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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공(휘 時說)묘비문 소개(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묘비 제막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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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4-26 07:49 조회1,49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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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陽德公(諱 時說) 墓碑文 

 

 

贈 

人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時說이고 字는 汝習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의 上洛郡開國公이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二代祖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와서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監察 諱 孟廉, 典農寺主簿 諱 哲鈞, 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叅判 諱 彦黙은 曾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士流에 이름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成均館儒生들과 從兄 正言公 諱 釴과 더불어 靜菴 趙光祖를 力救하는 上疏에 참여하였다가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父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長水道 察訪에 올랐다가 濟用監 直長을 거쳐 永山과 比安縣監으로 나아갔다가 壬辰倭亂을 만난 후 白衣從軍하시다가 槐山 先塋에 돌아와 歿하셨으며,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母는 贈貞敬夫人 南陽洪氏로 贈左承旨 以坤의 따님으로 生 六男하니 第四男이 公이신데 一五六九年(宣祖二) 十二月 十三日에 出生하셨다.  

 公은 一六二0年(光海十二) 武科에 及第하고 一六二三년(仁祖一)에 繕工監役을 거쳐 一六三一年(仁祖九)에는 陽德縣監에 除授되셨다. 이 때 公은 淸白하고 溫厚한 性品으로 愛民하며 善政에 힘썼는데 이를 기리는 縣民들의 頌德碑가 이곳에 세워졌다. 任期 後에는 槐山에 돌아와 自然과 벗하며 悠悠自適하시다가 一六四五年(仁祖二三) 十一月 十七日에 七十七歲로 歿하시니 槐山邑 水津里 水津山 子坐에 永眠하셨다. 그 후 子 素의 顯達로 嘉善大夫 兵曹叅判에 追贈되셨다.

  配이신 贈貞夫人 求禮孫氏는 司宰監正 祿慶의 따님으로 一五七六年(宣祖九) 一月 三十日 忠北 槐山郡 沙梨面 荷島에서 出生하셨는데 婦德을 크게 갖추시고 治家하니 주위의 칭송이 높으셨다. 一六四五年(仁祖二三) 十一月 十一日에 七十歲로 公보다 六日 먼저 歿하시고 公과 合葬되셨다.

 公은 三男五女를 두셨으니 長男 諱 素는 文科에 오른 후 黃海,忠淸道 觀察使에 이르렀고 後에 子 龜萬의 顯貴로 吏曹叅判에 追贈되었는데 光州金氏 安世의 따님에게 장가드셨다. 二男 諱 繁은 武科하여 벼슬이 安州判官인데 慶州李氏인 의 따님에게 장가드셨으며, 三男 諱 縈은 通德郞인데 曲阜孔氏에게 장가드셨다. 사위로는 權璟 尹廷敏 安弘宇 朴震弼 尹濟民이 있다.

 아아! 公을 追慕하는 情은 至極하지만 文才가 없고 또한 墓碑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公께서 일찍이 원하시던 바가 아니었기에 다만 간략한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叅判公十四代孫 恒鏞 謹撰



追記

嗚呼라, 公께서 歿하신 지 三百六十年이 지나도록 墓前은 不幸하게 墓碑도 없이 지내왔도다. 더욱이 제작하다 中斷한 文官石마저 방치되어 왔으니 宗孫으로서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쓰린 가슴을 달래며 微力을 다하여 간절히 갈망해 왔던 公의 墓碑와 文官石을 세우게 되니 晩時之歎이나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다.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전말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함과 동시에 뚜렷한 民族精神과 崇祖睦族意識을 갖춘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西紀 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叅判公 十三代傍孫 泰國 謹書.

      叅判公 十三代宗孫 泰燮 追記 謹記, 墓碑 謹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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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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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