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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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사공 소개

  2. 묘지호 소개

3. 묘지명 소개

  4. 묘지호 확인

5. 실록 기록 자료

  6. 최초의 목민심서

7. 국조오례의에서

  8. 경기도 박물관 방문기

9. 기타자료

10. 구 묘비 소개

 

본문

p11.png 3. 副使公 墓誌銘 번역 및 해설

        (2002.  영환(문) 제공)

成川都護府副使 安東金公 明理 墓誌銘

朝鮮國 奉政大夫 成川都護府副使 兼 勸農副使 安住 左翼兵馬團鍊副使 金公 明理 墓地銘

 

공의 성은 金이요, 諱는 明理이니 安東인이시다.  신라 경순왕 김부의 15대손인 고려국 문하시중 상락군개국공 金方慶1)의 5대손이시다. 증조의 諱는 金承澤이시니 직량동덕좌리공신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諡 良簡公이시며,할아버지의 諱는 金昴이시니, 추봉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중대광 上洛君이시며, 아버지의 諱는 金九容2)이시니,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이시다.  어머니는 추봉 봉익대부 밀직부사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 통직랑 예의정랑 南陽 洪義元의 따님니시다.  공은 1361년(고려공민왕10년)에 태어나시었다.  나이 9세에 음보로 총릉직에 출사하시었고 15세에 이승상과 같이 진사시에 급제하시었으며, 서기 1384년(고려우왕10년)4월1일에 아버지 척약재께서 전교시판사의 신분으로 요동도사에 행례사로 가시었다가 명나라 조정에서 고려의 세공마가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황제의 명으로 대리위에 귀양되어 가시는 도중에 병환으로 돌아가시었다.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픈 상중에도 생원과에 황현등과 함께 제4등으로 급제하시어 낭장에 제수되시고 이어   중랑장에 승진하시었다.  사헌부 감찰,호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하시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하신뒤 진양대도호부 판관을 거치시고 옥주군사에 나가시었다.  공은 백성을 다스리시매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관대하시고 또한 사랑하시니 만기가 되어 떠나실 때 백성들이 길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여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관과 정랑에 잠깐 계시다 호조의 군자소감에 오르시었는데 다시 경기 및 경상도의 경력을 지내시고 경창부 소윤을 하시다가 경기도 탄곡리에 퇴거하시어 호를 炭谷野 라 하시었다.  이로부터 여러차례 조정에 나오시기를 권고 받았으나 사양하시다 서기 1427년(조선세종9년)가을에 성천도호부부사를 역임하시었는데 또다시 사임을 청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더니 겨울에 질병을 말하여 사임되시니 다시 탄동에 되돌아오시었다.  서기 1438년(세종20년)12월 23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이때 나이 71세이시었다.  부인 경주이씨께서는 공에 앞서 서기 1409년(태종9년)겨울에 돌아가시었으니 묘를 광주 둔촌 목동의 산기슭에 모시었는데, 1439년(세종21년)12월16일에 탄동소재 공의 묘소 남쪽에 이장하시니 이는 공의 유언에 따라 행한 것이다.

 

공의 천성은 관후하시었고 풍의가 엄중하시었으니 타인의 실수를 탓하지 않고 부귀만을 탐하는 것은 대장부답지 못하다하였으며, 자제의 실수가 있었어도 즉시 질책하지 않으시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시었으며 의복은 필히 검소하고 음식은 정선하여 드시었으며 겨울에도 아무리 추워도 난로를 멀리하시고,여름에 무더위에도 부채를 쓰지 아니하시었으며, 틈만 나면 독서하시고 스스로 꽃씨를 뿌려 조석으로 손수 물을 주시며, 또 좋은 때 친구를 맞아하셔 술상을 극진히 대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늙어서는 마땅히 물러나야 하며 재산을 불리려고 함은 곧 원수를 기르는 일인지라 이를 구하지 말고 또 출세하려 발버둥 치지 말라"하시었다.

 

부인 이씨게서는 당성보리익찬공신 중대광 계림군이시며 시호는 文靖公 호는 霽亭이신 李達衷3)의 따님이시니 3남 4녀를 낳으시었다. 장남은 金孟獻4)이니 조봉대부 전농시 소윤 겸 지제교이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은 金仲舒5)이니 승사랑 전구서 부승이니 무오년에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삼남은 金季友6)니 무공랑 예문관 봉교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사재감 직장 權煊7)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좌군사직 南景福8)에게, 삼녀는 사선서 직장 金鐵山9)에게, 4녀는 중군 부사직 崔善文10)에게 각각 출가하었다.

 

소윤 맹헌의 부인은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李思儉11)의 딸로서 3남3녀를 낳으니 金自정12),金自壤13),金自堉14)이고 장녀는 尹흔15)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부승 金仲舒의 부인은 중훈대부 합천군사 金礎16)의 딸로 1남을 낳으니 金自완17)인데 아직 어리다.  봉교 金季友의 부인은 선략호군 郭仲義18)의 딸로서 1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金自均19)이요, 딸은 아직 어리다.  큰사위 權煊은 5남을 낳으니,생원 權국20, 權擴21), 權塡22), 權抱, 權추이며 장녀는 별시위 李孟智에 출가하였고, 둘째사위 좌군사직 南景福은 3남을 낳으니 南문, 南暲, 南暖이고, 3녀중 큰딸은 郭伸餘에게 출가하였다. 셋째사위 사선서 직장 金鐵山은 4남을 낳으니 생원 金國光23), 金謙光24), 金廷光, 金景光이고, 딸 둘은 아직 어리며, 金國光의 부인은 호군 黃保身25)의 딸로서 1남1녀를 두니 아들은 金유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넷째사위 중군부사직 崔善文은 4남3녀를 낳으니 崔漢公, 崔漢侯, 崔漢伯, 崔漢男인데 모두 어리고,장녀는 부사정 呂仁甫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여인보는 1남을 낳으니 呂範인데 아직 어리다.

 

소윤 金孟獻과 봉교 金季友는 모두 나와 같이 공부한 同年이다.  소윤 金孟獻이 나에게 찾아와 墓誌를 써주기를 극진히 청하여오니 나는 소윤 김맹헌과는 동문수학하고 같이 출사한 아주 교분이 두터운 사이인지라 감히 졸문이나마 사양치 못하고 썼노라.

 

                         서기 1439년(조선 세종21년) 10월 하순

                         중훈대부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세자 우보덕 완산인 柳義孫26)  씀

 

 *주 해설

 

  1) 김방경 1212(강종1)-1300(충렬왕26) 고려후기의 명장, 시호는 충렬공 삼별초의 난 평정, 고려와원나라의 연합군 도원수로서 일본 정벌  안동김씨의 중시조

  2) 김구용 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 고려말기의 정치가,성리학자,호 척약재,시호 문온공,안동김씨 문온공파 파조.

  3) 이달충.?--1385(우왕11) 본관 경주 시호 문정공, 호 제정, 계림부원군. 제정집이있음

  4) 김맹헌. 문과 대과 급제  예문관 직제학      

  5) 김중서.  생원과 급제  호조참의

  6) 김계우. 문과 대과 급제  의정부 사인   

  7) 권 훤. 안동인    

  8) 남경복. 의령인

  9) 김철산. 광산김씨. 사헌부지평,광성부원군.   

10) 최선문. 화순최씨, 시호 문혜공

11) 이사검. ?-1446(세종28) 양성이씨,시호 공소공 지중추원사     

12) 김자정. 직장       

13) 김자양. 내섬시첨정 호조참의     

14) 김자육. 무후

15) 윤흔. 펴평윤씨. 현령          

16) 김초.경주김씨. 군수      

17) 김자완. 사헌 감찰. 임피현령

18) 곽중의. 청주곽씨; 호군. 판서      

19) 김자균. 진천 현감        

20) 권국. 현감

21) 권확. 호군   

22) 권전. 판서   

23) 김국광. 1415(태종15)-1480(성종11) 광산김씨.시호 정정공. 좌의정. 광산부원군. 6세손이 사계 김장생

24) 김겸광. 1419-1490 시호 공안공. 예조판서. 광성군.       

25) 황보신. 황희 정승의 아들

26) 류의손 : 1398(태조7)-1450(세종32) 조선 세종때의 문관, 자는 효숙,호는 회헌, 본관은 전주, 세종때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감찰에 이르렀고, 집현전수찬이 되어 1436년(세종18) 중시에 2등 급제, 직제학에 이르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히고,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무고 사건으로 파직되매 세종이 슬퍼한 끝에 예조참판을 내리고 병이 심하여 몸이 쇠약하매 왕이 친히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권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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