장(李重章) 1659 기해 문중(文仲) 전주(全州) 丙科3
이진휴(李震休) 1657 정유 백기(伯起) 여흥(驪興) 丙科18
이해준(李海準) 1653 계사 계도(季度) 벽진(碧珍) 乙科7
이현조(李玄祚) 1654 갑오 계상(啓商) 전주(全州) 乙科6
이희창(李喜昌) 1644 갑신 재흥(再興) 전주(全州) 丙科2
임원성(任元聖) 1636 병자 여해(汝諧) 풍산(豊山) 丙科22
정제태(鄭齊泰) 1652 임진 사첨(士瞻) 연일(延日) 丙科3
조무훈(曹武勛) 1661 신축 도경(道卿) 가흥(嘉興) 乙科2
조석(曹錫) 1634 갑술 규보(圭甫) 가흥(嘉興) 乙科1
조의징(趙儀徵) 1649 기축 상보(祥甫) 한양(漢陽) 甲科2
주항도(朱恒道) 1650 경인 여구(汝久) 능성(綾城) 丙科25
채정린(蔡廷麟) 1642 임오 일서(一瑞) 미상(未詳) 丙科21
홍수주(洪受疇) 1642 임오 구언(九言) 호은(壺隱) 남양(南陽) 丙科10
홍수헌(洪受瀗) 1640 경진 군택(君澤) 담포(淡圃) 남양(南陽) 丙科15
12) 신 경매 간찰 소개 (2007. 1. 27. 태영(군) 제공)
김시경(金始慶)선조님 간찰

1) 크기 : (가로 * 세로 ) 43 * 26 센티
2)상태 : 양호
3)경매처의 필자 소개 내용 :김시경(金始慶:1659~?)/肅宗 8년 (임술, 1682년), 增廣試 乙科5
* 인적사항 : 생년(生年) 기해1659(己亥1659) 자(字) 선여(善餘)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가족사항 : 부(父) 김두서(金斗瑞) 조부(祖父) 김영희(金永熙) 증조부(曾祖父) 김구(金榘) 외조부(外祖父) 봉산군 이형신(蓬山君 李炯信) 처부(妻父) 이두광(李斗光)
* 이력 및 기타사항 : 소과(小科) 1682(임술) 생원시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승지(承旨)
*경매처 : 금요고서방 시작가 20만원
(9) 신장(贐章) [승지 김시경 선여(金始慶 善餘)] ▣ (2004. 6. 9. 윤만(문) 제공)
전권사신은 재주와 꾀를 갖춰야 하는 것 / 殊方專對仗才猷
묘하게도 호당주(주1)의 첫째 인물 뽑았네 / 妙選湖堂第一流
사절이 새벽에 임금께 하직하니 / 使節曉辭天北極
문창성이 밤에 일본 땅에 비치네 / 文星夜照日東陬
뱃머리는 상제 딸의 베틀 괴던 돌을 향하고 / 槎頭帝女支機石
돛대 밖은 진 나라 동자들의 약 캐던 섬일세 / 帆外童男採藥洲
산과 바다 천만 경치를 다 거둬 와서 / 領略海山千萬景
나를 위해 그 이야기 들려 주게나 / 歸來爲我說奇遊
왕사에 분주하여 저녁에 얼음을 마시는데(주2) / 王事驅馳夕飮氷
타향에 이별의 한 이루 다 견디기 어려우리 / 異鄕離恨浩難勝
온 조정의 덕망이 무거우니 시가 삼백 편이고 / 當朝望重詩三百
나라에 바친 몸이 가벼우니 바다가 만층일세 / 許國身輕海萬層
물결은 돛대를 보내 대마도를 지나는데 / 波送一帆經對馬
바람은 유월을 장식해 건붕에 대이도다 / 風摶六月趁騫鵬
이번의 그 행차는 평생에 으뜸이라 / 奇遊最是平生冠
쾌히 부상에 뜨는 새벽 해를 보리 / 快覩扶桑曉日昇
承旨金始慶善餘。
주1) 호당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본서의 저자인 임수간(任守幹)이 일찍이 여기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사람이므로 한 말.
주2) 얼음을 마시는데 : 음빙(飮氷)은 ① 얼음을 먹음. 마음이 불안 초조함의 비유. ② 관리가 나라를 위하여 애태움. ③ 곤궁하면서도 깨끗한 절조를 지킴.
《출전 : 동사일기 곤(東槎日記坤), 돈와부군(遯窩府君)이 일본에 사신갈 때의 신장(贐章) 신묘년(1711, 숙종 37) 》
*【동사일기 (東槎日記)】 소개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임수간(任守幹)이 1711년에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 11년 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0개월간의 기록을 건(乾)·곤(坤) 2권에 나누어 수록하였다. 건에는 전후통신사좌목(前後通信使座目)·신묘통신사좌목(辛卯通信使座目)·일기 등이, 곤에는 주로 견문록·해외기문·필담문·신정약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다른 사행기록보다 체재와 내용이 훌륭한데, 일기에 소제목을 붙여 일목요연하게 한 점과 일기와 중요기록을 구분한 점, 특히 일부 기록은 원래 지은자를 명기하여 혼란이 없도록 한 점에서 두드러진다. 내용에 있어서도 음률·상수(象數)·병법·지리 등 다양한 면이 돋보인다. 필사본. 2권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임수간 (責守幹 1665∼1721(현종 6∼경종 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용예(用譽), 호는 돈와. 본관은 풍천(豊川). 1690년(숙종 16) 생원시를 거쳐 94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정언·교리·부수찬을 지냈다. 17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수찬을 지냈으며, 1709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그 뒤 일본 통신부사·우부승지를 거쳐 21년(경종 1) 우승지가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음률(音律)·상수(象數)·병법(兵法)·지리(地理)에 조예가 깊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돈와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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