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제례의식(祭禮儀式)에 대한 일고(一考)(2)-우리나라의 효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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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6:15 조회1,398회 댓글0건본문
우리의 효사상은 오래 전부터 엄격하게 교육하고 크게 장려하여 일상생활 속에 관습화 ․ 생활화 되어 왔다. 일찍이 고대의 지석묘와 단군신화에서 조상숭배사상을 발견할 수 있고, 삼국시대에는 유교의 효사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교육기관인 태학(太學)과 경당에서 유교의 경전인 오경삼사(五經三史 : 오경(五經)- 詩經,書經,易經,禮記,春秋. 삼사(三史)-史記,漢書,後漢書)를 비롯한 한학을 교육하면서 효(孝)를 가르쳤고, 효를 행하는 사람을 관리로 천거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시면 봉토(封土)를 만들고 부근에 나무를 심어 정화(淨化)하였다. 백제에서는 정확한 기록물을 찾을 수는 없으나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교적 윤리관과 효를 크게 강조했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신라는 가장 늦게 유학을 도입했지만 신문왕 2년(682년)에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을 세워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효녀 지은(知恩), 향덕(向德), 설씨녀(薛氏女) 등이 나오며, 화랑도의 세속오계(忠孝信勇仁)에 효를 크게 장려했다는 것과 통일신라시대에 《논어(論語)》, 《효경》등을 기초로 한 유교적(儒敎的) 효사상을 지식인들의 기본교양으로 삼았다는 기록 등은 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 때까지 효를 얼마나 널리 장려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정신적 기반으로 불교와 유교를 병립하였다. 최고 학부인 국자감 외에 향교, 학당, 서당 등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필수로 교육했고, 성종 때에는 충과 효를 크게 장려하였으며, 그 후 역대 임금들은 효자 효부를 표창하였고 관리들에게는 효행을 위한 휴가를 주기도 하였다.
조선조 때는 성균관, 서울의 사부학당,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기관에서 유교와 효경, 소학 등을 가르치고 향약제도를 실현함으로써 효사상을 매우 고귀한 윤리와 덕목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하였다. 우리나라 전국의 각 마을 입구마다 효자각(孝子閣)과 효자 정문(旌門)들이 즐비하며, 집집마다 《효행록》,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이 필수 교양 도서로 구비되어 있었던 것 등은 당시에 효를 얼마나 크게 강조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시기는 효의 이론면과 실천면에 있어서 명실 공히 최대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일제강점기와 6.25동란을 거쳐 현대의 산업사회와 정보화시대를 맞이하면서 약간의 형식적 변화는 있었지만 효의 개념과 이에 따른 제례의식(祭禮儀式)은 면면히 전수되어 왔다. 즉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며, 봉양한다는 효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이 인륜의 가장 으뜸가는 덕목으로 삼아왔으며, 그에 따른 각종의 예절과 제례의식도 각 시대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변화 발달돼 왔던 것이다. 오늘날 각 가정의 기제사와 시제, 한식과 명절 때의 성묘 행렬 등에서도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효사상(孝思想)은 중국에서 먼저 이론을 정리하고 강조했지만 청출어람(靑出於藍)격으로 이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재정립하고 체계화하였으며 실천적 측면인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각종 제례의식도 잘 발전시켜온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사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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