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김방경 연보(김항용본).(2009. 1. 7. 항용(제) 제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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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6:17 조회1,905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연보(年譜) (김항용본)
*본 충렬공 연보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족보본, 복제본), 행장, 묘비문, 김태영본(안동김씨 홈페이지, 역사적 인물 김방경란), 장동익본(<충렬공 김방경>. 2006. 12. 안동대학교 편저. 안동시 간) 등을 상호 비교하여 정리하였으며 서로 상이한 것은 별도의 주를 달았음. 특이한 관직명은 <高麗時代 官階 官職 硏究>(고려대출판부. 박용운저. 1997. 6), 국사대사전(새국사사전. 교학사. 1996) 등을 참고하여 주를 덧붙였음.
1. 1212년(강종 1). 1세
이름은 김방경(金方慶)이요 자(字)는 본연(本然)으로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서 3남 2녀 중 장자(長子)로 출생하였다. 신라 56대 왕인 경순왕 후손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증조(曾祖)는 예부시랑(禮部侍郞) 김의화(金義和), 조(祖)는 장야서령 겸 직사관(掌冶署令兼直史館) 김민성(金敏成), 부(父)는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 모(母)는 원흥진부사낭장(元興鎭副使郎將) 송기(宋耆, 金寧人)의 따님인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 했을 때 가끔 안개와 구름 속에 싸이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운기(雲氣)가 항상 코와 입에 닿으니, 아들이 반드시 신선 가운데에서 점지해 나오려는 듯하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랄 때는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혹 자기 의사를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으레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도리어 무서워하며 김방경을 피해 지나갔다 한다.
2. 1213년(강종 2). 2세
*8월 : 고려 고종이 즉위 하였다. 대륙에서는 몽고가 새로 일어나 거란과 대치하였다. 거란은 그동안 고려를 무수히 짓밟아왔던 숙적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몽고와 거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3. 1219년(고종 6). 8세
*1월 : 몽고군이 거란의 모든 성을 처부수고 마지막으로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고려의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이 몽고의 요구에 의하여 몽고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4. 1224년(고종 11). 13세
*5월, 부(父)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 김효인(金孝印)이 보경사 원진국사(寶鏡寺圓眞國師)의 비문(碑文)을 썼다.
*조(祖-金敏成)로부터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서 학문을 배웠고 낙동강 상류의 상락대(上洛臺) 등에서 심신(心身)을 연마하였다.
5. 1227년(고종 14). 16세
*5대조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일긍(金日兢)의 음서(蔭敍)로 양온서동정(良醞署同正)(주1)에 임명되었다가 차대정(借隊正.종9품)(주2) ․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을 거쳐 산원(散員.정8품) 겸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정9품)에 임명되었다. 이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忠直)함을 사랑하여 예(禮)로써 대우하고 큰일을 많이 맡겼다.
#주1. *양온서(良醞署) : 궁중에서 술을 바치는 일은 담당하던 곳. 문종때는 양온서(良醞署), 뒤에 장례서(掌醴署)로 고치고 신종때 양온서로 복귀했다가 충렬왕때 사온감(司醞監)으로 개칭했다.(새국사사전.교학사.1996. 이하 ‘국사대사전’이라 함),
*양온사(良醞史) : 행장, 장동익본
*동정(同正) : 일정한 직책이 아직 부여되지 않은 허직(<高麗時代 官階 官職 硏究>. 고려대출판부. 박용운저. 1997. 6. 참고.-이하 ‘고관연’이라 표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주2. *대정(隊正) : 행장,
*차대정(借隊正) : 장동익본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차(借) : 일시 빌려서 하는 임시 직위(고관연)
*국사대사전 : 고려 무관직의 최 하위직
6. 1231년(고종 18). 20세
*8월 29일, 몽고 원수(蒙古元帥) 살리타이(撒禮塔)가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鐵州)를 공격하는 등 몽고군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10월 1일, 몽고인(蒙古人) 2인이 첩(牒)을 가지고 평주(平州)에 오자 김방경의 부(父) 전중시어사 김효인(殿中侍御史 金孝印)을 파견하여 사유를 묻게 하였다.
7. 1232년(고종 19). 21세
*6월 16일,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약 10만에 이르는 개경의 민호(民戶)는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고, 강화도 천도가 적의(敵意)의 표시가 되어 이 해 가을 몽고의 살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제2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타버렸다. 그러나 수전(水戰)에 미숙한 몽고군은 천의 요새지인 강도를 쳐들어가지 못하고, 내륙지방을 짓밟아 엄청난 참상을 당하였다. 살리타이는 처인성(處仁城)에서 사살되었다.
8. 1237년(고종 24). 26세
*4월, 백부(伯父) 김창(金敞)이 판대복시사(判大僕寺事)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다.
9. 1242년(고종 29). 31세
*4월 9일, 백부(伯父) 김창(金敞)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0. 이 후
*서북면병마록사(西北面兵馬錄事.정9품)․별장(別將.종7품)․낭장(郎將.정6품)을 역임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에 임명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게 됨에 청탁(請託)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상(宰相) 모(某)가 권신(權臣. 집정자 崔瑀로 추정)에게 김방경을 헐뜯자, 이에 권신(權臣)이 김방경을 질책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
11. 1247년(고종 34). 36세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정5품)(주3)에 임명되었다.
#주3
*김태영본 : 1231년(고종 18년. 20세)에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 되었다.
12. 1248년(고종 35). 37세
*3월, 왕이 북계(北界-西北面) 병마사(兵馬使)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북계의 여러 성(城)에 있는 백성들을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 김방경은 병마판관(兵馬判官.정5품)으로서 위도(葦島-지금의 평안도 정주)에 들어갔다. 안북부(安北府)에 위도(葦島)라는 곳은 10여 리(里)나 되는 평탄하고 넓은 곳이 있었지만, 바다의 조수(潮水)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는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쌓고 개간(開墾)하여 종자를 뿌리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괴로워하였으나,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이 그 힘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섬에는 우물이 없어 물을 길러 간 자가 때때로 몽고병에 사로잡혀 가므로 김방경이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하여 못을 만들어 여름에는 끌어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얼음을 뜨게 하니 그 걱정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어,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13. 이 후
*견룡행수(牽龍行首)(주4)에 임명되어 해이해진 숙위(宿衛)를 철저히 하였다.
#주4. 견룡행수 : 고려시대에 국왕의 숙위 및 의식을 담당한 숙위군의 대장. 대전·동궁·제비주부의 숙위를 담당하고 태묘의식 등 각종 의식에 거의 참가하였으며, 의장에도 시종하였다. 말단의 무관직이나 국왕을 가까이 하며 총애를 받아, 권문세가 자제들의 관심 직책이었다.
*좌금중지유 섭장군(左禁中指諭 攝將軍(정4품)(주5)에 임명되었다.
#주5 *攝將軍 : 장동익본, 행장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없음
*‘攝’은 실직이 아닌 임시 직위라는 의미.(고관연)
14. 1250년(고종 37). 39세
*5월 8일, 부 김효인(金孝印)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주6)가 되었다.
#주6. *동지공거(同知貢擧) : 지공거(과거 시험관)의 바로 아래 직위
15. 1253년(고종 40). 42세
*11월 15일, 김방경의 부(父)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이 별세하였다.
16. 1256년(고종 43). 45세
*2월 4일, 백부(伯父)인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김창(守太師 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金敞)이 죽으면서 김방경에게 국장(國葬)을 사양하게 하였다.
17. 이 후
*장군(將軍.정4품)에 임명되어 급사중(給事中.종4품)을 겸임함.
*어사중승(御史中丞.종4품)에 임명되어 법을 엄격히 준수함.
*1258년(고종45). 최씨무인정권 붕괴되었다.
18. 1260년(원종 1). 49세
*3월 1일, 태손(太孫-충렬왕)이 옛 서울 개경으로 환도(還都)하고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장군 김승준(金承俊) 등을 출배별감(出排別監)으로 삼아, 창고의 쌀 6천 4백 20곡(斛)을 꺼내어, 제왕(諸王)과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고, 서울에 집을 짓는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3월 3일, 지형부사(知刑部事.종3품)에 임명되었다.
19. 이후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종3품)으로 지합문사(知閤門事.종3품)(주7)를
겸임하였다.
#주7. *지합문사(知閤門事) : 행장, 묘지명, 고관연, 국사대사전
*지각문사(知閣門事) : 장동익본.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비문 : 기록 내용 없음
20. 1263년(원종 4). 52세
*어사중승(御史中丞.종4품)으로서 전선(銓選)을 장악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종4품) 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와 반차(班次-官品)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이로 인해 김방경 인척들의 사환(仕宦) 길이 막히었다.
*12월 20일, 김방경(金方慶)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종4품) 겸 선군별감(兼 選軍別監使. 종3품)에 임명되었다. 김방경은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풍절(風節)이 늠름하였다(<麗史制綱>). 방경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감찰어사(感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였는데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권신(權臣)에게 참소하기를, "지금 어사는 전의 어사가 봉공(奉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때마침 방경이 이르자 권신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전의 어사와 같도록 하려면 나도 또한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나는 나라의 창고를 쌓는 것이 요긴하지 여러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다." 하니, 참소한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을 때 금위군(禁衛軍)이 권문(權門)에 다투어 아부하느라고 숙위(宿衛)가 몹시 게을러지니, 방경이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었으나 휴가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어사대에 들어와서는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서 풍채와 절개가 늠름하였다(<東史綱目>)
21. 1265년(원종 6). 54세
*1월 25일, 광평공 순(廣平公 恂)․대장군 김방경(大將軍 金方慶)․중서사인장일(中書舍人 張鎰) 등을 몽고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5월 1일, 광평공 순(廣平公 恂)․대장군 김방경(大將軍 金方慶) 등이 몽고에서 돌아왔다.
22. 이 후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를 겸임하였다.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혜정(惠政)을 베풂. 모상(母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임명되었다.
23. 1268년(원종 9). 57세.
*2월, 중방(重房) 장교(將校)들의 반주(班主)인 응양군상장군 전빈(鷹揚軍上將軍 田份)의 미움을 받았다. 이때 권신(權臣.집정자 金俊으로 추측됨)에 의해 남경부사(南京副使)로 좌천되었다.
*2월 25일, 남경에 부임한 지 3일만에 북계(北界) 40여 성(城)에서 글을 올려서 김방경(金方慶)이 이 지역에 다시 와서 진무(鎭撫)하기를 청하니, 왕이 김방경을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정3품)(주8) 西北面兵馬使(주9)로 삼았다. 방경이 앞서 북계를 진수(鎭守)하면서 백성에게 유애(遺愛)가 있었기 때문이다(<麗史提綱>).
#주8. *判禮賓省事 : 고려사. 고려사절요, 행장, 김태영본, 국사대사전
*判秘書省事 : 장동익본
#주9. *西北面兵馬使 : 장동익본, 김태영본
*北界兵馬使 : 고려사절요
24. 이 후
*서북면병마사에서 돌아와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3품)(주10)에 임명되었다.
#주10.
*김태영본 : 1265년(원종 6). 김방경(金方慶)을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25. 1269년(원종 10). 58세.
*6월 18일, 임연이 재추(宰樞)를 모아 원종(元宗)을 폐위(廢位)하기로 의논한 뒤, 21일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옹립하고 원종을 별궁으로 옮김.
*9월 7일, 집권자 교정별감 임연(敎定別監 林衍)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방경(金方慶),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몽고에 보내 원종(元宗)의 폐위사건(廢位事件)을 변명하게 하였다.
배신(陪臣)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왕(前王)이 질병에 걸려 크게 위독하므로, 장차 분수를 지켜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여, 간절히 영화를 사양하고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또한 형이 왕위를 사양할 때에는 그 아우에게 전하라는 것은 선왕(先君)의 유언이 있었고, 또 이 번국(藩國)의 왕위를 하루라도 비워 두기가 어렵습니다. 국왕은 진실로 부왕(父王)의 명령을 거스르거나 신자(臣子)의 상도(常道)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여, 이에 어쩔 수 없이 임시로 국사를 맡아보고, 문득 그 사유를 자세히 써서 서둘러서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때 몽고에 있던 세자(世子-忠烈王)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병사를 내어 줄 것을 요청하여 몽가독(蒙哥篤) 휘하의 군사를 출동하게 하였다. 문하시중 이장용(李藏用)이 이들을 안내하게 될 인물로서 김방경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세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김방경은 몽고군과 함께 동경(東京)에 주둔하였다.
*9월, 유천우(兪千遇)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김방경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주11)로 삼았다.
처음에, 천우가 좌승선(左承宣)이 되어 오래 정병(政柄: 관리임명권)을 잡았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다 따라붙었다. 방경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적에 길에서 그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揖)하였다.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드는 몸이라, 3품 이하는 다 은피(隱避)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러하오?" 하니, 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3품이나 그대가 조삼(早衫) 차림으로 명을 받든 몸이니, 내가 예를 행하고자 할 따름이오." 하여 오래도록 서로 따지다가 방경이, "해가 저물었소." 하고 먼저 갔는데, 천우가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다. 그래서 방경의 친족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는 다 억제 하였으나 방경은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에 천우의 전장(田庄)이 장사(長沙)에 있었으나 방경은 요란 피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東史綱目>)
#주11. *고려사 : 9월, 김방경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使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장동익본, 김태영본 : 12월 13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행장 : 12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명 : 기록 없음
*10월 13일,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한신(崔坦․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의 수령을 죽였으나, 김방경의 매서(妹婿)인 박주수 강빈(博州守 姜份) ․ 연주수 권천(延州守 權闡)만은 방경(方慶)의 선정(善政) 연유(緣由)로 인해 해를 입히지 않고 예로써 대접하였다.
*11월 23일, 원종(元宗)이 복위하였다.
26. 1270년(원종 11). 59세
*1월 9일, 몽고에 파견되었던 문하시중 이장용(門下侍中 李藏用)․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김방경 등이 동경(東京-遼陽) 부근의 행궁에서 몽고로 행차하던 원종을 알현하였다.
몽고에서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경(西京)에 주둔하게 하였다. 처음에 세자(世子)가 임연(林衍)의 변란소식을 듣고 몽고에서 군사를 내어 줄 것을 청하니, 몽고는 바로 몽가독을 파견하였고, 몽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몽가독이 만약 오랫동안 서경에 머물고 있으면, 임연이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배반 하였으니, 반드시 군량미를 공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임연과 내통하지 않을 사람을 뽑아서 함께 가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그 인선(人選)을 어렵게 여기니,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金方慶)이 두 번 북계(北界)의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백성들에게 남긴 은혜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김방경에게 몽가독을 동반하여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계책을 말하기를, "몽고 관군(官軍)이 서경에 이르러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건너면, 왕경(王京)이 저절로 혼란하여져 장차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황제의 분부를 받아서 대동강을 건너지 말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이것을 윤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들이 울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공이 만약 여기 있었다면 어찌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다투어 와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때에 최탄 등은 몽고 군사에게 의지하여 속으로 고려가 허약한 틈을 타서 나라를 방탄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을 후하게 대접하고 날마다 간사한 계략으로 꾀었으나, 김방경이 언제나 계책을 내어 이를 저지 시켰다.
임연은 왕이 몽고 군사를 청하여 옛 서울 개경을 회복하려는 것이 염려되어, 황제의 명령을 거역 하고자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하게 하였고, 또 신의군(神義軍:三別抄의 하나)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최탄과 한신 등이 그 음모를 알고 비밀히 배(舟楫)와 복병(伏兵)을 갖추고, 남몰래 몽가독에게 이르기를, "임연 등이 장차 몽고 관군을 죽이고 제주도(濟州島)에 들어가려고 하니, 청컨대, 관인(官人)께서 나가서 사냥한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고려 경군(京軍)의 왕래하는 상황을 살펴서 서로 보고하게 하면 우리들은 수군(舟師)으로 보음도(甫音島), 말도(末島)에 진군하고 관인께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나가면 저들이 능히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 정상을 알아낸 다음에 황제에게 자세히 아뢴다면, 왕경(王京)을 빼앗을 수 있으며, 고려의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을 다른 놈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몽가독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오득공(吳得公)이란 자가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비밀히 김방경에게 고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니 오득공이 말하기를, "만약 믿지 못하시겠거든, 남몰래 정찰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모이고 최탄 등이 기뻐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몽가독이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객지에 오래 있어서 무료하므로, 사냥이나 즐기겠는데, 공은 나를 따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어느 곳에서 사냥할 겁니까?" 하니 몽가독이,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黃州), 봉주(鳳州)에 이르러 초도(椒島)까지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官人)께서 황제의 분부를 들었을 터인데, 어찌 강을 건너려 하십니까?"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사람이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황제께서도 또한 알고 계신데, 그대가 어찌 이를 막는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지할 뿐입니다. 만약 관인께서 사냥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찌 반드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간 다음이라야 즐겁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몽가독이 말하기를, "만약 대동강을 건넜다고 죄를 받는다면 내가 혼자 당할 터인데,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관인께서 어떻게 강을 건너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건너고 싶거든, 반드시 황제의 명령을 품신(稟申)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비밀히 지보대등을 타일러서 군사를 후퇴 시키도록 하였다.
몽가독은 김방경의 충성과 정직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크게 그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사실대로 고하기를, "고려 왕경(王京)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최탄의 무리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였다.
*2월 25일, 임연이 병사하고,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5월 14일, 집권자 임유무가 피살되었다.
*5월 29일, 사신을 강화에 보내 삼별초(三別抄)를 파(罷)하게 하였다.
*6월 1일,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났다.
*6월 13일, 김방경을 역적(逆賊-三別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김방경은 군사 6천여명을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宋萬戶)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 지금의 南陽)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김방경이 이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이를 만류 하였는데, 적은 이에 도망 하였다.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노소 모두 1천여 인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방경이 돌려보내 주기를 행성(行省)에 청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았다.(<東史綱目>)
*8월 19일, 삼별초가 진도(珍島)에 입거(入居)하였다.
*9월 7일, 신사전(申思佺)을 대신하여 전라도 추토사(追討使, 혹은 討賊使)에 임명되어 몽고 원수(蒙古元帥)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 토벌에 나섰다. 김방경이 아해(阿海)와 함께 나주(羅州) 부근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駐屯)하면서 진도와 대치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진도(珍島)를 토벌 하였는데, 이때에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여러 주, 군(州郡)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적이 장차 나주에 이르려고 하자, 부사(副使) 박부(朴浮)등이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나주 향리(鄕吏) 정지려(鄭之呂)가 분개하여 말하기를, "만약 성에 올라가서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산골짜기로 군사를 피할 것이지 무슨 면목으로 고을의 수리(首吏)가 되어서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겠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사록(司錄) 김응덕(金應德)은 성품이 본래 용감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분연히 성을 지키기로 뜻을 결정하고 금성산(錦城山)에 들어가서 지키면서, 가시나무를 꽂아 목책(木柵)을 만들고 군졸을 거느리고 독려하였다. 적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상처를 싸매고 결사적으로 지키니, 적이 무릇 이레 동안 밤낮으로 성을 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을 사람 김서(金敍), 정원기(鄭元器), 정윤(鄭允) 등이 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왕이 가상하게 여겨서 김응덕에게 7품 벼슬을, 김서 등에게 섭오위(攝伍尉) 벼슬을 내려 주었고, 또 미곡을 내려 주었다. 처음에 적들이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항복할 것을 논의 하였으나, 전주 사람들이 또한 망설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도중에서 이 말을 듣고 군사를 버리고 갈 길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가서 먼저 전주에 통첩하기를, "아무 날에 마땅히 1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을에 들어갈 것이니, 곧 군량미를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주에서 그 통첩을 나주에 보이니 적이 이 소문을 듣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가버렸다. 이 뒤로부터 적은 다시 여러 고을을 함부로 노략질 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曹子一), 공유(孔愉)는 적이 금성(錦城)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섬에 유배시키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용서하고 삭직(削職)에만 그쳤다. 공유는 환관과 서로 결탁한 때문에 죄를 면할 수 있었다.
*11월, 김방경(金方慶)이 아해(阿海)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여, 진도(珍島)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들이 약탈한 배에 모두 괴수(怪獸)를 그렸는데, 강을 가리우고 물에 비치어 배가 움직이면서 굴러가는 것이 마치 날아가는 듯하여, 능히 감당할 수가 없는 형세였다. 매번 싸울 적마다 적군(賊軍)들이 먼저 북을 둥둥 울리고 돌진하여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여러 날 동안 서로 버티었다. 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등이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아해(阿海)에게 말하기를, "김방경. 공유(孔愉) 등이 남몰래 적과 내통 합니다." 하니, 아해(阿海)가 그 말을 믿고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보고 하였으므로, 다루가치가 김방경을 소환하여 홍찬과 대질하게 하고, 참지정사 채정(蔡禎)에게 대신 하게 하였다. 아해가 김방경을 오라로 묶어서 왕경(王京)으로 보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홍찬과 대질시키니, 홍찬이 무고(誣告)한 것을 자백 하였으므로, 이에 김방경을 석방하였다.
원종(元宗)이 탈타아(脫朶兒)에게 청하여 김방경을 다시 기용하게 하고 상장군(上將軍.정3품)으로 임명하여 삼별초를 공격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러 삼별초와 싸울 때 아해(阿海)의 외축(畏縮)으로 인해 포위되었으나, 장군 양동무(楊東茂)에 의해 구원되었다.
*12월, 수사도 참지정사(守司徒 參知政事.종2품)에 임명되었다.
*윤월, 왕이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진도(珍島)에 이르니, 적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旗幟)를 벌여 세우고 징과 북소리를 울리며 바다를 크게 들끓게 하였다. 또 성(城) 위에서도 북을 치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기세를 돋우니, 아해(阿海)가 싸우기를 겁내어 배에서 내려 천막을 쳤다가, 또 물러가서 나주(羅州)에 주둔 하도록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약 물러간다면 이것은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오. 적이 승승장구(勝勝長驅)한다면, 누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가 있겠소? 황제께서 만약 문책 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 하겠소?"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자, 적이 전함(戰艦)을 가지고 이를 역습하자 관군이 모두 달아났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결승(決勝)은 오늘에 달려있다." 하고, 적진 가운데로 돌진하니,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김방경의 배에는 화살과 돌이 모두 다 떨어지고, 군사들은 모두 화살에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珍島)에 가까워지니, 언덕에 적의 군사가 있다가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가운데로 뛰어들자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써 그들을 거꾸로 찔렀다. 김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신세가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바다 가운데로 몸을 던지려고 하니,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이를 만류하고 사람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큰 배를 가지고 공격하여 구원하자 비로소 적이 흩어지므로 포위를 뚫고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달려와서 구원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죄를 따지고 목을 베려 하자 아해가 만류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27. 1271년(원종 12). 60세
*1월 5일,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 삼별초와의 전투시 아해(阿海)의 외축(畏縮)을 보고하자 세조(世祖)는 아해(阿海)를 소환하였다.
*3월 3일, 몽고에서 흔도(忻都)․사추(史樞)가 와서 아해(阿海)를 대신(代身)하여 삼별초 토벌에 참여하였다.
*4월 14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이 흔도(忻都)와 삼별초의 내통을 보고하였다.
*5월 15일, 김방경(金方慶), 흔도(炘都) 등이 진도(珍島)를 토벌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위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니, 적의 도당 김통정(金通精)이 나머지 무리들을 거느리고 탐라도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몽고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마련하지 않았는데, 김방경(金方慶)이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분발하여 적을 치니, 적이 놀라서 흩어져 모두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김방경이 적을 추격하여, 남녀 1만여 명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사로잡았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갔던 강화도의 사대부집 여자와 진귀한 보화 및 진도(珍島)의 주민들이 모두 몽고 군사에게 사로 잡혔다.
승화후 왕온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왕준이 아들 왕희옹(王熙雍)에게 부탁하기를,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원해야 한다." 하였는데, 홍다구가 먼저 들어가서 왕온과 그 아들 왕환(王桓)을 죽여 버렸다. 처음에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 옛 서울 개성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태조의 어진(御眞)에다 점을 쳤는데, 반은 살아남고 반은 죽는다는 점괘를 얻고, 죽는 것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요, 살아남는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적을 달래기를, "용손(龍孫)은 12대에 끝났지만, 남쪽으로 가면 제경(帝京)을 이룩한다.[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는 참위설(讖緯說)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고 하면서, 드디어 적의 주모자가 되었다.
적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몸을 뽑아내어 김방경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군사들이 그를 쳐서 죽였다. 이 때에 적장(賊將)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南海縣)을 점거하고 연해지방을 쳐서 노략질 하다가, 적이 탐라도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도 또한 배 80여 척으로 따라갔다.
*11월 26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이 개선(凱旋)하여 전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정2품) 判吏部事(종1품))(주12)에 임명되었다.
#주12.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 고려사
*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 장동익본
*守大夫 中書侍郞平章事 : 행장
*中書侍郞平章事 : 고려사절요
*金紫光綠大夫 判吏部事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大子大保 :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12월, 흔도(炘都)가 봉주(鳳州)에서 와서 왕에게 따지기를, "군마(軍馬)가 많이 굶어 죽는데도 양식과 말먹이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 입니까?" 하였다. 흔도가 이것을 구실로 삼았으나, 사실은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이리 하여 유사(有司)에서 독려하여 군량미를 수송하였는데, 길이 험하고 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군사를 염주(鹽州). 백주(白州)로 옮겨 주둔하도록 청하니, 흔도가 그대로 따랐다.
28. 1273년(원종 14). 62세
*1월 6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김방경을 판추토사(判追討事)로, 추밀부사 변윤(樞密副使 邊胤)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2월 20일, 중군 행영 병마 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예(精銳)한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흔도(炘都)와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탐라도에서 토벌하니, 왕이 부월(斧鉞)을 주어서 보냈다.
*4월 28일,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炘都) 등이 군량미를 매우 급하게 요구하니, 마땅히 전라도의 공납미(貢納米)를 가지고 이를 보충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재추(宰樞)들에게 그 계책을 물었다. 재추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창고가 텅텅 비어서 경략사(經略使)와 제반 물선(物膳) 공급에도 감당할 수 없으니, 청컨대, 경상도의 조세(租稅)를 수송하여 군량미에 보충하게 하고, 전라도의 공납미는 모두 경창(京倉)으로 운반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김방경(金方慶)이 흔도(炘都) 등과 함께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토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흔도, 홍다구(洪茶丘)등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 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고 하는데, 여러 도의 전함(戰艦)들이 모두 표류하거나 침몰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군사 1만 명과 전함 1백 6십 척을 이끌고 추자도(楸子島)에 머물렀다가 바람을 기다려 탐라도로 들어갔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에서부터 들어가니, 적이 바윗돌 사이에 복병 하였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크게 소리치면서 항거하였다. 김방경이 성난 소리로 크게 꾸짖고,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뛰쳐나가 적의 가운데로 돌입(突入)하니, 사졸들이 이 기세를 틈타서 다투어 진격하였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러 적을 죽이거나 생포한 것이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楊島)로부터 바로 적의 진지를 들이치니, 적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달아나서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外城)을 넘어 들어가면서 불붙인 화살을 사방으로 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고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김통정(金通精)은 그 도당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갔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웃옷을 벗어 몸을 들어내고 항복하였다. 김방경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내성으로 들어가니 부녀자들이 목을 놓아 울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적의 괴수를 섬멸할 것이지만, 협박 받아 따른 사람들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다만 김원윤(金元允) 등 6인의 목을 베고, 항복한 자 1천3백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싣게 하며, 탐라도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전과 같이 편안히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
탐라도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리하여 흔도가 몽고군 5백 명을 주둔시키고 김방경도 또한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나주에 이르러 적당(賊黨) 35인을 목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며, 크게 잔치하여 군사들을 먹이고 여러 주(州)의 군사들을 해산하였다. 김방경이 김수(金綬)와 지후(祗候) 김감(金減)과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어 승첩(勝捷)을 고하니, 왕이 김수(金綬)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삼고, 유보를 중랑장으로 삼고, 대정 고세화가 먼저 성을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고 하여 그를 낭장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으로 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6월 16일,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였다.
*윤6월 13일, 대장군 김수(金綬)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평정한 것을 고하였다. 삼별초 토벌을 포상하여 왕은 중군원수(中軍元帥) 김방경에게 붉은 가죽띠 1벌을 하사하고 크게 잔치하였으며, 김방경을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 門下侍中.종1품)(주13)으로, 병마사 변윤(兵馬使 邊胤)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김석(金錫)을 상장군(上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고, 나유(羅裕). 송보연(宋甫演)을 모두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주13. *守大師 : 행장
*守大師 開府儀 同三司門下侍中 上鑄國 判御使臺事 : 묘지명족보본
*授大師 開府儀 同三司門下侍中 上柱國 判御使臺事 : 묘지명복제본
*守太師 : 장동익본
*김방경을 侍中으로 삼음 : 고려사
*7월 16일, 시중 김방경이 원에 불려갔는데, 세조(世祖)가 광한전(廣寒殿)에서 인견(引見)하여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금안(金鞍) ․ 채복(綵服) ․ 금은(金銀)을 하사하였다.
29.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년). 63세
*1월 2일, 시중 김방경이 일본정벌을 위해 전선(戰船) 300척을 건조(建造)하라는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의 첩(牒)을 가져왔다. 원나라에서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戰艦) 3백 척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다. 또 홍다구(洪茶丘)로 하여금 감독하여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하기로 약속하니, 왕이 이에 시중 김방경(金方慶)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종1품),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삼고, 추밀원부사 허공(許珙)을 전주도 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삼고, 우복야 홍록주(洪祿週)를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羅裕)등을 보내어 여러 도의 부부사(部夫使)로 삼아 공장(工匠)과 인부(役徒) 3만 5백여 인을 징집(徵集)하게 하였다. 이때에 역마(驛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번잡한데다가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배 만들 재목을 변산(邊山: 지금의 부안(扶安))과 천관산(天冠山:지금의 장흥(長興))에서 취했는데, 일을 이달 16일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끝내어 크고 작은배 9백척을 금주(金州)에 돌려대니, 사신을 보내어 원에 고함.(<東史綱目>)
*2월, 별장 이인(李仁)을 보내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기를, "소방(小邦)에서 중서성의 지시를 받으니, ‘전함(戰艦) 3백 척을 만드는데, 거기에 필요한 공장(工匠). 인부와 재목(材木)등을 배신(陪臣) 김방경(金方慶)등에게 나누어 맡겨서 마련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공사가 크고 국력이 미약하여 잘 마련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할 때에, 거기에 종사하는 공장. 인부 3만 5백명의 하루 세끼 양식을 계산한다면 3개월간에 모두 3만4천3백12석5두를 지출하여야 합니다. 또 흔도(炘都)의 군사 4천5백인이 금주(金州)에 도착하였는데, 가지고 갈 양식 1천5백70석과 홍다구(洪茶丘)의 군사 5백인이 가지고 갈 양식 85석과 제주도에 머물면서 지키는 몽고 관군(官軍)과 소방(小邦)의 군시를 합하여 1천4백인의 7개월간 양식 2천9백4석과 나주(羅州)에 낙후(落後)하여 있는 오로활단치(奧魯闊端赤)의 군량미 8천석과 말먹이(馬料) 1천3백25석을 모두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 중서성 지시를 받으니, ‘봉주(鳳州)의 둔전군(屯田軍)의 매달 부족되는 양곡 2천47석과 소먹이(牛糧) 1천1석7두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나, 이들 종전군(種田軍)에게 그 농우(農牛), 농기(農器), 종자(種子)와 도착한 첫해 가을까지의 양곡을 이미 넉넉히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들이 망령되게 일컫기를, ‘둔전(屯田)이 충재(蟲災), 수재(水災)의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함부로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소방으로 하여금 또 공급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감히 지시를 어기려고 이렇게 말을 꾸며서 신달(申達)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소방으로 하여금 공급하게만 하고 기한이 없으니 실로 민망할 뿐입니다. 모두 면제시켜서 먼 곳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4월, 간의대부 곽여필(郭汝弼)을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번에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金方慶)에게 글을 보내기를, ‘배 3백 척과 뱃사공[梢工]. 수부[水手] 1만5천인을 마땅히 먼저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소방(小邦)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데다가 전란까지 겹쳤습니다. 지난번 탐라도(耽羅島)를 정벌할 때의 병졸과 사공들이 모두 배 만드는 역사에 나갔으니, 지금 일본을 정벌하는 군사를 장차 어디에서 차출 하겠습니까? 소방(小邦)의 북계(北界) 여러 성과 서해도(西海道)에서 조세를 포탈한 백성들 가운데 동녕부(東寧府)로 가서 투항한 자들은 모두 배 젓기에 익숙한 자들이니 청컨대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군사 정원[軍額]에 충당하도록 하여 주소서. 또 경오년(庚午年1270년, 원종11년)으로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군량미를 공급하는 데에도 이미 부족하였는데, 지금 이러한 조선(造船)과 둔전(屯田) 및 홍총관(洪摠管)의 군사와 제주도 주둔군[留守軍]의 군량미를 모두 배신(陪臣)과 백성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계속할 수 없자, 특별히 황제의 인자하심에 힘입어 쌀2만 석을 운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였으며, 또 양곡 값으로서 비단을 하사하시니, 무엇으로 보답하고 사례하여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사(公私) 재물이 이미 고갈되었으며 또 배를 만드는 일로 인하여 농사지을 때를 잃게 되었으니, 비단을 주고 양곡을 사는 일도 여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어 조선(造船)을 감독하다가 6월 18일, 원종(元宗)이 붕어(崩御)하자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귀경(歸京)하였다.
*7월 12일, 김방경이 정동선봉별초(征東先鋒別抄)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출발하였다.
*10월 3일, 도독사(都督使)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김선(金侁)을 좌군사(左軍使),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으로 편성한 8천명을 거느리고 몽고군 2만5천명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고군사. 중국군사[漢軍] 2만5천명과, 우리나라 군사 8천명 및 사공[梢工]. 수부[水手] 6천7백명과 전함(戰艦) 9백여 척이 합포(合浦)를 출발하였다.
*10월 6일, 동정군(東征軍)이 대마도(對馬島)에 상륙하였다.
*10월 14일,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왜병이 해안 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 조변(趙卞)이 뒤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청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홍다구가 박지량. 조변과 더불어 공격하여 왜인 1천여 명을 죽였다.
이어서 이만도(伊蠻島)로 나아가 삼랑포(三郞浦-鹿原)에 상륙하여 중군(中軍-金方慶) ․ 우군(右軍-金文庇)은 이만도(伊蠻島)를 공격하고 좌군(左軍-金侁)은 박다(博多-朴加多)를 공격하여 왜병과 싸우고 철수하여 전함으로 돌아왔는데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왜병이 공격해 와서 중군과 충돌하므로 김방경이 큰 화살 한 개를 빼어서 쏘면서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왜인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 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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