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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방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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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8:42 조회2,0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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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여름에 삼별초(三別抄-좌우 별초와 신의군의 통칭)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들을 강제로 몰아



서 바다로 나가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왕이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파견하여 추토사(追討使)로



삼았고 또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군사 60여 명을 인솔하고 몽고의 송(宋)만호 등의 군대 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해중(海中)에 이르렀더니 반적들의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하



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김방경은 이것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말리었으므로 반적들



이 달아나 버렸다.



반적들 가운데서 도망쳐 온 남녀 노소 천여 명이 있었는데 송만호는 그들은 역적의 무리들이라 하여 모



두 포로로 하여 데리고 돌아갔다. 그 후에 행성(行省)에다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돌아오지 못



한 자가 상당히 많았다.



반적이 진도에 들어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고 여러 고을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으나 신사전은 토벌



에 뜻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으니 반적들을 격



파하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 또 무슨 벼슬을 얻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



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 부사(副使) 이빈



(李彬)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 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전



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



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 날에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



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



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는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



-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



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공유는 환관들과 교제하고 결탁하였으



므로 죄를 면하였던 것이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고 진도를 건너다 보면서



진을 치게 되었는데, 반적들은 약탈해 간 선박들과 군함들에다 모두 괴상한 모양을 한 동물들을 그리었으



며 그 배들이 강을 덮을 듯이 많고 그 그림자들은 물 위에 비치어 얼른거렸고 게다가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이 날아다니는 듯 빨라서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매양 싸울 때마다 반적들의 군사들이 먼저 북



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해 오곤 하여 호상간에 승부가 거듭되고 여러 날 서로 대치해 있게 되었



다.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과 서로 내통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아해는 그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달로화적에게 공문을 띄



웠더니 달로화적이 김방경에게 돌아오라고 하여 홍찬 등과 대질을 시켰고 참지정사 채정(蔡楨)을 김방경



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달로화적이 왕에게 말하기를 “홍찬 등이 말한 바는 허망한 일이니 이자들을 응당 감옥에 가두어야 할 것



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방경을 석방하여 주었다.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



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 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



고 있었다. 아해는 겁을 내어 배에서 내려서 나주에로 퇴각하여 주둔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여 닥치면 누



구가 그 창 끝을 당해 낼 것인가?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 날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



가?”라고 하니 아해가 감히 퇴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들어가니,



반적들은 전함으로 역습을 해왔는데 원군(몽고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결승은 오늘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자기 진영



측으로 몰아 갔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 배가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니 적의 한 군졸이 칼



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다.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를 찔러 넘겼다. 김방경이 일어나



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들의 손에 죽겠느냐?”라고 하면서 바다



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그것을 말리었다.



이때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어나 급히 싸웠으며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



충(蒙衝-전함)을 타고 돌격해서 싸움이 조금 풀리게 되어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



으나 아해가 말리었다.



이듬해에 왕이 안세정과 공유의 관직을 박탈하고 또 아해가 위축되어 비겁하게도 싸우지 아니 하였던 사



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찬 등을 참형에



처할 것을 조서로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토의하고 진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中軍)을 거느



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부터 쳐들어가고, 영녕공(永寧公)의 아들 왕희(熙)와 왕옹(雍) 및 홍다구(洪茶



丘)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으로부터 들어갔으며 대장군 고을마(高乙쬱)는 우군(右軍)을 거



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쳐들어가니 군사들의 탄 배가 모두 백여 척이나 되었다.



적(賊)군은 벽파정에 모여서 중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다구가 먼저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협공



(挾攻)하니 적군은 놀라서 붕괴하게 되어 우군이 있는 데로 물러갔는데 우군은 또 그것을 두려워하여 중



군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에 적군은 토벌군의 배 2척을 노획하여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보다 앞서 관군은 적군과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반적들이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관군이 용감히 공격하게 되자 반적들은 모두 처자들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하여 적들이



포로하였던 강도(江都-강화도)의 선비들과 여인들, 그리고 각종의 보물들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몽고 군



대의 포로로 된 자가 많았다.



김방경은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그를 추격하여 남, 여 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획득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탐라로 달아났다. 김방경이 진도에 들어가서 쌀 4천 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왕경에로 운반해 가게 하였고,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자



기 생업에 다시 종사하게끔 하고 개선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 시랑 평장사의 벼슬



을 더하여 주었다.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



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갔다.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



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



다.



왕은 이것을 심히 우려하여 14년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내었



다. 김방경이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



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



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에 돌연히 거센 바



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벌써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



데 바람과 파도가 세차서 전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의 안녕함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 사업 하나에 달려 있는데 오



늘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풍랑이 멎었으므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



浦)로부터 진공 해 들어갔다.



반적들은 바윗돌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뛰쳐나오며 고함을 치면서 중군의 진격을 막았다. 김방



경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면서 여러 배들이 동시에 진격하도록 독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



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입해 들어갔고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하



였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이르러서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



았다.



한편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가니 반적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몰려 자성(子城)에 밀리어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서 들어가 화시(火



矢) 4발(發)을 놓으니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반적의 무리들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반적의 편에서 넘어와 투항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반적들이 이미 형세가 궁박해져서 달아날



것을 꾀하고 있으니 빨리 쳐서 점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



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옷을 벗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을 표시



하면서 항복해 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



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탐라의 주민들은



모두 평안히 이전처럼 안심하고 살게 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



(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



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



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



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



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



다.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여 승선 박항(朴



恒)을 보내 그 다음날에 서울에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방경은 즉시 길을 재촉하여 그 날로 들어



가 왕을 뵈었다.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



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지시하기를



“제주도의 반적들은 실로 제압하기가 어려웠기로 심지어 몽고에까지 응원 부대를 청하여 이것을 토벌하



게 되었다. 만약 군사 기간이 오래 되었더라면 그 군기, 군량의 수송비가 한없었을 것이며 큰 바다를 건너



가는 데에서 의외의 변고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국가)의 안전함과 위태로움이



실로 이번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군 원수 김방경은 진도 전역 때부터 탐라 토벌에 이르기까지 전심 전



력하여 온갖 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제기되는 일들을 옳게 하였다. 전함, 병기, 군량이 잘 준비되지 않



은 것이 없었고 대군을 독려, 인솔하여 흉악한 무리의 괴수를 쳐 없애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다시 살



아나게 하였으니 그 공적이야말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바이다. 또 병마사(兵馬使) 변윤(邊胤)은 먼저 남



방으로 가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처리하였고 김방경과 함께 마음과 꾀를 합치어 싸웠으니 그 공훈이 특이



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야 할 상전(賞典)에 대하여 빨리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기타 군대와 전함을 인솔, 관리하였던 장령, 군사들 및 장교, 전군(典軍)들, 그리고 외별초(外別抄-지방



에 있던 별초 군대)에게 줄 상전(賞典) 조건들에 대하여도 다 함께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리고 드디어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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