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열전 김방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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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8:29 조회2,048회 댓글0건본문
고려사는 조선 개국후 세종대왕의 명으로 김종서, 정인지등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입니다.
현재 고려시대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고려사절요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고려사에는 왕중심의 정치사를 쓴 세가편과 고려시대의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쓴
열전이 있습니다.
이 열전속에 쓰여 있는 충렬공 할아버님의 내용을 옮겨 봅니다.
고려사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은 한자가 지원되지 않는 글자가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국역본은 청주의 주회씨의 도움으로 입수하였습니다.
이 국역본은 제가 보기에는 북한에서 번역한 자료를 워드화 한 것 같습니다.
간혹 우리 어법이나 어순과 약간 틀린 경우가 있으나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 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전문이 너무 길어서 몇번에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 정인지가 왕의 교서를 받들고 편수하였음.
⊙ 김방경
⊙ 한희유
⊙ 나유
⊙ 원충갑
⊙ 김주정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김방경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
지 김효인(金孝印)은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
며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안개를 들여 마시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가 일찍
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과 같은 기(氣)가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리어 있으니 이번 아이는 반드
시 신선들 가운데서 내려와 잉태된 것이리라”고 하였었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
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
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
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
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
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
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
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
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
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
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
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병이 났을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
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
(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
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
상 늠연(凜然)하였다.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
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
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
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
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
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
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
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
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
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
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
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
(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
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
을 올려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와서 진무(鎭撫)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남경으
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왕은 그에게 다시 서북면을 진무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중
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다.
10년(원종)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
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
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
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차 떠나
려고 하였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지금 몽가독이 만약 서경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대군
(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면 임연은 이미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자라 필연코 주둔 군대의 양식
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당여(黨與)가 아닌 자로 하여
금 함께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러한 인물을 선택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즉 서북면)를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세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고 하였
다. 곧 김방경에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군(원나라 군대)이 서경에 도착하여 만일 대동강을 넘
는다면 왕정(개성)에서는 스스로 소란해져서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대동강을 넘어 서
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황제에게 이
뜻을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리어 원군으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줄 것이
라고 명령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
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
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
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최탄 등이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한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은밀히 꾀하면서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를 꾀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그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키었다.
이보다 앞서 임연은 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몽고 군대를 청해 올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막으려고 지유
(指諭) 지보대(智甫大)로 하여금 야별초를 인솔하여 황주에 주둔시키고 또 신의군(神義軍)은 초도(椒島)
에 주둔시켜 방어하게 하였다. 최탄 등이 그 계책을 알고 가만히 배들을 준비하고 정예한 군사들을 모으
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임연 등이 장차 관인(官人)과 원나라의 군대들을 죽이고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청컨대 관인께서는 사냥하러 간다고 널리 선전하고 경군(임연 지휘하의 군대)의 왕래 정
형을 정찰하여 서로 통보하도록 하면 우리들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에로 진
공해 가겠으니 그때 관인이 착량(窄梁-인천 부근의 좁은 해협지대)으로 군대를 영솔하여 나가 있으면
그들이 진격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황제께 구체적으
로 아뢰게 된다면 왕경(개경)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곳의 젊은 남녀들과 재물들은 다
당신의 것으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몽가독이 좋아하면서 그렇게 할 것을 승낙하였다.
이때 영원(寧遠) 별장(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 오득공(吳得公)이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이 일을 알고 가만히 김방경에게 일러 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
니 오득공이 “만약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은밀히 정탐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숙소인 객관의 문 앞에 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와 있었고 최탄과 한
신 등은 좋은 기분을 띠고 있었다. 몽가독이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오랫동안 손님 노릇을 하고 있노라니
대단히 심심하다. 생선잡이라도 해서 즐겨 볼까 한즉 공(김방경)은 나를 따로 오시겠소?”라고 하였다. 김
방경이 “사냥은 어디서 하시려오?”하니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 봉주(鳳州)에 가서 초도로 들어갈까 하
오”라고 대답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들었는데 어찌 하여 강을 건너가려
하오?”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은 활쏘기, 사냥질을 일상적인 일로 삼는데 이것은 황제께서
도 아는 바라 공이 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사냥하는 것을 금
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 뿐이오. 만일 사냥하고자 한다면 하필 그쪽
으로 건너 가서야만 즐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몽가독은 “만약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이 죄가 된
다면 내 혼자서 당하리다”라고 하니 김방경이 “내가 여기 있는 한, 관인이 어떻게 강을 건너갈 수 있겠
소! 만약 기어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황제께 말하여 승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가만히 지보대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물러가라고 하였더니 몽가독이 김방경의 충직
성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김방경을 크게 존경하고 존중히 여겼으며 사실대로 일러 주면
서 말하기를 “왕경(고려를 의미함)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어찌 다만 최탄 등 뿐이겠소. 또 다른 사람
도 있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아무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비밀에
붙였으므로 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라는 그 때문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고려시대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고려사절요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고려사에는 왕중심의 정치사를 쓴 세가편과 고려시대의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쓴
열전이 있습니다.
이 열전속에 쓰여 있는 충렬공 할아버님의 내용을 옮겨 봅니다.
고려사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은 한자가 지원되지 않는 글자가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국역본은 청주의 주회씨의 도움으로 입수하였습니다.
이 국역본은 제가 보기에는 북한에서 번역한 자료를 워드화 한 것 같습니다.
간혹 우리 어법이나 어순과 약간 틀린 경우가 있으나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 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전문이 너무 길어서 몇번에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 정인지가 왕의 교서를 받들고 편수하였음.
⊙ 김방경
⊙ 한희유
⊙ 나유
⊙ 원충갑
⊙ 김주정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김방경의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
지 김효인(金孝印)은 성품이 엄격하고 굳센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씨를 잘 썼으
며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처음에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안개를 들여 마시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가 일찍
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름과 같은 기(氣)가 항상 내 입과 코에 서리어 있으니 이번 아이는 반드
시 신선들 가운데서 내려와 잉태된 것이리라”고 하였었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
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
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
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
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
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
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
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
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
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
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
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병이 났을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
지를 아니 하였다. 또 숙직하는 처소가 비좁아서 수비병들이 모두 밖에서 자고 있었으며 그의 동료로 박
(朴)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가 한번은 기생 하나를 데려 오려고 하였으므로 김방경이 굳이 이것을 말리었
더니 박도 무안해하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어사 중승의 벼슬을 하게 되자 법률을 고수하였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으며 그의 기풍과 절개가 항
상 늠연(凜然)하였다.
원종 4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되었다. 이 시기에 좌승선(左承宣)으로 있던 유천우(兪千遇)는 오
랫동안 정권(관리 임명권)을 잡고 있었다. 양반 관료들이 모두 그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번
은 김방경이 길 가는 도중에서 유천우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례(揖禮-두 손을 약간 올리고 고개를 숙이
는 인사)를 하였더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 봉명이므로 3품 이하의 인원들은 모두 피마(避馬-
말을 딴 방향으로 돌리어 경의를 표시하는 예식)를 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가?”라고 따지었다. 김방경
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또 조삼 봉명이므로 나는 예식대로 인사하려는 것뿐이다”라
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한참이나 따지고 책망하던 중에 김방경은 “시간이 많이 갔구만!”하고 드디어
결판도 내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유천우는 마음속으로 이 일을 아주 언짢게 생각하고 무릇 김방경의 일
가 친척으로서 벼슬살이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구실을 붙여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김방
경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그 후에 진도(珍島)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김방경은 전라도에서 군대를 초모하게 되었는데 유천우의 전
장(田莊-농장, 소유지)이 장서현(長沙縣-모장(茂長)에 있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그에게 피해되지 않도
록 하라고 훈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자 어떤 일이 있어서 중방(重房)의 장교 한 명을 곤장으로 치게 하였더니 이때
에 반주(班主)로 있었던 전분이 김방경의 처사를 미워하여 권신에게 고소하여 김방경을 강직시켜 남경
(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게 하였다. 김방경이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
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
을 올려 김방경으로 하여금 다시 와서 진무(鎭撫)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남경으
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왕은 그에게 다시 서북면을 진무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후 중
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다.
10년(원종)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립하였는데 이때 마침 세자(世子)는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던 길에 의
주(義州)에 이르렀다가 국가에 정변이 생긴 것을 듣고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황제에게 이 사연을 보고하
였더니 세조(世祖)는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파견하여 국내에 있던 여러 신하들을 훈유하게 하였
다. 알탈아불화가 귀국하게 될 때 김방경은 황제께 올리는 글(표문-表文)을 가지고 그와 함께 원나라로
갔다.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차 떠나
려고 하였는데 중서성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지금 몽가독이 만약 서경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대군
(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된다면 임연은 이미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자라 필연코 주둔 군대의 양식
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니 세자는 응당 임연과 한 당여(黨與)가 아닌 자로 하여
금 함께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자가 그러한 인물을 선택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즉 서북면)를 다스려서 그 지방 민심을
얻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세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에도 맞는다”고 하였
다. 곧 김방경에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군(원나라 군대)이 서경에 도착하여 만일 대동강을 넘
는다면 왕정(개성)에서는 스스로 소란해져서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니 대동강을 넘어 서
지 않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황제에게 이
뜻을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고 조서를 내리어 원군으로서 대동강을 건너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줄 것이
라고 명령하였다. 김방경 일행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
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
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 이듬해에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으로 오니 서경 지방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김방경을 대접하고 울면서 말하기를“공(방경)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어찌 최탄, 한신과 같은 자의 반란 사
건이 일어났겠습니까?”고 하였다. 최탄 등도 역시 조석으로 와서 김방경을 만나 뵈곤 하였다.
최탄 등이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한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은밀히 꾀하면서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를 꾀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그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키었다.
이보다 앞서 임연은 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몽고 군대를 청해 올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막으려고 지유
(指諭) 지보대(智甫大)로 하여금 야별초를 인솔하여 황주에 주둔시키고 또 신의군(神義軍)은 초도(椒島)
에 주둔시켜 방어하게 하였다. 최탄 등이 그 계책을 알고 가만히 배들을 준비하고 정예한 군사들을 모으
고 몽가독에게 말하기를 “임연 등이 장차 관인(官人)과 원나라의 군대들을 죽이고 제주도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청컨대 관인께서는 사냥하러 간다고 널리 선전하고 경군(임연 지휘하의 군대)의 왕래 정
형을 정찰하여 서로 통보하도록 하면 우리들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에로 진
공해 가겠으니 그때 관인이 착량(窄梁-인천 부근의 좁은 해협지대)으로 군대를 영솔하여 나가 있으면
그들이 진격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실정을 잘 알게 된 후에 그것을 황제께 구체적으
로 아뢰게 된다면 왕경(개경)을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곳의 젊은 남녀들과 재물들은 다
당신의 것으로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몽가독이 좋아하면서 그렇게 할 것을 승낙하였다.
이때 영원(寧遠) 별장(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 오득공(吳得公)이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이 일을 알고 가만히 김방경에게 일러 주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하
니 오득공이 “만약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은밀히 정탐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숙소인 객관의 문 앞에 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와 있었고 최탄과 한
신 등은 좋은 기분을 띠고 있었다. 몽가독이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오랫동안 손님 노릇을 하고 있노라니
대단히 심심하다. 생선잡이라도 해서 즐겨 볼까 한즉 공(김방경)은 나를 따로 오시겠소?”라고 하였다. 김
방경이 “사냥은 어디서 하시려오?”하니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 봉주(鳳州)에 가서 초도로 들어갈까 하
오”라고 대답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도 역시 황제의 명령을 들었는데 어찌 하여 강을 건너가려
하오?”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들은 활쏘기, 사냥질을 일상적인 일로 삼는데 이것은 황제께서
도 아는 바라 공이 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사냥하는 것을 금
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 뿐이오. 만일 사냥하고자 한다면 하필 그쪽
으로 건너 가서야만 즐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몽가독은 “만약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이 죄가 된
다면 내 혼자서 당하리다”라고 하니 김방경이 “내가 여기 있는 한, 관인이 어떻게 강을 건너갈 수 있겠
소! 만약 기어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황제께 말하여 승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가만히 지보대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물러가라고 하였더니 몽가독이 김방경의 충직
성은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김방경을 크게 존경하고 존중히 여겼으며 사실대로 일러 주면
서 말하기를 “왕경(고려를 의미함)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가 어찌 다만 최탄 등 뿐이겠소. 또 다른 사람
도 있답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아무개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비밀에
붙였으므로 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고 나라는 그 때문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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