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海印寺)의 장경(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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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3-22 21:42 조회1,500회 댓글2건본문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 2 ?葉記二
해인사(海印寺)의 장경(藏經)
장경은 세칭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대저 불가에서는 팔만사천이란 숫자를 많이 칭하는데, 대계(大戒) 역시 팔만사천조가 있는 예와 같다. 그러나 이는 큰 숫자를 들어서 말한 것이지, 꼭 불경의 권수가 팔만은 아닐 것이다. 해인사의 장경판은 세간에서 신라 애장왕(哀莊王)때에 새긴 것이라 하나 그것은 허왕되고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 절의 중이 따로 적은 기록에,
"무신년에 고려국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칙명을 받들어 조각했다." 생각건대 고려의 정종(定宗) 3년(948), 목종(穆宗) 11년(1008), 문종(文宗) 22년(1068), 인종(仁宗) 6년(1128), 명종(明宗) 18년(1188), 고종(高宗) 35년(1248), 충렬왕(忠烈王) 30년(1304), 공민왕(恭愍王) 17년(1368)은 다 무신년이다.
하였는데, 고려에는 도합 6번의 무신년이 있었으니,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목록 3권을 살펴보니, 천(天)자로부터 시작하여 동(洞)자에 이르기까지 각각 1함(函)씩이고《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백권부터《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100권까지 도합 1천 5백 63부(部) 6천 5백 29권이고, 인지(印紙)가 7천 7백 28첩(牒) 2장(張)이다. 또 등사되어 전하는 세조조(世祖朝)의《탑인절목(?印節目)》1책을 상고해보고 다음과 같이 대충 기록하여 둔다.
천순(天順) 원년(1457) 무인 9월 26일에 우부승지 김 질(金?)의 차지(次知)로 순왜지(純倭紙) 2건과 교왜지(交倭紙) 1건에 인쇄 교정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제본하였는데, 송염지(松染紙)로 표지(表紙)를 만들어 전라도에 9백 90권, 경상도에 9백 90권, 충청도에 9백 7권 10장, 강원도에 4백 51권 5장, 황해도에 5백 10권 5장을 안치했다.
천순 2년(1458) 2월 23일에 동부승지 정식(鄭軾)의 차지로 순왜지와 교왜지에 인쇄 제본할 때 1책의 장수를 100장으로 한정하여 1책으로 만들되, 혹 100장을 넘거나 100장에 미치지 않아도 1책으로 만들었고,《심경(心經)》과《목련경(目連經)》은 장수가 많지 않으므로 5~6가지 경전을 합해서 1책으로 만들었다.
천순 2년 7월 24일에 우부승지 김질의 차지로 대장경 50부를 인쇄하여 해인사에 1본, 흥천사(興天寺)에 1본, 예조(禮曹)에 1본을 안치하고 남은 47건 안에서 1건은 좋은 것으로 골라 복천사(福天寺), 그 나머지는 각 사찰에서 맞아다 안치하고 화상(和尙)들의 의논을 계문(啓聞)하였다.
천순 2년 9월 14일에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의 차지로 인쇄한 47건 안에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2건, 고령(高靈) 반룡사(盤龍寺)에 4건, 진주(晉州) 백암사(百巖寺)에 1건, 오대사(五臺寺)에 1건, 칠불사(七佛寺)에 1건, 응석사(凝石寺)에 1건, 성주(星州) 용연사(龍淵寺)에 1건, 안봉사(安峯寺)에 1건, 영산(靈山) 보림사(普林寺)에 1건, 밀양(密陽) 재악사(載岳寺)에 1건, 안동(安東) 백련사(白蓮社)에 1건,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 1건, 중방사(中方寺)에 1건, 대둔사(大芚寺)에 1건, 경주(慶州) 천룡사(天龍寺)에 1건, 불국사(佛國寺) 1건, 함양(咸陽) 군자사(君子寺)에 1건, 의령(宜寧) 보리사(菩提寺)의 1건, 영천(永川) 거조사(居祖寺)에 1건, 정향사(鼎鄕寺)에 1건, 상주(尙州) 관음사에(觀音寺)에 1건,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 1건, 지평(砥平) 상원사(上元寺)에 1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1건, 강진(康津) 만덕사(萬德寺)에 1건, 영암(靈巖) 도갑사(道岬寺)에 1건, 능성(綾城) 쌍봉사(雙峯寺)에 1건, 장흥(長興) 성불사(成佛寺)에 1건,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1건, 무장(茂長) 참당사(懺堂寺)에 1건, 남원(南原) 승련사(勝蓮寺)에 1건,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 1건, 진원(珍原) 하청사(下淸寺)에 1건, 태인(泰仁) 운주사(雲住寺)에 1건, 무안(務安) 법천사(法泉寺) 1건, 광주(光州) 증심사(證心寺)에 1건, 담양(潭陽) 용천사(龍泉寺)에 1건, 보은(報恩) 복천사(福泉寺)에 1건, 옥천(沃川) 지륵사(地勒寺)에 1건, 고성(高城) 유점사(楡岾寺)에 1건을 안치했다.
천순 2년 9월 14일에 경상도에 인경지(印經紙) 9만 9천 4백 첩(貼), 전라도에 9만 9천 4백 첩, 충청도에서 9만 7백 54첩, 강원도에서 4만 5천 1백 26첩, 황해도에서 5만 1천 1백 26첩, 순왜지(純倭紙)가 1만 7천 2백 54첩, 교왜지(交倭紙) 8천 6백 34첩을 모아서 불경을 인쇄하는 데는 38만 5천 8백 95첩이 들었다. 이 중에 잡초지(雜草紙)로 인쇄한 것이 47건으로 1건마다 7천 7백 70첩 10장이 들었으니 도합 30만 2천 7백 22첩 10장이요, 순왜지(純倭紙)로 인쇄한 것이 2건으로 7천 7백 17첩 10장이 들고 잡초지로 인쇄한 것이 47건이고 표지가 3천 4백 2첩 12장이 들었다.
작업에 종사한 승려들 중에 공량(公糧)으로 공급된 수효가 7천 57명이고 사량(私糧)으로 공급된 수효가 1천 4백 85명인데, 공급된 중미(中米)가 4천 6백 79석(石) 6두(斗)이다.
감독을 맡은 여러 신하들은 봉직랑 행성균주부(奉直郞行成均主簿) 정은(鄭垠)ㆍ보의장군 행용양위섭호군(保義將軍行龍?衛攝護軍) 윤찬(尹贊)ㆍ추충 좌익공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경연참찬관 겸상서원윤 수문전직제학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겸판봉상시사 지이조내직사준원사(推忠左翼功臣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經筵參贊官兼尙瑞院尹修文殿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奉常寺事知吏曹內直司樽院事)
조석문(曺錫文)ㆍ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판병조사 성균과대사성 고령군(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崇政大夫判中樞院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判兵曹事成均館大司成高靈君) 신 숙주(申叔舟)ㆍ숭록대부 판주추원사 수문전대제학 겸판호조사(崇祿大夫判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兼判戶曹事) 이인손(李仁孫)ㆍ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천부원군(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ㆍ수충.....공신 계양군(輸忠.....功臣 桂陽君) 증(?) 벼슬이 높은 자는 왼쪽으로, 낮은 자는 오른쪽으로 앉는다. 등이다.
○인성대장경발(印成大藏經跋) : 신(臣)이 듣건대 우리 불여래(佛如來)가 처음 정각(正覺)을 이룩하고 나서 '기이하다.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동일한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망상(妄想)과 집착(執着) 때문에 그것을 증득(證得)하지 못할 뿐이다.'고 말씀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마다 청정 무루(淸淨無漏)한 성(性)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면서도 무명(無明)에 가리워져 육취(六趣)에 윤회(輪回)함을 슬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석가모니가 세상에 출생한 본래의 뜻이므로, 바로 말하기도 하고 비유(比喩)해서 말하기도 하여 그 글이 천만 축(軸)에 이르도록 많아진 것도 괴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법(法) 스스로가 확충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확충되는 것이니, 그 법이 행하여지고 행하여지지 않음은 당시의 군주가 그 법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존(至尊)의 지위에 오르고 상성(上聖)의 자질을 갖추시어 성명(性命)의 이치를 연구하고 도덕의 아름다움을 다하신 데다가 삼장(三藏)의 묘계(妙契)와 진승(眞乘)을 통달하여 우리 부처의 자비로 제도(濟度)하는 도로써 억조 창생으로 하여금 사악을 버리고 바른 데로 돌아가 다같이 덕의 수레를 타고 인수(仁壽)의 영역에 이르도록 하려 하시니, 이는 곧 명철하신 임금이요 의로우신 군주라 보통에서 뛰어난 이가 하는 바이고 천백 년에 드물게 만나는 융성한 시기입니다. 천순(天順) 원년(세조 1457) 정축 겨울에 임금께서 계양군(桂陽君) 신(臣) 증(增)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신 윤사로(尹師路)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신 신숙주(申叔舟)와 판중추원사(判中樞阮事) 신 이인손(李仁孫)ㆍ권남(權擥)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 한명회(韓明澮)와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신 조석문(曺錫文) 등에게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나는 하찮은 덕으로 천지ㆍ조종의 신령을 잇고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다행히 경 등과 시대를 함께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조그마한 선근(善根)이 아니다. 생각건대 불교가 우리 동방에 흘러들어온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설이 실린 글로는 장경(藏經)만한 것이 없는데, 다행하게도 그 판본이 해인사에 갖추어져 있다. 근세에……(원문 1자 빠짐) …… 좋은 것들을 전부 인쇄해냈으나 간간이 국가에서 일본에 하사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약간부를 인쇄해내어…… (원문 2자 빠짐)…… 복지(福地)를 만들어 위로는 선왕(先王)ㆍ선왕후(先王后)와 조고(祖考)의 영(靈)에게 명계(冥界)의 길복(吉福)을 받으시게 하고 아래로는 법계(法界)의 중생과 미미한 곤충ㆍ초목에 이르기까지 복리를 함께하여 그지없이 미치게 하려 한다. 모든 일이란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법인데, 이제 일을 시작하여 50부까지 완성되었으므로 우리나라의 큰 불사(佛寺)에 두루 안치하려 하니, 경등은 조치를 취하고서 그것을 차례대로 알리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신 증(?) 등이 삼가 서둘러서 그 경(經)의 본말과 거세(巨細)를 다 혜각존자(慧覺尊者) 신(臣) 신간(信看)ㆍ판선종사(判禪宗事) 신 수간(守看)
ㆍ선사(禪師) 신 학열(學悅)과 의논하여 수시로 임금께 아뢰고 승정원을 거쳐 각도(各道)에 공문을 보내어 그 고장의 형편에 따라 종이를 내는 분량을 정하였습니다. 이어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 신 윤찬(尹贊)ㆍ종부주부(宗簿主簿) 신 정(鄭)……(원문 1자 빠짐)……을 경상도로 보내어 미리 준비하게 하는 한편, 판 선종사 신 수간과 해인사 주지 신죽헌(竹軒)에게 그 업무를 독려하게 하였고, 감사 신 이극배(李克培)에게 일러 그 일을 감독 총괄하게 한바, 그 이듬해 2월에 일을 시작하여 그해 4월에 끝내었습니다. 이리하여 신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하여 그 발문(跋文)을 쓰게 하셨습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제불(諸佛)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오직 중생을 제도하는 일 때문이요, 왕자(王者)가 부록(符?)을 받아 세상에 나오는 것 역시 오직 백성 구제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삼계(三界)의 스승이 되어서 그 미혹함을 인도하고 임금은 만민의 주인이 되어서 그 삶은 구제합니다. 이는 비록 세상을 경영하고 세상을 벗어나는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서원(誓願)을 발하여 그지없이 널리 제도(濟度)하자는 뜻은 부처와 왕자가 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 앞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에 직접 대난(大難)을 당하시어 간흉(姦凶)을 쓸어버리고 하늘과 사람이 돌아와 천명(天命)이 이르렀으니 그 성대한 덕업으로 보아 실로 우리 동방에 없었던 성주(聖主)이십니다. 그러나 즉위하신 이래로 여가를 그냥 보내지 않고 치도(治道)를 더욱 절실히 구하여 백생들이 편안함에도 편안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시절이 화평함에도 화평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리고 예부터 성제(聖帝)나 명왕(明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 으레 삼보(三寶)를 존숭(尊崇)하여 대업(大業)을 이룩하였다고 여기시고는,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여 큰 기업(基業)을 그지없이 연장시키고 정법(正法)을 가져 부촉(付囑)하던 세존(世尊)의 유지(遺志)를 잊지 않아 위대한 불전(佛典)을 이룩하여 참된 교화(敎化)를 널리 선양하였으니, 대체로 부처와의 세대는 1천여 년이 되고 거리는 1만여 리나 되는데도 우리 성상의 정신ㆍ심술(心術)의 묘(妙)와 자비ㆍ광대한 도량은 부처와 동일하십니다. 어떤 이가 신에게 묻기를 '세상에서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읽기로 이름난 이라 하여도 수십 권을 해독하는데 불과한데 지금 삼장(三藏)의 글은 집채에 꽉 차 있어 끝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 글을 다 보고 그 설을 다 구명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저 원각(圓覺)의 본체란 신묘하게 밝아 예와 이제에 투철하여도 변하는 것이 없고 범인과 성자(聖者)에 관통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이는 다 미혹됨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이것도 없고 더 것도 없는 때문입니다.《능엄경(楞嚴經)》에「한 사람이 자비심을 발하여 본원으로 돌아간다면 시방(十方)이 텅 비어서 모두가 다 없어져 버린다.」하였으니, 이는 우리 성상께서 발심(發心)한 처음부터 이미 대법륜(大法輪)을 굴리심으로써 여러 불국(佛國)도 많은 중생도 따질 것 없이 다같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사람마다 그 불전을 눈으로 본 뒤에야만 공덕이 되겠습니까. 이는 보통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했었습니다. 천순 2년 6월 일에 가선대부 행충좌위
상호군(嘉善大夫行忠佐衛上護軍) 신 김수온(金守溫)이 큰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지었고, 선산부사(善山府使) 신 김인민(金仁民)이 썼습니다.
○보살계(菩薩戒) : ……(원문 2자 빠짐)……조선국왕 이(李) 친압(親押) 는 삼가 선왕ㆍ선왕후와 조종의 영(靈)과 죽은 아들 의경(懿敬 덕종(德宗)의 시호)이 극락에 오르고 아울러 법계(法界) 중생의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위하여 대장경 50건을 인쇄하고 표지(表紙)는 이미 끝났으므로 이달 10일에 해인사에서 법회(法會)를 특설하기로 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한 원음(圓音)으로 여러 근기에 설법하였으니 교(敎)에는 돈교(頓敎)와 점교(漸敎)의 구별이 있고, 오천축(五天竺)의 불전을 유통해서 풀이하였으니 글에는 한어(漢語)와 범어(梵語)의 차이가 있으므로 반구절의 게송(偈頌)으로는 복취(福聚)를 바라기 어렵고 한마디의 말로는 선근(善根)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과거에 심어놓은 인연으로 금세에 응보를 받았으니, 매일같이 있는 만기(萬機)에 항상 깊은 못이나 살얼음을 밟는 듯하는 경계가 절실하게 여겨지고 구극(九極 임금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어찌 감히 국가에 대한 걱정을 잊겠습니까? 언제나 자신의 덕이 모자라서 하늘의 명(命)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므로 삼보에 의지하여 기쁨을 백생들과 함께 하려합니다. 물에 비유하면 강(江)이나 하(河)가 어찌 큰 바다와 같겠으며, 그 도를 논하면 유도나 도교(道敎)가 어찌 고원한 석시(釋氏)와 같겠습니까? 다만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의 전서(全書)에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의 총상(總相)이 들어 있습니다. 판본이 가야산 절에 안치되어 귀신이 옹호하고 금지하며 참된 교화가 우리 동방에 미쳤으니 하늘과 사람이 받들어 행하고 받아 지니는 바이므로 마땅히 인쇄하고 널리 비치하여 범인과 성자가 다 공경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수천 여의 일꾼을 모으고 50건의 경전을 인쇄하니, 낭함 패첩(?函貝牒)에는 은미한 종지(宗旨)가 들어 있고 상......(원문 1자 빠짐).....우화(象□雨花)는 신묘한 공용(功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막 끝나고 고승(高僧)들을 맞아다 펼쳐보게 되니, 공전(空前)의 법연(法筵)은 하늘이 열었고 일대(一代)의 아름다운 설법은 샘이 불어난 듯하여, 진실로 대승(大乘)을 판별할 수 있고 거의 묘력(妙力)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선왕 열성(列聖)의 영과 죽은 아이와 고혼(孤魂)의 무리가 직접 대자대비의 제도를 받아 극락세계에 오르고 속히 정각(正覺)의 힘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에 들어서, 일체의 번뇌를 모두 버리고 그지없는 복을 널리 받아지이다. .......(원문 2자 빠짐).....경건히 기도하는 마음 금할 길 없어 삼가 아룁니다. 천순 2년 8월 초 10일.
해인사의 장경궤(藏經?)는 무설전(無說殿)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건륭(乾隆) 경자년(정조 4, 1780) 1월 8일에 무설전에 화재가 나서 경궤가 타버렸다. 내가 일찍이 해인사에 놀러갔었지만, 여기에 대한 차기(箚記)가 《한죽당필기(寒竹堂筆記)》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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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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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합천 함벽루를 거쳐 해인사에 들르게 되는 때에 맞추어 팔만대장경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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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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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