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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 함벽루(涵碧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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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4-10 13:41 조회1,60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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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함벽루(涵碧樓) 남강 돌벼랑 위에 있다.
○ 안진(安震)의 기문에, “내가 15세부터 초가집에서 글을 읽으면서 세상을 모른 지가 10년이었다. 정사년 가을에 중국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면서 평양을 지나다가, 처음으로 영명사(永明寺)와 부벽루(浮碧樓)를 보았다. 5년 뒤에 진주 목사로 나와서 또 용두사(龍頭寺)의 장원루(壯元樓 진석루)에 올랐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에 본 바에 남북의 뛰어난 경치는 이 두 누(樓)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저께 나라의 일로 인해서 강양에 가다가 도중에서 한 누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듯 하고 단청이 현란하여 봉(鳳)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저 누는 어느 때에 지었는가.’ 하니, 객이 답하기를, 지금 태수가 신축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듣고 기뻐하여 곧 배를 띄워 강을 건넜다. 난간에 올라 4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형세가 거의 전일의 두 누보다 못하지 않고, 단청이 빼어난 것은 더 나은 듯하였다. 아, 이 고을이 생긴 이래로 이 강산이 있었고, 옛날 영웅 호걸로써 이 고을에 수령으로 온 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도 푸른 석벽을 파고 맑은 흐름을 임해서 누를 지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직 군이 비로소 발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감추었다가 지을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닌가. 이에 잔을 들고 노래하기를,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이 푸르르네. 밝은 달 돋는데 물이 출렁출렁. 노 위에서 사시로 보아도 부족하고, 아득할손 나의 회포 하늘 저쪽이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말라도 사또의 덕은 잊을 수 없으리.’ 하였다. 객이 나에게, ‘이 노래를 써서 이 누의 기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므로 나는 곧 붓을 잡아 쓰노라. 누를 짓는데 제도의 보태고 줄인 것과, 관람하는 경치의 큰 것 작은 것은, 시에 능한 자가 드러내는 것을 기다려도 또한 늦지 않다. 누를 함벽(涵碧)이라 한 이는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로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군(金君)이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중신기(重新記)〉에, “족형 무송 윤담수(族兄茂松尹淡?)씨는 박식하고 고상한 군자이다. 기축년 가을 종부 정(宗簿正)으로 있을 때, 경산도 단성현(丹城縣)에 모친을 뵈오려 갈 제 길이 합천을 경유하였는데, 합천 태수 유후(柳侯)의 편지와 그 고을의 함벽루의 기문을 아울러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다. 담수의 말은, ‘함벽루는 군 남쪽 4리에 있는데 절벽에 의지하여 긴 강을 굽어보는데, 남으로 바라보면 여러 산이 읍하는 듯 푸른 병풍이 빙 둘러 있다. 돌아서 조금 서쪽으로 오면 바위 언덕에 옛 절이 있어서 새벽 종과 저녁 북소리가 은은하게 구름 가에서 울려 온다. 누 바로 동쪽 30보쯤에 한길과 나루터가 있어서 나그네가 오가는 자, 옷을 벗고 건너는 자, 옷을 걷고 건너는 자들을 굽어보면 고물고물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이것이 함벽루 경치의 대체이다. 누를 지은 시초는 안 선생 진(震)의 기문에 자세하고 잇달아서 시 지은 사람도 모두 예전에 이름나 선비들이다. 그렇다면 이 누가 한 지방 형승을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황폐하고 무너진지 40년이 되어도 부흥시키는 자가 없다가 정해년에 유후가 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정사가 은혜스럽고 간략하니, 백성이 즐거워하고 번성하였다. 오래된 민폐를 없애고 새로운 정사를 일으켰다. 공무의 여가에 빈터를 돌아보고 개연히 탄식하며 다시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이에 중 성소(性昭)에게 일을 맡겼다. 전 군사(前郡事) 문여충(文汝忠)이 의논하지 않아도 뜻이 같아서 고을 부로(父老)들을 격동시켜 권하니, 역사에 달려오기를 서로 뒤질까 하였다. 목재를 모으고 기와를 굽는데 관가 재물에서 사용하고, 백성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높은 데를 깎고 좁은 데를 넓히며, 옛모습 그대로 하되 제도를 보탰다.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완성되었는데, 이른바 함벽루라는 뜻이 더욱 드러나고 맞았다. 유후가 예전 기문과 시를 다시 새겨서 꾸미고자 하는데, 다시 지은 전말을 기록하는 것은 오직 그대에세 바란다.’ 하여 굳이 청하였다.
나는 마침 병이 조금 뜸하여 창 앞에 나돌아다닐 정도로서, 남쪽 지방의 누각과 대사(臺?)의 명승은 도적(圖籍)을 상고하여 상상하며 바라던 참이었다. 그런데 안공의 기문을 보고는 황홀하게 내 자신이 함벽루 위에 앉아서 구름을 굽어보고 넓은 공중을 흘겨 보는 듯하니 참으로 장쾌한 느낌이다. 내 어찌 군말을 하랴. 그러나 백성의 이익을 일이키고 백성의 힘을 아끼면서 능히 일을 해낸 것은 당연히 써야겠다. 일찍이 《춘추》를 상고하니 공역(工役)을 일으킨 것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썼으니, 그것은 토공을 삼가고 백성의 힘을 중하게 여긴 것이었다. 쓰는 말을 보아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라일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한 고을의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한 고을에도 백성이 있으며 사직이 있으니, 곧 옛 제후와 같은 제도이다. 거기에 장이 된 자의 한 번 호령의 정당함과 정당하지 아니함과, 한 정교의 아름다움과 나쁨에 은혜와 원망이 따르게 되니 어찌 속일 수 있으랴. 지금 유후가 정사를 하매 백성이 편하여지고 유후가 공역을 하여도 백성이 폐가 없이, 수십 년이나 황폐하였던 곳에 층층의 뛰어난 누각이 하루아침에 등장하고, 아름답게 나타나도 백성은 힘들이지 않았으니, 어찌 쓰지 않으리오. 후일 이 누에 오르는 자가 그 집의 우뚝함과 단청의 화려함을 보고 혹 마음에 의심하기를, ‘이런 공역을 일으킨 자가 능히 백성에게 괴롭히지 않았을까.’ 한다면 나의 기문이 그것이 아님을 증거 하기에 족한 것이다. 유후는 문성(文城)의 훈벌 세가(勳閥世家)로서 이름은 윤(綸)이며, 일찍부터 아름다운 명망이 있었다.” 하였다.
○ 조준(趙俊)의 시에, “말을 몰아 멀리 와서 홀로 누에 오르니, 풍진 세상 십년의 시름이라. 제갈(諸葛)의 계책 없음이 한스러워, 창을 비껴잡고 우거진 모래톱에서 높게 읊조린다.” 하였다. ○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한벽(寒碧)이 서로 엉켜 협구(峽口)가 밝은데, 누에 오르는 가느다란 길 구름속에 비꼈네. 올라 구경할 줄 아는 것은 누구의 안력인가. 모름지기 푸른 벼랑을 쓸고 성명 적으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군이 객과 함게 강루에 오르니, 누 위에 가인(佳人) 막수(莫愁)가 있다. 다시 옥선(玉仙)을 불러 옥피리 불며, 맑은 달 함께 휘어잡고 꽃다운 물가를 굽어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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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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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신증동국여지승람 중의 함벽루(涵碧樓) 내용 잘 보았습니다
서울에 계시는군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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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