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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님 거주지 찾기[쌍계재(雙溪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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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5-04-24 09:40 조회1,57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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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육백년사>화원 이징(李借8은 당대의 달인이었는데 위세를 빌어 인평대군은 그에게 단청화원으로 일하게 하였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일을 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이 집도 후에 허물어졌고 장생전(長生殿)이 들어서게 되었다.
같은 타락산 아래에 신광한(申光漢)의 제택이 있었다. 세칭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로 알려져 있었고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쓰고 새긴 ‘홍천취벽(紅泉翠壁)’의 4자가 있어 유명하였다. 이 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동숭동인데 이 일대에는 남숭문(南尙文) · 강세황(姜世晃) · 남치원(南致元) 제택과 쌍계재가 있었다.

쌍계동은 반궁(泮宮, 성균관) 위 골짜기에 있는데, 두 개의 샘이 시내(澗)를 이루며, 김자고(金子固)가 시내를 끼고 집을 지어 복숭아 나무를 심고 무릉(武陵)을 모방하였다.」

하였다고 하였다. 강희맹의 부에는

「김자고가 문아(文雅)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호준(豪俊)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며 놀았다.」

라고 읊었다. 자고(子固)는 참판 김유(金紐)의 아호이다.


<서울육백년사>현 종로구 동숭동129,130번지 대학로 뒷산을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산등성이가 낙타등처럼 굴곡이 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이 산은 그렇게 높지도 않고 골짜기도 별로 깊지 않지만 기암괴석 사이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또 골짜기마다 소나무 · 잣나무 · 전나무 등 상록수가 창음(蒼陰)을 이루어 그 풍치가 수려할 뿐 아니라 그윽하였다.
또 창덕궁, 창경궁 등 대궐이 이 계곡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역대 문신들 중 산수를 즐기는 분들은 으레껏 이 낙산계곡을 중심으로 저택 또는 정자를 짓고 조석으로 여가를 틈타 심신을 수양하며 산책하기를 즐겼다.

<서울육백년사>지금의 종로구 이화동과 동숭동 일대에 걸친 낙산 중복에는 또 쌍계동(雙溪洞)이 있었는데,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한 사이로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려, 일찍부터 1 삼청, 2 인왕, 3 쌍계, 4 백운, 5 청학이라 하여 도성내 5대 명승지의 제3위로 꼽았으며, 시냇물과 폭포를 내려다 보는 협간정(夾澗亭)이 있어 부근 인사들이 즐겨 유상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연려실기술>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서울육백년사>동소문(東小門) 즉 혜화문(惠化門) 자리에서 동쪽으로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도성의 왼쪽 봉우리는 풍수학적으로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이 있다. 마치 낙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타낙산(駝駱山) 또는 낙산이라고도 부른다. 암석으로 된 정상에 오르면 도성 안의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동남 쪽으로 양주 · 광주 일대의 여러 산봉들이 멀고 가깝게 바라다보여 안계(眼界)가 넓어진다. 산 동쪽 즉 도성 안에 해당되는 곳의 산록 · 계곡을 따라서는 쌍계동(雙溪洞) · 이화정동(梨花亭洞) · 백동(栢洞) · 신대동(申垈洞) 등 옛날의 동명이 말해주듯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과 수림의 자연풍경이 좋고, 그 자연풍경을 따라서 옛날부터 시인 묵객(墨客)들이 집을 짓고 정자와 대(臺)를 마련하여 청한(淸閑)한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김뉴선조님의 쌍계재터는 쌍계동에있다.낙산정상에서 동승동129번지 부근 즉 아파트촌 아래에 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쌍계재위치는 답사가 필요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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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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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