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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안윤덕 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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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1-25 15:39 조회1,1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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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安公神道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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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安氏系出廣州。遠有譜牒。歷高麗入本朝。有開城留後諡思簡公諱省。最顯于世。寔公曾祖。祖諱從生。司憲監察。贈吏曹參判。考諱彭老。安東判官。贈兵曹判書。妣權氏。贈貞夫人。福川君諡莊簡公諱愷之女。監察以下贈爵。皆以公貴故。公諱潤德。字善卿。生有異質。及長。篤意治經。窮日夜不懈。中成化乙酉生員。癸卯文科。選補權知承文副正字。朝議以公深於經學。宜025_216b令師諸生。啓移成均。由學諭陞至博士。丁未。以司錄。遷宗簿主簿。弘治戊申。拜正言。明年。移地官爲佐郞。俄丁內憂。服闋。授兵曹佐郞。甲寅。陞持平。以擧職聞。乙卯。改刑曹正郞。大臣會議疑獄。問其顚末。掌者不能答。公從旁對甚悉。觀者咸器重之。未幾。移兵曹。秋官難其代。請留。特令因舊。歷尙衣,掌樂僉正。簡入都堂爲檢詳。擢重試。陞舍人,知製敎。又兼史職。戊午。轉司諫。己未。巡邊大臣薦公備幕。移閑局爲相禮。尋陞直提學。庚申。擢拜同副承旨。壬戌。特階二品。出按慶尙。剸劇興學。績用茂著。以刑曹參判徵還。充賀正于燕。還歷戶,刑二曹亞025_216c卿。甲子。建節畿甸。燕山政亂。公坐忤旨。謫配金堤。正德丙寅。中廟改玉。起公授漢城左尹。錄原從功。階嘉靖。丁卯。復爲刑曹參判。移兵曹。庚午。倭奴寇薺浦。殺鎭將。仍陷熊川城朝。廷推擧公有將才。陞秩資憲。以知中樞。充副元帥。以行諸軍。擊倭大捷。凱還奏功。拜漢城判尹。轉判刑曹。乙亥。命觀察平安道。大修檀君,箕子祠。構作成庫於文廟。貯米若布。權其子母。俾供餼廩。月聚諸生。課其所業。加以賞罰。其經承口講指畫者皆彬彬可觀。丁丑。引疾辭。以知中樞召還。兼帶同知成均。辛巳。遷工曹判書。帝遣太監金義,陳浩。冊立世子。頒025_216d誥命。公承遠接之命。迎送江上。義等服公才識。涕泣而別。嘉靖癸未。移判戶曹。隨事綜密。上嘗臨朝。嘉奬不已。丙戌。公年至。詣閤乞骸。上優敎不許。時年輩與公埒者。高贊成荊山等凡七人。公擬洛社之會作契。常置酒高會。丁亥。拜左參贊。辛卯。又判工曹。以病改知中樞。乙未。卒于第。公生天順丁丑。至是年九月十四日易簀。春秋七十有九。訃聞。輟朝賜賻祭有加。用十一月二十七日。葬于廣州靈長山思簡公墓原。從治命也。公宇量弘毅。不喜苛禮。而平居必整服端坐。雖子弟。未嘗見惰容。歷任中外。文簿滿案。奮筆裁判。初若不思。卒025_217a皆就緖。長於料敵。每邊報告警。必咨於公。動中事宜。性又孝友。遇忌日。必悲慕。潔誠以祭。兄弟早世。恤其遺孀。歸其孤女。凡所經紀。必與罄力。夫人羅氏。監察文緖之女。賢有法度。先公卒。生四男二女。男長曰漢英。弘文博士。中丁卯文科次。漢雄。宗簿主簿。中丁卯進士。皆夙逝。次漢俊。今爲海州牧使。次漢彥。今爲江華府使。女長適副正李瑛。次適別坐鄭鈜。側室有二女。皆適宗室。博士生三女。長適府使鄭世紹。次適趙忭。次適掌令李彥忱。牧使生二女。長適許凝。次適兪涵。府使生二男。汝敬,汝恒。公與吾先君同年生。契分最篤。兩家子弟以父兄視025_217b之。故公之二子。以最跡問銘。屬于士龍。安可以不文辭。銘曰。

國家興隆。必有世臣。宣力贊謨。以翊休辰。思簡宦著。莊簡勳顯。二姓之配。公象其善。窮經取科。始振英聲。冠豸讞疑。最簡廷評。六官務殷。屛毗寄重。公實遍爲。動受褒寵。人或斂手。公刃乃恢。用不盡才。造物之猜。引年乞閑。眷留彌篤。高會繼洛。足以儀俗。矧有四鳳。克業其家。緜繼復始。流慶必遐。孝思顯親。圖永於聞。有欲視德。請考斯文。


 


 


안씨(安氏)는 광주(廣州)에서 비롯되었고 멀리 보첩(譜牒)이 이어졌다.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시호 사간공(思簡公) 휘(諱) 성(省)이 세상에 가장 드러나니 곧 공의 증조이다. 조(祖) 휘 범생(泛生)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요, 고(考) 휘 팽로(彭老)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에 증 병조 판서(兵曹判書)이며 비(妣) 권씨(權氏)는 증 정부인(貞夫人)이요 복천군(福川君) 시호 장간공(莊簡公) 권개(權愷)의 딸이다. 감찰 이하 증직(贈職)은 모두 공이 귀해짐으로 해서이다. 공의 휘는 윤덕(潤德)이요 자(字)는 선경(善卿)이다. 태어나면서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자라자 경서(經書)에 독실한 뜻을 두어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화(成化)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년)에 생원(生員),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선정 보임되었는데, 조정의 논의가 ‘공은 경학(經學)에 깊어 제생(諸生)의 스승이 되게 해야 한다’고 아뢰어 성균관(成均館)으로 옮겨 학유(學諭)를 거쳐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년)에 사록(司錄)에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옮겼다. 다음 해인 홍치(弘治) 무신년(戊申年, 1488년 성종 19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호조(戶曹)로 옮겨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좀 뒤 내간상을 당하였으며 복을 마치자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에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는데 직을 잘 수행한다고 알려졌다. 을묘년(乙卯年, 1495년 연산군 원년)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옮겨졌는데, 대신(大臣)이 회의에서 의옥(疑獄) 사건의 전말을 물었으나 관장한 자가 답변을 못하는지라 공이 곁에서 매우 자세하게 답하니, 이를 듣는 자가 모두 그 능력을 인정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병조로 옮기게 되었는데, 형조에서 그 후임을 구하기 어렵다며 유임을 청하자 특별히 그대로 두게 하였다. 상의원(尙衣院)과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을 거쳐 의정부(議政府)에 선발되어 들어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며 지제교(知製敎)와 사관직(史官職)을 겸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에 사간(司諫)으로 옮겼고 기미년(己未年, 1499년 연산군 5년)에 순변 대신(巡邊大臣)이 공을 추천하여 막하(幕下)에 두었으며 통례원(通禮院)으로 옮겨 상례(相禮)가 되었다가 곧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500년 연산군 6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 임명되어 여러 번 옮기면서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임술년(壬戌年, 1502년 연산군 8년)에 특별히 2품에 승진하여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나가 고된 사무를 처리하고 문교(文敎)를 진흥시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소환되었고 하정 사신(賀正使臣)에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갔었으며, 돌아와서는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었는데, 연산군(燕山君)의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뜻을 거슬린 데에 좌죄되어 김제(金堤)로 유배되었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자 공을 기용하여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니 품계는 가정 대부(嘉靖大夫)였다.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다시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병조로 옮겼고,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에 왜노(倭奴)가 제포(薺浦)를 침범하여 진장(鎭將)을 죽이고 이어 웅천성(熊川城)을 함락시켰다. 이에 조정에서 공이 장재(將才)가 있다고 추천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키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나아가게 하였는데, 제군(諸軍)이 왜구를 무찔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해 돌아와 전공(戰功)을 아뢰자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옮겼다.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사당을 크게 수리하고 작성고(作成庫)를 문묘(文廟)에 조성하여 쌀과 베를 비축하고 그 이자(利子)를 불리어 식사를 제공케 하였다. 그리고 달마다 제생(諸生)을 모아놓고 그 공부한 바를 고과하여 상벌을 가하니, 구강(口講)이나 지획(指劃, 손가락으로 짚으며 가르침)을 받은 자는 모두 찬란하게 볼만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에 병을 이유로 사임하니 지중추부사로 소환하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겼다. 명(明)나라에서 태감(太監) 김의(金義)와 진호(陳浩)를 보내어 세자 책립(冊立)의 고명(誥命)을 반포하자 이에 공이 원접사(遠接使)의 명을 받들고 강상(江上, 압록강을 가리킴)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는데, 김의 등은 공의 재능과 식견에 감복하여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기까지 하였다.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옮겨 일에 따라 치밀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임금이 일찍이 조정에 임해서 칭찬해 마지않았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공은 나이가 많다고 합문(閤門)에 나아가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하교를 내리고 윤허치 않았다. 이때 연배로서 공과 비슷한 이로는 찬성(贊成) 고형산(高荊山) 등 7인이 있었는데, 공은 낙사(洛社)의 모임에 비겨 계를 만들어 늘 술을 마련하고 성대한 모임을 가졌다. 정해년(丁亥年, 1527년 중종 22년)에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또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인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옮겨 임명하였으며,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년)에 집에서 졸하였다. 공은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 1457년 세조 3년)에 태어나 이해 9월 24일에 이르러 졸하니 향년 79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시(朝市)를 쉬고 부ㆍ제(賻祭)를 예보다 더하여 내렸다. 11월 27일에 광주(廣州)의 영장산(靈長山)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묘원에 장사지내니 치명(治命, 평소의 맑은 정신에 한 명령)에 따른 것이다. 공은 도량이 크고 까다로운 예절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소 반드시 의복을 단정히 하고 앉아 비록 자제(子弟)라 하더라도 나태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중외(中外)의 소임을 두루 거치며 문부(文簿)가 책상 가득히 쌓인 것을 분발해 붓을 놀려 재결하였는데, 처음에는 생각지 않는 것 같았으나 마침내는 모두 실마리가 풀려나갔으며, 적(敵)을 헤아리는 데에 특장이 있어 변보(邊報)의 경고가 있을 적마다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였는데, 번번이 사의(事宜)에 맞곤 하였다. 천성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선공(先公)의 병이 깊자 똥을 맛보아 병세를 징험해 보기까지 하였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슬퍼하고 사모하였으며 정결과 성심으로 제사를 받들었다. 형과 아우가 일찍이 죽자 그 과수(寡嫂)가 된 이를 돌보았으며 그 아비 없는 딸을 출가시키되 반드시 힘을 기울여 주선하여 보냈다. 부인 나씨(羅氏)는 감찰(監察) 나문서(羅文緖)의 딸로서 현철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공보다 먼저 졸하였다. 4남 2녀를 낳으니, 아들 맏이 안한영(安漢英)은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냈고 다음 안한웅(安漢雄)은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요 정묘년(丁卯年)에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다음 안한준(安漢俊)은 현재 해주 목사(海州牧使)요 다음 안한언(安漢彦)은 현재 강화 부사(江華府使)이다. 딸 맏이는 부정(副正) 이영(李瑛)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별좌(別坐) 정횡(鄭鈜)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게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종실(宗室)에 출가하였다. 박사 안한영은 3녀를 낳아 맏이는 부사(府使) 정세소(鄭世紹)에게, 다음은 조변(趙忭)에게, 다음은 장령(掌令) 이언침(李彦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목사 안한준은 2녀를 낳아 맏이는 허응(許凝)에게, 다음은 유함(兪涵)에게 출가하였다. 부사 안한언은 2남을 낳으니 안여경(安汝敬)과 안여항(安汝恒)이다. 공은 나의 선군(先君)과 같은 해에 태어나 교분(交分)이 매우 도타웠으므로 두 집안 자제들은 모두 부형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공의 2자가 행적을 모아 명(銘)을 물으며 나 정사룡(鄭士龍)에게 부탁하니 글 할 줄 모른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나라가 흥성하는 데에는 반드시 대대로 섬기는 신하가 있어서인 것. 힘을 다해 협찬(協贊)하여 아름다운 시대를 도왔네. 사간공의 벼슬은 드러났고 장간공의 공훈은 뚜렷하였네. 두 성(姓)의 배합에서 공은 그 선(善)을 본받았네. 경전(經傳)을 깊이 연구해 과거에 급제하여 비로소 영명(英名)을 떨치었네. 형조의 낭관(郎官)으로서 의옥(疑獄)을 의정하자 가장 간결타고 조정의 평판이 컸도다. 육조(六曹)에서 정무 성대하였으며 변경의 보좌에 의지함 무거웠네. 공은 실로 두루 일을 하였기로 번번이 포총(褒寵)을 받았네. 사람들은 혹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공의 칼은 곧 컸다네.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조물주의 시기함이었던가?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려 하자 만류는 더욱 도타웠다네. 성대한 모임 낙사(洛社)를 이었으니 세속의 표준이 되기에 족하였네. 더구나 훌륭한 네 아들 있어 그 가문을 더욱 크게 하였네. 연달아 계속하여 처음으로 회복하니 경사의 흐름은 반드시 영원하리. 효성스럽게도 어버이 현양(顯揚)키 위해 길이 알려지기를 꾀하였네. 덕(德)을 알아보려 한다면 이 글을 상고해 보기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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