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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공(휘 繁) 묘비문(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묘비 제막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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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4-26 07:51 조회2,230회 댓글1건

본문

 

3. 安州公(諱 繁) 墓碑文

 通   訓

 夫  

 判  官

 

 

人 

氏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繁이요 字는 知盛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 上洛郡開國公이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三代祖이시다. 그 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司憲府監察 諱 孟廉, 典農寺主簿 諱 哲鈞, 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을 지나 贈 吏曹叅判 諱 彦黙은 高祖요, 成均進士로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曾祖이시다. 領相公은 道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己卯士禍 때 禍를 피하여 槐山으로 은둔하시어 세칭 五甲의 名賢을 키우셨고, 子 文肅公 諱 悌甲의 推恩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셨다. 祖이신 贈 左贊成 諱 仁甲은 司馬試에 入格한 後 比安縣監을 역임하시고 子 時讓의 推恩으로 左贊成에 追贈되셨다. 父이신 諱 時說은 武科하여 繕工監役을 거쳐 陽德縣監을 지내시고 子인 諱 素의 推恩으로 兵曹參判에 追贈되셨다.

 母는 贈貞夫人 求禮孫氏로 司宰監正 祿慶의 따님으로 生 三男 五女하니 第二男이 公이신데 一六0四年(宣祖三七) 十二月 十三日에 出生하셨다.  

 公은 武科에 及第하고 지혜와 용기를 고루 갖췄기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장사(壯士)로 추천되시어 선전관(宣傳官) 겸 세마(洗馬)를 제수 받으셨다. 병자호란 후엔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청나라 심양으로 모시고 가서 8년간의 볼모기간 온 힘을 다하여 충심으로 모셨다. 귀국해서는 안주판관(安州判官)을 제수 받으셨으나 부임하지 않자 제천으로 귀양을 가셨다. 그 후 효종께서 <南山歌>(현재 不傳)란 시를 지어 주어 애석하고 안타까운 이별의 마음을 전했다. 방환 후에 제천에서 노년을 보내시다가 一六七一년(顯宗12) 別世하셨는데 壽 68세이며 묘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이다. 

 配이신 淑人 慶州李氏는 무과하신 의 따님으로 判決事 獻忱의 曾孫이신데 婦德을 크게 갖추고 治家하시니 주위의 칭송이 높으셨다.

 公은 六男 二女를 두셨으니 長男 諱 學萬은 寶城郡守인데 從叔인 糸各(휘 彦弘의 玄孫)에게 養子가셨고, 二男 義萬은 武科하여 京畿道防禦使이시며, 그 다음으로 重萬, 直萬, 後萬, 就萬이 있으며, 李彭壽, 梁弘績은 사위이다.

 아아! 公을 追慕하는 情은 至極하지만 文才가 없고 또한 墓碑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公께서 일찍이 원하시던 바가 아니셨기에 다만 간략한 世系와 子孫만을 적고 文辭는 비우도다.


檀紀 四三三八年(二00五年) 四月二十四日  判官公 十三代傍孫 恒鏞 謹撰


追記

嗚呼라, 公께서 歿하신 지 三百六十年이 지나도록 墓前은 不幸하게 墓碑도 없이 지내왔으니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쓰린 가슴을 달래며 微力을 다하여 간절히 갈망해 왔던 公의 墓碑와 묘역을 정비하닌 晩時之歎이나 不孝의 痛恨을 덜게 됐음에 感泣할 따름이다. 벅찬 감격을 누르고 그 顚末을 기록하여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들이 永久히 傳授되고 本 墓域이 子孫萬代 保存되며, 後孫들은 크게 繁盛함과 동시에 뚜렷한 民族意識과 崇祖睦族精神을 갖춘 民族의 棟樑으로 長成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八年(西紀 二00五年). 四月. 二十四日. 

  

     判官公 十代孫 相錫 追記 謹記. 墓碑 謹立

     判官公 十二代傍孫 泰國 謹書.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영
작성일

  정성어린 묘비문 잘 보았습니다.  상석대부님의 숭조돈목의 정신을 진작 알았지만 추기를 보니 더욱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