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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온공 종택 발굴 참여 보고 연재모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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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5-06 15:29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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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렸던 참여보고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제목 :   문온공 종택 발굴 현장 보고  
 작성자 :  솔내영환 
     조회수 : 105     2004-12-20 16:54:57  

일요일 새벽  심한 갈증에 눈을 떴다.

아직 어제 있던 안사연 송년회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하나

무언가 가슴에 벅차 오르는 뭉클함이 있기에 몽롱한 정신에서도 잠을 깨기 위해

세수를 하고 보내 새벽 5시이다.

이렇게 일찍 깬 것이 갈증만이 아닌 것이 따로 있기에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제 망년회 자리에서 받은 다급한 전화 한통, 그것은 문온공 종손인 광도씨였다.


“대부님 계획이 바꾸어서 종택 발굴이 내일로 거의 마무리 되어 조사담당 교수가 내일

내려 온다고 하니 대부님께서 꼭 참석하여 주셔야 겠는데요,  어쩌면 좋지요? 

내일 아침 모시러 가면 안 되될까요?“


나는 전화 다시 해 주마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지나야 끝날 거라며,, 지금은  겉흙을 걷어내고 있으니 다음 주중에

내려와 달라고 어제 종손에게서 연락을 받았기에 내일(일요일)점심때  초등학교 동창들과

동창회 겸 망년회를 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동창망년회가 문제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일 포천으로 내려가기로 결심을 하고

종손에게로 전화를 했다. 내일 내려 가겠노라고...


아! 그랬지, 오늘 아침 포천에 내려 가야하지...

종택의 초석 발굴.  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숙원이었다.

듬성듬성 묻혀있는 사방 30Cm가 넘는 네모 반듯한 -흡사 왕궁터의 그것같은- 주춧돌을

보면서, 이마도 누각 기둥의 주춛돌이었을  높이 1M쯤 되는 큰키주춧돌을 금수정 갈때마다

돌아보면서, 언젠가는 이 종택을 발굴하여

원형을 복원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기룰 십수년...

 

올봄 포천시청으로부터 종택터의 기초조사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

포천시청에서는 기초발굴조사에 4,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하여 조사용역을 공개입찰을

했으나 유찰되어 또 얼마나 속상했는지...

도대체 그런 조사사업비에 사천만원을 책정한 공무원만 속으로 미워하면서 새겼는데..

가난한 포천시로서는 그나마 어렵게 만든 예산인데

올해를 넘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 조렸던 나날이었다.

  포천시문화담당공무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단국대학 매장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작업을 맡기로 했단다.   뛸듯이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아침일찍 조반을 챙겨 먹고 집을 출발했다.  도중에 태우씨와 발용씨가 동승하여 우리 셋은

설레는 마음으로 포천을 향해 달렸다.  엊저녁 모임에서 나는 이 종택터 얘기를 했고,

모여있던 모든 분들이 동참하고 싶어 했지만 년말 계획이 잡혀서 결국 두분만

동참하게 된 것이다.

 

포천읍을 지나 얼마쯤 달렸을때

“어! 대부님! 조경선생묘가 여기 있네요.  방금 표석을 지나왔네요”

 

발용씨의 이런 얘기도 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조경선생에 대해 서로

많은 얘기를 했을텐데....  조견선생의 배위도 우리 우리 집안이고 한양조씨는 포천에

세거하면서 우리 문온공파와는 많은 혼맥이 이어저 있는 집안이다.  지금 현재의 종부(광도-태항의 포천돌림자는 光--씨 어머니)도 한양조씨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종택터 초석만 머리에 있을뿐, 건성으로 흘려버렸다.   발용씨가 조금은 무안하거나 서운했을 런지도 모르겠다.


삼팔선휴게소를 지나 전곡쪽으로 좌회전하여 잠시 숨을 돌리려고 가까운 가게에 들려

종부께 드릴 부드러운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다시 출발하였다.

10여분 달려 멀리 금수정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문온공 단소가 모셔저 있는

금수정으로 좌회전하면서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금수정 입구 밭에 새로 지은 종부가 계시는 따님댁을 그냥 지나처서(들려서 종부께 인사드린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곧바로 금수정으로 들어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종택터의 적나라한 초석들..  

 이 순간 왜 황룡사지를 연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발용씨는 먼저 카메라부터 들이대고--역시 못말리는 매니어---

 

“사진 촬영은 문화재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데요...”

그림그리는 캔파스 같을 것에 모눈종이를 대고 그림를 그리는 연구원이 촬영을 제지하며 출입을 막았다..

문화재관리법에 의하면 발굴중인 현장은 외지인이 출입할 수도 없고 촬영할 수도 없단다.

어기면  처벌 받는다나... 

이말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발용씨와 우리는 순간 돌부처가 된 듯했다.

 

계속...

 

 

 

제목 :   문온공 종택 발굴 참여기 (2)  
 작성자 :  솔내영환 

     조회수 : 115     2004-12-22 11:54:57  


"저 문온공파종회에서 왔습니다. “  하면서 명함을 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박교수께서는 않오셨냐고 하고 오늘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서 말을 풀어 나갔다.

그제서야 경계의 눈빛이 좀 풀리는 듯 했다.

사진은 찍지 않을것이며,  발굴현장에 지장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둘러보겠노라고하여

승낙을 받았다.


솟을대문이 있었던 주춧돌을 보면 솟을대문 좌우에 작은 방이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또 있다.  음수재 솟을대문과 좌우 곁방을 연상하면 딱 맞을 듯 싶다.

이 대문은 금수정쪽을 향해서 나 있다.

지금은 뒤쪽(종택터에서 보면)으로 입구가 나 있지만 옛날에은 금수정 왼쪽 현재의 문온공 단소가 모셔져 있는 아래쪽이 입구였을 것을 짐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금수정쪽은 절벽이 10여미터이니 불가능 할 것이고,,  전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이어졌을 것이니 금수정 밑 절벽을 돌아서 종택으로 올라 왔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암각문이 있으니, 커다란 바위에 洞天石門이라고 새긴 단정한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다.  成海應의 [東國名山記]에 이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를 통해서 종택이나 금수정으로 올라갔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바위뒷쪽에는 또 암각문이 있는데 이 글씨는 瀾石이라고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글씨는 중국황제의 사신 허국이 쓴 것이며 원래 廻瀾石이란 글자인데 회자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廻자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돌을 쌓고 그 위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과 중문옆으로 곳간인 듯한 방이 있다.

중문초석에는 문지방을 걸었음직한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다.

안채는 디귿자형의 내실인데 앞마당이 조금은  좁은 듯하고 안채의 내실이 규모에 비하여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 곳은 육이오 때 종택이 불난후 임시로 종가를 지었으므로  훼손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안채 옆으로 주춧돌이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으로 다른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도 몇 개의 주춧돌이 빠져 있으나 그 규모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발굴현장 근처에는 많은 주춧돌이 모아져 있으니 틀림이 없으리라

  안채옆 건물을 별채라고 우선 이름 짓고 이 별채 앞쪽으로 또 커다란 주춧돌이 있으니

아마도 사랑채였을 것 같다.  이곳은 십여칸의 건물과 이어져서 높은 누각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높이 1.5미터의 높은 초석이 세 개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개는 부러져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 주춧돌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누각에서 앞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금수정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고 금수정앞으로는 영평천이 휘돌아 나가며 그 냇물에는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있듯이 많은 바위들이 물위에 솟아 있다. 이곳을 연화암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또한 많은 암각문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瓊島(또는 浮島)라고 짐작되는  80 x 120센치미터의 대형 초서가 있고, 그 옆 바위에는 초서로 된 한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봉래집에 의하면 贈琴翁詩 라고 되어 있으며 이시는 많은 문인들 사이에 알려진 자료이다. [東國輿地誌] 및 [東洲集(이민구)]에도 또한 인용하고 있다.  봉래집에는  증금옹시를 적고 그 말미에 琴翁은 금수정주인이다 라고 적혀 있어 당시 금수정이 안동김씨의 소유였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琴翁은 척若齋선조의 5대손 金胤福(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복)할아버님의 호이기 때문이다.

(금수정옆 바위 위에는 금옹할아버님이 거문고를 연주하셨다는 琴臺가 있으며 이곳에도 琴臺라고 단정한 해서가 새겨져 있다. )

증금옹시 초서 옆에는 큰 웅덩이 같은 바위가 있는데 마치 술동이 같다하여 尊巖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 모든 글씨가 봉래양사언선생의 친필암각문이다.

이 연화암이 있는 영평천 건너 오른쪽으로는 작으마한 동산이 있으니 지금 할미산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종가 소유이다. 

금수정과 할미산 가운데를 영평천 넘어 아득한 벌판이 이어져있으니  그 정경이야말로 이루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고려때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 넘어를 바로보며 시를 짓다가 댓구가 생각안나 울고 내려왔다는 시가 연상되는 그런 곳이다.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 - 긴 성벽 한쪽으로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산들이 점점점"


 



계속




김윤만 종택의 규모가 드러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던 듯 싶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2004-12-22 삭제

김우회 저도 계속.
저도 계속 상당한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집필에 고생 많습니다.
2004-12-22 삭제

김영윤 계속되는 종택 발굴 현장 답사기 기대됩니다 2004-12-22 삭제

김항용 주춧돌만 있는 발굴중의 종택만 보았는데 해설을 겸하니 화려했던 옛날이 연상됩니다. 2004-12-22 삭제

김정중 이제 폐허의 터위에 아름답게 복원될 그날의 종가 모습을 그리며 모두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기록을 남겨 두셨으면......
2004-12-22 삭제

김윤식 대부님, 반가운 소식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종택 복원이 잘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빕니다.

 

 

 

제목 :   문온공 종택 발굴 현장 참여보고(3)  
 작성자 :  솔내영환 
     조회수 : 123     2004-12-27 12:56:04  

 정신없이 종택주춧돌을 한시간여 살펴보고나니 한대의 렉스턴짚차가 들어온다.,

작업중이던 연구원들과 일하시는 분들이 저분이 박교수님이라고 한다.


박교수는 우선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우리(나, 광도, 태우. 발용)가 있는 곳으로 왔다.  박교수와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명함에은 이렇게 씌여 있었다.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소장.

문화재위원회 제1전문위원. 조계종성보보존위원회 전문위원. 교육학박사 박 경식


“안동김씨 종택을 발굴하게 된 데 대해 개인적으로는 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종택 발굴을 하면서 이곳의 지형이 선사시대의 주거지 였을 가능성이 매우 많아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좀 더 많은 곳을 발굴하면 선사시대의 흔적을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면 종택발굴사업에는 많은 애로가 있을 것이어서 가슴 조리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종택의 규모가 99칸이라고 전해오나 그렇게는 볼 수 없고요.

생각보다 안채의 규모가 작아보여서 지금 안채의 동쪽 부분을 더 발굴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안채보다는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구요.  또 종택에 딸린 하인들이 살았을 부속건물들이 발견 되지 않고 있네요.  물론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현재 발굴지역을 넓혀가지 못한 상태여서 이에 대해서는 좀 미흡합니다.  그리고 출토 유물들도 보잘것 없는 것도 이상합니다.  현재로서는 조선후기 이후의 유물이 조금 발굴 된 상태입니다.  생활용품의 유물도 그리 많지 않구요.  종손부의 말씀을 들어보면 육이오때 종택이 불타고 난 후 들어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구들장까지 뜯어 갔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때 많이 없어 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랑채의 규모는 상상보다 대단함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각이 있었을 기둥 네 개중 한개는 부러져 있지만 그 웅장함이 놀랠만합니다.“



문온공부터 현종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선조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나는 부족하지만.  문온공(척약재)할아버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구전되어 오기를 금수정의 지으셨다는 성천도호부사공(휘 김명리)의 내력에서부터, 고려사를 편찬하신 직제학공(휘 김맹헌)께서 노후 이곳에 은퇴하시어 말년을 보내셨으며, 지금도 근처 종산에 영면하고 계시며 이후 참의공(휘 김자양), 청도군수공(휘 김예생), 가선대부 경상좌병사공(휘 김윤종), 공주판관공(휘 김윤선),  금수정의 기록으로는 최초로 나오시는 금옹공(휘 김윤복), 이후 별제공(김진기), 의금부도사공(김대섭), 철원부사공(김확), 그리고 부사공의 매부이신 지봉이수광. 교산 허균과 이곳 금수정에 얽인 인물들,봉래 양사언,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번암 채제공, 농암 김창협, 화서 이항로. 면암 최익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금수정주변이 널려있는 암각문에 대해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후 이 종택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결과, 이 건물을 처음지은 것은 정확할 기록이 없지만 임진란 이후 조선 후기에 별서(別墅)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후 조선 말기 이후는 이곳에서 종손가가 계속 살아 오셨으리라.  이런 짐작을 하는 것이 건물의 구조상 안채가 빈약하고 별채와 사랑채의 규모가 대단한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別墅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당시로서는 제2의 종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교수님 주춧돌 같은 것이 나옵니다.”

이때 발굴중이던 인부들이 박교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 아직 부족해 보였던 안채의 다른 부분이 발견되나 보다 하고 흥분이 되었다.

박교수를 따라 나도 현장에로 가보니 가지런히 쌓은 돌무더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박교수는 조심스럽게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주변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호미로 파고 빗자루로 그곳을 쓸어내기를 여러번하니 어느정도 돌더미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쯤 되는 규모로 돌을 가지런히 쌓이 놓고 그 위를 넓은 돌로 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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