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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김방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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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1 19:11 조회2,0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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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아들들로 김선, 김흔, 김순(金恂)이 있다. 김선은 관직이 부지밀직 사사에 이르렀고 김선의 아



들들로 김승용(金承用), 김승택(金承澤)이다.



김승용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밀직사(密直使)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하다고 칭하였다. 김승용의 아



들 김후(金厚)는 공민왕 때에 여러 관직들을 지나 검교첨의 평리로 되었다가 원나라의 박 새인불화(朴賽



因不花)에 아부하여 합포 만호로 되었다. 김후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그의 처도 마음이 사납고 인색하여



참혹한 짓을 잘 하였다. 일찍이 능직 피륙을 잃은 일이 있었는데 그 아들 김칠우(七祐)가 훔쳐다가 첩에



게 준 것이라고 짐작하고 김칠우를 결박해 놓고 종일토록 고문한 결과 드디어 김칠우가 죽게 되었다. 그



는 종을 시켜 목을 매어 달아 두게 하고 “사람들이 묻거든 제가 목을 매어 죽었다 하라!”고 하였다. 그리



하여 당시 사람들이 능직이 아들보다 더 소중하다고들 하였다.



김승택은 중서 평장사로 치사하고 죽었다. 양간(良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김묘(昴)는 상락군



(上洛君)이었고 김묘의 아들은 김구용(金九容)과 김제안(金齊顔)이다.



김구용의 자(字)는 경지(敬之)이니 처음에는 김제민(齊閔)이란 이름을 썼다. 공민왕 때 나이 16세에 진



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왕이 모란꽃에 대한 시를 지으라고 하였을 때 김구용이 제일 잘 지어 첫자리를 차



지하였으므로 왕이 기특히 여기고 산원(散員) 벼슬을 주었다. 그 후 과거에 합격하여 덕녕부(德寧府) 주



부가 되고 여러 관직을 지나 민부 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 직강으로 되었다. 그는 후진들을 힘 써 추천



하고 그들을 가르쳐 주어 권태할 줄 몰랐고 비록 휴일에 집에서 쉬게 되는 날이라 하더라도 질의하러 오



는 여러 학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신우 원년에 삼사 좌윤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 이르기를



“백안 첩목아(伯顔帖木兒-공민왕의 몽고식 이름) 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맺었으니 그



대의 나라에서 왕(공민왕)을 죽인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



奫)은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김구용은 이숭인(李崇仁),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도당(都



堂)에 글을 올려 이르기를



“만약 이 사신을 맞아들인다면 전국의 모든 관료, 인민들이 모두 임금을 반대한 반란 도당의 죄를 둘러쓰



겠으니 죽어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공민왕)을 만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복흥



(慶復興)과 이인임은 이 글을 받아 주지 않았으며 간관(諫官)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글을 올



려 이인임의 죄를 논하고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은 도리어 간관을 곤장으로 쳐서 귀양 보내었



으며 또 김구용, 이숭인 등도 자기를 음해하려 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을 보내었다.



김구용은 죽주(竹州)에 귀양 갔다가 얼마 후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가 있게 되었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



지 않고 산수 경개가 좋은 곳에서 시 짓기와 술 마시기로써 낙을 삼았으며 자기 거처에 편액을 달아 육우



당(六友堂)이라고 하였다.



7년에 신우(우왕)가 불러서 좌사의대부로 삼으니 곧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지금 왜구가 사방에서 침범해 와서 나라 안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므로 전쟁은 그칠 날이 없고 백성은 자



기 생업을 잃게 되어 굶주리고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공부(貢賦), 군대 복무, 출정



등의 세(稅), 역(役)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변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전



하께서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마음을 수양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침식



과 일상 생활이 절도가 없고 술에 취하여 말을 몰아 거리와 골목을 다니니 그러다가 혹시라도 넘어지게



되면 옥체를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전하 자신은 설사 자기를 중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묘와 사직



(국가)을 맡아 나가는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간난하게 경영한 선조들의 국가 사업을 생각하고 하늘이



견책하는 뜻을 살피어 날마다 대신들을 만나 국가 통치의 방도를 강구, 논의하며 궁중에서 출입할 때면



모두 옛 규범에 따라 거동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신우는 듣지 아니 하였다.



이듬해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전임되고 얼마 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되었다.



처음에 의주 천호(千戶)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가니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 등이 거짓 말하기를



“우리는 그대의 나라일에 항상 마음을 다하여 잘 해주느라고 하였는데 왜 그대의 나라에서는 감사의 뜻



을 표시하지도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10년에 김구용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아서 편지와 은 백



냥, 가는 모시 베와 삼베 각각 50필을 가지고 가게 되었다. 요동에 이르니 요동 총병(摠兵) 반경섭(潘敬



葉), 왕여의(旺與義) 등이 말하기를 “신하로 된 자들은 의리상 사사로이 교제를 하는 법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구용을 붙잡아서 서울(남경)로 데려 가니 황제는 그를 대리



위(大理衛-지금 운남)로 귀양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가 귀양 가는 도중 노주(瀘州) 영녕현(永寧縣)



에 이르러 병을 얻어 죽으니 나이 47세이었다.



그 후에 신우(왕)가 조계룡이 매의의 말을 그릇되게 전달하였던 죄를 소급하여 다스리고 조계룡을 귀양



보내었다.



김구용이 시, 부, 잡문(詩賦雜文) 등 글짓기를 잘하여 그의 저서인 척약재집이 세간에 전한다. 그의 아들



은 김명선(金明善), 김명리(金明理), 김명윤(金明允)이다.



김제안(齊顔)의 자(字)는 중현(仲賢)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13년에 좌정언이 되었다. 당시에 내수



(內竪-내시) 한휘(韓暉), 이귀수(李龜壽)의 두 사람은 변방에서 세운 공이 있다 하여 승급 순서를 뛰어



넘어서 첨의평리의 벼슬을 얻어 하게 되어 국가의 기밀 사업을 관할하였으며 왕의 총애와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으나 간관(諫官)이 그들의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김제안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저희들이 나라일을 위하여 집안일을 잊어버리고 외지에 나가서 풍상을 헤아리지 않고 노력하였는데 김



제안은 나이가 어린 자로서 그릇되게도 임금을 충고하는 관직 자리에 있어서 저희들의 임명장에 서명하



지 않을뿐더러 무릇 달천(덕흥군의 군대가 침입하였을 때 싸우던 전투) 전역에 공이 있었던 장령, 군사들



이라면 모두 그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것은 왕을 배반할 뜻이 있어서 장령, 군사들의 통일 단결을



해체해 버리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이 크게 성을 내어 시중 경천흥(慶千興), 첨서 밀직(僉書密直) 원송수(元松壽),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에게 말하기를



“한휘(韓暉), 이귀수(李龜壽)는 고초와 간난을 겪으면서도 나를 위하여 많은 힘을 썼고 그 공로가 크기



때문에 작위를 주어 보답하려고 하였더니 김제안이 그들의 임명장에 서명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를



문초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경천흥 등이 대답하기를



“낭사(郞舍-중서 문하성 첨의부 관원들)가 많은데 어찌 김제안 한 사람만이 그 책임을 다 지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김제안은 그대들의 일가 친척이기 때문에 그대들을 위해서도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



원송수를 꾸짖기를



“그대는 관리의 선발, 임명을 맡아보면서 그대의 친척을 이끌어다가 간관으로 삼았으니 도대체 무슨 목



적으로 그렇게 하였는가?”라고 하니 원송수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땀을 흘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왕이 장차 김제안을 옥에 가두려고 하니 경천흥은 밀직부사 송인적(宋仁績)과 더불어 그러면 안 된다고



간하였으나 말려 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김달상이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김제안은 간관입니다. 만일 그를 감옥에 가둔다면 후세 사람들이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임명장에 제때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무슨 죄로 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왕이 더욱 노하여



궁내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튿날 김제안이 병이 있다는 구실로 관직을 내놓으려고 하니 왕은 중



사(中使-궁중에서 파견하는 사신)를 파견하여 억지로 나와서 일을 보게 하여 한휘 등의 임명장에 서명



하게 하고 마침내 김제안을 파면시켰다.



15년에 군부 좌랑으로서 전록생(田祿生)을 따라 하남왕 확곽 첩목아(河南王 擴廓帖木兒)를 예방하러 갔



었는데 연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황태자는 고려 왕과 하남 왕 간에 관계가 있게 되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



에게 귀국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김제안은 전록생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대신이니까 머물러 있을 수



없거니와 나는 여기 남아서 반드시 사명을 다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고 그 길로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



여 연경에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형 김제민(齊閔)에게 편지를 써 보내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연경



이 옛날과 같지는 못하지만 문사들이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김제안이 어떤 다른 음모를 가지고 있나 하여 그에게 주었던 예사 전곡(例賜錢穀-사신으로 가는



자에게 예에 따라 주는 전곡)을 도로 징수해 내게 하였더니 얼마 안 있어 김제안은 연경으로부터 홀로 말



을 타고 하남으로 뛰어가 국서(國書)를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재상 전녹생은 영지(令旨. 황태자의 명령)를 받고 귀국하였으나 김제안은 왕의 명령을 전달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또 대왕(하남왕)의 명성을 잘 들었던 만큼 만리를 멀다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라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 옥촉(玉燭-옥으로 만들어 촛불을 켜는 물건)을 선사하였다. 왕이 이것은 무엇인가 하니 김



제안이 말하기를



“이것은 등불을 밝히는 물건으로서 그슬려지면 불이 어두워지나 닦으면 곧 밝아지는 것이니 왕이 덕을



이와 같이 닦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눌러 있으면서 하남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우리 국왕이 총명하고 인자하면서도 군사에 익어서 앉은 자리에서 백만 명이나 되는 홍두적을 소탕하



여 원나라 황실을 편안하게 함에 있어서 천하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의 충성과 도의의



소문이 천하에 가득하므로 우리 국왕은 대왕과 동, 서에서 힘을 합쳐서 외람하게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



을 진압하고 황실을 도우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하남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황제에게 아뢰어 중의대



부(中議大夫) 중서 병부 낭중, 첨서 하남 강북 등처 행 추밀원사(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의 관작을



주게 하였다.



김제안이 본래 유금(儒琴)을 잘 탔는데 이때 하남왕을 위하여 한 번 타니 왕이 좋아하였다. 얼마 있다가



하남왕이 그의 막빈(幕賓) 곽영석(郭永錫)을 보내 김제안과 함께 답례 방문케 하였다. 왕이 김제안을 대



언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신돈(辛旽)은 그가 자기에게 먼저 와서 인사하지 않은 것을 앙큼하게 생각하



고 그것을 방해하였으므로 왕은 그를 내서사인으로 고쳐 임명하였으나 얼마 후에 전교 부령(典校副令)으



로 강직되었다.



김제안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그 후 전임(前任)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처단할



것을 꾀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순군(巡軍)옥에 붙잡혀 갇혀 있게 되었고 또 곤장을 맞았는데 신돈이 사



람을 시켜 목을 매어 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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