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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생애와 행적(3)-(2007. 2. 장동익 편저. 김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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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4 조회1,0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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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년(원종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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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6일(경신) 門下侍郞平章事 김방경을 判追討事로, 樞密副使 邊胤을 追討使로 임명함.

* 2월 20일(계묘) 行營中軍兵馬元帥 김방경이 精騎 800을 거느리고 忻都와 함께 삼별초를 치기위해 耽羅로 출발함.

* 4월 28일(경술) 원수 김방경이 흔도․홍다구와 함께 탐라에서 삼별초를 격파함.

* 6월 16일(정유) 원수 김방경이 개선함.

* 윤6월 13일(계해) 삼별초 토벌을 포상하여 中軍元帥 김방경을 守太師․門下侍中으로, 兵馬使 邊胤을 判樞密院事로 임명함.

* 7월 16일(을미) 시중 김방경이 元에 불려갔는데, 世祖가 廣寒殿에서 引見하여 丞相의 다음에 앉히고 金鞍․綵服․金銀을 하사함.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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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일(경진) 시중 김방경이 일본정벌을 위해 戰船 300艘를 建造하게 하라는 元 中書省의 牒을 가져옴. 이때 開府儀同三司에 책봉되고 東南道都督使로 임명됨. 이때 洪茶丘(察忽)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옴.

* 이후 김방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어 造船을 감독하다가 6월 18일(계해) 元宗이 崩御하자 洪茶丘와 함께 歸京함.

* 7월 12일(병술) 김방경이 征東先鋒別抄를 거느리고 合浦로 출발함.

* 10월 3일(을사) 都督使 김방경으로 하여금 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金侁을 左軍使, 金文庇를 右軍使로 삼아 三翼軍으로 편성하고 8,000명을 거느리고 몽고군 25,000명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게 함.

* 10월 6일 東征軍이 對馬島에 상륙함.

* 10월 14일(병진) 一岐島에 이르러 海岸에 陣을 친 倭兵을 공격하여 1,000여급을 擊殺함. 이어서 伊蠻島로 나아가 三郞浦(鹿原)에서 상륙하여 中軍(김방경)․右軍(金文庇)은 伊蠻島를 공격하고 左軍(金侁)은 博多(朴加多)를 공격하여 왜병과 싸우다가 철수하여 전함으로 돌아옴. 이날 밤 큰 風雨가 있어 戰艦이 巖崖에 부딪혀 많이 破損되고 左軍使 金侁이 溺死함.

* 11월 27일(기해) 동정군이 합포에 돌아왔는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13,500餘人임.

* 12월 28일(경오) 侍中 김방경이 開京으로 還軍함. 上柱國․判御史臺事의 官爵이 더해짐.

1275년(충렬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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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8일(경진) 門下侍中 김방경이 大將軍 印公秀와 함께 元에 파견되어 일본원정의 부담을 감소하여줄 것을 요청함.

* 3월 20일(신묘) 김방경이 원에서 돌아옴.

* 10월 25일(임술) 官制의 改革으로 首相인 匡靖大夫․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됨.

* 12월 24일(경신) 上柱國이 더해짐.

1276년(충렬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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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7일(계축) 中贊 김방경이 直史館 文璉과 함께 함께 원에 파견되어 聖節(世祖의 生日)을 하례함. 王이 김방경의 삼별초토벌 및 일본원정의 전공을 포상하여 虎頭金牌를 下賜하여 줄 것을 요청함

* 9월 世祖를 알현하고 虎頭金牌를 하사받음.

* 10월 7일(무진) 김방경이 원에서 호두금패를 받아 돌아옴.

* 12월 16일(병자) 匿名의 誣告書에 따라 達魯花赤 石抹天衢에 의해 齊安公 淑․金方慶 등 43人이 叛逆의 혐의로 체포됨. 17일(정축) 亞相인 僉議侍郞贊成事 柳璥의 努力에 의해 公主(忠烈王妃)가 석방함.

1277년(충렬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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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일(신묘) 중찬 김방경이 妻母의 喪을 당하였으나, 軍國의 事務가 번다하여 후일에 服을 입게 함.

* 1월 4일(갑오) 김방경을 世子師로, 柳璥을 世子傅로 임명함.

* 12월 13일(정묘) 前大將軍 韋得儒․中郎將 盧進義․金福大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忻都에게 무고하자 왕이 贊成事 柳璥․元傅 등으로 하여금 東征元帥 忻都․達魯花赤 石抹天衢 등과 함께 심문하게 하고 무고임을 알고서 석방함.

1278년(충렬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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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8일(임인) 왕이 봉은사에서 忻都․洪茶丘와 함께 김방경․忻의 父子를 심문함.

* 2월 3일(병진) 왕이 국청사에서 忻都․洪茶丘와 함께 김방경․忻의 父子를 심문함. 이때 홍다구가 혹독하게 심문하였으나 끝내 自服하지 아니하자 병기를 私事로이 保管한 죄로서 大靑島에 유배함.

* 2월 10일(계해) 장군 印候를 원에 보내어 김방경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함.

* 2월 14일(정묘) 柳璥을 判典理司事로 임명함. 이때 홍다구의 청에 의해 韋得儒을 上將軍으로, 盧進義를 將軍으로 임명함.

* 3월 15일(무술) 위득유․노진의가 고려의 談禪法會가 元을 저주하는 행사라고 홍다구에게 전하자 홍다구가 이를 中書省에 보고함

* 4월 15일(무진) 印候가 원에서 돌아와 世祖가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노진의로 하여금 왕을 隨從入朝하여 對辯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고 전함. 위득유와 노진의는 원에 가다가 노진의는 中道에서, 위득유는 大都에서 죽음.

* 6월 26일(무인) 왕이 中書省에 上書하여 김방경의 일과 담선법회를 변명함.

* 7월 3일(갑신) 왕이 세조를 알현하고 김방경이 무고된 것을 해명함.

* 7월 22일(계묘) 세조가 김방경을 赦免하고 왕을 따라 還國하게 함.

* 10월 3일(계축) 김방경을 僉議中贊․上將軍․判監察司事로 삼고 銀 10斤을 하사함.

* 10월 10일(경신) 僉議贊成事․判典理司事 柳璥이 辭職을 청하자 致仕시키고, 김방경을 判典理司事로 임명함.

* 12월 某日 洪茶丘의 一黨을 숙청한 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元의 使臣 速魯哥가 중찬 김방경․判密直司事 許珙을 데리고 원에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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