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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자료 모음집-제2회 안사연 학술발표회-(2002. 1. 27. 김영환(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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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3 조회1,0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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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사이버종친회 학술발표

  충렬공의 자료 모음집

            2002년 1월 27일





      忠烈公 22世孫             榮  煥
      solnae@empal.com   016-363-0543

  본 자료는 충렬공 선조님의 많은 자료중에서 현재까지 본인이 안공김씨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자료를 중심으로 모은 것이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자료는 안동김씨홈페이지 게시판에 등록되어 있으니 여기에 첨부하지 않은 자료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십시오.
목록
1.안동에 대한 선조님 세분의 시
2.단모부(이승휴가 충렬공께 보낸 賦)
3.충렬공의 답신
4.충렬공의 또다른 서신
5.동안거사집(이승휴) 원본
6.충렬공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 3편
7.충렬공이 15대손이라는 자료모음 -1-
8충렬공이 15대손이라는 자료  -2-
9.충렬공이 15대손이라는 자료 -3- 동현사략(양촌문집)
10.숭의전
11.신증동국여지승람 -안동편
12.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편-
13.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편(조선)-
14.충렬공 묘소와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
15.충렬공과 김통정에 대한 제주도 전설 -1-
16.충렬공과 김통정에 대한 제주도 전설 -2-
17.충렬공 신도비
18.상락대
19.충렬공의 치수 자료  -의림지, 수산제, 위도-
20.국난을 극복한 고려 최대 안사공신 김방경- 민기 원작-
21.충렬공 행장
22.충렬공 묘지명
23.전해오는 이야기-능동 묘소와 광산김씨-
24.감사원 홈페이지에 실린 충렬공

金榮煥(문온공 18세손. solnae@empal.com 016-363-0543)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6/15 18:42   조회 : 77
安東에 대한 先祖님 세분(忠烈公,都僉議公,文溫公)의 詩(충렬공자료 1)  

충렬공 할아버님의 시의 韻을 따서 지은 詩 세편을 올립니다.
문온공 18세손 영환 young8kim@hanmail.net. 016-363-0543
安東에 대한 先祖님 세분의 詩

1. 東征日本過福州 (동정일본과복주) (忠烈公 方慶)
일본정복하러 가는 길에 안동을 지나며 충렬공 방경

山水無非舊眼淸 (산수무비구안청) 산과 물은 옛날 보던 맑음 그대로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역시소년정) 누대 또한 어릴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가련고국유풍재) 애틋하여라, 고국엔 옛 풍속 남아있어,
收拾絃歌慰我行 (수습현가위안행) 노래소리 모아서 내갈길 위로하네.

2.登福州映湖樓 (등복주영호루) (都僉議公 흔 )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도첨의공 흔

十載前遊入夢淸 (십재전유입몽청)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중래물색위인정)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간봉계엄군필)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咤愚兒萬戶行 (감타우아만호행)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3.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文溫公 九容)
(안동객사북루차고조상락공시운) 문온공 구용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先祖題詩字字淸 (선조제시자자청)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중래차일갱함정)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강산사유류연색)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잉점춘풍말긍행)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한자가 지원되지 않아 한글로 적은 글자 설명
흔=기뻐할 흔=心방변에 도끼斤을 합한 글자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0/15 21:32   조회 : 41
자료8)충렬공의 편지(3)  

충렬공 할아버님이 쓰신 답장(충렬공의 편지(2)의

원전은 동안거사 이승휴가 단모부를 지어서 드린 것에 대한 답장입니다.
여기여 단모부 전문을 올림니다.

단모부(旦暮賦)
  전(傳)에 이르기를, "...만세 이후에나 이 말 뜻을 이해하는 한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그것은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만난 듯이 대단히 일찍 만난 것이라..." 하였으니 정성스럽다 이말이여.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원묘조(元朝)11년(1270년)에 재상이 되고, 임금이 왕위에 있던 초에 이르러 지위가 상상(上相)올랐으며, 송도(松都)에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뜻을 펴지 못하여 날뛰던 무리가 강화도에 까마귀 떼처럼 모여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모여 있으면서 인근 주를 삼키고 바다를 점거해서 날뛰니, 일이 도모하기 어려웠다. 이에 상국(上國)이 명하여 관군(官軍)을 내여, 본군(本軍)과 합하여 정벌할 때에 공이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진퇴의 법칙이 평소에 훈련한 바가 아니었으나 양국의 군사가 모두 그 마음을 얻어서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한 번 거사함에 그들을 양떼 몰아내듯이 평정하니, 부녀자들이 개가를 노래하고, 군대는 돌아왔다. 또 상조(上朝)의 원수(元帥) 혼독(혼篤)과 더불어 같이 왜국을 칠 적에,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전쟁을 지휘하며 해가 돋아 오르는 바다 끝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위엄을 혁혁히 빛내고 미역(尾域)지역을 편안히 하고, 무덕(武德)을 선포해서 큰 공을 아뢰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고,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도원수(東번諸路都元帥)로 삼아서 특별한 은총으로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동쪽 정벌이 없는 해가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공이 거느리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水戰)·육전(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국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 종신(宗臣=왕족)과 석보(碩輔=재상)로서 중국에 조알하고 왕래한 자가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되,
그 도원수(都元帥)의 직임(職任)을 받은 자가 있었던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도다.
  또한 공(公)이란 오등제후 (五等諸侯=공,후,백,자,남)의 으뜸 작위(爵位)이므로, 외부로 나가면 열국의 으뜸이 되고, 천자에게로 들어오면 천자의 다음이 되니, 그 등급은 발돋움을 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혹시 시기를 잘 타고 갑자기 일어나서, 전쟁터의 털끝 만한 공도 없으면서, 다만 서울을 휩쓸 정도의 권세로써 외람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를 맡는 자도 있으나, 그것은 일이 잘못되고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래서 해외(海外)의 다른 나라에 우리 나라의 무공을 드날려, 조공(朝貢)하지 않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자에게 승첩을 바쳤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우리 전하께서는 덕은 중윤(重輪)보다 더 뛰어나고, 뜻은 오로지 나라를 감독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을 초치하는 북을 올리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는 깃발을 세워서 힘쓰고 노력하기를 급급하게 하면서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마땅히 이런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일컬어 말하게 되고 이런 사람을 성심으로 사모하게 된다는 것은 천하의 공언(公言)이니, 그 누가 이 일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적인 장려이니, 그 누가 이 상(賞)을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公)이 오늘날 공(公)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요행으로 공(公)이 된 것과는 다르다. 대개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미 그 상수(上壽)를 주어서 그 몸을 편케 했으되, 뜻이 오히려 부족해서 또 상작(上爵)을 주어서 그 지위를 높게 해주었다. 원컨대, 공(公)은 하늘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순응해서, 그 분수를 편케 여겨서 영화를 누리소서. 앞에서 이른바 "만세의 뒤에 한 번 성인을 만나 그 견해를 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성군(聖君)이 태어남이여!
풍운(風雲)의 길을 열고,
재상과 함께 조정에 진출(進出)함이여,
경위(經緯)를 도모했다.
타고난 충성심(忠誠心)을 다하여 삼한(三韓)을 도우고,
황비(荒肥)에 으뜸이 되매, 만민을 편안케 하였도다.
중조(中朝)에 조회를 가서 큰 공을 아뢰고,
동로(東路)에 길잡이가 됨이여, 도원수가 되었도다.
군사가 백만이 됨이여, 더욱 더 잘 다스렸고,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정신은 맑고 기운은 장대함이여, 몸은 기력이 강건하였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으니,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도다.
중신(中宸)은 옛 일을 도모하는 뜻을 돈독히 하여 잊지 않고,
동궁(東宮)이 나라를 감독함이여! 태평정치를 아름답게 이루었도다.
후현들을 격려하기를 기약함이야,
포상하여 책봉하고, 개국공상락군(開國公上洛郡)으로 봉해 줌이여,
공(公)으로 은총을 내려주었다.
맏아들 영공(令公)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여러 손자들의 빛남이여,
뜰에 가득하고 손님들이 환호하며 왁자지껄함이여! 마을에 가득하도다.
어깨를 부딪히며 헌수하며 종종걸음치고,
길가는 사람들도 공(公)을 어질다 말하며 눈물을 흘리도다.
송나라 왕형공(王荊公)이 있음이여! 경륜을 양보하였고,
당나라 곽분양(郭汾陽)이 있음이여! 그 시작과 마침이 다소 부끄러웠다.
송축(頌祝)의 노래 소리는 조야(朝野)에 드날림이여!
장수(長壽)를 축원하고 미담이 어부와 초부에게도 미침이여,
성대한 일을 자랑하도다.
원숭이가 울고 학이 울음이여 환성으로 전송하고,
잣나무가 좋아하고 소나무도 기뻐하며 축하의 뜻을 베풀도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0/12 22:54   조회 : 54
충렬공의 편지(2)  

충렬공 선조님의 또 다른 글이 있어 공개합니다.

공(公=김방경)이 보내 준 답서
전에 붙여 준 고부(古賦) 1편을 받았는데, 늙고 병듦으로 해서 미처 답할 겨를이 없었다가,
이제야 화답하여 돈헌(돈=豚밑책바침=軒)에게 부쳐 보인다.
천지(天地)가 높고 낮음이여! 씨줄로 삼고, 성현(聖賢)이 오고 감이여!
날줄과 같도다. 그 나가고 취함이 있음이여, 무리와 더불어 했도다.
벼슬하지 않으면 산림에 있거나, 혹 강호에 있었고
세상에 나가서는 정승도 되고 장수도 되었도다.
박(剝)이 허물이 없음이여 육삼(六三)에 있도다.(1)
돈(돈=豚밑에책바침한글자)의 길하고 좋음이여 구사(九四)에 있도다.(2)
당(唐)의 요(堯)임금이 팔짱만 끼고 다스림이여! 칭송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허유(許由)3)가 귀를 씻음이여 또한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오직 성명(性命)만을 회복하려 함이여!
그 명성(名聲)은 의식하지 않으며,
반드시 나가고 물러날 필요가 없음이여,
세상이 어지럽고 세상이 다스려짐으로 말미암았도다.
선현(先賢)과 후현(後賢)이 한 것이 혹 같기도 하니,
그때나 이때가 어찌 다르겠는가.
지금 우리 성주(聖主)께서는 덕은 요(堯)임금과 같고,
마침 은사(隱士)가 있는데 성(姓)은 이(李)씨로다.
조정(朝廷)에 설 만하면 조정에서 벼슬하고,
향리(鄕里)에 돌아갈 만하면 향리에 살았도다.
도통(道通)을 떨어뜨리지 아니하니 노자(老子)·장자(莊子)보다 더 깊고,
유학(儒學)의 문을 다시 열어 줌이여, 수사(洙泗)4)에 비길 만하도다.
이미 청정함이여, 그 마침을 잘 마쳤고, 어찌 충의를 처음에만 시작하겠는가.
노을을 먹고 기(氣)를 먹음이여! 참다운 공부가 있었고,
경을 말하고 부처에게 예를 말함이여! 다른 일이 없었도다.
나의 공명(功名)같은 것이야 어찌 그대의 마음에 있겠으며
공(公)의 덕행(德行)같은 것은 곧 나의 뜻이로다.
원정(元貞)2년(충렬왕22년=1296년)2월

(1)주역의 박괘 육삼 효의 뜻으로 소인은 음을 버리고 군자는 양을 취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고 하였음
(2)주역 돈괘 구사효의 뜻으로 사욕을 버리는 군자이기 때문에 길하다고 하였음
(3)허유 : 요임금이 허유를 찾아가 천하를 물려 주겠다고 하자 허유가 오늘 별소리를 다 들었다고 하며 귀를 씻었다는 옛일이 있다.
(4) 공자를 말함

윗 글은 이승휴가 지어올린 [단모부]에 대한 답신입니다.
서기 1296년에 쓰신 글이니 춘추 85세에 쓰신 글입니다.
단모부는 내일 다시 올리겠습니다. 본문이 좀 길어서 워드화에 시간이 걸려서 우선 급한대로 할아버님 글부터 올립니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0/08 20:55   조회 : 80
충렬공의 편지  

충렬공 선조님의 관한 자료는 너무나 많지만 할아버님께서 직접 쓰신 글은 지금까지 "東征日本過福州(일본을 정벌하러가는 길에 안동을 지니며"만 알려 져 왔습니다. 충렬공 할아버님께서 직접 쓰신 편지가 있어 여기에 소개 합니다.

忠烈公의 편지
전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사(判典吏事) 세자사(世子師)로치사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식읍 일천호 식실 삼백호 김방경(金方慶)이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

지난번 보내 중 양칙(兩則)의 법어(法語)를 항상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根氣)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 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겸해서 게송(偈頌)을 보내 주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유마(維摩)의 方丈(방장)*1)이 모암(茅庵)을 생각하였고, 금색의 두타(頭陀)가 화담(話談)을 접했도다. 팔만(八萬)의 예상(猊床)*2)을 어디에 놓았던고, 거울 같을 작은 못이 갑자기 와서 비춘다' 하였는데, 이 말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요요암명(了了庵銘)을 보여 주었습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이르기를, "마음이 밝으면 법을 밝게 하고, 자기를 밝게 하면 사람을 밝게 한다. 자기가 밝지 못하면 곧 사람과 자기가 미혹하게 되고, 마음이 밝지 못하면 모든 세계가 마음을 따라 미혹해진다"고 하였고, 또 한 노인이 있어 말하기를 "만법이 본래 공(空)하니, 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이미 있는 것이 아니니 밝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원만해지고, 법이 이미 본래 공(空)하니 밝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항상 적적하다."고하였고,
양무위자(楊无爲子)가 또 노래해 말하기를, "산당(山堂)에 새벽이 되니 백운이 날아오르고,
산당(山堂)에 저녘이 되니 백운이 돌아가도다. 청송(靑松)이 늙음이여 월계(月溪)가 밝네,
밝고 밝지 못함이여 누구와 더불어 알 수 있겠는가?"고 하였고, 삼단어칙(三段語則)에 이어서 말하기를, "청컨대 거사는 주각(住脚)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내 경계(境界)가 아닌데, 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소. 그러나 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앞의 두 노인은 각기 한 부분을 찬양하고 무위자(無爲子)는 중간에서 노래했으니, 요요의 뜻이 지극하여 그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노인*3)이 있어 자기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운을 이어 지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맑게 개인 가을 하늘에 외로운 새가 날아가니 秋空晴兮孤鳥飛
내 자취를 숨기며 어디로 돌아가려 하느냐. 沒朕迹兮將安歸
회광반조(廻光反照)*4)함이여 못 미침이 없다네. 廻光炤兮无欠餘
명성이 미치지 않음은 심상하게 아는도다. 名不及兮尋常知
내가 한 마디 한 것을 화상은 어떻게 여기는가. 和尙以爲如何
귀위(歸依)할 바를 가르쳐 주길 바랍니다. 伏望小示指歸

*l)방장(方丈) : 주지가 거처하는 방
*2)예상(猊床) : 부처가 앉는 자리
*3)한 노인 : 김방경 자신을 말함
*4)회광반조(廻光反照) :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心性을 反省하여 보는것

원문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solnae@empal.com 016-363-0543

. 東征日本過福州 (忠烈公 方慶)
일본정복하러 가는 길에 안동을 지나며

山水無非舊眼淸 산과 물은 옛날 보던 맑음 그대로이고,
樓臺亦是少年情 누대 또한 어릴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애틋하여라, 고국엔 옛 풍속 남아있어,
收拾絃歌慰我行 노래소리 모아서 내갈길 위로하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1/13 11:31   조회 : 39
자료-12- 전설=지렁이장군 김통정과 충렬공(1)  

제주도에 전승되는 삼별초난때 김통정과 충렬공 선조님의 전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지렁이의 아들장군]
밤이 꽤 깊었다.
곤히 잠을 자던 과댁(寡宅)은 들창 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
과부댁은 숨을 죽이며 인기척에 귀를 곤두 세웠다. 그러나 다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사 사람이 근접했다손 치더라도 방문과 들창을 단단히 걸어 잠궜으나 방안에는 얼씬도 못할 것이기에 과부댁은 마음을 놓고 다시 잠에 빠졌다.
그런데 어느 때쯤이나 되었을까? 잠이 깊었던 과부댁은 가슴을 누르고 있는 바위같은 중압감에 잠에서 깨었다.
『에그머니나!』
숨소리가 남정네임이 분명한 집채만한 체구가 자신을 덮쳐 누르고 있는 것이다.
『누구요?』
하고 고함이라도 질러야 할텐데 그의 힘에 압도되어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남정네는 벌써 일을 벌인 것이다. 이윽고 불이 꺼졌다. 남정네는 쓰다 달다 한마디의 말도 없이 부시시 과부댁의 배 위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걸어 잠근 방문으로 해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칠흙같은 밤이고 방 안에는 등잔불 하나 켜있지 않았으니 남정네의 모습이나, 그가 어디로 해서 나가버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과택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일은 이렇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밤에도 바로 똑같은 시각에 같은 남정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나 잠을 자던 과부댁을 범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흘, 나흘, 닷새·‥
남정네는 계속해서 찾아 왔고, 과부댁은 이 일을 피하려하기는 커녕, 은근히 기다리며, 남정네가 하자는 대로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은 이 만남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의 증거가 과부댁의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부댁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마을 아낙네들이 눈치채기 시작하였다. 『과부댁의 허리가 굵어졌어…』 부녀자 두 서넛만 모이면 과부댁의 소문이었다. 이 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과부의 몸으로서--.
과부댁은 과부댁대로 억울하게 당한 일을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해야만 했다.
마을의 노파가 하루는 과부댁을 찾아 왔다.
『사람이 실수를 하려면 어쩌는 수 없는 일이지 …. 부끄러워 말고 나한테 얘기를 해 보라니까.』 과부댁은 이말에 용기를 얻어 노파에게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좋은 수가 있어요. 그가 다시 찾아오면 그의 허리에 실을 매요. 그래서 실을 따라가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참 그렇군요』
남정네가 또 나타나 일을 치루고 사라졌다.
과부댁은 그의 허리에 실을 매놓고 그것이 한 없이 풀려나가게 했다.
다음 날 새벽 과부댁은 일찍 일어나 실을 따라 나섰다. 이상하게도 실은 방안에서 들창 사이로 빠져나간 것이다. 과부댁은 방 밖으로 나가 창문 사이로 빠져나온 실을 따라가자 실은 바로 옆길가에 세워 놓은 노둣돌(하마석 - 下馬石)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과부댁은 이 노둣돌을 간신히 들어 옮겨놓고 실이 간 곳을 찾았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 돌이 놓였던 자리에 커다란 지렁이가 허리에 실을 맨채 거기에서 굼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부댁은 지렁이를 보자 아찔하였다. 징그럽고 분한 생각이 들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렁이에게 당하다니…살려 놨다간 또 당할 것이다!』하고 과부댁은 지렁이를 발로 뭉개어 죽여버렸다. 그러자 다시는 남정네가 나타나지 않았다. 지렁이는 처치했지만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그 씨는 달이 차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보통 아이와 달랐다. 온몸이 비늘로 덮였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과부댁은 이 일을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고 아이를 정성껏 키웠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는 지렁이와 정을 통해 난 아이라고 하여 『지렁이 진』자를 성으로하고, 정을 통했다고 진통정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게 했다. 그 후 다시 성을 김이라고 고쳐 김통정이라고 했다.

다음에 2편 (충렬공과 김통정의 싸움에 대한 전설)이 계속 됩니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1/19 16:49   조회 : 34
자료12-충렬공과 김통정에 얽힌 제주도 전설  

[지렁이 장군 김통정]에 이어서 충렬공과 김통정에 얽힌 제주도 전설을 계속해서 소개 합니다.
아이(김통정)는 자라면서 남달랐다. 활을 잘 쏘고, 칼쓰기라든지 창던지기 등 무술에 재주를 보였다. 그는 커서 당시의 군사이었던 삼별초군에 들어갔다. 삼별초군은 고려시대에 최씨의 집권하에 있던 때에 특별히 조직된 군대이었다.
이 때 고려는 몽고군에 쫓기어 정부는 강화도에 옮겨가 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최씨가 몰락하여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게 되었고, 강화 있던 정부가 다시 개경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런 일들을 반대한 삼별초군은 난을 일으켜 김통정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그는 제주도에서 토성을 크게 쌓고 그 안에 대궐을 지은 다음, 스스로 해성왕국을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그는 백성에게 돈이나 곡식으로 세금을 받지 않고 재 닷되와 빗자루 하나씩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그는 백성들에게서 거둔 많은 재를 성벽위에 두껍게 뿌려 놓고, 빗자루는 비축해 두었다. 그는 바다로 해서 공격해 올 정부군을 막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 성위에서 바다를 감시하게 하였다. 적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말꼬리에 빗자루를 맨 다음 말을 타고 성벽위를 돌았다. 그러면 꼬리에 맨 빗자루가 성벽 위에 쌓아놓은 재를 흩어 뿌리는 바람에 멀리에서 보면 흡사 안개가 낀 듯 시야를 가려 적의 공격을 방해했다. 적은 방향을 찾지 못해 싸우다가는 철수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세워 김방경 장군에게 대군을 딸려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김통정은 번번히 안개작전을 써서 적을 물리쳤지만 이번만은 그런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사세가 불리하게 되자, 김통정은 백성들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공격해 오는 관군과 싸웠다. 그런데 그는 급히 서두르느라고 애보기 여자 한 사람을 못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이 큰 실수였다.
토성은 워낙 높은데다가 웅장한 철문이 닫혀있어서 김방경 장군은 군대를 성 안으로 진격시키지 못하고 성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이 때 애보기 여인이 김방경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성안으로 진격하지 못하시오?』
『저 큰 철문을 열수가 없지 않소?』
『장군님도 참 한심하시오. 저따위 철문을 못 열고 쩔쩔 매시오?』
『좋은 수라도 있다는 말이오?』
『철문 아래에 불을 펴놓고 두 이레 동안 풀무질을 해보시오. 불을 달면 쇠는 녹게
마련아닙니까? 그러면 쇠문을 열립니다. 』
애보기 여인의 말을 듣고 김방경은 그말을 옳게 여겨 철문 아래에 풀무를 걸어 놓고
불을 피워 달구기 시작했다.
열 나흘동안의 풀무질에 쇠문은 녹아 열리고 말았다. 정부군이 몰래 들어오자 김통정은
다급해져 깔고 않아 있던 쇠방석을 수평선을 향해 던지자 그것은 바다위에 떨어지면서 둥
둥 뜨는 것이었다.
김통정은 겨드랑이의 날개로 새처럼 날아서 그 쇠방석 위에 가 앉았다.
그를 꼭 잡을 줄만 알았던 김방경 장군은 애보기 여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무슨 좋은 수가 없겠소?』
『장군의 부하 장수 한 사람은 새로 둔갑을 시키고, 또 한 장수는 모기로 둔갑을 시켜
김통정을 쫓아가게 하시오』
이 말에 김방경은 그의 부하 두사람을 도술로 둔갑을 시켜 새와 모기로 변하게하여
김통정을 따라잡게 하였다.
쇠방석에 앉은 채 바다에 떠 있던 김통정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새와 모기를 보자
쇠방석에서 떠나 뭍으로 다가가 공성리 마을을 흐르는 갈그미라는 내로 날아갔다.
그러자 새로 둔갑한 장군은 김통정의 투구위에 내려 않고 모기로 둔갑한 한 장군은
김통정의 얼굴을 앵앵거리며 맴돌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김통정는 새와 모기를 살피느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바람에
목의 비늘이 거꾸로 거슬려지면서 비늘 사이로 맨살이 들어나 보였다.
모기로 둔갑을 했던 장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빼어 그곳을 내리치자, 김통정의
목이 뎅겅 떨어져 나갔다.
장군은 얼른 그 잘린 자리에 재를 뿌려 목이 다시 붙어 살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가 죽자 김방경 장군은 성안으로 들어가 김통정의 아내를 사로잡아 보니, 임신중이었다.
김방경은 김통정의 손을 끊기 위해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그러자 그의 피가 인근의 흙을 붉게 물들였다.

나중에 보니 토성 안에서 아주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그 땅은 김통정이 거기에 물을 고이게 하고 뱃놀이를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12/27 15:58   조회 : 49
물을 다스리는자 천하를 얻는다_(충렬공자료-16-)  

중국 고대부터 치수는 천하의 근본이라 치수를 잘하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충렬공 선조의 치수 기록이 역사적으로 확인 된 것이 여러 편이 있어서 차례로 올립니다.
우리나라 가장 오랜 3대 저수지는 의림지와 벽골제 그리고 수산제입니다.
여기에 의림지와 수산제의 기록을 비롯하여 위도의 간척사업에 관한 사항을 싣습니다.

[의림지]
저수지란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의 과다 또는 과소를 조절하는 인공적 수리시설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막연하게 제언(堤堰)이라 불렀으나 수리 시설의 기능이 분화되면서 최근에는 보(洑)·방조제(防潮堤) 등과 구분하여 저수지라 불리게 되었다. 저수지는 지표수 유량을 조절하여 수력발전, 상수도, 공업용수로도 사용할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개발할 수 있는 다목적성을 띠어 수자원의 종합적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왔다. 그 에 따라 벽골제를 시작으로 국가적 규모의 큰 저수지가 여러 곳에 축조되었다.
그 중에서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이다. 의림지는 고을을 다스리던 박순(朴淳)이 축조하고 그의 아호 의림을 따서 의림지라 이름한 것이나 일설에는 540년 악사 우륵이 유지(柳池)라 불리던 소규모 저수지를 개축한 것이 의림지의 시원이라는 설도 있다.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194년(명종 24) 개축할 때에 발견된 축조 당시의 기초공사를 보면, 제방 내부의 기초가 흙을 옹기 굽듯이 3층으로 다져 쌓아 누수를 막고, 배수구의 수문은 수톤의 거석을 쌓아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거석에는 '朴義林'이라는 음각글자가 있었다 한다.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이, 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鐘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密陽都護府 수산제(守山提).  新增東國第 26卷
수산현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한다.
못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 연. 마름, 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 문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定州牧  山川  新增東國與地勝覽第52卷
위도(葦島):
주의 동족 50리에 있다. 고려 고종 때에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에 들어가 은신하는데 그 곳이 10여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한데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믿고 활발하였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는데 크기가 주혈(株穴)만한데, 가산( 山)체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어 가보면 뱀이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사람들이 머지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만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 간척사업의 역사
(1) 고려 및 조선시대의 간척 우리나라의 논농사 기원은 BC 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간척사업은 고려 고종 22년(서기 1235년)에 몽고병이 침입하였을 때 병란을 피하여 강화도로 임시도읍을 옮긴 후 해사방어를 목적으로 연안제방(沿岸堤防)을 구축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식량생산을 위한 농지조성목적의 간척사업은 고려고종 35년(서기 1248년)에 몽고병란시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당시 병마판관이었던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안북부(지금의 평안남도 安州,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葦島)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한 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후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군량미 확보와 식량생산을 목적으로 강화, 김포 등에 간척사업을 시행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선조 정종 때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간척사업을 위한 제방 및 배수갑문 축조방법에 대한 기술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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