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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사관’에 매몰된 항몽의 진실 ‘삼별초(三別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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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5-12-19 14:54 조회52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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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사관에 매몰된 항몽의 진실 삼별초(三別抄)‘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을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여겼다.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에 맞서 싸운 선조들의 항쟁 역사를 교육하는 것은 국민적 단결과 저항 정신을 기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여기에 편승하여 다수의 지식인이 '민족의 우수성'이나 '항쟁'이라는 틀에 맞춰 지나친 민족주의 강조로 항쟁사관(抗爭史觀)’에 매몰되어 객관적인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역사가 특정 목적(국민의 저항 정신 함양 등)을 위해 '주입' 될 경우, 이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항쟁사관만이 유일한 '정통' 사관인 것처럼 여기면,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위축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어렵다. 역사 교육에서 항쟁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방해하고 특정 관점만을 획일적으로 주입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1. 삼별초의 정체 

 

삼별초는 원래 최우(崔瑀)가 자신의 권력 유지와 신변 보호를 위해 만든 사병 조직인 야별초(夜別抄)에서 출발했다. 이후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확대되었지만, 본질에서는 무신정권의 핵심 친위대로 무력 기반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고려 전체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통제 아래 있는 지역(남도 해안 및 도서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고종 44)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 무신정권 말엽이다.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형옥(刑獄)의 경찰 임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도둑뿐만 아니라 무신정권에 반하는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비호하에 전국에 걸쳐 친위대, 특공대, 전위대, 편의대 등 임무를 수행했다. 

 

2.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 도구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삼별초가 기동성이 강했기 때문에 권신(權臣)들이 자기들을 수호하고 보좌하는 부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권신에 의하여 설치되고 권신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삼별초의 지휘는 국가 관료인 도령(都領지휘(指揮교위(校尉) 등을 배치하여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임연(林衍송송례(宋松禮)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정권을 견제하고 유지하는 핵심 무력으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무신정권이라는 '군부독재 체제'의 수호자였다. 

 

3. 개경 환도와 '해산' 위기에 대한 반발 

 

1270(원종 11) 고려 원종(元宗)이 몽골과의 대몽화의(對蒙和議)가 이루어지면서 무신정권을 종식하고 왕권 중심의 체제를 회복하려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무신정권의 사병으로서 막강한 권한과 녹봉을 누리던 삼별초 입장에서는 개경 환도는 곧 정권 기반의 붕괴와 자신들의 지위 및 생존권 박탈을 의미했다. 

 

삼별초는 왕권이 회복되고 몽골과 화친한 새로운 고려 중앙 정부를 '정통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며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다. 이는 기존의 무신정권 시대의 정치 체제를 이어가려 했던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4. 백성들의 피해와 생존권 위협

 

삼별초가 강화도를 떠나 진도와 제주도에 정착하며 봉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식량 및 물자가 필수적이었다.

  

삼별초는 서남해안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연안 지역의 군현(郡縣)을 공격하고 방화하거나 약탈하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주민이나 지방 관리가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일도 발생했다. 1272(원종 13) 기록에는 삼별초가 조운선 수십 척을 나포하고 미곡 수천 석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별초가 주둔했던 진도나 제주도 등지의 주민들에게 군량미와 물자,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주민들의 생업을 위협하고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제주도민들은 삼별초의 군사 활동에 시달리면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제주도는 삼별초 최후 거점이었던 만큼, 주민들의 고통이 특히 심했다. 

 

삼별초의 재평가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고려 정부를 부정하고 별도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로 거점을 옮기는 과정에서 몽골군뿐만 아니라, 개경의 고려 정통 정부군과도 교전하는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는 한국사에서 '대몽항쟁의 상징'으로 높게 평가받아 왔지만, 최근 역사 학계에서는 그들의 활동을 조직의 기득권 수호와 그 과정에서 희생된 백성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각이 활발하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고려라는 국가였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였는가?" 

 

삼별초는 대몽항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군사 정권의 잔재가 생존을 위해 벌인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민초들의 희생이 막대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댓글목록

김태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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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