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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영모당((永慕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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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7-01-17 10:30 조회8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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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道 정자기행(2591)-고창 영모당((永慕堂)


 

전북 고창군 공음면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 1496 연산군21516 명종16)의 은거처로 전라도에서 유일무일한 조선의 18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장성출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사서 영모당(永慕堂)이라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이후 전남 장성출신 개항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쓴 영모당중수기(永慕堂重建記)가 그의 문집 송사집(松沙集)에 남아 있어 이 시기에 중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김질(金質)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전남 해남출신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평소 효를 사모하던 중 무장현감으로 오게 되어 자주 상종하며 영모당기(永慕堂記) 글을 지어 벽에 걸어 주었고, 스승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면서 스승을 가르쳤다고 평을 받으면서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중종 22 ~ 1572 선조 5),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이 모두 공의 효에 감복했다.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5대손이요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복중(福重)의 아들이다


1496(燕山 2) 공음면 개가리(凱歌里) 출생했다.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 복중(福重)의 아들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등창을 빨아 낫게 하고, 아버지의 상사에 흙을 져다가 성분(成墳))하고 여묘(廬墓)했는데 어느날 제사 지내는 간장독에 쥐가 빠지매 공이 그 그릇을 안고 통곡하니 근처의 쥐가 모두 와서 그릇 밑에서 죽었고, 아버지가 꿩고기를 좋아하여 젯상에 반드시 꿩고기를 올리는데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저자(安山巿場)에 갈 수 없으매 불효를 한탄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 들었다.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와 집의 거리가 들 하나 사이임에도 한번도 집에 온 일이 없었고 부인과 여비(女婢)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는데 부인 김씨가 긴히 알릴 일이 있어 여비를 보내매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이 직접 나아갔으나 더욱 깊이 숨어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눈이 많이 내렸는데 그 묘 주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그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때 선조 38년년(1605) 명나라에서 중국에서 우리나라 행의(東國行誼))를 채집할 때 제일의 행의를 알리라 하여 전라도 관찰사 용졸당(用拙堂) 민성휘(閔聖徽 1582~1648)에 의해 공의 효가 추천되어 1546년 년 명나라로부터 정표(旌表)가 내려 당시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등도 그를 추앙하며 종유했고 학자들이 영모선생이라 불렀다. 공음면 칠암(七岩)에 효자진사김질지려(孝子進士金質之閭)가 세워졌 다 


 

그의 후손에 계승되어 충효로 명망이 높은 자가 속출하였다 


 

전라북도 고창 공음면 소재지에서 법성쪽으로 삼거리 갑촌길 20, 고종 19(1882) 지어진 도암사(道巖祠)가 대신하고 있으며 주벽으로 증손 은송당(蘟松堂) 김경철(金景哲)과 현무제(賢武齌) 김익철(金益哲)을 좌우로 향사하고 있다. 저술로는 영모록(永慕錄)과 육사자책설(六事自責說)이 전한다. 


하마비가 있고 건너편에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솟을대문) 안에 강당, 뒤로 정려(旌閭)와 봉안각(奉安閣)이 좌우로 있고 내삼문(孝忠文)안에 사우는 도암사(道巖祠)가 자리하고 있다. 강당 도암서원(道巖書院)은 방풍을 단 한와 팔작집이다. 도도록하게 다듬은 덤벙주초와 두리기중이고 2간은 대청, 좌우로 방을 등여 방에는 2짝문을 재청에는 각각 4짝문으로 격차장이다 


상송마을의 상송제 서측 하단부에 위치한다. 철폐된 松陽祠 대문에 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에는 贈朝奉大夫童蒙敎官昌寧成武祚之閭라고 쓰여 있다. 성무조의 호는 송재로, 1778년에 태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병이 나자 지성으로 간병하였다고 한다. 이에 1892년에는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인 1893(고종30)에 정려가 내려졌다.

 


참고문헌=全羅北道鄕校財團, 1994, 全北鄕校祠宇大觀. 輿地圖書 湖南人物志

문화.오인교


출처 : 한국매일 2017. 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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