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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방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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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9:04 조회1,8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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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3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 정벌을 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도착하여 군사 기



자재들을 검열하였고 왕은 합포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각 군의 사열을 거행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하여 일본의 세계촌 대명포(世界



村 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통역)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관문서)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타이



르게 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니 제군(諸軍-좌, 우, 중군 등)이 모두 배에서 내리어



왜군과 싸웠는데 낭장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 박구, 박지량(朴之亮), 형 만호(荊萬戶) 등이 일본군과 접전해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일본 군사들이 돌격해 왔으므로 관군(몽고군)이 무너지고 홍다구는 말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왕(王)만호가 다시 측면 공격을 들여 대어 일본군 50여 명의 목을 베니 일본군이 이로 인하여 물러갔으



며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 또다시 싸웠으나 패전하였고 군사들이 많이 유행병



에 걸리어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흔도, 홍다구 등은 여러 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했고 도 범문호(范文虎)가 약속한 기한이 넘도록 도착하



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하자고 의논하기를



“황제의 명령은 강남군(江南軍-범문호의 군대)과 동략군(東略軍)이 반드시 이 달 보름까지에는 일기도



(一岐島)에서 합세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강남군은 도착하지도 않았고 우리 군사들만이 먼저 도착하여



몇 번 싸웠으나 배는 썩고 양식은 다 되어 가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아무 대꾸



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한 열흘쯤 지난 다음에 다시 먼저 번처럼 논의가 되었는데 김방



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우리는 석 달 동안의 식량을 가지고 떠났는데 지금 아직 한 달 분의 식량이 남아 있



으니 남군(강남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반드시 일본을 격멸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



이 감히 또다시 무어라고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가 만군(蠻軍)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도착하였는데 선박의 총수는 9천 척이나 되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만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



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고도 걸어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군하였다.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



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



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郡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하루는 왕에게 요청하여 고향 땅에 성묘하러 가게 되었는데 왕은 그의 아들 김순(恂)을 태백산 제고사(祭



古使)로 임명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친구들의 만류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아들더러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 들일 때가 되였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



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



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



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



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



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



라의 정사에 참여한 지 오래되고 또 금부를 받아서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다.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



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섰으며 권세에 아부하고 남의 위력을 빌어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전국



을 쏘다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말리지 아니 하였다.



또 그가 일본을 정벌하려 갔을 때에 군공에 대한 관작과 상품의 수여에서 불공평하게 된 것이 상당히 많



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



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고 비난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



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충선왕 때



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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