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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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3-02 14:15 조회1,992회 댓글0건본문
김자점(金自點)
김자점과 임경업의 만남은 묘한 악연(惡緣)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은 낙안에서 태어났으며(1588∼1651)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낸 것과(1626∼1628)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가 등극하여 이괄의 난(1624)을 평정하는 데도 또한 공헌을 하였다. 1635년 당시 명나라가 쇄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하여 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군신 관계로서 추종하도록 강요를 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청은 12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때 (1635년 병자호란) 김자점은 도원수였고 임경업 장군은 의주 부윤이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운명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감자점은 인조와 후궁 조귀인의 막강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청과의 화친할 것을 간청하였고 임경업 장군은 그동안 명과 지내 왔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명과 내통하게 된다. 결국 임경업 장군은 청군에 포로가 되었고 조선에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형리들에 의하여 장살(杖殺)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뒤 효종이 등극(1649)하자 1651년 조귀인과 짜고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등을 제거하고 승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결국 처형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만남은 악연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그의 집터를 소(沼)를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의 보성군 벌교읍 원등리 못등(옛 낙안)에 있는 못이 바로 김자점의 집터라 한다. 또한 그의 선친 묘 역시 옥산(玉山)아래 있는데 최근까지 큰 소(沼)로 남아 있어 여름철이면 이곳에 사람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여 주민들에 의해 메워지고 지금은 논으로 일구어져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김자점은 낙안 제석산의 정기를 받아 옥산 아래서 태어났으며, 김자점의 부친이 옥사장으로 있었는데 마침 사형을 당할 뻔한 선비 두 명을 구하여 주었다. 그 선비들이 은공을 갚고자 불재 넘어 범들(널박골)에 묘 자리를 잡아 주며 묘를 쓸때 하관 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그러나 김자점의 부친은 궁금하여 하관하는 모양을 몰래 지켜보았다. 이 때 불을 밝히고 있던 한 귀(貴)동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후 김자점이 태어났고 나중에 역모 사건의 주범이 되었다 전한다. 김자점의 역모가 탈로 되어(광양 현으로 귀양 옴) 병사들에 쫓기면서 향리에 돌아와 부인에게 옷을 달라고 하였다.
부인이 옷고름을 달지 않고 주자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였다. 부인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감께선 옷고름 때문에 뒤에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 거라며 옷고름을 달아 주었다. 김자점이 병사들을 피하여 낙안 객사 대들보 위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이 객사 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 때 대들보 사이로 왠 옷고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옷고름 때문에 김자점은 잡히게 되었고 결국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의 집은 소(沼)로 만들었다 전한다.
▣ 김영환 - 반갑습니다. 자점할마버님의 자료를 모아서 집대상하면 훌륭한 자료가 된것입니다.
▣ 김영환 - 오타 수정 = 자료모아서 집대성하면 대단한 자료가 될것입니다.
▣ 김정중 - 태서아재 반갑습니다 잘 읽고 있읍니다^-^
▣ 김윤만 - 태서조카님. 음성군지(1996년) p1460 "김자점은 감곡면 출생이다." (강상문답. 박용구 찬. 한국기담일화집. 을유문화사)가 있읍니다. 자점 선조의 진짜 탄생지는 어딥니까?
▣ 김항용 - 좋은 자료와 글을 올려 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좋은 자료와 글을 올려 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태서종친님께서 김자점 선조의 기록을 총정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성과를 기대합니다.
김자점과 임경업의 만남은 묘한 악연(惡緣)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은 낙안에서 태어났으며(1588∼1651)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낸 것과(1626∼1628)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가 등극하여 이괄의 난(1624)을 평정하는 데도 또한 공헌을 하였다. 1635년 당시 명나라가 쇄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하여 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군신 관계로서 추종하도록 강요를 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로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청은 12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때 (1635년 병자호란) 김자점은 도원수였고 임경업 장군은 의주 부윤이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운명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감자점은 인조와 후궁 조귀인의 막강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청과의 화친할 것을 간청하였고 임경업 장군은 그동안 명과 지내 왔던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명과 내통하게 된다. 결국 임경업 장군은 청군에 포로가 되었고 조선에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형리들에 의하여 장살(杖殺)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뒤 효종이 등극(1649)하자 1651년 조귀인과 짜고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등을 제거하고 승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결국 처형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만남은 악연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자 그의 집터를 소(沼)를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의 보성군 벌교읍 원등리 못등(옛 낙안)에 있는 못이 바로 김자점의 집터라 한다. 또한 그의 선친 묘 역시 옥산(玉山)아래 있는데 최근까지 큰 소(沼)로 남아 있어 여름철이면 이곳에 사람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빈번하여 주민들에 의해 메워지고 지금은 논으로 일구어져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김자점은 낙안 제석산의 정기를 받아 옥산 아래서 태어났으며, 김자점의 부친이 옥사장으로 있었는데 마침 사형을 당할 뻔한 선비 두 명을 구하여 주었다. 그 선비들이 은공을 갚고자 불재 넘어 범들(널박골)에 묘 자리를 잡아 주며 묘를 쓸때 하관 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그러나 김자점의 부친은 궁금하여 하관하는 모양을 몰래 지켜보았다. 이 때 불을 밝히고 있던 한 귀(貴)동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후 김자점이 태어났고 나중에 역모 사건의 주범이 되었다 전한다. 김자점의 역모가 탈로 되어(광양 현으로 귀양 옴) 병사들에 쫓기면서 향리에 돌아와 부인에게 옷을 달라고 하였다.
부인이 옷고름을 달지 않고 주자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였다. 부인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감께선 옷고름 때문에 뒤에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 거라며 옷고름을 달아 주었다. 김자점이 병사들을 피하여 낙안 객사 대들보 위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이 객사 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 때 대들보 사이로 왠 옷고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옷고름 때문에 김자점은 잡히게 되었고 결국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의 집은 소(沼)로 만들었다 전한다.
▣ 김영환 - 반갑습니다. 자점할마버님의 자료를 모아서 집대상하면 훌륭한 자료가 된것입니다.
▣ 김영환 - 오타 수정 = 자료모아서 집대성하면 대단한 자료가 될것입니다.
▣ 김정중 - 태서아재 반갑습니다 잘 읽고 있읍니다^-^
▣ 김윤만 - 태서조카님. 음성군지(1996년) p1460 "김자점은 감곡면 출생이다." (강상문답. 박용구 찬. 한국기담일화집. 을유문화사)가 있읍니다. 자점 선조의 진짜 탄생지는 어딥니까?
▣ 김항용 - 좋은 자료와 글을 올려 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좋은 자료와 글을 올려 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 김주회 - 태서종친님께서 김자점 선조의 기록을 총정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성과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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