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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님 거주지 찾기[쌍계재(雙溪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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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4-12 22:46 조회1,50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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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 이징(李借8은 당대의 달인이었는데 위세를 빌어 인평대군은 그에게 단청화원으로 일하게 하였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일을 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이 집도 후에 허물어졌고 장생전(長生殿)이 들어서게 되었다.
같은 타락산 아래에 신광한(申光漢)의 제택이 있었다. 세칭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로 알려져 있었고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쓰고 새긴 ‘홍천취벽(紅泉翠壁)’의 4자가 있어 유명하였다. 이 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동숭동인데 이 일대에는 남숭문(南尙文) · 강세황(姜世晃) · 남치원(南致元) 제택과 쌍계재가 있었다.

「쌍계동은 반궁(泮宮, 성균관) 위 골짜기에 있는데, 두 개의 샘이 시내(澗)를 이루며, 김자고(金子固)가 시내를 끼고 집을 지어 복숭아 나무를 심고 무릉(武陵)을 모방하였다.」

하였다고 하였다. 강희맹의 부에는

「김자고가 문아(文雅)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호준(豪俊)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놀았다.」

라고 읊었다. 자고(子固)는 참판 김유(金紐)의 아호이다.

<출처;서울육백년사>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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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지금의 동숭동이라----.  성균관 위의 골짜기 두 개의 샘이 시내를 이루고 있는 곳---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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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차 답사때 반궁(泮宮, 성균관) 위 골짜기에 있는데 라는 말에 성균관 부근에서 찾은것 같습니다. 쌍계동은 낙산쪽인데 성균관과 떨어져있어 생각을 못 했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