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서삼리 고려 고분 논문 자료(08. 5. 9. 영환(문) 제공)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11-10-26 16:10 조회1,779회 댓글0건본문
[고려시대의 안동] 책에 실린 서삼리 무덤에 대한 글을 옮겨 봅니다.
고려시대의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문서원 2006.10.
발간사 책머리에
제1장 고려시대의 행정체제 개편과 안동의 변화 제2장 후삼국 통일의 발판, 고창전투 제3장 제비원 미륵불, 안동인의 희망을 지키다. 제4장 태사묘 유물은 통해 보는 고려시대의 허리띠 제5장 고려의 안동 인물. 김방경 제6장 봉정사 대웅전 불화와 고려 후기의 안동불교 제7장 발굴 자료로 본 안동 지역 고려시대 무덤 제8장 안동 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탑과 불상 제9장 고려시대 안동 지방의 군사 시설 제10장 고려시대 하회탈이 제작된 시기와 배경 제11장 안동차전의 기원과 전개 과정 제12장 고려말 조선 전기 안동 재지사족의 성장 과정
제7장 발굴 자료로 본 안동 지역 고려시대 무덤
1.안동의 고려시대 무덤 2.서삼리 벽화무덤 3. 안막동의 고려 무덤들 4.정하동의 고려무덤들 5.안동 고려고분에서 볼수 있는 몇 가지 특징들
1.안동의 고려시대 무덤 2.서삼리벽화무덤 이 무덤은 석곽묘(石槨墓)에 속한다. 특히 석곽묘 가운데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 네 벽과 천정을 각 한 장씩 화강암 판석으로 만든 것으로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사신도와 인물상 그리고 천정의 별자리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의 벽화무덤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조사 당시 이미 도굴되어 원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특히 유물은 중국과 고려의 동전 10여개와 토기편 수 점 만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또 석곽 내부에서 인골 일부와 철제 관못 등이 수습되었는데 이로 보아 목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인골도 상태로 미루어 보아 상당 부분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습되지 못한 인골이나 유물들은 무덤 근처의 조사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사진;서삼리 벽화무덤의 복원 후 전경
1) 구조 (1)봉토와 돌담 <1>봉토; 석곽의 개석과 같은 높이로 개석 주위에 장방형으로 지대석을 돌리고 그 위에 봉토을 올린 방형 봉토분이다. 봉토 밑면 410X290cm, 장축은 남북이며, 봉토는 지대석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쌓았다. 면 최고 50-60cm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2>돌담; 봉분과 약 40cm 떨어져 봉분의 삼면을 따라 돌담을 돌렸다. 남쪽은 지대석만 있고 담을 쌓지 않았다. 이처럼 봉분 주위에 돌담을 돌리는 것은 고려시대 무덤에서 흔히 보이며 고려 분묘의 전통이 아직도 계승되고 있던 조선 초기 분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묘 앞 시설; 묘의 전면에는 폭이 넓은 석단을 만들고 있는데 신분이 높은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며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2)석곽 네 벽의 천정이 모두 각 1장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의 석벽이 출입문으로 사용되었다. 석곽의 길이 229cm, 폭 96cm , 높이 90cm 이며 장축은 남북이다. 천정에는 별자리 그림과 구름무늬가 있고 별자리 그림을 28수(宿)와 해, 달, 사보천극(四輔天極)이 그려져 있다. 사벽에는 방위에 따라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인물도가 있다.
사진;남쪽 입구를 통해 보이는 석곽 내부
(3)제사유구 무덤을 완성한 뒤 의식을 행한 유구를 말한다. 주술적 성격이 강하며 석곽을 완전히 매장한 후 지낸 평토제와 분묘 전체를 완성한 후 행한 의식 등 두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석곽 정남 표토하. 남쪽 장대석에서 40cm 되는 곳의 지표 아래 35cm 지점에 직경 50cm 깊이 13cm 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작은 동물 한 마리를 불에 태워 뼈를 묻었다. 구덩이 위는 작은 화강암 조각으로 덮여 있었다. 짐승 뼈는 개로 추정되는데 무덤을 지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덩이는 석곽의 뚜껑과 거의 같은 높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석곽 뚜껑을 덮은 후 평토제를 지낸 흔적으로 보인다. <2>북쪽 돌담 틈에서 회색의 토기가 깨진 채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북쪽 돌담의 정 중앙부 윗부분의 무너진 돌 틈에 끼워진 채 있었는데 동물 뼈를 묻은 남쪽 유구와 대칭되는 곳이다. 따라서 무덤의 뒤쪽에서 무덤을 지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 지며 그릇을 깨서 돌 틈에 끼워 넣은 것은 그릇이 깨질 때 나는 소리가 나쁜 기운을 내쫓는 역할을 한다고 하는 풍습과 관련 있을 것이다. 사진;북쪽 돌담 틈의 깨진 토기 사진;석곽 중앙부 남쪽의 동물 뼈를 묻은 제사유구 오른쪽 돌 있는 부분
2)출토 유물
(1)동전 석곽 내부에서 모두 16점의 동전이 수습되었다. 동전의 종류는 고려전(高麗錢)3종4점, 중국의 당전(唐錢)1종2점과 송전(宋錢)8종10점이다. 가장 오랜 것은 621년 주조된 당의 개원통보(開元通寶)이며 가장 늦은 것은 1086에서 1093년까지 사용된 송의 원우통보(元祐通寶)이다. 또 고려전으로 가장 오랜 것은 1002년에 주조된 동국중보(東國重寶)이다.
(2)철제 손칼과 헝겊에 싸인 쇠조각 길이 5.5cm 폭 1.3cm 의 철제 손칼과 손칼의 칼집 일부로 추정되는 헝겊에 싸인 쇠조각이 수습되었다. 쇠조각에는 얇을 종이가 붙어 있고 그 위로 헝겊이 두 겹 싸였는데 구리의 녹으로 보이는 푸른색이 마직물 전체에 골고루 배어 있었다. 헝겊은 평직으로 된 마직물로 본래는 철편을 완전히 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토기 북쪽 돌담에서 출토된 것을 흑회색 경질의 무유도기(無釉陶器)이다. 어깨 위는 깨져 없어졌으며 좁은 목을 가진 매병(梅甁)의 형태로 보인다. 몸통 직경 17cm 밑면 직경 9cm 이다. 파편의 출토로 보아 약간의 토기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서삼동 벽화무덤 출토 유물들, 유물 간의 비례는 서로 다름
3)피장자
무덤 안에서는 몇 점의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대퇴골 1점, 두개골 편 3점, 치아4점이 남아 있었다. 남은 인골의 상태로 보아 애초 상당 부분의 인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도굴범들이 대부분의 인골을 수습해 다른 곳에 버린 것으로 보였다. 치아 상태로 보아 무덤의주인은 대체로 40세 전후의 남자로 추정되었다. 40세 전후라면 남자의 가장 왕성한 활동기로서 이 남자는 인생의 전성기에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안동의 북쪽 녹전을 고향으로 둔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호족 출신의 귀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서삼리 무덤처럼 벽화가 있는 방형 봉토분이 경남의 거창, 진주 등 개성에서 먼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은 12세기 초엽까지도 이러한 지방 출신의 호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4) 벽화의 내용
그림은 천정을 제외하고는 돌벽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으며 북벽의 회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은 회의 흔적만 약간씩 남은 정도였다. 천정의 별자리 그림은 회를 바른 흔적이 없으며 그림의 상태도 매우 좋아 본래부터 회를 바르지 않고 돌 위에 직접 채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사방의 벽면과 천정에 그려진 벽화의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겠다.
(1)동벽 청룡이 벽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상태는 벽화 중에서 가장 나빠서 구체적인 형태는 거의 알아본 수 없었는데 전체 길이는 약 30cm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는 석곽의 입구 쪽으로 향하여 있으며 머리 형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입구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다리 앞부분은 분명치 않고 몸의 중간에 있는 것이 비교적 뚜렷한데 이는 뒷다리의 하나로 생각된다. 뒷부분은 꼬리와 뒷다리가 갈라져 서로 얽혀 있는데 밑의 것이 뒤로 뻗친 뒷다리로 생각된다. 고구려 벽화의 경우 대체로 꼬리가 위를 향하여 비스듬히 뻗혀 있는데 비해서 이것은 꼬리를 둥글게 구부려 아래로 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록색으로 그렸으며 갈색의 가는 선으로 윤곽을 그렸다. 이처럼 꼬리와 뒷다리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이 고려시대의 동경(銅鏡)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 무덤의 사신도는 고려 전기 사신도의 특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동벽 청룡
(2)서벽 중심부에 백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전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석곽 입구에는 가늘고 검은 선으로 그려진 인물상이 있다. 인물은 머리에 두건을 썼는데 두건의 끈 같은 것이 뒤로 늘어져 있고 앞으로는 목이 긴 병을 안고 있다. 두 팔은 손을 맞은편 소매자락 속에 넣고 둥글게 돌려 병을 싸안고 있는데 병과 팔이 몸에서 너무 앞으로 나와 있어서 전체적으로 매우 어색하게 보인다. 옷은 발까지 내려오는 도포를 입은 듯 한데 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눈, 코, 입이 분명하다. 인물은 석곽 내부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의 바로 앞에는 굵고 검은 선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이는 백호의 치켜올린 앞다리로 보인다. 인물상의 높이는 약 20cm 이다.
사진;남복 주작
(3)북벽 벽 중앙부에 현무도가 있다. 네 벽 가운데 상태가 가장 좋으며 역시 회칠을 한 후 그 위에 검은색으로 현무를 그렸다. 전체 높이 18cm 인 현무는 입구를 향하여 정면으로 그려졌으며 거북의 등이 비교적 선명하다. 배 부분은 청색을 칠하였다. 배의 좌우 끝에는 발가락이 셋으로 갈라진 발이 헤엄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은 가슴 중앙부에서 ‘S'자형으로 틀어 올려졋고 머리는 오는 쪽, 즉 서쪽을 보고 있다. 등 위에는 삼각형을 한 분명치 않은 물체가 앉아있으며 그 좌우의 선이 현무의 양 옆으로 날카롭게 흘려 내렸는데 오른쪽에는 현무의 꼬리가 옆으로 나와 있다. 목은 안쪽으로 뱀의 배와 같은 비늘을 그렸으며, 머리에는 눈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다. 머리 위로는 뿔 같은 것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현무의 등 위에 있는 삼각형의 물체는 언뜻 보아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상태가 나빠 사람으로 단정 짓기 어려우며 산이나 발위 등일 가능성도 있다. 현무가 정면으로 앉은 것으로 묘사된 것은 주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또는 그 이후의 무덤벽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예이다. 그러나 앞의 주작도처럼 허재, 최광 등 고려 석관에 새겨진 음각 사신도가 서삼동 무덤의 것과 매우 흡사하며 이로 미루어 서삼동 무덤의 경우 역시 고려 전기 사신도 양식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북쪽 현무
(5)천정 천정 전체는 청록색으로 되어 있고 중심은 주위보다 더 짙은 청색으로 원을 그렸다. 그 내부에는 붉은 별자리를 배치하였다. 원 외부의 남쪽과 북쪽에는 흰색으로 구름을 그렸다. 별을 그린 둥근 원은 직경 80cm 로 하늘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별은 검은 선으로 직경 1cm 가량의 원을 그리고 내부를 붉게 칠하였다. 중심부에는 북두칠성과 비슷하지만 모두 9개의 별로 이루어진 성좌가 자리하며 그 양쪽에는 직경 2.5cm-3cm 의 다른 별보다 훨씬 큰 붉은 원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다른 별과 특별히 구별되는 것으로 보아 해와 달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의 별자리 그림에 있어서 해와 달의 묘사는 고구려 이래의 전통이며 동쪽에 해, 서쪽에 달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레에 배치된 별은 현재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이 165개인데 떨어져 나간 것이 약간 있는 듯하며 본래는 170개가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 천정에 별자리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 이래의 전통이다. 이 별자리 그림들은 대체로 중국의 28수(宿) 방위에 따라 몇 개씩 골라 그리든가 전체를 그린 것인데 28수 전체를 그린 것으로는 덕흥리 2호분이 대표적이며 서삼동 무덤과 매우 닮았다. 또, 일본의 다카마쓰쓰카(高松塚)무덤의 천정에서도 완전한 28수도 그림이 나온 바 있다. 서삼동 무덤은 다카마쓰쓰카 무덤보다는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지만, 다카마쓰쓰카 무덤보다 훨씬 많은 170여개의 별로 이루어진 것으로 182개의 별로 이루어진 본래의 28수와 거의 같은 수로 되어있다. 서삼동 무덤의 28수도 중심에 그려진 9개의 별은 일반적으로 북두칠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다카마쓰쓰카무덤에서 중심에 9개의별로 이루어진 ‘사보(四輔)천극(天極)’별자리나 고구려 천문도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 태조 4년 제작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上列次分野地圖)>의 중심부에 있는 ‘사보천극(四輔天極)’별자리와 비교할 때 서삼동 역시 사보천극 별자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史記)]-[천관서(千官書)]에는 별자리를 ‘천관(天官)’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중관(中官), 동관(東官), 남관(南官), 서관(西官), 북관(北官)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의 동.남.서.북관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사방 28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중심부에는 중관이 있는데 중관은 천극성(天極星)을 대표로 하며 가장 밝은 것은 태일(太一)이다. 그 옆의 세 별은 삼공(三公)을 말한다. 태일 뒤의 구부러진 네 개의 별은 끝에 있는 큰 별이 정비이고 다른 세별은 후궁이라 되어 있다. 또, 이 정비와 후궁을 의미하는 네 별을 ‘사보(四輔)’하 한다. 이 중관은 천제(天帝)가 있는 자미원(紫薇垣)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보 천극을 중심으로 한 28수의 배치는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완성되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서삼동 무덤이 축조된 12세기 전반은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재를 완성시키는 시기로서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림;천정 별자리 그림;별자리 그림에 붙은 구름 그림
5)출토 동전과 그를 통해본 축조 시기
앞에서 살핀 대로 석곽 안에서는 16점의 고려전과 중국의 당전 송전 등 동전들이 수습되었다. 이 동전들의 주조국과 사용 연대를 만들면 아래와 같다.
東國重寶 2개 高麗 穆宗5(1002) 東國重寶 1개 高麗 肅宗2-10(1097-1105) 海東通寶 1개 高麗 肅宗2-10(1097-1105) 開元通寶 2개 唐 高祖 武德4(621) 天聖元寶 1개 宋 仁宗 天聖年間 1023-1031 明道元寶 1개 宋 仁宗 明道年間 1032-1033 景祐元寶 1개 宋 仁宗 景祐年間 1034-1037 皇宋通寶 2개 宋 仁宗 皇宋年間 108-1039 嘉祐通寶 1개 宋 仁宗 嘉祐年間 1056-1063 熙寧元寶 2개 宋 神宗 熙寧年間 1068-1077 元豊通寶 1개 宋 神宗 元豊年間 1078-1085 元祐通寶 1개 宋 哲宗 元祐年間 1086-1093
위의 동전 중 가장 오랜 것은 7세기에 사용된 당의개원통보이지만 개원통보는 고려시대까지도 상당량이 유포되어 있으므로 이 무덤의 축조 시기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중국 동전이라도 송나라의 동전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고려에 수입되어 일반적인 화폐로 유통되었으므로 이 무덤의 축조 연대를 정하는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이 동전들 가운데 가장 늦게 사용된 것은 송의 원우통보로 1086년부터 1093년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무덤의 축조된 시기는 1086년부터 1093년 이후의 어느 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서삼동 무덤에 보이는 고구려적 전통
우리나라의 방형분 전통은 고구려 초기의 방형 적석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통은 백제 초기의 서울 석촌동, 방이동 등지의 방형계단식 적석총으로 이어지는데 그 이후 삼국 및 신라의 분묘에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방형분은 고구려 묘제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에 들어오면 경기도 양주군 최영장군묘, 거창 둔마리 벽화무덤, 진주 석갑산 무덤등이 모두 방형 봉토분을 하고 있다. 이는 고려의 건국이념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곧,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이 명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문화적 축면에서도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음을 이러한 무덤의 형태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고구려적 전통은 석곽 내부의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무덤벽화가 중.후기로 들어오면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무덤의 벽화도 역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다만 고구려의 사신도와 달리 고려의 사신도는 주작과 현무가 정면상 배치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며 고려적 특징이아 할 것이다.
3. 안막동의 고려 무덤들
1)안막동 2호분 ..........
필자; 임세권=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암각화학회 고문이며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암각화], [중국변방을 가다.],[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 [우리 인문학과 영상](공저0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한국선사암각화의 한국적 형상성의 성립], [선사시대 한국과 중국의 암각화 비교연구], [신세동7층전탑의 원형복원], [한국전탑의 전래와 변천과정]등이 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