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마을의 역사(2006. 6. 7. 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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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6:07 조회2,089회 댓글2건본문
사촌마을이 지나온 발자취(사진자료 생략)
김태홍(실무지킴이)
안동문화권 속의 의성문화
경상북도 북부권은 안동을 중심으로 의성, 봉화, 청송, 영양, 영덕 등을 포함하며 안동문화권이라고 한다. 대다수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의성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안동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안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의성의 이름난 가문과 학자들은 대부분 퇴계의 학맥을 이었으며, 안동의 명문가와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안동에서 의성으로 이거해 온 경우도 심심하지 않게 나타난다. 때문에 경상북도에서 유교문화권정비사업의 하나로 의성 금성의 산운마을이나 점곡의 사촌마을을 전통마을로 개발하기 위해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다.
의성은 지리적으로 경상북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조문국이 있었고 신라때 문소로 불러오다가 고려 태조 12년 후백제 견훤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성주 홍술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의로운 성" 곧 의성이라 명명하고 의성부로 승격시켰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의성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선조들의 뜻을 이어 일제에 항거 독립운동에 앞장선 항일 애국지사가 경상북도 전체 애국지사의 40%, 전국의 3.2%가 의성인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서 깊은 고장인 의성은 안동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반촌이자 집성촌이 여럿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의성 금성면의 영천이씨 집성촌인 산운마을과 점곡면의 선안동김씨 집성촌인 사촌마을이다. 그 가운데 특히, 사촌마을은 안동과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가까운 곳으로 유림의 학맥이나 생활문화가 안동과 많이 닮은 고장이다.
사촌마을의 유래와 역사
사촌마을은 행정상 의성군 점곡면에 위치한다. 점곡면은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고제자 회자(會子)의 부친 회점(會點)의 점(點)자를 따라 점골(點谷)이라 불리다가 후에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 폐합에 따라 점곡면(點谷面)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점곡면의 면소재지권이기도 하는 사촌마을의 역사는 고운 최치원의 장인 나천업 정승이 살았다고 마을의 원로들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신라 중엽까지 추측할 수 있다. 실제 마을에는 나정승의 묘라는 고묘가 전해지고 있다.
사촌이라는 지명은 충렬공 김방경의 6세손 김자첨공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중국의 사진촌을 본따서 사촌이라고 한 것을 유래로 한다. 후에 안동지방의 명문들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사촌의 안동김씨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고, 조선조말까지 대과급제자와 소과급제자를 각각 13명과 31명 배출한 명문가이다. 사촌마을은 대촌으로 ‘와해’라고 불렸을 만큼 기와집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사촌마을은 세 번의 난을 겪으면서 옛날의 모습을 상실했는데 그 가운데 특히 항일의병운동으로 인한 피해는 마을이 모두 화재로 불타서 없어질 만큼의 큰 고난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를 계기로 1896년 병신창의(유림에 의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남) 당시 의성지역의 의병운동 중심지가 바로 사촌마을이다. 운산 김상종과 좌산 김수욱 등의 의병장을 배출한 사촌마을은 1896년 3월 30일 의병장의 출생지였기 때문에 일제의 마수에 의해 잿더미로 화했고, 그로인해 옛날의 ‘와해’라고 불렸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앞서 안동김씨가 사촌마을에 입향한 유래를 언급했는데, 사촌마을에 안동김씨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자첨이 입향할 당시 함께 왔던 사위로 안동권씨 부정공파인 권식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조선조 천사 김종덕에 이르러 풍산유씨 겸암파인 병촌 유태춘이 천사의 누이와 혼인하여 하회에서 처향인 사촌으로 이거할 때 동생인 유민춘과 함께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사촌마을에는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유씨가 함께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안동김씨였다.
사촌마을과 안동김씨
본래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안동김씨는 두 가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충렬공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를 ‘선 안동김씨’ 혹은 ‘상락김씨’라고 하며,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삼태사 중의 한 분인 태사공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를 ‘후 안동김씨’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사촌마을 안동김씨는 선안동김씨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송은 김광수와 만취당 김사원 그리고 천사 김종덕을 들 수 있다. 송은 김광수는 충렬공의 9세손으로 도평의공파의 파조인 김구정의 현손이며, 서애 유성룡의 외조부이다. 선생은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썼는데 그가 후손들에게 전한 경심잠 십조목은 후대에 사촌마을 선비들이 정신적으로 받들었으며, 지금까지도 문규로 만들어 선생의 뜻을 받들고 있다. 선생의 경심잠 십조목은 학문을 닦는데 힘쓰고, 벼슬과 재산에 욕심 내지 말며, 벗과의 우애와 부부간의 도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촌에는 영남에 크게 이름났거나 높은 벼슬을 한 선비는 없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라에 큰 일이 생길 경우는 크게 일어나서 앞장섰다. 임란 당시에는 의성에서 의병장을 했거나 망우당 곽재우의 의진에서 활동했고, 앞에서 언급한 병신창의 때 의성 의병의 발원지이자 중심지가 사촌마을이었다.
또 선생은 서애의 외조부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따님이자 서애의 모친은 여장부였다고 한다. 서애의 모친에 대한 전설이 마을에 전해지는 것이 있어 소개하겠다. 사촌마을 한복판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을 처음 팠을 때 붉은 황토물을 먹으면 큰 자식을 낳는다는 말에 송은선생의 넷째딸(서애의 모친)이 그 흙물을 몇 바가지나 퍼 먹었다고 한다. 또 하나, 사촌마을에는 삼정승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김씨부인이 서애 선생을 임신하고 산달이 되어가자 아들이 그 기운을 받도록 하기위해 친정인 사촌마을로 왔다가 친정아버지인 선생이 “명기를 외손에게 줄 수 없다”고 내치는 바람에 마을 입구에 있는 가로숲에서 서애선생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만취당 김사원 선생은 송은 김광수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의 인물로 임란 당시 창의하여 정재장이 되었으며, 난후에는 휼민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또한, 외척인 서애와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퇴계가 만취당을 아껴 안동 도산면 원촌에 있는 월란정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후에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유림모임인 월란척촉회의 중심에 사촌마을의 안동김씨가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천사 김종덕 선생은 퇴계의 학맥을 이은 대산의 수제자로 마을에서는 천사의 사형제를 모두 이를 때 사채선생이라고 했으며, 대산선생의 문하에서는 선생을 호문삼로 중의 한분으로 불렀다. 선생은 대산의 학문을 이은 거유로서 사후에 유림의 공의로 불천위로 되었다.
400년된 유림조직 월란척촉회(續月瀾躑躅會)
‘월란(月瀾)’은 월란사를 이야기하고, ‘척촉(躑躅)’은 철쭉의 한자표현이다. 이 모임은 약 400여년된 것으로, 현재 유림의 모임으로 크게 알려진 ‘박약회’나 ‘유도회’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유림의 대표적인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월란척촉회가 안동지역 유림사회에서 가지는 비중은 대단하다. 월란척촉회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양반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1)
월란척촉회는 400년 전 농암과 퇴계선생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문학동호회와 같은 성격의 유림모임이다. 퇴계와 농암의 회동에 농암의 자제와 퇴계의 제자들이 따라와 그대로 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리하여 이 모임은 안동문화를 형성시킨 요소이자 모태가 되었다.2) 이 모임은 도산면 원촌리에 위치한 월란정사(月瀾精舍)에서 행해졌다. 월란정사는 원래 작은 사찰인 월란사(月瀾寺)가 있던 자리이다. 강세황의 ‘도산서원도’ 우측 끝에 그려진 이곳은 폐허가 된 16세기에 농암과 퇴계에 의해 알려졌다. 농암과 퇴계는 함께 이곳에서 ‘월란척촉회’를 개최하였고, 퇴계는 이후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월란척촉회에 대한 농암과 퇴계의 애착은 농암집에 드러난다.(원문생략)
“월란척촉지회는 나를 위해 연기한 듯 하나 이제 나는 늙고 병든 몸이라 제외시킴이 어떻겠는가. 또한 일직이 강산 전체를 그대에게 붙여준 편지가 있었는데, 다만 이번만은 언약도 있고 하니 부득불 병든 몸을 이끌고라도 그대의 뜻에 부응하고자 하니 요량하기 바라네.”
1555년 4월 10일, 농암 늙은이 손이 떨려 대강대강 쓰노라.
이 모임은 퇴계선생의 후대에 와서는 한동안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월란정사 역시 버려져 있다시피 하였는데, 1968(丙寅)년 이래 몇 유림이 선현의 유적지를 수심(搜尋)해오다가 도산 강학의 발원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3년, 월란칠대기적비를 세우고 ‘월란척촉회’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봉, 이근필, 김창회, 류창훈 선생 등이 논의하여 ‘속월란척촉회’(아래부터 월란척촉회로 통칭)를 결성한 이래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다.
월란척촉회가 발기할 당시의 위원회를 살펴보면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재무, 편간, 직일, 감사로 구성이 되어 있다. 2006년 현재는 회장과 부회장 두분, 총무와 감사로 구성이 되어있다. 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도 가능하다.
월란척촉회의 가입은 상당히 까다롭다. 회원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유림의 추천이 있어야 하며, 정기 모임 때 기존회원들의 수락이 있어야만 회원으로 활동 할 수 있다. 회원의 가입에서도 한집안(가정)에서 한명의 회원만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그 이유는 회원의 직함이 자손대로 유임되기 때문인데, 장남에게만 유임이 된다. 현재의 회원명부를 보면 예외로 형제가 가입된 것이 의성의 안동김씨(아래부터 사촌김씨) 문중에서 두 사례, 부자3)가 가입된 것이 진성이씨와 영천이씨에서 각각 한 사례가 나타난다. 회원의 회비는 가입 당시 2만원이며 년 2만원을 계속 낸다. 회원의 성씨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이것이 유림의 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진정이씨와 사촌김씨이다.
월란척촉회의 모임은 정일이지만 통문을 매번 발송한다.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월란정사의 아래에 있는 월란칠대기적비 앞에서 모임을 가졌다.4) 몇해전부터는 3년에 한번씩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가지며, 2006년의 경우 5월 7일 의성 사촌마을의 만취당에서 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는 회원의 가입과 제명에 대해 논하고, 그해의 결산을 하며 친목을 다지는 데, 가장 주된 내용은 역시 유림의 동향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모임이나 유림활동에 대한 자금은 회비와 위토, 찬조금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월란척촉회의 역사와 활동내용, 그리고 선현들의 가르침 등을 기록한 ‘월란지’를 발간하였다.
월란척촉회에는 또다른 모임인 ‘월란정사관리회’5)가 있다. 월란정사는 퇴계선생이 제자인 만취당 김사원 선생을 아껴 곁에 두고자 했으므로, 월란정사를 주고 그곳에서 공부하게 하여, 사촌김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지금 현재는 사촌김씨문중과 퇴계문중의 공동 소유로 되어 있다. 월란정사의 관리 역시 두 문중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사촌김씨가 거의 주관하여 관리한다. 그 이유는 버려졌던 월란정사를 사촌김씨 문중에서 기금을 마련해 중수하고 위토를 만들어 관리하기 때문이다. 진성이씨가 포함된 이유는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퇴계선생의 영향이 있겠지만 월란정사 바로 밑의 마을에 집성촌이 있었으므로 관리가 수월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월란정사를 중수한 이후 월란정사관리회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월란정사를 관리하기 위한 모임은 퇴계의 후손 중에서 유사 한명과 사촌김씨 문중에서 유사 한명을 두고 있다. 2년마다 한번씩 월란정사에서 모임을 갖는데, 봄에 주로 가진다. 모임은 비정일이며 통문을 띄운다. 모임의 모든 운영비는 사촌김씨문중에서 지출하고 있다. 모임 내용은 월란정사의 보수나 유지에 관련한 것이 주된다.
사촌마을의 귀중한 문화유적들
1) 영귀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34호로 지정(1991년 3월 25일)된 영귀정은 서애의 외조부인 송은 김광수가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수양하던 곳으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한다. 미천의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며, 영귀정 담장 안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2~3기 있어 한폭의 그림과 같은 조화로움을 보인다.
2) 만취당
만취당 김사원이 창건한 정자로 바로 옆에 안동김씨 종택이 있다. 선생이 43세 되던 1582년에 시작하여 1584년 10월에 완성하고 만취당이라 하였다. 조선조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정확하지 않으나 신라시대 고찰을 뜯어내어 그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로서 그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쳤다. 유형문화재 169호(1983년 6월 20일)로 지정되었다.
3) 사촌 가로숲
마을에서는 쑤, 가로쑤, 가로숲, 서림 등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상징물로써 마을 서쪽 입구에 있는 숲으로 길이가 약 1040m이며 폭은 40m되는 방풍림이다. 상수리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종이 있으며 수령은 300년에서 600년정도 되었다. 경상북도내에서도 큰 규모에 들어가는 숲으로 안동김씨 입향조인 감목공 김자첨이 1390년경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다. 지금도 숲에는 의성군의 군조인 왜가리와 철새들이 찾아든다. 천연기념물 405호(1999년 4월 6일)로 지정되었으며, 서애의 출생지라는 전설이 있고, 예전에 성황당이 있었으나 천사에게 현몽하여 기령산으로 옮겨갔다.
4) 사촌리 향나무
조선조 연산군 때 송은 김광수가 심었으며 스스로 이를 만년송이라 하였다. 수령 약 500년 정도 된 것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1995년 6월 30일)로 지정되었다. 비록 한그루의 나무이지만 선조들의 식수관과 자연 애호사상을 본받을 수 있는 현장학습자료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뜰에 심어온 정원수 식재의 흐름과 향나무 생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사촌마을의 미래와 전망
사촌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점곡면은 의성 동부권의 중심이다. 단위농협의 통폐합 당시 점곡면의 농협이 인근의 사곡농협, 옥산농협과 합쳐 의성동부농협으로 탈바꿈되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것은 경상북도의 도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상북도에서 북부지역 11개 시군에 대한 유교문화권관광사업(2000년~2010년)을 추진해 온 이후 2005년까지 1차년도 사업이 끝나고 2006년부터 2차년도 사업에 들어간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의성지역은 1차 사업기간 동안 금성면의 산운마을과 점곡면의 사촌마을의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사촌마을의 경우 약 15,990평에 이르는 방대한 면적을 정비하는 사업으로 88억원 가량을 투자하였다. 주요 정비내용으로는 만취당 등 고가옥을 보수하는 것과 지역 내 역사적인 건축물을 복원하고, 담장을 정비하였으며, 의성군 최초로 마을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마을주민들은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마을을 정비하는 것을 대다수가 좋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소한 불편함 정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보이고 있다.
경상북도의 정책과 군정뿐만 아니다. 마을 주민들의 사소한 지역적 관심이 사촌마을의 밝은 미래와 전망을 보여준다. 사촌리에서 거주하는 안동김씨는 문중행사가 안동권에서 있을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또한, 사촌리의 마을회관에는 다른 지역의 마을회관에서는 잘 볼 수 없을 만큼의 전통문화와 지역문화 관련서적들을 구입하거나 기증받아서 보관하고 있으며, 지역의 아이들이 마음껏 볼 수 있도록 개방한다. 비교적 전통문화가 잘 남아있는 안동지역에서 조차도 동제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지금, 사촌마을은 안동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동제를 계속 이어오고 있으며, 몇몇 분들은 문중이나 마을자료 수집에 열성적이다. 사촌리에 거주하는 김성수옹(81세)은 마을에서 민속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을 빠짐없이 수집한다. 그가 수집한 옛 사진이나 문중관련 자료는 책으로 묶어서 문중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배포한다. 전문성을 지닌 자료는 아니지만 문중관련 자료인 만큼 연구자에게도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로 넘친다. 절대로 수익성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마을을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촌마을의 미래와 전망은 너무나도 밝은 것이다.
끝으로 사촌마을 안동김씨의 ‘정신’이자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는 송은 김광수의 사친(事親)·보군(輔君)·제묘(祭廟)·정가(正家:齊家)·우애(友愛)·근형(謹刑)·폐참(廢讒)·신색(愼色)·결우(結友)·안빈(安貧) 등의 경심잠 10조목 원문과 해석본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松隱 先祖 警心箴(幷序)
士生斯世, 參於三才, 而壽夭窮達命也已矣, 心之操捨善惡, 在吾一身, 豈敢斯須忽哉, 夫人之異乎禽獸者, 有禮義也, 人無禮義, 可謂人乎, 唐虞邈矣, 淳風日釉, 而士習卑陋, 識者寧不寒心, 是故作箴十章, 以自警爲一家子孫之勸戒云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三才(天, 地, 人)의 하나로 참여하여 수(壽)하고 요(夭)하고 궁(窮)하고 달(達)함은 운명이라 하지만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내 몸에 달렸는데 이를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할까 보냐. 대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인데 예의가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요. 요순시대의 아름다운 풍속은 사라져가고 선비의 옛정은 저속해지니 어찌 한심치 아니할가. 고(故)로 내가 경심장 열 대목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고 子孫들의 경계를 권하노라.
一. 事 親
子於父母, 恩難報答, 宜得甘旨, 以供晨夕, 勿毁四體, 攪動親心, 一出鄕關, 感念益深, 我有偏母, 年逾七旬, 西山日迫, 愁淚滿巾, 烏鳥反哺, 人而恝然, 我斟我酒, 惟壽生前
- 어버이 섬기는 일
자식이 부모에게 은혜를 보답함이 어렵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조석으로 받들고 제 몸을 조심하여 부모의 근심을 없게 하며 하루라도 외박을 하면 부모 걱정 절로 된다. 나에게는 편모가 계시는데 70이 넘은지라 돌아가실 날 멀지 않으니 근심 걱정뿐이로다. 까마귀도 반포(反哺)의 효(孝)를 하는데 사람이 어찌 부모 걱정 아니할까. 어버이 살아 계실 적에 내손으로 정성껏 봉양하리라.
二. 輔 君
爲臣子者, 事君盡忠, 其曰不然, 乃禽乃蟲, 比干諫死, 萬古一臣, 李斯誤國, 千載罪人, 臣而反逆, 萬死誰惜, 宜罷重典, 夷滅三族, 君臣定分, 上天鑑臨, 我載我王, 益堅丹心
- 나라에 충성할 일
무릇 백성된 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되나니 그렇지 못하면 짐승과 같으리라. 비간(比干, 殷의 주왕시대의 충신)은 목숨을 바쳐 간하였기에 충신이 되었고 이사(李斯, 진시황의 악정을 도운 정치가. 참형됨)는 나라를 그르쳤기에 죄인이 되었다. 신하로서 나라에 반역함은 죽어서 마땅하며 나라의 엄한 법은 삼족을 멸하고 군신간의 정한 분수 하늘의 마련이라 내 나라 내 임금을 단심으로 도우리라.
三. 祭 廟
茫茫宇宙, 享祀爲重, 是用立廟, 小心欽奉, 公鄕大夫, 以及下士, 各遵祭禮, 宗子傳祀, 彼何人斯, 慢不致誠, 我有祠宇, 蕭灑三楹, 每歲明朝, 四仲吉日, 我盡我誠, 香火不輟
- 제사를 받드는 일
드넓은 이 세상에 봉제사가 중하니라. 그러므로 사당을 세워 성의껏 받드나니 삼공(三公)의 귀한 사람에서 하나의 서인에 이르기까지 제례에 따라 맏아들이 행사하니 그 어떤 사람인들 소홀히 할 것인가. 우리 집 가묘도 삼간이 소연하다. 해마다 신년 명절과 사중길일(四仲吉日, 한식·단오·추석·동지)에는 성의를 다하여 제사를 받드리라.
四. 正 家
一家之內, 夫作妻綱, 唱而和之, 服事巾裳, 子女童僕, 尊卑有級, 何物庸老, 變亂家法, 綠衣黃裳, 余甚痛惜, 厥妃奚罪, 葵百飢泣涕, 冠屢倒罷, 尾大難制, 我正我家, 以戒後裔
- 집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대개 한 집안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나니 남편이 행하면 부인이 따르는 것은 男女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다.
수하와 비복들도 상하(上下)의 체통이 있는데 어찌 늙음을 핑계삼아 집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랴. 부인네의 과분한 허식은 내 심히 유감스럽고 여자의 잘못은 가난을 원망하는데서 연유한다. 예절이 바르지 못하면 어른이 집을 다스리지 못하니라. 내 몸과 내 집을 바르게 하여 후손을 경계하고자 하노라.
五. 友 愛
惟兄與弟, 本是同根, 及其長成, 婚嫁他門, 姜公一被, 荊樹再花, 一何奇美, 其心孔嘉, 凡今之人, 相視如客, 分寸之利, 背面反目, 鴻或離行, 言之可慙, 我友我弟, 和樂且湛
- 형제 남매 화목할 일
형제 남매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나 자라나고 배워서 성년이 되면 각기 다른 곳에 결혼을 한다. 강공(姜公, 후한 때 효우로 이름있는 사람)은 형제간에 같은 이불을 덮었고 진전의 집 형(荊)나무는 다시 꽃이 핀다(荊樹復生 兄弟 安樂의 眞田三兄弟 故事). 이것은 모두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로다. 지금 사람들은 서로서로 남같이 보고 작은 이익으로 각기 다투나니 기러기의 질서있는 행렬을 보아도 부끄러운 일이다. 내부터 우애하기를 힘써 화락하게 지내리라.
六. 謹 刑
傷不復續, 死不再生, 其可誤按, 以亂民情, 凡爾有司, 愼勿暴刻, 一失其中, 悔將何及, 蒼頭赤脚, 走卒庸童, 葵賴任觸怒, 鞭背生蟲, 是亦人也, 豈無顧憐, 我寬我意, 誓不濫焉
- 형벌을 삼가할 일
한번 상하면 붙이지 못하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나니 형벌의 판단이 잘못되면 백성은 혼란하다. 무릇 형벌을 맡은 사람은 포악하고 각박함을 삼가할 것이다. 한번 중용을 잃으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종과 하인과 어린이들이 제 잘못으로 매를 맞는다 해도 그도 또한 가엾은데 내 뜻 너그럽게 가져서 매사를 조심하고 범람함이 없도록 하리라.
七. 廢 讒
悴爾墾人, 利口暢暢, 伺顔善誘, 其甘如蜜, 大而天下, 小而家國, 聞一讒間, 萬端生隙, 一掩紅顔, 夫婦參商, 一此蜂衣, 父子豺狼, 巧舌至此, 寧不愧慄, 我堅我志, 去讒不納
- 남을 헐뜯지 말 일
귓속말로 남을 험담하면서도 좋은 말로 꼬이듯 하니 그 말이야 꿀같이 달지만 크게는 천하(天下)로부터 나라와 가정에 이르기까지 험언으로 서로 이간질하면 만가지 감정이 생긴다. 부부간에도 얼굴을 붉혀 의사가 상치되고 부자간도 이리같이 무서워지나니 이처럼 무서운 험언을 하고도 어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가. 내 뜻 굳게 가져 험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八. 愼 色
蛾眉晧齒, 朱顔綠髮, 悅人心目, 爛人腸腋, 聖智明料, 不邇尤物, 彼何狂士, 而作淫荒, 狂甘雲雨, 褻瀆綱常, 行同犬豕, 慙穢日彰, 衆口悴諦, 醜不可言, 我修我身, 以訓子孫
- 여색을 삼가하는 일
나비 눈썹 흰 이빨의 아름다운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지만 남자의 정력만 소모하는 것이다. 밝은 판단으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음란하여서 달콤한 교정에 사로 잡혀 짐승같은 행동이 날로 더해지고 남의 비방을 받게 되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내 몸을 조심하고 자손을 훈계하리라.
九. 結 友
蓬生麻中, 不扶而直, 沙之在泥, 自然而黑, 芝蘭善友, 不能自負, 表裏異者, 吾友何取, 擇須勝巳, 交必端肅, 切磋磨琢, 相輔以德, 平生所思, 不過忠孝, 我礪我節, 前賢是效
- 친구를 잘 사귀는 일
따붓(蓬)이 삼밭에서 자라면 저절로 곧아지며 흰 모래가 진흙에 섞이면 자연히 검어진다. 지란(芝蘭)같은 좋은 벗은 배신함이 없고 표리(表裏)가 다른 사람 사귀지 말 것이다. 모름지기 훌륭한 벗은 단정하고 엄숙함이니 충심으로 서로 도와 갈고 닦아서 평생토록 힘쓸 일 충효에 불과하다. 내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옛 성현을 본받으리라.
十. 安 貧
貴而近禍, 富多不仁, 何如雲壑, 以養天眞, 一瓢顔巷, 樂在其中, 三逕陶園, 白月淸風, 聖賢尙爾, 況乎小儒, 屋八九間, 可容殘軀, 田數十畝, 足慰飢腹, 我安我分, 不趨利欲
- 가난하면서도 분수를 지키는 일
귀하게 되면 화가 따르고 부자는 어질지 못함이 많다. 어찌하면 전원에 살면서 천성(天性)을 지킬까. 안연(顔淵, 孔子의 首弟子)은 누항에서 즐거워했고 도연명(陶淵明, 晋代의 逸士)은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성현들도 이렇게 살았거늘 하물며 시골 선비야 말해 무엇하랴. 집이 비록 일여덟간이라도 몸을 용납할만 하고 밭이 수십 마지기이니 먹을 것은 넉넉하다. 형편에 만족하고 분수를 지켜서 명리와 욕심에 급급하지 않으리라.
참고자료
安東金氏門中, 沙村世居略史, 1996
安東金氏門中, 沙村安東金氏門規, 1997
안동청년유도회, 沙村마을과 晩翠堂, 2005
김성수, 사진으로 본 門中營建 70年史, 2006
안동김씨홈페이지(http://www.iandongkim.com)
댓글목록
김태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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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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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예전에 "안동문화지킴이"에 쓴 글인데, 지금 올라가 있는 자료가 당시 초본이다 보니 오류가 많다고, 문중에 어느분께서 전화를 주셨네요... 수정 부탁드립니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고제자 회자(會子)의 부친 회점(會點)의 점(點)자를...' ->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고제자 증자(曾子)의 부친 증점(曾點)의 점(點)자를...'
'송은 김광수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의 인물로 임란 당시 창의하여 정재장이 되었으며...,' 정제장으로
'천사의 사형제를 모두 이를 때 사채선생이라고 ...' 사체(四棣)선생으로
-. 송은 선조의 경심잠(8 愼色) 중
이빨을 이(齒)로 고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김기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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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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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사촌마을의 귀중한 문화유적들
2) 만취당
설명문 끝 부분에 '유형문화재 169호(1983년 6월 20일)로 지정되었다.'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825호(2014.6.5)로 지정되었다.'로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