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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김사형) 묘소와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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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2-25 17:47 조회2,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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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묘소에 대한 풍수 전문가의 답사기를 보고 옮겨 적습니다.



이글은 형산의 풍수이야기에서 퍼 왔습니다.



제 목 : 2. 청학포란형의 김사형과 신효창 묘역



등 록 자 : 유영봉, ybongyoo@hanmail.net

조회 : 167 등록일 : 2001-11-16 오후 7:49:57







2. 청학포란형의 김사형과 신효창 묘역



버스에 오르며 보니, 맨 앞의 조수석이 비어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표가 난다더니, 얼마전 갑작스레 작고하신 김웅기 고문님이 얼른 뇌리에 떠오른다. 답산길마다 이 자리는 언제나 선생님의 차지였는데, 이제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이 인다.



버스가 터미널을 지나자마자, 양서면의 목왕리를 향해 좌회전을 한다. 조선 시대에 정승을 지낸 아홉 분이 묻혀있다는, 그래서 예로부터 명당으로 유명한 양서면 목왕리와 부용리 일대에 걸쳐 있는 `구정승골`로 가기 위해서이다.



양수리를 벗어난 버스의 앞쪽으로 가을걷이가 끝난 들길이 펼쳐진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은행나무가 곱게 물들었다. 대전보다는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이 일대는 벌써 가을걷이도 끝났고, 은행나무도 노란 불꽃으로 타오른다.



얼마나 형세가 좋은 곳이기에 아홉 정승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말인가?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완만하고 유순한 산세들이 들판에 다다라 천천히 몸을 세웠다. 서쪽으로는 얼마간 먼 곳에서 급하고 험한 산세들이 연이었다. 그 한켠에는 펼쳐든 두루마리 모양으로 정상부분이 평평하고 양쪽이 들린 형상을 한 봉우리인 고축사(告軸砂)가 얼른 눈에 뜨인다. 정승을 낳는다는 고축사이다. 필시 저 고축사가 어느 곳에서나 잘 보이기에, 이 좁은 골짜기에 아홉 자리나 있으리라.



지나치는 개울의 맑은 물 속에는 단단하게 박혀있는 돌들이 보인다. 수구사(水口砂)이다. 수구사가 나타나면, 그 위에 좋은 혈처(穴處)가 있다는 증거이다. 수구사는 혈을 싸고 내려온 물의 흐름을 더디게 하는 기능을 한다. 유속을 더디게 하는 만큼 기(氣)의 유출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길가에는 우리가 추후 방문할 묘소들을 알리는 표지판이 계속 스쳐간다. 꿈틀대며 달리던 버스가 `구정승골`의 제일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선생의 묘소 입구에 섰다. 목왕리 버스 정거장 앞이다.





정 선생이 하차한 회원들을 불러모은다. 오르기 전에 주산(主山)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멀리 하늘을 이고 있는 봉우리가 중앙 부분은 평평한 듯하다가 좌우로 둥그스름하게 흘러내렸다. 산의 모양으로 보아 녹존성(祿存星)으로 분류된다.

녹존성은 둥두렷이 퍼진 모양을 한 봉우리에다 곁가지 같은 능선이 많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면으로 내려올수록 곁가지에 해당하는 능선이 많아지고 튼튼해진다. 이를 하생다각(下生多脚)이라고 한다.



녹존성의 한가운데에서 나온 산줄기 중출맥(中出脈) 또한 처음에는 흐릿하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더욱 굵어지면서, 어느 즈음에서 자그마한 둥근 산봉우리를 솟아올린다. 이를 소원봉(小圓峰)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 혈이 맺힌다. 녹존성이 맺는 혈의 모양은 언제나 소치혈(梳齒穴)에 속한다. 소치혈이란 얼레빗이나 어금니처럼 약간 우묵하게 생긴 곳에 맺는 혈을 가리킨다.



이곳의 주산은 청계산으로 녹존성이다. 그 앞으로 능선 한줄기가 횡으로 누웠고, 가장 앞에는 송림이 검푸른 모습이다. 이 송림 가운데 소원봉이 숨었고, 그 소원봉에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정 선생의 설명이다.



청계산의 오른쪽 능선에는 사람의 손길이 선연하다. 살펴보니, 그곳에 공원묘지가 들어선 모양이다.

마을의 앞뒤로 제실(祭室) 두 곳이 눈에 뜨인다. 입구의 제실이 더 우람한데 평산(平山) 신씨(申氏)네의 신추당(愼追堂)이다. 누구의 묘가 이곳에 있기에 저토록 거대한 신도비(新道碑) 셋을 앞세우고 위용을 자랑할까?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시간을 아끼려는 의도에서 모두들 그냥 우 하니 묘역으로 오른다.



기실 우리는 이곳에 김사형 선생의 묘소만 있는 줄 알고 찾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효창(申孝昌) 선생도 같은 묘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인인 김사형이 부인 죽산(竹山) 박씨(朴氏)와 함께 뒤에서, 사위 신효창은 홀로 앞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쪽의 신추당은 신효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실이오, 뒤쪽의 낙포재(洛圃齋)는 안동 김씨 문중에서 김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제실이다. 신추당은 『논어(論語)』의 `신종추원(愼終追遠; 부모의 상에는 슬픔을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하며, 조상의 제사에는 공경을 다하라)`에서 따온 이름이고, 낙포재는 김사형 선생의 호(號)였던 `낙포`에서 나온 것이다.



쌉싸름한 내음이 풍겨나는 송림으로 들어섬에, 앞쪽에 작은 동산의 아랫 둥치가 나타난다. 크기에 비해 제법 우뚝 솟은 둥근 산이다.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어린 매끈한 산세이다.



송림을 지난 오솔길은 광주(廣州) 김씨(金氏)의 묘가 있는 즈음에서 좌측으로 몸을 꺾어 동산을 타고 오른다. 이제 경사도 제법이다.



숨이 찰만 하자, 오솔길이 끝나면서 신효창 선생의 묘가 먼저 나타난다. 동산의 정상 부분치고는 꽤 너른 묘역이다. 그리고 김사형 선생의 묘가 이어진다. 두 묘소는 한결같이 육각형으로 테두리석이 둘리어졌다. 보기 드문 모습인데, 이는 조선 초기 상류 계층이 조성했던 묘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장묘법(葬墓法)을 보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까지 귀족 계층의 묘소는 대체로 장방형을 하고있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 육각형으로 잠시 모양을 바꾸다가, 이내 원형으로 다시 모양을 바꾸었다. 따라서 육각형으로 테두리석이 둘린 묘소는 그만큼 희귀하다.



용맥을 보기 위해 김사형 선생의 묘소 뒤로 오르는데, 잠시 후 신수붕(申壽鵬)의 묘가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단 바로 앞이 과협처(過峽處)이다. 멀리 백두산에서 내려온 이 용은 설악산과 오대산을 거쳐 용문산을 지나 유명산을 통과한 다음 좌측으로 청계산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 지점에 이르러 험한 기운을 털어 버리기 위해 목을 조이고 있다. 아주 힘이 좋은 용인데, 앞에다가 혈을 쏟아내기 위해 풍선목처럼 잘록해졌다.



과협처는 용의 실제적인 면모를 먼저 보여주는 곳이다. 과협처가 왼쪽으로 튼 형상이면 혈은 분명 왼쪽에 있다. 아울러 과협처가 오른쪽으로 틀었으면 혈 또한 오른쪽에 있는 것이 자명하다. 또 과협처가 길면 혈은 먼 곳에 맺히고, 짧으면 가까운 곳에 혈이 맺힌다.



따라서 과협처가 부드럽고 아름다워야 좋은 혈이 맺히고, 과협처가 이지러지거나 깨져 있으면 혈 또한 맺지 못하는 법이다. 특히 호위하는 지맥들이 과협처의 좌우에서 조밀하게 흘러내리고, 물길이 좌우로 나뉘어 흘러내리는 것이 분명해야 하며, 바람을 막아주는 영송사(迎送砂)나 공협사(拱夾砂)가 있어야 매우 길하다고 본다.



이곳은 잘 생긴 과협처이다. 좌우 양쪽의 원근에 있는 지맥들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흐른다. 과협처의 정중앙에다 물 한 바가지를 부으면 물이 좌우로 잘 나뉘어 흐를 형세이다. 좋은 분수령(分水嶺)인 것이다. 계단의 좌우와 앞뒤로는 영송사가 선명하다. 그리고 혈에서 내청룡과 내백호 역할을 하는 지맥이 좌우 저만큼에서 공협사가 되어 허리에 드는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두 손으로 풍선목을 감싸 바람을 막아주듯 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에워싸는 형세이다.



과협처를 지난 용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더 나아갔다. 혈을 만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살기(殺氣)를 털어내기 위해 용이 몸통을 좌우로 가볍게 흔드는 이런 움직임을 위이( 弛)라고 한다.



이곳은 손질을 너무 많이 가한 묘소라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입수도두처와 선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입수도두처는 묘의 바로 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익이 양쪽으로 팔을 벌려 묘를 껴안고 있다.



김사형 선생과 신효창 선생의 묘소 사이는 네모 반듯하고 평탄한 공터가 차지하였다. 그런데 신효창 선생의 묘도 혈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곳은 구슬을 꿰듯 한 자리에 혈이 두 개 이상 맺혔다는 의미를 지닌 연주혈(連珠穴)에 해당하는데, 그것도 녹존성이 낳은 소원봉의 꼭대기에 맺혀 있어 더욱 특이하고 남다른 주목을 끈다. 보통은 소원봉의 중턱이나 하단부에 통상 하나의 혈이 맺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보아 신효창 선생의 자리가 더 좋다. 생기가 뭉친 정도도 그렇고 전망도 그렇다. 자리도 천심십도(天心十道)에 정확히 맞추었다. 천심십도가 정확하면 발복이 크고 오래 간다고 한다.

이곳은 분명 소원봉의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꼭대기라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만이 생겨난다.



전방을 내다보면, 청룡과 백호가 겹겹이 싸여 혈과 명당을 보듬고 있다. 내청룡은 낙포재 앞으로 감쌌고, 외청룡은 신추당 앞의 신도비가 있는 곳까지 둥글게 감아 내렸다. 내백호는 마을 앞에까지 유순하게 흘러 마을을 싸안았고, 외백호는 신추당의 신도비 앞쪽으로 감돌았다. 따라서 두 제실과 마을이 있는 공간이 내명당이 되고, 도로 건너 들판은 외명당이 되는 셈이다. 꽤 넓고도 평탄한 명당이니, 부와 귀를 꿈꾸어 볼만도 하다.



안산도 다정하게 혈을 바라본다. 능선의 흐름도 일그러지거나 각이 진 부분이 없이 유순하다. 그리고 오른쪽 솔가지 너머로는 잘 생긴 귀인봉이 하나 단아하게 숨어있다.



묘역의 끝에 서서 전방을 관찰하는데, 임 사장님이 예의 장난끼 가득한 표정을 하고 다가온다.

"유 선생, 목욕하고 싶지 않아? 여기서 한번하고 가지. 여기 물이 가득하네. 들어가기만 하면 되겠어. 어서 뛰어들어가 봐!"



임 사장님이 가리킨 곳은 신효창 선생의 묘소 앞 축대 아래쪽에 자리잡은 두 기(基)의 묘였다. 농담이지만 맞는 말씀이다. 그 곳은 두 개의 혈을 감싸고 내려온 물기가 한데 모이는 자리이다. 따라서 항상 물기로 축축한 곳이니, 결코 묘를 써서는 아니 되는 자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묘소의 사이로 물풀이 새파랗다. 저러니 유골인들 편안하시겠나?



축대는 후일 사람들이 쌓은 것인데, 주변 곳곳에 천연석이 혈장(穴場)을 따라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그러고 보니 축대를 쌓은 돌들도 제멋대로 생긴 천연석들이다. 아마도 근처에서 눈에 뜨이는 대로 주어다가 쌓은 듯 여겨진다.



그렇다면 신효창 선생의 자리는 돌이 많은 곳을 비집고 맺는다는 석중혈(石中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뜻 머리를 스친다. 석중혈도 보기 드문 괴혈(怪穴)의 하나인데…… 옆에 있던 서상석 회원도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이곳은 물형(物形)으로 보아,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이라고 불리는 자리이다. 주산인 청계산(靑溪山)이 좌우에 날개처럼 생긴 능선을 거느리고 있어, `청계`란 이름과 함께 청학을 연상시키는 데다가, 두 개의 혈이 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두 묘소는 공통적으로 을좌신향(乙坐辛向)의 향을 보았다. 물길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는 좌수도우(左水到右)로써, 건(乾)의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건파(乾破)이다. 88향법에 따르면 정묘향(正墓向)에 속하는 길한 방위를 쓴 것이다.



정묘향은, 물이 좌수도우하고 우측에서 또 작은 물이 나와 양수협출(兩水陜出)해야 하며, 곤신파(坤申破)에 정미향(丁未向), 건해파(乾亥破)에 신술향(辛戌向), 간인파(艮寅破)에 계축향(癸丑向), 손사파(巽巳破)에 을진향(乙辰向)이 이에 속한다. 정묘향은 부귀를 함께 불러오며 자손들이 번창해서 건강하게 장수를 한다는 향이다.



김사형(1333∼1407) 선생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字)는 평보(平甫)이며, 호(號)는 낙포이다. 그는 상락후(上洛侯) 영후(永 )의 손자이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지낸 천( )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앵계관직(鶯溪館直)에서부터 벼슬을 시작하였지만, 공민왕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다가 위화도(葦花島)에서 회군을 한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해서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여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는 태조 때에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참여하고, 정종 때에는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가 외교적 임무를 완수하기도 하였다. 그는 1401년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使)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그는 특히 벼슬길에서 단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은 인물로 유명하다.



신효창 선생은 고려말 공민왕 13(서기 1364)년에 태어나 세종 2(1440)년에 세상을 등진 문신이다. 자(字)는 성대(聖大), 호(號)는 화봉(華峰)이다. 그의 증조부는 문학사대언(文學士代言)을 지낸 중명(仲明)이며, 조부는 진현학사(進賢學士)를 지낸 군평(君平)이고, 부친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수(璲)이다.



그는 1383년 우왕(禑王) 때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38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후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음관(蔭官)으로 사헌시사(司憲侍史)에 임용되어 상장군(上將軍), 호조전서(戶曹典書), 대사헌(大司憲),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등의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다가 1418년에 탄핵을 받아 무주(茂州)에서 7년의 귀향살이를 하였다. 그의 손녀가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군(廣平君)과, 남지(南智)의 딸이기도 한 외손녀가 세종의 네째 아들 임영군(臨瀛君)과 결혼하게 되어 삭탈된 관직을 환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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