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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생애와 행적(2)-(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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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4 조회1,0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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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의 생애 

시 기

연령

행              적

1212년(강종 1)

1

* 본관은 安東, 曾祖는 司戶 義和․祖는 掌冶署丞兼直史館 敏誠․父는 兵部尙書翰林學士 孝仁․外祖는 元興鎭副使郎將 宋耆(金海府人).

1224년(고종 11)

13

* 5월경 父 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 金孝仁이 寶鏡寺圓眞國師의 碑文을 씀.

1227년(고종 14)

16

* 三韓功臣 日兢의 蔭敍로 良醞史同正에 임명되었다가 借隊正․太子府牽龍을 거쳐 散員兼式目都監錄事에 임명됨. 이때 門下侍中 崔宗峻이 그의 忠直함을 사랑하여 禮로서 대우하고 큰일을 모두 맡겼다고 함.

1231년(고종 18)

20

* 8월 29일(임오) 蒙古元帥 撒禮塔이 咸新鎭을 포위하고 鐵州를 공격하여 몽고군의 침입이 시작됨.

* 10월 1일(계축) 蒙古人 2인이 牒을 가지고 平州에 오자 殿中侍御史 金孝仁을 파견하여 事由를 묻게 함.

1232년(고종 19)

21

* 6월 16일 首都를 江華島로 옮기기로 결정함.

1237년(고종 24)

26

* 4월 伯父 金敞이 判大僕寺事로서 國子監試를 주관함.

1242년(고종 29)

31

* 4월 9일(신유) 伯父 金敞이 樞密院副使로서 知貢擧가 됨.

이 후

 

* 西北面兵馬錄事․別將․郎將을 역임함.

* 監察御史(종6품)에 임명되어 右倉을 감독하여 請託을 받아들이지 않음. 宰相 某가 權臣(집정자 崔瑀로 추측됨)에게 김방경을 헐뜯자, 權臣이 김방경을 질책하였으나 굽히지 않았음.

1247년(고종 34)

36

* 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됨.

1248년(고종 35)

37

* 3월 北界(西北面)兵馬使 盧演에 명하여 蒙古兵을 피하여 人民을 이끌고 海島에 入保하게 함. 김방경은 兵馬判官으로서 葦島에 入保하여 堤防을 쌓아 10여리의 평야를 개간하고, 빗물을 用水로 사용하게 하자 人民이 편히 여김.

이 후

 

* 牽龍行首에 임명되어 解弛해진 宿衛를 철저히 하려고 함.

* 左禁中指諭․攝將軍에 임명됨.

1250년(고종 37)

39

* 5월 8일(계유) 父 金孝仁이 尙書左丞으로 同知貢擧가 됨.

1253년(고종 40)

42

* 11월 15일(경인) 김방경의 父 兵部尙書․翰林學士 金孝仁이 別世함.

1256년(고종 43)

45

* 2월 4일(을축) 伯父인 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金敞이 죽으면서 조카 金方慶에게 國葬을 사양하게 함.

이 후

 

* 將軍에 임명되어 給事中을 겸임함.

* 御史中丞(종4품)에 임명되어 법을 엄격히 준수함.

1260년(원종 1)

49

* 3월 1일(무진) 太孫(충렬왕)이 開城으로 還都하기 위해 大將軍 김방경 등을 出排別監으로 삼음.

* 3월 3일(경오) 김방경을 知刑部事로 임명함.

이후

 

* 金吾衛大將軍으로 知閣門事를 겸임함.

1263년(원종 4)

52

* 이해에 御史中丞(종4품)으로서 銓選을 장악한 知御史臺事(종4품)․左丞宣 兪千遇와 班次[官品]을 다툼. 이로 인해 김방경의 姻戚들의 仕宦이 막힘.

* 12월 20일(병인) 知御史臺事兼選軍別監使에 임명됨.

1265년(원종 6)

54

* 1월 25일(을미) 廣平公 恂․大將軍 金方慶․中書舍人 張鎰 등을 蒙古에 보내어 方物을 바침.

* 5월 1일(기사) 廣平公 恂․大將軍 金方慶 등이 蒙古에서 돌아옴.

이 후

 

* 御史大夫를 겸임함.

이 후

 

* 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惠政을 베품. 母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옴.

이 후

 

* 上將軍(정3품)에 임명됨.

1268년(원종 9)

57

* 2월 이 시기 이전에 重房의 將校를 班主인 鷹揚軍上將軍 田份의 미움을 받음. 이때 權臣(집정자 金俊으로 추측됨)에 의해 南京副使[南京倅]로 좌천됨.

* 2월 25일(병오) 西北諸城의 요청에 의해 남경에 부임한지 3일 만에 判秘書省事․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됨.

이 후

 

* 서북면병마사에서 돌아와 刑部尙書․樞密院副使에 임명됨.

1269년(원종 10)

58

* 6월 18일(임진) 임연이 宰樞를 모아 元宗을 廢位하기를 의논하고, 21일(乙未) 安慶公 淐을 옹립하고 원종을 別宮으로 옮김.  

* 9월 7일(경술) 집권자[敎定別監] 林衍이 樞密院副使 金方慶․大將軍 崔東秀를 몽고에 보내 元宗의 廢位事件을 변명하게 함.

* 이때 몽고에 있던 世子(忠烈王)가 世祖에게 請兵하여 蒙哥篤 휘하의 軍士가 출동하게 됨. 문하시중 李藏用이 이들을 안내하게 될 인물로서 김방경을 추천하여 세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몽고군과 함께 東京에 주둔함.

* 10월 13일(을유) 西北面兵馬使營의 記官 崔坦․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의 守令을 죽였으나, 김방경의 妹婿인 博州守 姜份․延州守 權闡만은 方慶의 緣由로서 禮로써 대접함.

* 11월 23일(갑자) 元宗이 복위함.

* 12월 13일(신사) 김방경이 同知樞密院事․御史大夫에 임명됨.

1270년(원종 11)

59

* 1월 9일(기유) 몽고에 파견되었던 門下侍中 李藏用․同知樞密院事 김방경 등이 東京[遼陽]에서 돌아와 東京부근의 行宮에서 몽고에 행차하던 원종을 알현함.

* 이 시기 이후에 김방경이 몽고장군 蒙哥篤과 함께 西京에 머물면서 崔坦․韓愼 등이 蒙哥篤에게 권하여 開京을 함락시키려는 획책을 저지시킴.

* 2월 25일(을미) 임연이 病死하고, 아들 林惟茂가 교정별감에 임명됨.

* 5월 14일(계축) 집권자 임유무가 피살됨.

* 5월 29일(무진) 사신을 강화에 보내 三別抄를 罷하게 함.

* 6월 1일(기사)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남.

* 6월 13일(신사) 김방경을 逆賊[三別抄]追討使로 임명함.

* 8월 19일(병술) 삼별초가 珍島에 入居함.

* 9월 7일(갑진) 申思佺을 代身하여 全羅道追討使(혹은 討賊使)에 임명되어 蒙古元帥 阿海와 함께 진도를 토벌함.16) 김방경이 阿海와 함께 羅州 부근의 三堅院에 駐屯하면서 진도와 對峙하였는데, 이때 潘南人 洪贊․洪機 등이 김방경을 阿海에게 참소하여 삼별초와 密通하고 있다고 보고함. 이로 인해 達魯花赤 脫朶兒에 의해 김방경은 면직되고 체포되어 개경으로 압송되었으나, 兩側의 對辯에 의해 誣告임이 확인되어 석방됨. 元宗이 脫朶兒에게 청하여 김방경을 다시 기용하게 하고서 上將軍으로 임명하여 삼별초를 치게 함.    

* 12월 22일(정사)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러 삼별초와 싸울 때 阿海의 畏縮으로 인해 포위되었으나, 將軍 楊東茂에 의해 구원됨.

* 12월 守司徒․參知政事에 임명됨.

1271년(원종 12)

60

* 1월 5일(기사) 將軍 印公秀를 몽고에 보내어 阿海의 畏縮을 보고하자 世祖가 阿海를 소환함.

* 3월 3일(병인) 몽고가 忻都․史樞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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