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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안사연 답사 미리보기-1. 중대리 광주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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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01-25 15:09 조회8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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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대리 광주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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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垈里)를 ‘텃골’이라고 부르는데, 『여지승람』에는 덕곡(德谷)이라고 하였다.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뒷산은 영장산(靈長山) 줄기로 이 마을은 광주 안씨(廣州 安氏)의 세거지이다. 조선 초기에 의정부 참찬을 역임한 조선조 최초의 청백리인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이 입향하여 600여 년간 세거하여 오고 있다.

 


∎안성(安省, 1344∼1421)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고려 우왕 6년(1380)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학사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의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기게 됨을 개탄하여 대궐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청백리가 되었고 관직은 한성부윤을 거쳐 의정부 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안윤덕(安潤德, 1457~15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자는 선경(善卿). 안동판관 팽로(彭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복천군(福川君) 권개(權愷)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었다. 1487년에 종부시주부, 1488년에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지제교 겸사관(知製敎兼史官)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相禮)·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을 거쳐 1503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한성부윤·형조판서를 역임하고,151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敬祖精神)과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19년에 공조판서로 복직, 세자책립을 위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안윤덕(安潤德) 신도비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군 중대동(德谷)

⦁건립연대 : 1548年(명종 3)

⦁찬 자 : 정사룡(鄭士龍)

⦁서 자 : 김노(金魯)

⦁전 자 : 김노(金魯)

⦁비 규 모 : 총고 271cm, 비고 158cm, 폭 85cm, 후 20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8.0cm, 음기(陰記)2.2cm

⦁비재질(碑材質): 이수(螭首) : 대리석, 비신(碑身) : 대리석, 대석(臺石) 화강암

 


1548년에 건립된 이 비는 비좌이수(碑座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 앞면에는 가운데의 여의주를 용 두 마리가 마주보며 농주하고 있고, 뒷면도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꼬리와 운문이 있다. 대석에는 복연(覆蓮)과 안상문(眼象紋)이 2단으로 장방형 판석 위에 세워져 있다. 비의 마멸이 진행되고 있어 일부 판독이 난해한 곳이 있으며, 묘소에는 정부인 금성나씨(錦城羅氏)와 쌍분. 상석·향로석·족석·혼유석·계체석·장명등·문인석·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1535년(중종 30)에 건립한 비좌하엽의 묘표가 있다.

 


∎안황(安滉, 1549~1593)

자는 경호(景浩). 좌참찬 안성(安省)의 후손으로, 증조는 호조판서 안윤덕(安潤德)이며, 아버지는 목사 안여경(安汝敬)이고, 선조의 매부이다. 1574년(선조 7)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고, 1577년에 왕의 지친으로 1592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아들로서 편모와 처자를 버리고 밤낮으로 왕을 호종하다가 1593년 의주로부터 환도하는 중도에 죽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광양군(廣陽君)에 추봉되었으며, 뒤에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시는 충양사(忠陽祠)가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조선 영ㆍ정조대의 실학자로서 호는 순암(順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에 재직할 때 세손(正祖)을 보도(輔導)하였으며, 외직으로 충청도 목천현감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다.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우리나라 실학의 태두이며, 성호의 학문을 이어받아 조선후기 3대 사찬(私撰) 역사서의 하나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광주가 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 『동사강목』외에도 『순암집(順菴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겨 현대에도 그의 저서는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고 있다. 영장문(靈長門)을 들어서면 후학을 양성하며 강학하던 이택재(麗澤齋)와 사숙당(思肅堂)이 배치되어 있다. 지금도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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