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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金瓚)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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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3-22 21:30 조회1,60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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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록 보유 하권(己卯錄補遺 卷下)
 
신명인전(申命仁傳)

신명인은 임자생(壬子生)이고 자(字)는 영중(榮仲)이며, 대사성 김식(金湜)에게 수업하였다. 화가 일어나던 날, 여러 유생(儒生)들이 대궐 뜰에서 울부짖으니 임금이 교지를 내리어 이르기를, “여러 유생들이 대궐문을 밀고 들어와 소리내어 운다는 것은 천고(千古)에 없는 일이다. 적발하여 죄로 다스려라.” 하니,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서 뛰어나와 소리쳐 말하기를, “옛날에 양진(楊震)주D-001이 갇혔을 때에 태학생(太學生) 3천여 명이 대궐을 지키고 통곡한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하시는 일은 참으로 천고에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그 뒤부터는 항상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경진년에 김식이 화에 걸려 죽자 그 시체를 영남으로부터 운반하여 올라오는데, 김식의 부인 이씨가 충주(忠州)로 가서 시체를 맞아 염습하고 관에 넣어서 임시로 그곳에 매장하였다. 공은 멀리서도 시체가 충주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리더니 감개하고 애도하여 마침내 송옥(宋玉)주D-002을 조상하는 글을 지어 대성(大成 대사성 김식)의 부득이한 뜻을 밝히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말을 듣지 않을까 두려워 과거를 시험보는 장소에는 가지만 종일토록 돌아다니며 놀면서 선비들이 가지고 온 술을 찾아 다 마시고 몹시 취한 후에 나왔다. 스스로 호를 귀부(龜阜) 혹은 송정(松亭)이라 하고, 일찍이 윤칠림(尹漆林 윤수(尹壽))ㆍ목현헌(睦玄軒)ㆍ목세칭(睦世秤))과 도보(徒步)로 상종하고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상락군(上洛君)김찬(金瓚)의 기장대시(棄藏臺詩)에 차운하기를,
천 자 대 앞에 푸른 옥이 흐르는데 / 千尺臺前碧玉流
옛날에 듣기로 김씨가 여기 와서 놀았다고 하네 / 昔聞金氏此?遊
조정의 높은 몸으로 산수를 겸하였으니 / 朝廷身世兼山水
부귀한 생애에 근심이 적도다 / 富貴生涯少恨憂
사업은 각에서 몸을 던진 늙은이를 능가할 것이고 / 事業可凌投閣老
장한 마음 진 나라를 물리친 무리들을 비웃을 수 있네 / 壯心堪笑却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충신 마땅히 역사에 전하리니 / 始終忠信當傳史
주졸도 오히려 상락후를 알도다 / 走卒猶知上洛侯
하였다. 또 중 월간(月澗)이 공에게 시를 써달라 하니, 공이 시 한 구절을 시축(詩軸)에 썼는데,
솔가지 드리운 고요한 창에 기우는 해 더딘데 / 松窓?寂月西遲
세상 길에 이는 풍파 나는 몰라 / 世路風波不自知
골짜기 맑은 냇물은 귓전 울려 흐르는데 / 一壑晴川鳴歷耳
달 뜰 때까지 방석 위에 앉아 있네 / 蒲團坐到月明時

하였다. 월간이 충암(?庵)의 시를 구하려 바다를 건너 제주(濟州)로 들어가 감자(柑子)와 병술을 가지고 찾아가 소매에서 시축을 꺼내 바쳤다. 충암이 펴 보고, 이 한 수만을 두세 번 읊더니 작자를 묻기에, 월간이 이름을 말하니, 충암이 감탄하며 칭찬하여 마지않다가 시축에 두 수를 써서 돌려주었다. 그 한 수에,
문장으론 당세에 응당 비길 이 없으리 / 文章當世定無前
고귀함을 믿고 어진 이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부끄럽네 / 挾遺還羞不下賢
고구의 재명으로 가진만을 알았으니 / 蠱九才名知可鎭
필경은 우물에서 하늘 본 것 사과할 것일세 / 會須謝也井觀天
하였다. 가진은 최수성(崔壽城)의 자(字)이다. 글이 줄줄 나아가 조금도 생각이 막히는 데가 없으니, 충암에게 중하게 보였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송옥을 조상하는 글[弔宋玉辭] 서문에, “송옥은 초(楚) 나라의 삼려대부주D-003인 굴원(屈原)의 제자다. 송옥이 가을이 되면 몹시 슬퍼하였는데, 나는 다만 가을은 슬퍼할 만해서 슬픈 것으로만 알았고 그 슬퍼하는 까닭을 잘 몰랐었다. 그런데 경진년은 첫여름부터 몹시 더워 괴롭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입추(立秋)를 지난 지 8일이며 누고(漏鼓 시각을 알리는 북)는 이경(二更)을 알린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난간에 기대어 귀뚜라미와 쓰르라미의 울음소리에 놀라 새삼스레 때(가을)를 느끼고 슬픔이 일며 송옥의 슬픔에 마음이 쏠렸다. 그의 슬픔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다만 가을의 정경이 슬퍼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굴원은 마음과 행실이 진실로 비길 데가 없이 굳건하였다. 일찍이 회왕(懷王)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양왕(襄王)이 참소를 믿어 그를 추방하였다. 권력을 잡은 간흉(奸凶)이 정사를 농간하고 나라가 병들어 시들려 하니, 화가 몸에 미칠까 두려워 짐짓 지나친 행동으로 자살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편벽된 선(善)이요 중용을 얻은 처사가 아니라 하였으나, 굴원의 뜻은 그렇지가 않았다.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려 했으나 끝내 들어줌을 못 받았으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뭇사람을 놀라게 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한 것이 굴원의 뜻이었고 그것이 그때의 대세였으며, 일의 권도(權道)였다. 송옥이 가을을 슬퍼한 까닭이 그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삶도 한때요 죽음도 한때라는 것을 알고, 또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음을 알았는데 어찌 생사를 가지고 가을을 슬퍼했겠는가. 이에 그 경위(經緯)를 적어 굴원과 송옥의 뜻을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입추 후 8일은 6월 22일이다.
송옥을 조상하는 글에 애달프다, 송옥이 가을을 슬퍼함이여. 그 까닭을 생각해 보니, 그것은 가을에 대한 슬픔의 처절함이 아니라 그 스승에 대하여 품은 시름이었다. 옛날 굴원(屈原)의 굽히지 않았던 충성은 세상을 바로잡을 좋은 재목이었다. 의(義)에 따르고 큰 덕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니, 하늘을 태울 듯한 훈유(薰? 향기로운 풀과 구린내 나는 풀. 선과 악)가 한 그릇에 같이 있겠는가. 모모(?母)는 반드시 서시(西施)를 질투하는 법주D-004이다. 나라를 걱정한 선생의 뜻이 사람을 슬프게 하도다. 선생이 가신 뒤 이제 몇 가을이 되는고. 때는 마침 신삭(申朔 7월)이라 밤은 길고 이슬은 쌀쌀한데, 홀로 오두막에 조용히 앉았도다. 계수나무 그림자는 금빛 물결이 출렁이듯 하고, 풀벌레는 잎사이에서 울어대니, 문득 마음속에 일어나는 처량한 느낌은 선생의 천 배나 더하도다. 예와 이제주D-005가 꼭 같음은 계절의 바뀜 탓이로구나. 후세 사람들이 굴원을 평하기를, “외곬으로 어질기만 하고 중용(中庸)을 얻지 못 하였다.” 하나, 그 시대가 어떠하였는가를 비교하지도 않고, 어찌 오직 자기 생각과 같으리라고 하는고. 그의 행적(行績)에 빈틈없음을 본다면, 그 천백분의 일이라도 알 것을. 현량(賢良)하다는 사람들이 선비를 시기하나 혐의를 결단주D-006하고 다스려지기를 꾀하였으며, 선비의 현량함을 알고 왕도(王道)가 행하여지기를 바랐으나, 시기하는 무리들이 현량을 두려워하고 그를 시기하였다. 그때 왕의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무관(武關)의 모임이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으랴. 화가 어찌 여기에 그쳤으랴. 다시 참소되어 거듭 유배되었네. 미미한 내 자신은 가여울 것 없지만, 나라가 병들고 망해감을 어이하리. 나약한 자를 서게 하고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하는 데는 과격한 처사가 아니고서는 어찌할 수 있겠는가.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해(害)를 멀리하고, 고절(苦節)을 운수로 돌리는 것은 오히려 범부(凡夫)의 할 일이지, 이런 사람의 달관(達觀)이 어찌 편벽된 생각을 스스로 달가워하였겠는가. 아, 이윤(伊尹)은 성(聖)을 맡은 이로서 태갑(太甲)주D-007을 동궁(桐宮)으로 추방하였고, 비간(比干)주D-008은 죽고 미자(微子)주D-009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거짓 미쳤다가 동국(東國)에 봉(封)함을 받았다. 희단(姬旦)주D-010이 섭정하매 형제가 서로 용납하지 않았다. 하물며 공자의 시중(時中)함으로 미복(微服)을 입고 송(宋) 나라를 지났으니, 이 모두 변국(變局)에 처하여 시세에 맞춘 것으로, 어리석은 자는 의심했으나 슬기로운 이는 칭찬하였던 것이다. 아, 선생의 슬퍼하고 답답함이여, 어찌 그 심정이 다른 데 있었으랴. 시절의 변동에 따르는 정감(情感)이 선현(先賢)을 우러러 탄식한 것이리라. 슬프도다. 원유(遠遊)의 애절한 충혼(忠魂)이여. 가을 하늘의 푸르고 아득함을 향하네. 옛사람의 슬픔을 오직 쓰르라미의 울음소리에 부치노라.
아들 신익(申翌)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대부 병마절도사(嘉善大夫兵馬節度使)에 이르렀으므로 관작(官爵)을 추증하였다.

[주D-001]양진(楊震) : 후한(後漢) 때의 현인으로 관서공자(關西孔子)라는 이름을 들었다. 박학(博學)과 청렴(淸廉)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주D-002]송옥(宋玉) : 초(楚) 나라 문인으로 굴원(屈原)의 제자다. 굴원의 다음가는 부(賦)의 작가로서 굴송(屈宋)이라고 일컫는다. 굴원의 추방을 슬퍼하여 지은 구변(九辯)은 뛰어난 서정적 서사시이며, 모두 16편의 부를 남겼다.
[주D-003]삼려대부 : 초 나라의 왕족인 소씨(昭氏)?굴씨(屈氏)?경씨(景氏)의 세 집안을 관리하던 굴원을 말한다.
[주D-004]모모(?母)는 반드시……질투하는 법 : 모모는 황제(黃帝)의 넷째 왕비인데, 심한 추부(醜婦)였으며, 어진 서시는 월(越) 나라의 절세의 미인이다. 여기서는 굴원이 간신들의 참소로 쫓겨났음을 말한다.
[주D-005]예와 이제 : 예는 송옥을 말하고, 이제는 저자를 뜻한다.
[주D-006]혐의를 결단 : 진(秦)이 제의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무계(誣計)라고 간파(看破)한 굴원은 회왕(懷王)이 무관(武關)에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주D-007]태갑(太甲) : 은(殷) 나라의 제2대 임금 태종(太宗)의 이름인데, 그가 즉위하여 3년 동안 포학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이윤(伊尹)에게 추방되었다가, 3년 뒤에 개과하고 다시 돌아와 선정을 베풀었다.
[주D-008]비간(比干) : 은 나라의 충신으로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주왕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주D-009]미자(微子) : 은 나라의 충신으로 왕의 서형(庶兄)이 된다. 왕족인 기자?비간과 함께 은 나라의 3인(仁)이라 일컬었다.
[주D-010]희단(姬旦)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요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周公)의 이름인데,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이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주공 희단이 섭정을 하여 왕실의 기초를 세우고, 제도와 예악(禮樂)을 정비하여 주 나라 문화의 터전을 만들었다.
 
 

댓글목록

김좌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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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좌회 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통화 한번 하고 싶습니다
전화 010-5548-4833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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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회대부님 반갑습니다~! 지난번 눌암 할배전에 올린 서애선생의 뇌사기를 얻고 류문에 보여 드렸더니 펄쩍 뛰시며 기뻐 하셨습니다. 약간의 손질이 필요 하다는 자문도  듣고......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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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상기의 시는 <신명인전>에 들어 있는 시로서, 김찬 선조님이 쓰셨던 시의 운자를 차운하여 기묘록의 신명인전을 쓴 분이 지은 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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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출전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