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산정사의 만취당 김사원선생 향사 (2006. 6. 7. 태홍(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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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6:08 조회1,697회 댓글1건본문
후산정사의 만취당 김사원선생 향사
김태홍(실무지킴이)
안동지역이 47위의 불천위를 모신다면, 의성지역은 10위가 조금 못되는 불천위를 모신다. 사촌마을에도 불천위가 모셔지는데 바로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선생이다. 사후 18년에 유림에서 불천위로 정한 천사는 1724년(경종 4년) 7월 28일에 사촌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도언(道彦)이다. 충열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예로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안동인 남응(南應)이고 어머니는 순천 김씨다. 그는 남보다 재주가 뛰어나 말과 행동을 항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학문을 익힘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뜻을 세움이 또한 원대했다. 효우의 행실도 남달라 6․7세 때, 까마귀 소리가 들리면 악기가 서린다는 남의 말을 듣고는 매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모한테 해가 돌아갈까 실색하고 두려워했다 한다. 한 번은 여러 동생과 공부하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감염되었지만 억지로 먼저 일어나 몸져누운 동생들이 완쾌되도록 백방으로 힘썼고, 부모 마음을 항상 편케 하고 그 거처하는 방의 문을 바르거나 구들고치는 것을 다른 이한테 시키지 않고 자기가 늙을 때까지 손수 하였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동암(東巖) 유장원(柳長源),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와 함께 호문삼로(湖門三老)의 한 사람이다. 30세 때(1753년) 사마시에 합격, 통문이 왔을 때 마침 남의 글을 쓰고 있어 그 글을 다 마무리한 뒤에야 뜯어보는 신중성도 보였다. 1789년(정조 1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로 태지의 유자정(1890년 소실)에서 학문을 강론, 원근 안동, 예안, 예천, 청송 등지에 많은 문사들이 나게 했다. 1997년(정조 21년)에 향년 74세로 돌아가셨다. 천사 문집, 성학 정로, 공문 일통, 석학 정장, 정론 고증, 초려 문답, 예서 등의 저서가 전한다.
위의 내용은 의성지역에도 불천위가 모셔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다. 사진으로 촬영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지만, 글쓴이의 사정으로 천사 김종덕 불천위만큼은 촬영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서 사진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2004년 9월 19일에 복원한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선생의 향사를 대신하여 소개한다.
만취당 김사원은 조선 중종때의 인물로 1539년(중종 34년) 10월 2일 사촌에서 태어났다. 송은 김광수의 증손이며, 호가 만취당이다. 만취당은 천성이 인자하여 이웃에 어려운 이를 보면 부모한테 알려 힘껏 도와주었다고 한다. 일찌기 여러 아이들과 놀 적에 까마귀떼가 부르짖어 가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어 측은하게 여겨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집에 달려와 어른들에게 알려 하인으로 하여금 장사 지내게 했다. 사친(事親)에 있어 효도를 다해 무고히 부모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친척한테도 은의를 베풀고 원근 출입시는 매양 공손하고 겸양하여 노소로부터 사랑과 공경을 받았다. 자라서는 퇴계 이황에게 수업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사람으로서 닦아야 할 학문에만 전념했다. 스승(퇴계)이 돌아가자 흑립소의(黑笠素衣)로 3년간 즐거운 데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흉년이 들어 밥을 굶는 이에게 식량을 빌려줘 가난으로 갚지 못하면 여럿이 보는데서 차용증서를 불태워버려 원근에서 공의 집을 '김씨 의창'이라 일컬었다. 임진란 때 의성 정재장으로 활약하고 난후 이재민을 구하니 그 혜택을 입은 이가 농사지어 사례하고자 했다. 그는 웃으며 "먹지 못하는 여러분을 생각하여 준 것이지 갚기 바랐겠느냐"고 타이르고 그냥 돌려보냈고 한번은 저물어 구걸 온 이가 있어 살펴보니 나병환자였는데도 꺼리지 않고 방에 들어오라고 하여 잠재워 보냈는데 얼마 후 한 미장부가 찾아와선 전날 나환자로 변장해 왔던 사람이라면서 그를 시험해본 것이라 하며 정중히 사과하며 "후세에 복 많이 받으리라"는 말을 남긴 뒤 자취를 감춘 적도 있었다. 집 옆 오래된 소나무가 늦도록 푸르다고 '만취당(晩翠堂)'이라 자호했다. 1601년(선조 34년) 6월 14일 63세로 별세하였다. 사후에 후산정사에 제향하였으며 실기가 전한다. 아래의 사진은 안동김씨 홈페이지(iandongkim.com)에서 빌려온 것임을 밝힌다.
참고자료
安東金氏門中, 沙村世居略史, 1996
안동청년유도회, 沙村마을과 晩翠堂, 2005
안동김씨홈페이지(http://www.iandongkim.com)
경북나드리(http://www.gbtour.net)
댓글목록
김태홍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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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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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수정 부탁드립니다.
'임진란 때 의성 정재장으로 활약하고...'라고 했는데, 정재장이 아니고 정제장(整齊將) 으로 고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