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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요 선조님 소개

       

  1) 파조 도평의공(都評議公) 김구정(金九鼎)

 

<모선재 - 행촌 재실>

 

 

<묘소>(안사연 2002여름캠프시 참배)

 

* 도평의공 묘갈명 (都評議公 墓碣銘)

 

고려 봉거 직장 도평의 지인 부군 묘갈명(高麗 奉擧 直長 都評議 知印 府君 墓碣銘)

 

 고려조의 봉거직장 도평의지인 휘 구정 부군은 유아(惟我)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이시다. 삼가 생각하니 우리 김씨의 원조(遠祖)는 세대를 실전(失傳)해서 고거(考據)가 확실치 않았는데 경순왕의 손자이신 공부시랑 평장사 휘 숙승공께서 비로소 안동(安東)의 관(貫)을 받았으나 누대에 걸쳐 자호(字號) 배위(配位)와 세덕문물(世德文物)이 전하지 못하다가 한림학사지제고를 지내시고 선서(善書)로 명동일세(名動日世)한 휘 효인공이 계시니 곧 부군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방경이니 정동 도원수 추충정난공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시충렬로서 금고(今古)에 대현(大顯)하고 물계서원에 주향(主享)으로 뫼시니 우리의 중시조이며 증조 휘 선은 전법판서 상장군이다. 조 휘 승택은 도첨의 정승 시(諡) 양간이요 고(考)의 휘는 면으로 안렴사를 역임하고 치가와 수분에 힘썼다.

 공의 생년은 전하지 않고 초휘(初諱)는 충(忠)이였는데 일찍이 도평의지인을 지내시고 만년에 조선구장(祖先舊庄)인 회곡의 상락대에서 불식락강(不息洛江)의 자연을 벗삼아 근서무농(勤書務農)과 고가전범(古家典範)을 밝히면서 가산려수(佳山麗水)에 묻혀 송로자적(送老自適)하니 물외(物外) 한정(閑情)의 천품(天品)을 족히 추량(推量)할 수 있다. 오호라 1389년 홍무기사(洪武己巳) 이월 이십사일에 몰(沒)하시고 행현(杏峴) 중강을좌(中岡乙坐)에 안장(安葬)하였으며 배는 아산장씨로 전서 성미의 따님인데 대대(大垈) 유좌에 뫼셨다. 외아들 휘 자첨은 감목관으로 입향사촌하였고 그 아드님 휘 효온은 문과사직이며 휘 효항은 관사정인데 청송 화현으로 정거했다. 효온의 아들 휘 극해는 문과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지냈고 청백리로 알려졌으며 아드님 휘 광수는 호 송은(松隱)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에서 공부하던중 연산 사화를 예견하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후학을 지도했으며 장대서원에 제향되었다. 들째 휘 광복은 충순위인데 김해 덕산리에 전손세거하고 광수의 아들 휘 당은 기자전참봉이요 아드님 휘 세우는 통례원 인의이다.

 인의공께서 3형제를 두시니 휘 사원 사형 사정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晩翠堂)인데 퇴도고제(退陶高弟)로서 임란에 창의 정제장으로 활약하고 후산사(後山祠)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의 호는 독수헌으로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 수학하여 문과 직장이며 아들 간과 같이 진보로 이거하였다. 사정은 호 후송재(後松齋)라 하며 사숙계문(私淑溪門)하고 곽망우당 의진에서 중형사형과 같이 활동하였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하였다.

 사원의 아들 휘 준은 직장이고 사형의 아들 휘 간은 호 송암이요 사정의 아들 휘 회는 호 경암으로 문과 정랑이요 휘 형은 호 삼우당이다. 준의 아들 휘 상원은 호 남애로 한려문에 수학이요 위 상기는 호 사오 장사랑이며 휘 상각은 호 자여당(自餘堂)이고 휘 상비는 호 금취헌이며 휘 상인은 호 양진당(養眞堂)으로 충렬공(忠烈公)의 묘전설치(墓田設置)를 주도(主導)하였다. 간의 아들은 휘 상위 상찬이요 외의 아들 위 상유는 호 옥계로 장사랑이며 형의 아들은 휘 상관이다.

 그후 10여대에 걸쳐 문무과한과 유망을 갖춘 자손이 수십여이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선세의 장갈(狀碣)이 미비함으로 이제 보첩과 세전구비(世傳口碑)를 모아 서(敍)하고 삼가 명(銘)하노니 낙수변(洛水邊)의 상락대(上洛臺)는 승국고벌(勝國古閥) 터전이요 가산려수(佳山麗水) 자연경(自然景)은 세심정혼(洗心淨魂) 조신(操身)이라 충렬고리(忠烈古里) 청아의범(淸雅儀範) 문소지북(聞韶之北) 봉형(封瑩)이요 행현중강(杏峴中岡) 정민지탁(貞珉之琢) 이 산천(山川)과 함께하리

 

1992년 임신 소춘절

출처 : '내 고향 사촌' (지은이 : 김창회. 펴낸이 : 김억 2002년 6월)

 

 


 2) 사촌 입향조 감목공 김자첨(金子瞻)

 

선무랑 행 함길도 감목관 부군 묘갈명 (宣務郞 行 咸吉道 監牧官 府君 墓碣f銘)   (충렬공 28세손, 도평의공 24세손 容慶 제공)

 

 함길도 감목관 부군의 휘는 자첨이요, 성은 김씨로서 관향은 안동이다

고(考)의 휘는 구정으로 봉거직장 도평의 지인이니 우리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요 조의 휘는 면(冕)으로 안렴사이며 증조 휘 승택(承澤)은 도첨의정승 시(諡) 양간이요 고조의 휘 선(瑄=심방변)은 전법판서 상장군이다 개국공 시 충렬이며 훈업으로 대현(大顯)금고(今古)하니 곧 중시조(中始祖)이고 상계(上系)는 신라종성(新羅宗性)이다.

 

  공은 1369年 홍무 기유에 태어나시니 천성이 호매하고 고지원식의 탁견이 있었다. 상락 회곡의 세거사족이며 선대유훈으로 광화를 누렸으나 조선조가 개국을 함에 세류에 순응하고 유신(維新)의 뜻을 살려 고가(古家) 세업(世業)을 버리고 가권(家眷)과 함께 사촌에 입향하여 진황(榛荒)을 정리하고 자손의 터전을 닦은 후에 원대한 경륜으로 서림(西林)을 조성하고 전손의 기지를 잡았다. 조정에서는 승국훈신 후손의 예우로 감목관에 임용 하였으나 사양한 후 공명을 탈략하고 전원에서 근검으로 백세를 경영하다가 1454年 단종 2년 86세로 사세(辭世)하시고 행현 선묘하에 봉안하였으며 배는 시진 송씨로 차동 묘좌에 안장했다.

 

  자 효온은 문과 사직(司直)이고 효항은 사정(司正)이며, 여(女)는 김극경(金克敬) 유야거(柳野居) 권처신(權處信)이고 권식(權軾)은 생원이다. 효온의 자 극해는 문과 북평사와 지례현감이요 극해의자 광수는 진사로서 장대서원에 제향하였으며 세칭 송은선생이라 하였고, 광복은 관충순위다. 광수의 자 당은 기자전 참봉이고 자 세우는 통례원 인의요 세우의 자 사원은 퇴도문인으로 호는 만취당이며 임란에 창의하고 부호군이요 사형은 호 독수헌인데 문과 직장이며 사정은 호 후송재로 중형인 사형과 같이 곽망우당 의진에서 창의하고 지평에 추증되엇다. 사원의 자 준은 관직장이요 사형의 자 간은 호 송암 통덕랑이며 사정의 자 회는 호 경암인데 문과정랑이고 형(泂)은 호 삼우당으로 통덕랑이다.

 준의 자 상원은 호 남애 수(壽) 호군(護軍)이요 상기의 호는 사오 장사랑이며 상각은 호 자여당(自餘堂)이고 상비의 호는 금취헌이며 상린의 호는 양진당(養眞堂)으로 증사복사정이다. 간의 자는 상위 상찬이며 회의 자 상유는 호 옥계로 장사랑이며 형의 자 상관은 통덕랑이다.

 상원의 자 요좌는 증사복사정이고 다음은 성좌(成佐)이며 상기의 자는 괸좌 몽좌요 상각의 자 순좌는 호 산계며 석좌는 호 운암 통덕랑이고 상비의 자는 영좌 홍좌요 상인의 자 양좌는 호 사주로 생원에 증 호조참의이고 성좌(聖佐)는 호 송리(松里)로 문과부사이며 현좌는 통덕랑이다. 상유의 자 은좌는 호 소북이고 경좌는 호 기은이며 상권의 자는 희좌 신좌 명좌이다. 그 후의 번연한 자손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이제 보첩과 상전설화를 추려서 서하고 명하노니

 

영가부서 회곡산수 위국충훈 세장이요 (永嘉府西 檜谷山水 衛國忠勳 世庄이요)

영지명향 사진리는 탈략공명 기지로다 (嶺知名鄕 沙眞里는 脫略功名 基地로다)

염담과욕 맑은정신 구십향수 누렸으며 (심방변+舌淡寡慾 맑은精神 九十享壽 누렸으며)

선조지하 천년유택 일월같이 밝으소서 (先兆之下 千年幽宅 日月같이 빛나소서)

- 1992년(年) 임신 소춘절-

 

 


 3)사직공 효온(孝溫) (1412~? )

 

자첨의 아들이며 1434년 세종 갑인에 생원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직의 벼슬을 하고 향리에 은거 했다.

문과 동방인 박팽년, 최항과 친교가 있었다.

 

  


 4) 북평사 극해(克諧)

극해(克諧) (1440~ ? )

효온의 아들이며 1495년 세조 기묘에 생원이 되고

문과에 올라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역임했다.

청백리로서 세상에 알려 졌다

 

 


 5)훈련참군 영진(永진)

 

 


 6)송은공(松隱公) 광수(光粹)  (1468~1563)

극해의 아들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1501년 연산 신유에 진사가 되고 태학에서 연수중 연산정란을 예견하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남산록 소담 上에 영귀정을 짓고 시가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사후에 장대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송은집 과 경심잠이 세상에 전한다.

한편 임란에 출장입상으로 산하 재조의 위업을 남긴 류성룡은 외손이며 증손인 사원 사형, 사정도각각 창의 하여 국란에 유공하고 외증손 김치중은 의병장으로 순절 했다. 영귀정은 문화재 234호로 지정 되었다.

 

 <영귀정(詠歸亭)>

  <2002. 7. 안사연 탐방 당시>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34호

지정일자 : 1991. 3. 25.

소 유 자 : 안동김씨문중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산 13-1

위치좌표 : 북위 36° 25‘, 동경 128° 46“

 

영귀정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외할아버지인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자는 國華, 1468∼1563) 선생이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1500년경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미천(眉川) 강변의 하양층군 점곡층의 접촉변성대로 단단한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길이 50m, 높이 10m의 하식애 지형의 정상부언덕 위에 자리하여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북동향하여 자리 잡은 정자로의 출입은 뒤편으로 하게 하였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을 둘렀다.

 

지금의 정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허물어진 것을 1780년 경에 함인재(含忍齋) 김종록(金宗祿)의 주관으로 후손들이 중수․복원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앞에서 보아 앞면이 뒷면이 되고 뒷면이 앞면이 된다. 그리고 대문 안과 밖에 돌계단을 두어 이를 통하여 진입하도록 되어있다.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얹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하고 어칸은 2통 칸의 대청방으로 구성한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앞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달고 평난간을 얹었다. 오량가로 제형판대공을 얹었고 주상에 주두를 놓아 장혀, 도리, 보를 받치고 있다. 창방과 도리와 장혀사이에 소로를 두어 장식한 굴도리집으로 양봉이 보를 받고 있다.

 

 어칸대청과 툇마루는 우물마루형식이고 툇마루의 평난간의 난간판에는 완공을 하여 장식하였다. 창호는 아주 다양한데 방에는 여닫이 형식의 세살문 궁창, 널 세살문으로 되어있고 툇마루 측면과 대청방의 앞뒷면에는 골판문으로 되어 있다. 대청 내부의 좌우방 출입문은 모두 들장지문 형식의 격자살무늬문으로 되어있고 들쇠와 들어열개 고리가 어우러져있어 장관을 이룬다.

 

하천의 하상에는 다양한 크기의 자갈과 모래 그리고 양호한 식생이 조성되어 있는 등 양호한 습원상태가 형성되어 있다. 호안에도 제방을 자연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여 두어 점곡 제2교를 비롯한 물가에는 한 여름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전에도 이 곳은 선비들이 냇가에 은거 강학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5칸 팔작지붕, 툇마루를 설치하고 난간 판으로 장식한 전형적 정자건물이다

 

 <영귀정(詠歸亭-송은 김광수 선생 정자) 소개> (2002. 6. 12. 정중(도) 자료 조사. 제공)

 

종목별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234호.  명칭 :영귀정 (詠歸亭).  분류 :누(정).각.  수량: 1동. 지정일: 1991.03.25. 소재지: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 소유자:안동김씨문중. 관리자:안동김씨문중

 

영귀정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외할아버지인 송은 김광수(1468∼1563) 선생이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 정자는 미천강변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1) 사진 자료 소개

 

 (2) 장대서원(藏待書院--송은 김광수 선생 배향서원) 소개 (2002. 6. 12. 정중(도) 자료 조사. 제공)

■ 소재지 :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장대리 기슭에 경현사와 강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상리 출신인 오봉 신지제가 세운 곳이다.

조선조 광해군의 혼정으로 공조정 랑의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1610년에 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오봉 타 계 37년만인 1663년에 후진을 기르던 강당에 스승을 경모하는 뜻으로 경현사를 세워 향사를 하고 다음 해에 경정 이민성을 모셨다. 1702년에 경현사를 서원으로 추숭하고 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선생을 함께 모셨다. 1868년 8월에 조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며 1996년에 중건하였다.

 

<장대서원>

 

<경현사>(송은공을 모시고 있음)

 

<경현사 내의 송은공 위패>

 

  (3) <송은집> 사진 자료 소개 (2003. 5. 20. 태서(익) 제공)

 

  (4) <연려실기술>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1. 윤만(문) 제공)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의성(義城) 장대서원(藏待書院)임자년에 세웠다. 김광수(金光粹)-호는 송은(松隱), 진사다. ㆍ이민성(李民宬)-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 ㆍ신원록(申元祿)-호는 매당(梅堂)이다. ㆍ신지제(申之悌)-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讀花神國傳戱吟(독 화신국전희음)

                    -송은 김광수 선조님 詩-

-화신국전-

자손들아 한 이백년은 살아야 하고

남녀 둘은 낳아서 전해야 한다.

산수(山水)를 좋아하면 향기가 절로 나고

나무를 잘 가꾸면 식물(食物)도 난다.

말이 있다 해도 겨우 잔치집에 가고

소는 없으면 밭을 못 간다.

웃음소리가 언제나 떠들썩하면

사철 의복도 하늘이 준다.

의복을 깨끗이 입을 양이면

좋은 연석에도 가게 되리라.

원컨데 후생들아 화신국(花神國)에 태어나

언제나 가족들과 같이 즐겨라.

 

      <萬年松亭韻 >

 

一別俎徠問幾時 * 靑香細細來詩筆

일별조래문기시 * 청향세세래시필

栽封蒼翠萬年姿 * 殘子紛紛落硯池

재봉창취만년자 * 잔자분분낙연지

葉密幽禽啼自在 * 昻莊獨立村園裏

엽밀유금제자재 * 앙장독립촌원리

苔斑鱗甲老尤奇 * 不許尋常俗士知

태반린갑노우기 * 불허심상속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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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조래산(俎來山) 떠나온지 몇해런고

만년송(萬年松) 푸를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

 

맑은 향(香) 은은하게 시축(詩軸)에 풍겨오고

송화(松花)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진다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

늙은 줄기 이끼끼니 인갑(鱗甲)인양 아롱진다

 

은사(隱士)의 동산(東山)에 우뚝히 서 있으니

심상(尋常)한 저 속사(俗士)야 몰라준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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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苔一逕隔紅塵 * 車馬縱然嫌地僻

청태일경격홍진 * 차마종연혐지벽

幽興相尋日轉新 * 鶯花曾不厭家貧

유흥상심일전신 * 앵화증불염가빈

看山坐處凉生腋 * 自喜萬年松影裏

간산좌처량생액 * 자희만년송영리

高枕眠時翠滴巾 * 四時風景屬閑人

고침면시취적건 * 사시풍경속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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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그윽한 흥(興)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후미져 으슥한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드니 푸른 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속에 한가로운 이몸이라

아름다운 사시풍경(四時風景) 나홀로 기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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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송=지정보호수, 소재지: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만취당 앞 수령 600년 향나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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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래산:중국의 산, 조=한자가 없음(두인 변에 조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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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여헌 장현광 선생은 이 시를 전해 듣고

이 어른이 흉중이 여락해서 일점의 녹루도 없도다

하고

늘 만년송 안부를 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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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송은 선조 경심잠(병서 - 김억 제공)

 

松隱 先祖 警心箴(幷序)

士生斯世, 參於三才, 而壽夭窮達命也已矣, 心之操捨善惡, 在吾一身, 豈敢斯須忽哉, 夫人之異乎禽獸者, 有禮義也, 人無禮義, 可謂人乎, 唐虞邈矣, 淳風日釉, 而士習卑陋, 識者寧不寒心, 是故作箴十章, 以自警爲一家子孫之勸戒云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三才(天, 地, 人)의 하나로 참여하여 수(壽)하고 요(夭)하고 궁(窮)하고 달(達)함은 운명이라 하지만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내몸에 달렸는데 이를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할까 보냐. 대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인데 예의가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요. 요순시대의 아름다운 풍속은 사라져가고 선비의 옛정은 저속해지니 어찌 한심치 아니할가. 고(故)로 내가 경심장 열대목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고 子孫들의 경계를 권하노라.

 

一.  事     親

子於父母, 恩難報答, 宜得甘旨, 以供晨夕, 勿毁四體, 攪動親心, 一出鄕關, 感念益深, 我有偏母, 年逾七旬, 西山日迫, 愁淚滿巾, 烏鳥反哺, 人而恝然, 我斟我酒, 惟壽生前

- 어버이 섬기는 일

자식이 부모에게 은혜를 보답함이 어렵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조석으로 받들고 제 몸을 조심하여 부모의 근심을 없게하며 하루라도 외박을 하면 부모 걱정 절로 된다. 나에게는 편모가 계시는데 70이 넘은지라 돌아가실 날 멀지 않으니 근심 걱정 뿐이로다. 까마귀도 반포(反哺)의 효(孝)를 하는데 사람이 어찌 부모 걱정 아니할까. 어버이 살아 계실 적에 내손으로 정성껏 봉양하리라.

 

二.  輔     君

爲臣子者, 事君盡忠, 其曰不然, 乃禽乃蟲, 比干諫死, 萬古一臣, 李斯誤國, 千載罪人, 臣而反逆, 萬死誰惜, 宜罷重典, 夷滅三族, 君臣定分, 上天鑑臨, 我載我王, 益堅丹心

- 나라에 충성할 일

무릇 백성된 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되나니 그렇지 못하면 짐승과 같으리라. 비간(比干, 殷의 주왕시대의 충신)은 목숨을 바쳐 간하였기에 충신이 되었고 이사(李斯, 진시황의 악정을 도운 정치가. 참형됨)는 나라를 그르쳤기에 죄인이 되었다. 신하로서 나라에 반역함은 죽어서 마땅하며 나라의 엄한 법은 삼족을 멸하고 군신간의 정한 분수 하늘의 마련이라 내 나라 내 임금을 단성으로 도우리라.

 

三.  祭     廟

茫茫宇宙, 享祀爲重, 是用立廟, 小心欽奉, 公鄕大夫, 以及下士, 各遵祭禮, 宗子傳祀, 彼何人斯, 慢不致誠, 我有祠宇, 蕭灑三楹, 每歲明朝, 四仲吉日, 我盡我誠, 香火不輟

- 제사를 받드는 일

드넓은 이 세상에 봉제사가 중하니라. 그러므로 사당을 세워 성의껏 받드나니 삼공(三公)의 귀한 사람에서 하나의 서인에 이르기까지 제례에 따라 맏아들이 행사하니 그 어떤 사람인들 소홀히 할 것인가. 우리집 가묘도 삼간이 소연하다. 해마다 신년 명절과 사중길일(四仲吉日, 한식·단오·추석·동지)에는 성의를 다하여 제사를 받드리라.

 

四.  正     家

一家之內, 夫作妻綱, 唱而和之, 服事巾裳, 子女童僕, 尊卑有級, 何物庸老, 變亂家法, 綠衣黃裳, 余甚痛惜, 厥妃奚罪, 葵百飢泣涕, 冠屢倒罷, 尾大難制, 我正我家, 以戒後裔

- 집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대개 한 집안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나니 남편이 행하면 부인이 따르는 것은 男女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다.

수하와 비복들도 상하(上下)의 체통이 있는데 어찌 늙음을 핑계삼아 집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랴. 부인네의 과분한 허식은 내 심히 유감스럽고 여자의 잘못은 가난을 원망하는데서 연유한다. 예절이 바르지 못하면 어른이 집을 다스리지 못하니라. 내 몸과 내 집을 바르게 하여 후손을 경계하고자 하노라.

 

五.  友     愛

惟兄與弟, 本是同根, 及其長成, 婚嫁他門, 姜公一被, 荊樹再花, 一何奇美, 其心孔嘉, 凡今之人, 相視如客, 分寸之利, 背面反目, 鴻或離行, 言之可慙, 我友我弟, 和樂且湛

- 형제 남매 화목할 일

형제 남매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나 자라나고 배워서 성년이 되면 각기 다른 곳에 결혼을 한다. 강공(姜公, 후한 때 효우로 이름있는 사람)은 형제간에 같은 이불을 덮었고 진전의 집 형(荊)나무는 다시 꽃이 핀다(荊樹復生 兄弟 安樂의 眞田三兄弟 故事). 이것은 모두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로다. 지금 사람들은 서로서로 남같이 보고 작은 이익으로 각기 다투나니 기러기의 질서있는 행렬을 보아도 부끄러운 일이다. 내부터 우애하기를 힘써 화락하게 지내리라.

 

六.  謹     刑

傷不復續, 死不再生, 其可誤按, 以亂民情, 凡爾有司, 愼勿暴刻, 一失其中, 悔將何及, 蒼頭赤脚, 走卒庸童, 葵賴任觸怒, 鞭背生蟲, 是亦人也, 豈無顧憐, 我寬我意, 誓不濫焉

- 형벌을 삼가할 일

한번 상하면 붙이지 못하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나니 형벌의 판단이 잘못되면 백성은 혼란하다. 무릇 형벌을 맡은 사람은 포악하고 각박함을 삼가할 것이다. 한번 중용을 잃으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종과 하인과 어린이들이 제 잘못으로 매를 맞는다 해도 그도 또한 가엾은데 내 뜻 너그럽게 가져서 매사를 조심하고 범람함이 없도록 하리라.

 

七. 廢     讒

悴爾墾人, 利口暢暢, 伺顔善誘, 其甘如蜜, 大而天下, 小而家國, 聞一讒間, 萬端生隙, 一掩紅顔, 夫婦參商, 一此蜂衣, 父子豺狼, 巧舌至此, 寧不愧慄, 我堅我志, 去讒不納

- 남을 헐뜯지 말 일

귓속말로 남을 험담하면서도 좋은 말로 꼬이듯 하니 그 말이야 꿀같이 달지만 크게는 천하(天下)로부터 나라와 가정에 이르기까지 험언으로 서로 이간질하면 만가지 감정이 생긴다. 부부간에도 얼굴을 붉혀 의사가 상치되고 부자간도 이리같이 무서워지나니 이처럼 무서운 험언을 하고도 어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가. 내뜻 굳게 가져 험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八.  愼     色

蛾眉晧齒, 朱顔綠髮, 悅人心目, 爛人腸腋, 聖智明料, 不邇尤物, 彼何狂士, 而作淫荒, 狂甘雲雨, 褻瀆綱常, 行同犬豕, 慙穢日彰, 衆口悴諦, 醜不可言, 我修我身, 以訓子孫

- 여색을 삼가하는 일

나비 눈썹 흰 이빨의 아름다운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지만 남자의 정력만 소모하는 것이다. 밝은 판단으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음란하여서 달콤한 교정에 사로 잡혀 짐승같은 행동이 날로 더해지고 남의 비방을 받게 되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내 몸을 조심하고 자손을 훈계하리라.

 

九.  結     友

蓬生麻中, 不扶而直, 沙之在泥, 自然而黑, 芝蘭善友, 不能自負, 表裏異者, 吾友何取, 擇須勝巳, 交必端肅, 切磋磨琢, 相輔以德, 平生所思, 不過忠孝, 我礪我節, 前賢是效

- 친구를 잘 사귀는 일

따붓(蓬)이 삼밭에서 자라면 저절로 곧아지며 흰 모래가 진흙에 섞이면 자연히 검어진다. 지란(芝蘭)같은 좋은 벗은 배신함이 없고 표리(表裏)가 다른 사람 사귀지 말 것이다. 모름지기 훌륭한 벗은 단정하고 엄숙함이니 충심으로 서로 도와 갈고 닦아서 평생토록 힘쓸일 충효에 불과하다. 내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옛 성현을 본받으리라.

 

十.  安     貧

貴而近禍, 富多不仁, 何如雲壑, 以養天眞, 一瓢顔巷, 樂在其中, 三逕陶園, 白月淸風, 聖賢尙爾, 況乎小儒, 屋八九間, 可容殘軀, 田數十畝, 足慰飢腹, 我安我分, 不趨利欲

- 가난하면서도 분수를 지키는 일

귀하게 되면 화가 따르고 부자는 어질지 못함이 많다. 어찌하면 전원에 살면서 천성(天性)을 지킬까. 안연(顔淵, 孔子의 首弟子)은 누항에서 즐거워했고 도연명(陶淵明, 晋代의 逸士)은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성현들도 이렇게 살았거늘 하물며 시골 선비야 말해 무엇하랴. 집이 비록 일여덟간이라도 몸을 용납할만 하고 밭이 수십 마지기이니 먹을 것은 넉넉하다. 형편에 만족하고 분수를 지켜서 명리와 욕심에 급급하지 않으리라.

 ※ 본 해설은 편집자의 나름입니다. 정확하다고 볼 수 없으니 양지하시고 미진하고 곡해된 부분은 원문을 참조하여 해득하시기 바랍니다.

 

 (6)<국역 국조인물고>에서 -- 김광수(金光粹) (2004. 5. 12. 윤식(문) 제공)

묘표(墓表)

                                           유성룡(柳成龍) 지음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新羅)의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高麗)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은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김효온(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 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길가에 왜송(矮松)이 한 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畝]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 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며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오직 옛 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 군자(篤行君子)라 할 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娶)는 아들 김당(金溏)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 장씨(順天張氏)는 밀직 부사(密直副使) 장홍(張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張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郢)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苓)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ㆍ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康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ㆍ신대유(申大有)요, 세 사위는 김목(金牧)ㆍ문희정(文希禎)ㆍ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ㆍ김응상(金應商)ㆍ김응주(金應周)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 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불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을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명 헌종의 연호)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44년)에 태어나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돌아가니 향년(享年) 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几)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 해 앞서 가정(嘉靖)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德)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 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槩)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7)김광수(金光粹) 묘갈  (2005. 2. 4.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西厓先生文集卷之十九

碑碣

 

外祖進士金府君碣銘

 

公諱光粹。字國華。金氏本新羅宗姓。而麗時諱方慶 爲上洛府院君。樹大勳于世。公其後也。曾祖。咸吉道監牧官子瞻。祖司直孝溫。考諱克諧。登文科。官至知禮縣監。公天性恬淡。風神端潔。於富貴利達。泊然無所嗜。早以能詩。聞?輩間。中弘治辛酉進士。旣而棄擧業。屛居義城之北村。不復有進取意。宅邊有矮松一株。靑翠蔥鬱。蔭可數畝。公愛之。日飮酒?詩。偃仰於其下。自號松隱處士。家貧衣食不給。而公曠不以爲意。終日欣欣。無一不適意。時隣里賢愚少長。莫不敬慕而樂就焉。公孝友天至。知禮公早世。事先?數十年。所以承顔順旨者無不至。一弟在安東。每約來則倚門以待。日晩不食。必與同餐。平生口不道營産事。惟古人嘉言善行。詠歌稱道之不輟。故婢僕亦習聞而能傳之。嗚呼。公可謂篤行君子矣。雖古之處約養高之士。何以加此。公先娶南氏。生一子?。女一人。適金珣。後娶順天張氏密直副使弘之後僉正日新之女。生五女。長適申澤。次適金處善忠順衛。次適金溫。次適柳仲?觀察使。次適李?訓導。?生一女權德麟。一子世佑。金珣生二子。生河,生溟。一女康汝?。申澤生二子。大年, 大有。三女。金牧, 文希禎, 趙希祖。忠順衛生三子。應夏, 應商, 應周。金溫生一子。命堅。觀察使生二子。雲龍, 成龍。觀察使三女。李潤壽, 金宗武, 鄭好仁。訓導生一女。金坦。內外孫男女百餘人。張夫人賢有識慮。與公窮居食淡。而亦有以自樂無厭苦意。公生於成化戊子。終于嘉靖癸亥。享年九十六。臨終。沐浴隱?。屈指自語曰。足矣。有頃。?然而逝。肌膚如生。張夫人先公數年於嘉靖己未卒。年八十八。葬于大谷山乾坐巽向之原。及公之歿。就其麓爲同域異塋之制焉。其後二十二年。外孫柳成龍承朝命按節南來。就省公墓而祭之。傷其墓道無刻。而大懼潛德幽光。因至泯沒于後。遂立短碣其前。略敍于陰如右。百歲之下。必有因此而得公之大槪者矣。

 

형태서지

 

권수제 西厓先生文集    판심제 西厓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894年刊    권책 原集 20권, 別集 4권, 年譜 3권 합 14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1×17.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D1-A209C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2    

 

저자

성명 유성룡(柳成龍)    생년 1542년(중종 37)    몰년 1607년(선조 40)    자 而見    호 西厓, 雲巖     본관 ?山     시호 文忠     봉호 ?原府院君

 

  (8) 김광수 女(정경부인. 유성룡 모) 묘지 (2005. 2. 4.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西厓先生文集卷之二十

墓誌

 

先貞敬夫人墓誌

 

先비(女+比)姓金氏。其先安東人。中徙義城之北村。安東之金最遠而顯。實新羅宗姓。羅亡。歷高麗入我朝。上下千七百餘年。代有聞人。麗時上洛君方慶。以忠勳衛國。著大名于世。其後有奉擧直長都評議知印九鼎。知印之子諱子瞻。咸吉道監牧官。卽先?高祖。曾祖彰信校尉司直諱孝溫。祖諱克諧。以文科發身。監知禮縣事。考諱光粹。進士。隱跡林泉。以詩酒自娛。號松隱處士。年九十六終。?順天張氏。密直副使弘之後。訓鍊僉正日新之女。先?以正德壬申正月二十六日生。幼時日侍進士公。習聞詩禮之訓及古今人嘉言懿行。旣?。歸于我先考。閨範益修。嘉靖乙卯。先考階通政。先?始有淑夫人之號。甲子。先考爲觀察使。用二品例陞號貞夫人。後二十七年庚寅。朝廷以孤謬恩。贈先考領議政?山府院君。先?加貞敬二字號。又十二年辛丑。考終于河廻里第。實其年八月二十一日也。壽九十。嗚呼。先?德盛而天祐之。享膺五福。非偶爾也。自先考歿。先?寡居幾三十年。二子雲龍, 成龍。霑祿位于朝。而成龍尤不才。乃馴致卿相。受恩最深。歲歸爲先?榮。歲庚辰。成龍辭銀臺。屢上章陳親老乞外。上憐之。以尙州近家。特授之。成龍旣上官。卽走迎先?于家。先?素患轎眩。艱於卽路。方議舟行。時久旱水淺。臨發而雨。然船行猶不甚利。是夕泊宿多仁縣。夜又大雨。平岸而止。溪澗皆漲。遂以妓樂前導。由江?溪。達于城外。其後雲龍爲仁同縣。仁亦江邑也。其往迎亦如是。江邊人至今相傳爲美談云。癸未冬。成龍家居侍側。除慶尙監司。上疎辭。御批以本道有老母故授。可勿辭。自是。每年春秋。請告省覲。上賜米豆供養之需相繼。或輟禁中虎皮褥賜之。至庚寅夏。下二錦衣使遺母。乃內殿所御。曠世異數。聞者感動。旣而上又敦諭。必就養京師。先?不得已行。沿途郡邑。得上旨。具船輿設供帳遞護。道路以爲榮觀。壬辰變作。成龍扈駕而西。時雲龍爲太僕官。上以有母。特許解官自便。由是得奉先?東還。先?時年已八十一。奔竄山谷。或負或馬。備經艱危。人憂其不全。卒無。是時。賊鋒充塞遠近。士大夫家避亂者什不一保。獨先?所至。賊出沒左右近一二里。終不來犯。子孫婢僕從者甚衆。而無一罹禍。嗚呼。非天。其孰使之。蓋先?謙恭遜順。仁慈惻?。出於天性。平居秉心。洞洞屬屬。常若有畏。積一段誠敬之念。終始如一。無頃刻弛解。斯其所以獲報於天也歟。少時僑寓神武門外。坐未嘗背闕。其在??。必避日月光。與人言。無貴賤。待之盡禮。猶恐或傷其意。食物有生氣者。不忍屠割。禽魚之屬。亦多放之。治家以淸素簡寡爲本。不事營爲。以此財用窘乏。往往衣食不給。而亦無恨。先考屢典大州。?無良馬。衣不薰香。先?處內。恒守靖?。鈴門之內。澹然如水。惟先考志是遵是式。無毫髮干外事。晩。二子迎養在官。或遇酒肉之奉少豊於前。則輒曰。得無濫乎。不肖遭遇歷?。或遷官改級。先?不甚喜。惟戒之曰。無妄言。無雜交遊。對曰不敢。其失官而來也。懼無以告。久乃知之。亦怡如也。有遠識。每見水旱災異日星風雨之變。卽憮然曰。莫謂天高。人事得失。何所不見。此變奚爲至哉。又曰。吾雖婦人。家事或不掛念。惟心在國事不置云。嗚呼。先?之德大者如此。其細可略也。先?有二男三女。已具先考誌中。後雲龍官至通政原州牧使。而子正甫改名?。爲平陵察訪。純甫改名?。爲狼川縣監。皆以蔭仕。末子?業儒。二女?靑松府使金弘微, 醴泉郡守盧景任。成龍濫入相府。?勳封。生四子。褘, ?, ?, 袗。褘早夭。二女?察訪李文英主簿趙稷。庶子?, ?, ?。女一。李潤壽四子。, 燦炯, 煥。二女。長適參奉鄭允穆。一幼。金宗武一子?。女適士人金澈。鄭好仁有三女。長適全磊, 次南元立, 季尹商敏。?有二子一女。子長元直。餘幼。?有四子一女。?一子三女。靑松二子三女。醴泉二女。?一子。?一女。袗二女。李文英二子。趙稷二子。二子。炯一子二女。鄭允穆一子二女。金?一子一女。金澈一子。全磊二子。皆幼。內外孫及曾孫男女六十六人。嗚呼。孤兄弟五人。而三妹先亡。今年春。伯兄又亡。獨不肖在焉。而先?又棄養。不弔于天。?降大禍。攀號莫及。卜得是年十二月乙酉。合葬于先考墓左。蓋距先考之葬二十有九年矣。謹次其世系封爵志行子孫如右。納諸壙中。以圖永久。昊天罔極。嗚呼痛哉。孤哀子成龍謹誌。

 

  (9)김광수 외손자 유운룡 묘갈 (2005. 2. 4.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澤堂先生別集卷之七

墓碣

 

贈吏曹參判原州牧使柳公墓碣銘 幷序

 

安東府西天燈山金溪亥巳之麓。故通政大夫原州牧使柳公之墓在焉。弟西厓相國誌其壙。外甥金承旨弘微狀其行。皆實錄也。而今其諸孫。欲揭銘墓道。公傳道之。圖示久遠。以植方?史館。乃以屬筆。則不敢以不文辭。謹按公諱雲龍。字應見。世爲?山人。在高麗。諱伯恩。賜及第。入我朝。工曹典書從惠。始顯。生司正洪。司正生贈司僕正沼。是公高祖。曾祖成均進士。贈吏曹判書。諱子溫。祖杆城郡守。贈左贊成。諱公綽。考觀察使。贈領議政?山府院君。諱仲?。?安東金氏。進士光粹女。高麗名臣方慶後也。公生于嘉靖己亥八月六日。-----

 

配貞夫人鐵城李氏。參奉容之女。杏村後也。淑婉有懿範。事舅姑。惟公意是承。雖在奔竄山峽間。未嘗闕甘旨。父母宗族。咸稱其賢孝。有三男二女。長男?。平陵察訪。次?。狼川縣監。次?。天文敎授。長女壻。卽金承旨(=김홍미)。次弘文校理盧景任。察訪一男一女。男元直。女適權尙賢。狼川四男二女。男元亮生員。次元履縣監。次元慶,元定。女適參奉金秋任。次洪俊亨。敎授三男四女。男宗之,誠之,敬之。女適金念祖縣監。次金琨生員。次李英哲。次金時行。承旨(=김홍미)二男三女。男珌,珩。縣監。女適權克載。次金?(=문온공파 김구)。文科正郞。-----

 

형태서지

권수제 澤堂先生集    판심제 澤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74年刊    권책 原集 10권, 續集 6권, 別集 18권 합 16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19.4×15.2(㎝)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655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88

 

저자

성명 이식(李植)    생년 1584년(선조 17)    몰년 1647년(인조 25)    자 汝固    호 澤風堂    본관 德水    시호 文靖    

 

【김구(金?)】   자는 방숙(方叔), 호는 청창(聽蒼), 본관은 안동, 문온공(文溫公) 척약재(?若齋) 구용(九容)의 9세손으로 1582년(선조15) 임오(壬午) 3월26일 생,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4월28일 향년(享年) 36세에 졸(卒)하시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생원,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에 진사(進士), 1615년(광해군 7) 을묘(乙卯)에 식년시(式年試) 병과16(丙科16)에 합격, 승문참하(承文參下)를 하시다가 광해정란(光海政亂)으로 고향 충주(☞지금의 음성 감곡 상촌)로 물러나셨고 인조개옥(仁祖改玉) 후 예조정랑(禮曹正郞-문과방목 ☞壬申譜에는 예·형 양조좌랑으로 기록되어 있고 구전으로도 좌랑공이라 하고 있다)·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병사공(兵使公) 윤종(胤宗)·조부(祖父)는 음성공(陰城公) 진강(震綱)·부(父)는 상촌(桑村) 입향조(入鄕祖) 하양공(河陽公) 대하(大河)·외조부(外祖父) 이양형(李陽亨)이다.

 

배(配)는 숙인(淑人) 상산김씨이다. 1586년(선조 19) 병술(丙戌) 7월28일에 나시어 1658년(효종 9, ☞壬申譜의 1958년은 오기이다) 무술(戊戌) 11월27일 수(壽) 73세(☞임신보의 63세는 오기이다)에 돌아가시다. 부(父)는 참의(參議) 김홍미(金弘微)이시고 처 외조부(妻外祖父)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용 선생의 형님이신 겸암 류운용 선생이시다. -----

 

 


 7) 통정공(通政) 언윤(彦倫)  

 

 


 8) 참봉공(參奉) 당(당)  

 

 


 9) 훈도공(訓導) 몽정(夢楨)  

 

 


 10) 인의공(引儀) 세우(世佑)

 

 


 11) 만취당 사원(士元) (1539~1601)

 

 

 광수의 증손으로 호가 만취당 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월란정사에서 수업 하였으며 덕량이 심후 했다. 임란에 창의하여 정재장이 되었으며 난후에는 휼민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에 후산정사에 제향하였으며 실기가 전한다

당시 지은 만취당이 현존한다.

 

<만취당 묘소>(경북 의성군 단촌면 목촌리 )

 

  만취당(晩翠堂) 소개 (2006. 12. 30. 태영(군) 제공)

 

 1)소개 : 김사원(金士元)의 자(字)는 경인(景仁)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중종(中宗) 33年(1539년)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퇴계선생(退溪先生)에게 훈도(薰陶)를 받은 후 덕행(德行)을 실천한 선비였다.

 

천성이 인자(仁慈)하고 어릴때부터 공부를 즐겨하였던 만취당은 20세가 지난후에 퇴계선생 문하(門下)에 들어가 훈학을 받았으며 이때 선생은 무이(武夷) 관선재(觀善齋)에 관한 詩를 써 주면서 면학(勉學)을 장려하였다.

 

도산(陶山)에서 훈학을 받던중 山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病이 위중하게되자 先生이 경계하기를 ‘고인(古人)들이 학문(學問)을 하는데 비록 근고(勤苦)했다고 하지만 어찌 생병(生病)을 얻어 父母의 근심을 끼치는데 이르러서야 되겠느냐’고 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공부하게 했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왜적(倭敵)과 싸울때 의성재정장(義城齋整將)에 추대되어 의병대장(義兵大將) 김해(金垓)를 도우면서 활약했던 그는 전란통(戰亂通)에 굶주리는 지방민들에게 자기집 곡식과 음식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난리가 평정된 후 도움 받은 사람들이 土地와 물건을 가져와 사례하는것조차 거절한 덕망(德望)있는 선비였다.

 

학문을 닦으면서 농사일에도 힘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無償)으로 구제한적도 있으며 이러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은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고 불렀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일생(一生)동안 관직(官職)을 멀리하고 학문(學問)과 영농(營農)에만 힘쓴 만취당은 일찍이 ‘선비가 처세(處世)하는데 의(義)아닌 것으로 녹(祿)을 받지 말것이오 오직 본분(本分)에 진력(盡力)하면 거의 허물이 없을것이며 言行을 삼가는 한편 독서(讀書)를 부지런히 하고 농상(農桑)에 힘쓰는 등 세가지 일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할것이다.’고 말했다고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지은 묘갈(墓碣)에 적혀있다.

 

환고후(還故後) 고향에 월난정사(月蘭精舍)를 지어 학문에 정진(精進)하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서거하니 향년이 63세였으며 의성 후산사(后山祠)에 배향되었다.

출전: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1983년 李熙大 編著)

 

  2)주요 사진 자료

 

 

 

 

 

 

 

 

 

 

 

 

 

 

 

 

 

 <만취당>

 

<만취당에 있는 유성룡 모친 가마틀>

 

<가로숲>

 

 

 

 

 

 

 

 

 3)주요 자료 소개

 (1) 만취당(金士元) 선생 문집

<만취당선조실기 상>

 

<만취당선생 실기>(중간본)

 (3) 현대시

* <詩---여름만취당>  沙村詩篇 · 2

                                        金 進 中

 

만취당 대청마루

 

높은 섬돌위

공(O)표신 꼽(X)표신

한 一字 두 二字.

 

萬年松 향가지가

글씨를 쓰네,

사람人 사람人.

 

대설대

막힌 댓진

재떨이에 터는 소리

놋재떨이 뒤집혀서 구르는 소리

丁丁丁 正正正.

 

시렁위 곰팡이 핀

목각판 활자

譜世氏金東安

안동김씨세보

一之卷 卷之一.

 

--시작메모-- 문중할배들이 문회를 하시는지 모두들 만취당 대청마루에 모이셨네 서로 바뀔까봐 쇠꼬쟁이 불에 달궈서 공표 꼽표로 표시한 하얀 고무신들이 댓돌위에 가득한데 가끔씩 긴 장죽으로 놋재떨이에 담배재를 떠는 그 소리가 곰배(丁)로 열심히 일하란 소리로도 들리고

한편으로는 바르게(正) 살아라는 소리로도 들리네

불어오는 선들바람에 만년송 향나무 가지가 흔들리는게 흡사 사람되라고 사람人자만 쓰는 것 같은데

천정밑 시렁 위에 올려져있는 족보 목각판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읽어보노라니 도장 글씨처럼 꺼꾸로라

'보세씨김동안 일지권''이 되었부렀네 그래서 뒤집었다네

그런데도 내사 아직 인간이 덜 됬으니 옛 할배들 보기 참 면구스럽다네

 

 (4)<만취당 배위 숙인 이장(晩翠堂 配位 淑人 移葬) 관련 글> (2004. 3. 12. 정중(도) 제공)

 

2000年 경진(庚辰) 4월 6일

1.숙인 영양남씨지묘(淑人 英陽南氏之墓) 행현 감목공 묘하(杏峴 監牧公 墓下)와

 

2.숙인 일직임씨지묘(淑人 一直任氏之墓) 행현 연안강씨묘상(杏峴 延安康氏 墓上)과

 

3.숙인 안동권씨지묘(淑人 安東權氏之墓=대산동(垈山洞)에 있는 墓)를 고위 경내 강당 후록(考位 境內 講堂 後麓)에 3배위 열장(三配位 列葬)을 하여서

 

매 10월 15일 시사(每 10月 15日 時祀) 에 인향(引香)하여 합사(合祀)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장(移葬)은 상하(上下)로 장사(葬事) 되었던 것을 호당(戶當) 100,000원 씩 거출(據出)하여서 실시(實施) 하였습니다

 

위원장에 김희국(委員長에 金熙國), 부위원장에 김윤수(金潤秀),김호석(金浩石).김태석(金泰錫),김호석(金浩奭)이었으며, 거출금액 약 2,400만원 이온데 비용 900만원 제(除)하고, 여재(餘財)로 재실개와(齎室改瓦)하고 대문간(大門) 한채를 지었습니다.

 

2004年 2月20日

김희국(金熙國)은 서(書) 하다

 

 (5)만취당 묘갈명 (2008. 2. 14. 영환(문) 제공)

 

     晩翠堂金公墓碣銘  

 

公諱士元。初字景龎。後改景仁。金本安東上洛人。高麗忠烈公方慶之後也。五世而至子瞻。我恭定王。以前朝名臣後。授之官。挈妻子家聞韶之沙村。

 

子孫仍居焉。孫克諧官北評事。以淸名著於世。至國子進士光粹。遊太學。見燕山主無道。拂袖歸。隱居求志。世稱松隱先生。士林立祠以享。寔曾大父也。

 

大父溏參奉。父世佑引儀。妣義城金氏。萬謙之女也。公以嘉靖己亥生。卒於萬曆辛丑。壽六十有三。初公年二十二。謁退陶老先生請受業。

 

先生書贈武夷觀善齋詩曰。君能喩吾此意否。嘗與及門諸公。從先生遊淸涼蓮臺寺。詩以和。自是四五年之間。棲滿月庵。又棲蓮臺。已又棲月瀾庵。

 

讀書輒籤標質疑。有得疾書以記。葢與之麗澤者。艮齋李公德弘。趙公起伯也。艮齋嘗與琴公蘭秀。議構學舍陶山以容負笈者。書邀公。公卽具資力往。

 

先生曰。無庸。吾不要煩張。事遂已。公性慈仁。幼與羣兒遊。見烏鳶噪。往視之。凍死者橫道側。立解衣以覆。見貧匱者。必請父母周之。

 

服松隱公義方之訓。事親盡其孝。遇親戚鄕黨。恭敬禮讓。人無不愛服。及事老先生。遂輟擧子業。專精篤學。探賾陰陽五行之原。具問目質諸先生。

 

先生條答之。仍言苦思深求。反爲學者病。以爲戒。嘗入山攻苦病甚。先生躬自檢藥方以示。又戒曰。古人爲學。雖曰勤苦。何至生病貽父母憂乎。

 

及先生下世。門人疑所服。公曰。古禮師不服。不可以義起。遂以黑笠素衣帶從事。三年不與宴樂。庚辰壬午。荐罹艱。與二弟廬墓終三年。

 

壬辰島夷之訌。嶺南諸義將。起義兵討賊。推金公垓爲大將。以公爲義城齊整將。發半道。會大將卒于軍。遂罷歸。當是時。鋒鏑餓羸者。

 

聞公有急人義。襁至焉。公受之無倦色。有婦女至。詔家人接待。或以饘或以穀。所全活甚衆。人有籍土田臧獲以謝。公笑却之曰。吾豈望報者耶。

 

先是。公家居禔躬讀書。餘力課農。値歲歉。以稍贏者。假貸艱食。有貧無以償者。焚其券。人號爲金氏義倉云。宅西有萬年松。松隱公所取號。

 

公亦扁所居室曰晩翠。取呂氏約。增損爲洞䂓。行之數十年。村俗爲之敦。初娶英陽南氏。典籍崧之女。生一男四女。男濬直長。婿典籍權克明,

 

士人金之善,權得善,安昌。再娶一直任氏。生一女適李執可。三娶安東權氏亦一女。適趙綱。直長五男二女。男尙瑗護軍,尙琦,尙珏,尙玭,尙璘。

 

婿文博,李朝鳴並進士。曾玄及外孫蕃以昌。不可悉錄。今昆孫上舍宗德。以學行著稱士林。三弟或出入侍從。或陞上庠。皆不愧爲名祖孫也。

 

嗚呼。公歿二百年。文籍蕩佚。所著大學質疑,語錄解諸書。亦皆不傳。此後學所共歎惜。然公嘗曰。士子處世。不可非義干祿。惟盡力於本分。

 

庶幾寡過。况愼言行勤讀書務農桑三事。師敎所存。敢不勉諸。葢師門指授之訣。要約平實。人皆可以勉而行之。而爲聖爲賢之基。未必不藉於是矣。

 

公之平日佩紳而躬行者。要不外是而居焉。後之學者以之得。公亦以之自勉。則雖謂之不學。吾不信也。公葬在馬山負坎之原。實義城縣之北也。

 

銘曰。

松隱肖孫。

退陶門徒。

有齋藏修。

古松之隅。

知我者稀。

卷懷何傷。

貽厥令裔。

有斐聲光。

 

  晩翠堂金公墓碣銘(만취당김사원공묘갈명)   (2008. 2. 28. 국회(익) 제공)

 

 출전 : 樊巖先生集卷之五十二(번암선생집권지오십이)

   墓碣銘(묘갈명)

     晩翠堂金公墓碣銘(만취당김사원공묘갈명)

  *원문 및 이미지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公諱士元。初字景龎。後改景仁。金本安東上洛人。高麗忠烈公方慶之後也。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다. 초자는 경방(景龎)이었으나 뒤에 경인(景仁)으로 고쳤다. 김공은 본시 안동 상락인 고려 충렬공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五世而至子瞻。我恭定王。以前朝名臣後。授之官。挈妻子家聞韶之沙村。子孫仍居焉。

5세 자첨(子瞻)에 이르러, 우리 공정왕(역주 : 정종)이 이전 고려왕조 명신의 후예라 하여 벼슬을 내렸다. 처자를 거느리고 문소(聞韶 : 의성)에서 사촌(沙村 : 안동)으로 이사하여 자손이 거처하게 되었다.

 

孫克諧官北評事。以淸名著於世。至國子進士光粹。遊太學。見燕山主無道。拂袖歸。隱居求志。世稱松隱先生。士林立祠以享。寔曾大父也。

(자첨의) 손자 극해(克諧)는 벼슬이 북평사(北評事)로 청렴함으로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자감 진사였던 광수(光粹)에 이르러서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다가 연산군의 무도함을 만나 소매를 거두고 귀향하여 은거하며 뜻을 구하니 세상에서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불렀다.

 

大父溏參奉。父世佑引儀。妣義城金氏。萬謙之女也。

대부(곧 조부) 당(溏)은 참봉(參奉)이었고, 아버지 세우(世佑)는 인의(引儀)를 지냈다.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만겸(萬謙)의 따님이다.

 

公以嘉靖己亥生。卒於萬曆辛丑。壽六十有三。

공은 가정 기해년에 출생하여 만력 신축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시다.

 

初公年二十二。謁退陶老先生請受業。先生書贈武夷觀善齋詩曰。君能喩吾此意否。

공의 나이 22세에 도산에 물러나신 노선생(退陶老先生 곧 역주 : 퇴계 이황)을 뵙고 수업을 청하였다. 선생이 무이관선재시(武夷觀善齋詩 : 주자의 작품)를 쓰고는 “자네가 내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물었다.

 

嘗與及門諸公。從先生遊淸涼蓮臺寺。詩以和。自是四五年之間。棲滿月庵。又棲蓮臺。已又棲月瀾庵。讀書輒籤標質疑。有得疾書以記。葢與之麗澤者。艮齋李公德弘。趙公起伯也。

일찍이 동문의 여러 분과 어울렸는데, 선생을 따라 청량연대사(淸涼蓮臺寺)에 놀러갔다가 시를 화답하였다. 그 뒤로 4-5년간 만월암(滿月庵)에 살았고 또 연대사(蓮臺寺)에 살다가 다시 또 월란암(月瀾庵)에 살았다. 글을 읽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책갈피를 하였기에 재빠르게 기록할 수 있었다. 대개 함께 공부한 이는 간재 이덕홍(李德弘) 공, 조기백(趙起伯) 공 등이다.

 

艮齋嘗與琴公蘭秀。議構學舍陶山, 以容負笈者。書邀公。公卽具資力往。先生曰。無庸。吾不要煩張。事遂已。

간재 이덕홍이 일찍이 금란수(琴蘭秀) 공과 함께 도산에  학사를 열어 문도를 들이고자 할 때 편지로 공을 초청하니, 공이 즉시로 자비를 갖춰 달려갔다.  퇴계선생이 말씀하셨다. “쓸데없는 일이다. 나는 번다하게 하기를 원치 않노라.”하여 (퇴계를 모시고 학사를 여는) 일을 그만두었다.

 

公性慈仁。幼與羣兒遊。見烏鳶噪。往視之。凍死者橫道側。立解衣以覆。見貧匱者。必請父母周之。

공의 성품이 자애롭고 인애하셨다.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까마귀와 소리개가 시끄럽게 우는 것을 보고 달려가 보니, 얼어죽은 이가 길가에 나뒹굴어 있자 바로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가난한 이를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도와주었다.

 

服松隱公義方之訓。事親盡其孝。遇親戚鄕黨。恭敬禮讓。人無不愛服。及事老先生。遂輟擧子業。專精篤學。探賾陰陽五行之原。具問目質諸先生。先生條答之。仍言苦思深求。反爲學者病。以爲戒。

송은공(松隱公 : 역주 증조부)의 의롭고 방정한 가르침을 따라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고, 친척이나 고향분을 만나면 공경하고 겸양하니 아끼고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퇴계선생을 섬김에 이르러서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공부에 매진하니, 음양 오행의 원리를 깊이 탐색하여 문목(問目 : 질문 목차)을 갖춰 선생께 질의하면 선생은 조목조목 답하시고는, 이어서 “너무 괴롭게 생각하고 깊이 구하는 것이 도리어 학자의 병통이 되니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嘗入山攻苦病甚。先生躬自檢藥方以示。又戒曰。古人爲學。雖曰勤苦。何至生病貽父母憂乎。及先生下世。門人疑所服。公曰。古禮師不服。不可以義起。遂以黑笠素衣帶從事。三年不與宴樂。

일찍이 입산하여 공부를 괴롭게 하니 병이 깊어졌다. (퇴계) 선생이 몸소 약방을 찾아 보이며 또 경계하셨다. “옛분들이 공부를 부지런히 괴롭게 하라고 하였으나, 어찌 병이 나서 부모를 근심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겠는가”선생이 돌아가심에 미쳐서 문인이 상복에 의문을 가지자, 공이 말하였다. “고례에도 스승에는 복을 입지 않았으나 의리상 그만둘 수는 없다.” 마침내 검은 삿갓에 흰 옷, 허리띠를 하고 일하며 3년을 연락에 참여하지 않았다.

 

庚辰壬午。荐罹艱。與二弟廬墓終三年。

경진 임오년에 연거푸 부모상을 만나니 두 동생과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壬辰島夷之訌。嶺南諸義將。起義兵討賊。推金公垓爲大將。以公爲義城齊整將。發半道。會大將卒于軍。遂罷歸。

임진년 섬 오랑캐 난리에 영남의 여러 의장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칠 때에 김해(金垓) 공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고, 공을 의성제정장(義城齊整將)으로 삼으니, 출발하여 (안동으로) 가는 중간에 마침 군진에서 대장이 죽자 계획을 파하고 돌아왔다.

 

當是時。鋒鏑餓羸者。聞公有急人義。襁至焉。公受之無倦色。有婦女至。詔家人接待。或以饘或以穀。所全活甚衆。人有籍土田臧獲以謝。公笑却之曰。吾豈望報者耶。

이때에 베인 사람, 활맞은 사람, 굶주린 사람은 공이 인의에 우선한다는 말을 듣고 붙따랐다. 공이 이들을 맞이하되 게으른 빛이 없었다. 부녀자가 오면 집사람을 불러 접대하기를 죽이나 곡식으로 하니 온전히 산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개중에 논밭에서 수확한 것으로 사례하고자 하면 공이 웃으며 물리치고 말하였다. “내 어찌 보답을 바란 것이겠소?”

 

先是。公家居禔躬讀書。餘力課農。値歲歉。以稍贏者。假貸艱食。有貧無以償者。焚其券。人號爲金氏義倉云。

이보다 앞서 공이 집에서 독서를 할 때 여가에 농사를 점검하여 흉년을 만나면 농사를 망친 이에게 구휼미를 빌려주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이가 있으면 문서를 태워버리니 사람들이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 불렀다 한다.

 

宅西有萬年松。松隱公所取號。公亦扁所居室曰晩翠。取呂氏約。增損爲洞䂓。行之數十年。村俗爲之敦。

집 서쪽에 만년송이 있으니 송은공(역주 : 증조부 휘 光粹) 이 자호한 것이다. 공 역시 한 쪽에 방을 만들어 만취(晩翠)라 자호하였다. 여씨향약을 취하여 가감하여 동규(洞䂓)를 만드니 수십 년을 행함에 마을 풍속이 도탑게 되었다.

 

初娶英陽南氏。典籍崧之女。生一男四女。男濬直長。婿典籍權克明,士人金之善,權得善,安昌。

공이 처음에 영양남씨(英陽南氏) 전적(典籍)벼슬 南崧(남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준(濬)은 직장(直長)이고, 사위는 전적(典籍) 권극명(權克明),사인(士人) 김지선(金之善),권득선(權得善),안창(安昌)이다.

 

再娶一直任氏。生一女適李執可。

두 번째 일직임씨(一直任氏)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이집가(李執可)에게 시집갔다.

 

三娶安東權氏亦一女。適趙綱。

세 번째로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어 또 1녀를 낳았으니, 조강(趙綱)에게 시집갔다.

 

直長五男二女。男尙瑗護軍,尙琦,尙珏,尙玭,尙璘。婿文博,李朝鳴並進士。

직장(큰 아들 준)은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상원(尙瑗)은 호군(護軍)이고, 나머지 상기(尙琦),상각(尙珏),상빈(尙玭),상린(尙璘)이고, 사위 문박(文博),이조명(李朝鳴)은 나란히 진사(進士)이다.

 

曾玄及外孫蕃以昌。不可悉錄。今昆孫上舍宗德。以學行著稱士林。三弟或出入侍從。或陞上庠。皆不愧爲名祖孫也。

증손 현손과 외손들이 번창하나 다 기록할 수 없고, 곤손(昆孫)인 상사(上舍)벼슬 종덕(宗德)은 학행(學行)으로 사림에게 칭송받는다. 세 동생은 간혹 임금을 시종하고 관직에 나아가고 학문에 정진하니 모두 이름난 조상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도다.

 

嗚呼。公歿二百年。文籍蕩佚。所著大學質疑,語錄解諸書。亦皆不傳。此後學所共歎惜。

아! 공이 가신지 200년 문적이 망실되어 지으신 <대학질의(大學質疑)> <어록해제서(語錄解諸書)>가 모두 전하지 않으니 후학이 함께 탄식할 바이다.

 

然公嘗曰。士子處世。不可非義干祿。惟盡力於本分。庶幾寡過。况愼言行勤讀書務農桑三事。師敎所存。敢不勉諸。葢師門指授之訣。要約平實。人皆可以勉而行之。而爲聖爲賢之基。未必不藉於是矣。

하지만 공이 일찍이 말씀하였다. “선비가 처세함에 의가 아니면 녹을 구하지 말라. 다만 본분에 진력하면 거의 허물을 줄일 수 있다.” 더욱이 愼言行․勤讀書․務農桑 세 가지는 가르침이 남았으니 감히 힘쓰지 않으랴. 대개 스승의 문하에 전수한 비결은 요약되고 평탄 신실하여 사람들이 모두 힘써 행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성현이 되는 기초가 여기에서 바탕을 두지 않음이 없다.

 

公之平日佩紳而躬行者。要不外是而居焉。後之學者以之得。公亦以之自勉。則雖謂之不學。吾不信也。公葬在馬山負坎之原。實義城縣之北也。

공이 평소에 예복을 갖추고 몸소 실천한 것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학들이 이로써 얻을 지라. 공 역시 이로써 힘썼으니 배우지 아니했다 한들 나는 믿지 못하노라. 공은 마산(馬山) 부감(負坎)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실상 의성현(義城縣)의 북쪽이다.

 

銘曰。명문에 이른다.

松隱肖孫。송은공 빼닮은 자손

退陶門徒。퇴계 선생 문도로세

有齋藏修。서재 숨어 수양하니

古松之隅。묵은 솔의 옆이로세

知我者稀。날 아는이 적다한들

卷懷何傷。품은 회포 상할손가

貽厥令裔。빼어난 자손에 미쳐

有斐聲光。명성 영광 빛나리라

 

儒林學堂(hanja4u.com.ne.kr) 主人 金國會 拙譯

2008.02.28

 

*김사원(金士元 ; 1539~160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경상도 의성·점곡(點谷)·사촌(沙村)에 살았고, 증조부는 일사(逸士) 광수(光粹)이다. 1560년(명종 15)에 이황(李滉)에게 음양오행설을 배웠다. 벼슬에 나간일이 없고 부호군을 지내며 학문에 진력하였다. 천성이 인자하여 개인의 재산을 털어 많은 기민(飢民)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사림(士林)의 추대로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이 되어 두 동생 김사형(金士亨), 김사정(金士貞)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보내 창의(倡義)토록 하였다. 도의상교(道義相交)는 이덕홍(李德弘), 금난수(琴蘭秀)등이며 「신언행(愼言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으로 하였다. 후산사(后山祠)에 제향되었다. *김사원 각주 출처 :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퇴계학맥편

 

<후산사>

 

 


12) 독수헌 사형  

 

 


13) 후송재 사정(士貞)(1552∼1620)

 

---자는 정숙(正叔), 호는 후송재(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사원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퇴도(退陶)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사형(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창영 화왕산성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되지 않으리 삽혈심여도 분신지불회( 血心如刀 焚身志不灰)" 하였다. 증직으로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고 문집과 계문예설(溪門禮說)이 전하며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다. 그 후손에 이름있는 선비와 대소 과한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손자 오계 상유(玉溪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이 있었으며 유집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이중(北塢 履中)은 무과에 올라 선전 오위장(宣傳 五衛將)에 이르렀고 식략이 절인하고 무신란에 의장(義將)으로 추대되 어 군공을 세운 바 있다. 5세손 성고 성(省고 聲)과 귀은 오응(龜隱 五應)은 다같이 문과에 급제했는데 성(聲)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내고 경학에 고명하여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초휘는 성응(聲應)이었으나 어전에서 강경할 때 성(聲)음이 청아함으로 어명으로 성(聲)자 만을 이름하게 되었고, 오응은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여러 주, 읍을 다스림에 청백리로 알려 졌다.

정희량의 반란이후 사론이 분분할 때, 소수로서 직언(直言) 충간하여 조의(朝議)를 바로 잡아 전 영남이 신원(伸寃)된 일이 있으며, 함평에 치적비가 세워졌다. 6세손 종필(宗泌)은 문장이 뛰어났고, 종헌(宗憲), 종국(宗國), 종식(宗軾)은 각각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모두가 경사에 능통했고 명망이 있었으며 형진(馨進)은 호가 괴음(槐陰)으로 족대부 재응(載應)에게 수학하여 지국이 준정하고 경학에 정통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유집 4권이 있으며 경진(景進)도 진사에 합격했다. 양정(養楨)과 그의 아들 노선(魯善), 양정의 아우 양식(養植)과 그 아들 기선(驥善)은 모두 생진과에 합격하여 향방에 널리 알려졌다. 양정(養楨)은 정종로(鄭宗魯)를, 노선(魯善)은 유치명(柳致明)을 사사하여 문장이 능하고 율기와 검약으로 후덕하게 처신했다. 한 때 도천의 물망에 올랐으나 사양했고, 양정은 문집 8권, 노선은 12권을 펴 냈으며, 양식, 기선 부자 또한 행의가 근엄하고 문사(文辭)가 탁월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유집이 전한다.

 

- 후송재(後松齋)  (자료제공 : 김주회(안)

 

시군지순례 14-5. (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후송재(後松齋) pp329 .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3리

 

---임란 때 화왕산의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積薪成誓)의 피 끊는 시(詩)로서 전진을 격려한 후송재 김사정(後松齋 金士貞)의 거실로서, 만년에 강학 휴식의 곳으로 삼고자 후송재(後松齋)라 편액했다. 1896년 병신 의병 때 소실되고 중건하였으며, 1950년 6.25 당시 재차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1993년에는 후손 형수(瀅秀) 등의 주선으로 규모를 넓혀 4간 겹으로 신축하고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현재 문중 집회소로 이용된다. 진성 이원윤(眞城 李源胤)과 후손 위윤(渭允)의 기문이 있다.

 

  

<후송재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4) 천사(川沙) 종덕 (宗德)

 

1724년(경종 4년) 7월 28일 점곡면 사촌동서 난 김종덕의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고려 중흥공신 상락군 방경의 후예로 송은 광수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안동인 남응이고 어머니는 순천 김씨다.

그는 남보다 재주가 뛰어나 언어 행동을 항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학문을 익힘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뜻세움이 또한 원대했다. 효우의 행실도 남달라 6, 7세때 가마귀 소리가 들리면 악기가 서린단 남의 말을 듣고는 매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모한테 해가 돌아갈까 실색하고 두려워했다 한다. 한 번은 여러 동생과 공부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감염되었지만 억지로 먼저 일어나 몸져 누운 동생들이 완쾌되도록 백방으로 힘썼고, 부모 마음을 항상 편히 하고 그 거처하는 방의 문을 바르거나 구들고치는 것을 다른 이한테 시키지 않고 자기가 늙을 때까지 손수 하였고, 퇴도(退陶)의 학문을 사숙창명한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입재 정종로, 후산 이종수와 세칭 호문 삼종의 한 사람이다.

30세때(1753년) 사마시에 합격, 통문이 왔을 때 마침 남의 글을 쓰고 있어 그 글을 다 마무리한 뒤에야 뜯어보는 신중성도 보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 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태지의 유자정(1890년 소실)에서 학문을 강론, 원근 안동, 예안, 예천, 청송 등지에 많은 문사들이 나게 했다. 1997년(정조 21년)에 돌아가니 향년이 74, 천사 문집, 성학 정로, 공문 일통, 석학 정장, 정론 고증, 초려 문답, 예서 등의 저서가 전한다. 공의 사후 18년 사림서 불천위로 정하였다.

 

   사진 자료- 宗發(金宗德)先生 문집류

 

  

<천사선생 문집>(좌-원본, 우-영인본-1992. 계명대 간.)

 

  

<고증(考證)>(좌-원본, 우-내부)

 

  

<초려문답(艸廬問答)>(좌-원본,  우-내부)

 

 <성학정로(聖學正路)>(원본)

 

  

<성학정로(聖學正路)>(내부)

 

  

<심경강록(心經講錄>(내부)     <천사선생 학술발표회>(2002. 4. 13. 경북대. 동방한문학회 주관)

 

 *<각종 문헌 및 서찰 자료 소개>

 

 (1)  川沙(金宗德) 서찰(1)

 

1)일시 : 2003. 4. 2 : 발용(군)씨 사이트 소개.  항용(제), 주회(안)씨 총 8점의 서찰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 발굴.

2)소장처 : <옥과미술관>(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http://www.asan.or.kr/

3)서찰 촬영일시 : 2003. 4. 16. 안사연 6명 현지 방문. 열람 및 촬영.

4) 작성일 : 1785(정조9. 62세). 10. 26.

 

 

5) 해독 원문 및 번역(준비중)

 

 (2)  川沙(金宗德) 서찰(2)

  1)--3)은 상기와 동일

  4)미상

 

 

  5)원문 해독 및 해석(준비중)

 

 (3) 川沙(金宗德) 친필 (2002. 8. 9. 발견)

 

<친필>( 2002. 8. 9. 발견. 출전-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5) 용연 종발(宗發)

  (1) 金宗發 친필 유묵

 

<용연공(容淵公) 金宗發(金宗德 叔弟) 친필 유묵>

 

   (2) 용연선생일고(容淵先生逸稿)  (2004. 2. 26. 은회(익) 제공)

       김종발(金宗發, 1764~1812)의 시문집.

 

 

【서지사항】 石印本. 4권 2책. 1937년 5세손 병종(秉鍾)이 간행. 跋 : 金浩直․金秉鍾. 【체재 및 내용】 저자의 본관은 안동. 자는 경온(景蘊), 호는 용연(容淵). 아버지는 남응(南應)이며, 어머니는 순천 김씨로 주의(??)의 딸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7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9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장릉별검(莊陵別檢)․종부시주부․사한부지평을 역임하고 1798년 장령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형인 종덕(宗德)․종경(宗敬)․종섭(宗燮)을 비롯하여 동문인 유장원(柳將源)․이지춘(李遲春)․황학중(黃學中) 등과 더불어 사설(師說)의 계승, 발전에 노력하였다. 권두에 목록이 있고, 이어 권1은 시 29수, 소(疏) 1편, 서(書) 17편, 권2는 잡저 2편, 지(識) 3편, 권3은 제문 17편, 권4는 부록으로 유사․행장․?묘갈명․만사․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차운과 연구(聯句)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구는 대개 친구나 형제들이 모여 2구씩을 돌려가며 지은 것이다. 이밖에 <만임강와필대(輓任剛窩必大)> 등 만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소는 1798년 장령(掌令)을 사직하는 상소로 원자(元子)의 보양(輔養)과 궁료(宮僚)의 간선(簡選)을 진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서(書)의 <상대산이선생별지(上大山李先生別紙)>에는 『논어』와 『중용』에 관한 문목(問目)과 함께 이상정(李象靖)의 답서가 첨부되어 있다. 『중용』에 관한 문목 중에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성(誠)․인(仁) 등에 관한 것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서(書)에는 기타 이광정(李光靖)․유장원(柳長源)․이치춘(李穉春)․황학중(黃學中) 등에게 답한 것이 있다. 대개 학문적인 내용이 많은데, 그 중 황학중에게 보낸 편지는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심성(心性)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이 보인다.

 

잡저의 <백형언행수록(伯兄言行手錄)>은 저자의 맏형이며, 이상정의 같은 문인인 종덕(宗德)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문견록(聞見錄)>은 저자가 보고 들은 일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지(識)의 <학봉김선생복릉소선사후소지(鶴峯金先生復陵疏繕寫後小識)>는 김성일(金誠一)이 단종의 묘소를 능으로 복위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의 상소문 초안이 『장릉지(莊陵誌)』에 누락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필사하여 소장하게 된 취지를 적고 있다.

 

 한편 <서행당김동자유고후(書杏堂金童子遺稿後)>는 시문으로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다 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김동자의 유고에 대한 발문으로, 특이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 제문은 스승인 이상정을 비롯하여 이광정․최흥원(崔興遠)․이지춘 등에 대한 것이다.

 

【자료의 특성 및 가치】 저자는 학문적으로는 특히 『대학』과 『중용』을 비롯하여 주자서와 『심경』등에 심취하여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경세(經世)의 도(道)를 연구하는 데 힘쓴 바, 저자의 서간문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3) 金宗燮 친필 유묵

 

  

<金宗燮(김종덕의 季弟) 친필 유묵>

 

  


16) 우강 金浩直의 <漢陽歌>

 

 

(1995. 12. 金泰德 刊)

 

 


17) 金日秀의 <四禮要覽>

 

 

 


18) 자은 봉정

 

자은유고(紫隱遺稿)

 

<자은유고(紫隱遺稿)>

 자은유고서(紫隱遺稿 序)

 군자의 학문은 위기할 따름이다

위기의 학문이란 도리와 덕행을 몸에 익히고 심득 궁행하는 것이요

위인의 학문이란 심득궁행에 힘쓰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것을 말한다

자은처사 김공은 재식과 사장에 힘쓰지 아니하고

겸허로 자처하며 담해로 자청하여 일생을 살다가 가셨다

공은 출처와 덕행으로 이름 높은 송은 만취 선조의 영예로서

기산옹의 가학에 승발유염 되었으며 효제는 천성이요 시례는 근천으로 이루어졌다.

친환에 시탕과 당리의 정성을 다하고

친상에는 고석에 눈물의 흔적이 마르지 않았으며

훈호상화의 우애와 제가검약의 모차는 향린의 칭송을 받았다

일찌기 재종형 운산공을 사사하여 공부 하였으나

독려와 근장없이 경전의 이치를 탐구하여 학문이 발전되니 제류간에 성망이 높았다

공은 고종 무인생으로 경술 국치를 맞이할당시 삼십여세였으니

경륜과 포부를 펼쳐볼 겨를도 없이 국파군망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근역천리에 풍운은 조석으로 급변하여 나라의명운이 몰락할 때 였다

뜻있는 지사들은 혹 해외로 망명하고

혹 국내에서 활동하고 혹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이도 있었다.

그러나 노모와 백씨가 계신지라 순국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다.

당시 시정에는 모리와 아부로 개화의 풍조에 휘말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인사가 횡행 하였으나

탁류에도 몸을 굳건히 지켜 백의보발로 흔들림이 없으니

사류들은 조수고결한 선비라고 말하였다.

공의 평소생활은 후진을 교해하고 수분위기할 뿐이요

유소(儒所)의출입도 자제 하고 약간의 저술을 남겼다.

만제시서와 서기장갈의 사본이 적지 않았으나

경란(庚亂)에 산일되고 영성을 면치 못하니 후인의 유한일 따름이다.

구추향년으로서세하니 사류들은 <기문수지진성락 노숙향린복유유(글하는 선비 새벽별 지듯 떨어지니 고을안의 덕망있는 이 다시 누가 있는가)> 하며

향린의 앞날을 걱정 하였으며

족질 운강 위윤공은

<자소근공노대청 불리석척보애정 명리무관유수지 안빈대분낙평생

(소년시절 부지런한 공부 늙어서 더욱 정밀하고 법도에 따른 생활 진심으로 보존 했네

명리에 관여 않고 숨어서 뜻을 길러 청빈해도 분수 지켜 평생을 즐겼다네)>

하고 공의 일생을 애도 하였다

이로서 초연정개한 평생을 미루어 알수 있다.

희라 세상도애한

오늘날 학계기금의 축리여자로 유고를 간행하려 함에

한문원전을 해득하는 이가 드문지라 국역 발간이 보편화 되었지만

자력의 미급으로 우선 원문만 행간 하게 되었다

신사세말의 어느날 계회의 중의로 머릿글을 청촉하는지라 고사하지 못하였다

회상하여 공의 유자적 풍의와 유고장수의 신독을 우러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글을 적어 삼가 서문을 대신한다

 

2002년 임오 원월 일 족손 창회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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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봉종(鳳鍾)이요 자는 원서(元瑞)이며 호는 자은(紫隱) 이다

1878년(고종무인 9월 12일)生~1969 (을유 12월 3일)沒

 

<기산유고 서문> (2003. 5. 7. 정중(도) 제공)

 

서문

 

이 책은 나의 족선조 기산 김공 휘 석유의 시문집이다

공은 실로 오문의 장덕이요 향도의 망사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저술과 선정유촉에 문필의 기록을 남겼으나 사림에서 공을 칭송한 만제장갈의 유사는 찾을 수 없다

 세대는 멀어지고 전란이 거듭됨에 영성주예의 전전이거로 당시 제제고사간에 일행기선의 글이 산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학의 장연한 감회 금할길 없다

 하례은례(夏禮殷禮)를 오능언지(吾能言之)나 기송(杞宋)은 불가징(不可徵)이라 하고 공자께서 한탄하심은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보첩을 상고하면 참판 이돈우 도사 김도화 선생의 광기와 행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천운의 순환으로 후일을 기대 하면서 이제 상전구비와 정사초록의 유고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개략을 서술한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 훈업상신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 연산당시의 고사 송은 광수선생은 현조이시며 동방부자로 존앙받는 퇴도고제 만취당 사원선생은 구대조이시다

 1805년 순조 을축에 삼구단 양0공의 여섯아들중 다섯째로 태어나시니 품성이 총유 하시고 기지가 헌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세업으로 삼던 가정에서 승발유염으로 초학을 익히고 성장하여서는 성망 높은 선비 신암이동하 공의 사위가 되셨다

 그로부터 외0의 보익으로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한결 정진하여 대의를 효해하고 과업에 일일면진하였으며 늦게는 정재 유치명선생의 강석에 나아가 더욱 심잠하여 유망이 향방에 울연하였다

 장년시절 친명으로 장옥에 출입하였으나 청운입신의 이치를 깨닫고 임하에서 정양하였다

  5책5권 유고의 심대한 저서중에는 약간의 시편이 있으나

이는 병인양요의 프랑스군함이 양화진을 점령하고 강화에 들어올때 판서 이시원의사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간절한 서문과 함께 차운 하였으니 "팔월강성정기공 천왕파랑육침중 연상의리정마구 생사증안정비흉" 이라고 읊었다

 대개 보국교화와 관련된 사십여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시장에 힘쓰지 않고 경학과 이학에 전심 하였음을 알수 있다

 1855년 철종을묘에는 영남유생 이0병공 등이 중심이 되어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의 사초가 공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산이상정 선생의 청향소와 칠조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것이 일권이다

 2,3,4 권은 모두가 서편으로 외0인 신암공과 기수 정민병공을 비롯해서 류숙후 치후 이신암만0 , 이도정 0령, 이승지 건수공 등 영하명유와 경서를 강론한 서찰이 수백편이다

 문친간에는 율원 양휴공에게 질의하고 기계 노선공과 학문으로 깊이 상교하였다

 5권은 제문과 약간의 서 기가 있으며 잡저로 칠실대언이 있다

 통문편을 살펴보면 안동향교 통도내문을 비롯해서 노강 임천서원통문 갈암선생 분황통문 등이 공의 수중에서 제통되었으니 그 문장의 깊이는 미루어 가히 알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유고는 등수의 절차를 밟아 대가의 교정과 서문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점 한스럽다

 세월을 거슬러 공의 영손 자은 봉종공이 선고간역에 일진 하였으나 유의미수로 몰세하셨다 이제 임오세말의 모일 자은공의 후학수계취회 당시 여자를 수검해서 기산고를 영인 제작하기로 취의 하였다

 계중장로분들이 소자에게 머릿글을 쓰라고 청촉하는지라 생각하면 두려울 따름이다

 학문과 덕행이 세인의 사표가 되고 고결한 정신은 당세와 후세에 교화의 영향을 끼쳤으나 초옥에서 잠해로 정양한 선인의 권두에 어찌 단문을 붙이리요마는 다만 후일 상고의 자료에 공하기 위해 잠망을 무릎쓰고 전말을 밝혀 삼가 서문을 대신 한다

 

2002년 임오 계동 상현 족후손 창회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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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함인재공 휘 종록 친필 제문 경매 (2008. 3. 26. 항용(제) 제공)

 

     1. 경매 매입일 : 2008. 2. 27.

     2. 경매처 : 금요 고서방

     3. 경매 입수자 및 소장처 : 김항용(제)

     4. 규격 : 51cm×34cm

     5. 내용 : 변려문체로 김종록의 중형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처남(진주강씨)이 죽자 그의 빈소에 찾아가 제를 지내며 지은 제문.  

    *김종록(金宗祿. 1747-1834)

   자는 천여(川如) 호는 함인재(含忍齋) 영조 정묘생(1747년생) 족형인 천사(김종덕)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몸을 닦아 천거 받았으며 친구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세계 : 九鼎-子瞻-孝溫-克諧-光粹-溏-世佑-士貞-淮-尙瑜-殷佐-履和-致應-<宗祿>

 

  *주요 연보

   1747년(영조 23년 정묘) : 출생 (배 진주강씨 1742년생 1829년졸 87세). 천사 김종덕 선생(1724년생 23年上) 께 사사

   1766년(영조 병술. 20세) : 子 관진출생  

   1800년(정조 경신. 54세) : 孫 양억 출생  

   1802년(순조 2년 임술. 56세) : 처남 사망, 제문을 지음.

   1805년(순조 을축. 59세) : 孫 양의 출생  

   1834년(순조 갑오. 87세) : 졸  

 

 

 <원문 해독 및 국역>

   *해독 및 국역자 : 김익수(제. 한학자, 제주 문화재위원)

   *편집 윤문자 : 항용(제)

 

維歲次 壬戌八月 己亥朔 十九日丙辰 通家少弟 上洛金宗祿 謹以魚果 哭奠于近故處士 晉州姜公之靈曰 嗚呼 惟靈嶠南華族 詩禮家聲倜儻 其氣淳懿 其風鄕隣 交譽友朋 咸稱展也好人 何福不膺 堂棣美輝 庭蘭倂芳 潛有幽光 庶幾來慶在節 阿仲與公結好情 似雷陳誼重王謝 玆余無似被光輝 粵在黃羊 坐屈軒盖 敢竭心悃 纔奉數夕 如夢尙疑起憶 私家險釁 箎音奄忽 忍見孤胤 千里哭擗 兩家同禍 公訃繼至 視天茫茫 此何厄會 魯靈光景 賢季同憐 日月易逝 影響彌遠 缺界難圓 萬事成塵 余懷之悲 不但哭公 玆嘷而退 雲日蒼茫 於乎哀哉 尙饗

 

 해는 1802년(임술. 순조2) 8월 19일 통가(通家:대대로 사귀어오는 정분있는 집)의 작은 동생 안동인(安東人) 金宗祿은 삼가 요즘 돌아가신 처사(處士) 진주강공(晉州姜公-처남)의 영령에 곡을 하며 바닷고기와 과일로 제사를 지내나이다.  

 

 말씀 올리건대, 아아! 영령께서는 영남의 화족(華族: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집안이나 자손들)으로서 시(詩)와 예(禮)로 집안에서의 명성은 출중하여, 그 기품은 순박하고 아름다우며, 그 품격은 고향 이웃들이 벗으로 사귀기를 영예롭게 여겼으며,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어찌 복은 그에 부응하지를 못하셨나이까.

 

 집안의 형제는 아름답게 빛나고 집안의 딸들도 모두 덕행이 있으니, 남몰래 유광(幽光: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덕망)을 지녀 아마도 조상의 덕이 경사로 나타나고 절개로 남아 있는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나의 중형(仲兄:宗國)과 공(公)은 좋은 정분을 맺었으니 뇌진(雷陳:후한 때 雷義와 陳重은 교분이 매우 두터운 벗이었다)과 같은 정의(情誼)는 왕사(王謝:六朝때 명망이 높던 王씨와 謝씨의 두 姓. 인신하여 벼슬한 명문)보다 더 두터웠사옵니다.  

 

 이제까지 내가 영광을 입은 것은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사옵니다. 황양(黃羊:己未년. 1799. 정조23)에 몸소 찾아오시어 감히 마음속이 정성을 다하여 겨우 며칠 밤을 모셨는데, 아직도 꿈속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맥맥히 추억을 일게 하옵니다.  

 

 우리 집안의 불운으로 중형(仲兄:伯氏는 宗宅, 仲氏는 宗國. 1740-1801. 1768 생원. 수62세)의 죽은 소식(1801년)에 아비 없는 자식을 차마 볼 수 없어, 천리 먼 곳에서 곡을 하며 가슴을 치고 있었는데 양가(兩家)에서 함께 화(禍)를 당해 공(公)의 부고마저 잇달아 도착하여 하늘을 아득히 바라보게 되니 이 무슨 액운이란 말이옵니까.  

 

 노영광(魯靈光:魯의 靈光殿. 겨우 남아있는 인물이나 건물. 魯恭王이 지은 靈光殿이 여러 차례 전란을 겪었으나 피해를 입지 않고 우뚝 솟은 데서 유래함)의 모습으로 막내아우가 함께 애달파 하는데 세월은 바뀌어 흘러가 그림자와 목소리마저 까마득히 멀어졌으니 텅 빈 세상은 다시 원형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옵니까.

 

 모든 일이 흙먼지가 되어버렸으니 내 슬픈 감회는 비단 공(公)을 곡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울부짖다가 물러나 구름 낀 태양으로 아득히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니, 아아! 슬프옵니다.  

 

 흠향하시옵소서.            

 

  


20) 김상종(金象鍾. 1848~1908)   (2009. 2. 11. 정중(도) 제공)

 

 수익의 아들이고 호는 운산(云山)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서산 김흥락에게 배웠다. 문장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 병신에는 의성의 의병대장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황산(凰山)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破兵) 조칙(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창의 기적비 소개>

 

위치:경상북도 義城郡 點谷面 沙村里. 만취당 남편 진입로에 건립(건립일-2008년 12월)

 

 

 

 <비문 소개>

 

 *비문 전면은 의병대장 김상종 격문(국역)이며  이 내용은 2007년2월호 월간`순국` 지에 실린 글임.

 

이적(夷狄)의 중화(中華)가 변화됨은 고금에 듣지 못한 바이고

적국에 나라를 판 행위는 천지간에 능히 용납할 수 없다.

실로 태어난 본성이 있다면 누구인들 적개심을 품지 않으랴!

오호라! 십흉(十凶)이 권병을 농락하니 국가의 재앙이 비로소 성해지고

사교(四郊)에 진(陳)이 많게 되니 생민의 도탄이 이미 지극하게 되었다.

성상께서 머리를 깍는 일로 누차 흉도에게 핍박을 당하니 생각한즉 목이 막히고

국모가 해를 입어 마침내 허위(虛位)로 돌아감이 말하자니 통곡스럽다.

사나운 위세를 협박함이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같고

예의를 무시하여 버티니 무도한 견양(犬羊)이로다.

의관이 모두 변하니 한관(漢官)의 위의를 보지 못하겠고

달력은 새로 반포하니 춘왕(春王)의 월령이 어긋났도다.

수 천 년 강상이 다시 떨치지 못하게 되고, 3백 고을 풍속이 거의 다 변하게 되었다.

적과는 하늘을 같이 할 수가 없으니, 무(武)를 쓰기에 어찌 땅이 없으랴!

제(齊)나라가 9대의 원수를 갚으니 <춘추>에서 의롭게 여기고

주(周)나라가 6월의 군대를 일으키니 북쪽의 오랑캐가 징계되었다.

돌아보건데 우리 영남지방을 본디 추로(鄒魯)의 고을이라 일컬어졌다.

역대 우리 왕조에서 배양한 영향이 혈기가 있는 무리에게 모두 스며들고

여러 선배들이 이어받은 유풍이 예악을 일삼는 마을에 얕지 않도다.

사람은 적을 막을 재능이 있고 세상에는 특이한 자취가 많았다.

임진란에 능히 물리쳤던 날은 실로 소모(召募)의 힘 덕분이고

무신란에 유린하던 때에 오히려 규합하는 의리를 거행했도다.

더구나 지금 섬 오랑캐가 중외에 창궐하니

사람이 누가 부모께서 끼친 신체를 보존 하겠는가?

간특한 무리가 조야에 퍼졌으니 국가가 장차의 조종의 서여(緖餘)를 실추하게 되었다.

괴수를 섬멸하고 적을 잡을 날 어찌 없으랴!

뿌리를 제거하고 박힌 못을 빼는 것.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인의(人義)의 방패가 팔도의 선비에 부족하지 않고

충신(忠臣)의 갑옷이 반드시 작은 읍에 많으리라.

의대(衣帶)의 교서가 내림에 보는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상하지 않겠는가?

초토(招討)의 조칙이 선포됨예 듣는 이들이 주먹을 쥐고 손바닥을 쳤다.

의기가 격한 바에 얻지 않음이 없었도다.

이에 우리 읍에서 공의(公儀)를 크게 발하여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켰다.

활 쏘고 말 모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 비록 드높은 공은 없으나

방어하고 보위하기를 도모하니 오히려 극진한 충성이 있다.

엎드려 바라건데 이 격문이 전달 되는 날. 기한을 정하여 군대를 떨치고

소리를 일제히 하여 힘을 합하자.

이로서 종사의 위태함을 부지하고. 이로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자.

따르고 어기는 사이에 충력(忠力)이 절로 드러나리라. 각기 힘쓰도록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