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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筆蹟-조선05 (金壽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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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4 02:36 조회1,7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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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筆蹟-조선05 (金壽童2)







김수동 선조의 書畵 기록이 실려있는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와

김수동 선조께서 碑를 書하신 한계순 이라는 분의 행적을 찾아 보았습니다.











◎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



구분 : 필사본

저자 : 이긍익

시대 : 조선 후기(1911년 간행)



필사본. 59권 42책.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원집(原集) 33권, 속집(續集) 7권, 별집(別集) 19권 등 3편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원집에 태조 이래 현종까지의 283년간(1392∼1674) 각 왕대의 주요한 사건을 사의(私意)를 가하지 않고,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서 적어 나갔고,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 ·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속집은 숙종조(肅宗朝) 47년간(1674∼1720)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적었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역대관직(歷代官職)을 비롯하여 각종 전례(典禮) ·문예(文藝) ·천문 ·지리 ·변위(邊圍) ·역대 고전 등 항목별로 그 연혁을 수록하고 역시 인용한 책 이름을 부기하였다.



저자가 생존시부터 원집과 별집의 전사본(轉寫本)이 널리 퍼져 정본(正本)이 없으므로, 저자는 본문에 여백을 두고 그때그때 새로운 사실을 덧붙여 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조선시대 사서(史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저작인 이 저서는 객관적인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기록되었다는 점과 사견(私見)이 조금도 가해지지 않은 명석(明晳)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공정한 필치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가히 역사서의 백미편(白眉篇)이라 할 수 있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도합 34권으로, 1913년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도합 59권으로 각각 간행하였고, 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의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제1집으로 도합 12권으로 발행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



조선 태조에서 숙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들의 전기집(傳記集).



구분 : 필사본

저자 : 미상

시대 : 조선시대

소장 : 규장각



필사본. 원고(原考) 66권, 속고(續考) 8권 등 총 74권. 작자·연대 미상. 규장각 도서. 제4권과 제7권이 결본(缺本)으로 되어 있다. 수록인물수는 결본으로 빠진 수를 빼고도 2,065명이나 된다.



주요 항목과 수록 인물수는 원고에 상신(相臣) 54명, 국척(國戚) 74명, 유학(儒學) 36명, 문관(文官) 91명, 무변(武弁) 40명, 경재(卿宰) 286명, 명류(名流) 318명 등 22항목 1,895명을 싣고, 여기에서 빠진 부분을 속고에 17항목 170명을 추가로 보충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한계순(韓繼純)



1431(세종 13)∼1486(성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옹(粹翁).



개국공신 상경(尙敬)의 손자로, 함길도관찰출척사 혜(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처음에는 문음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였다가 세자익위사 우세마가 되고,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사헌부감찰·종부시주부를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10) 공조정랑으로 승진하고, 다음해 사재감첨정이 되었다.



1467년 통정대부로서 동부승지에 특진되었고, 다음해 예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에 전임되었다.

이해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평군(淸平君)에 봉하여졌다.



1469년(예종 1) 우승지로 전임되고, 1470년(성종 1) 좌승지로 전임되었다. 다음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공조판서에 승진하고,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오위도총관을 겸하였다.



1472년 청평군으로서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고, 다음해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주(銓注)를 공평히 하였다.



14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으며, 1479년 지중추부사로서 다시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창경궁(昌慶宮)을 영조할 때 선공제조(繕工提調)가 되어 공사를 관장하였으며, 그 공로로 1484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사람됨이 온량무해(溫良無害)하고 평소 거동이 예의있고 단정하였으며, 일을 신중히 처리하고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였다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신(史臣)은 재식(才識)이 없으면서 계미(繼美)·계희(繼禧)두 형이 세조의 총애를 입은 것에 힘입어 승지에 발탁되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평하였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韓永愚〉











◎ 이긍익(李肯翊)



1736(영조 12)∼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 서울출생. 광사(匡師)의 아들이다.



‘연려실’이란 그의 서실(書室)이름으로,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것인데, 그의 아버지가 서실벽에 손수 휘호해준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는데, 경종대의 신임무옥사건과 1728년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하였으며, 그의 나이 20세 때 아버지 광사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 유배를 당하여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역경과 빈곤 속에서 벼슬을 단념한 채 일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최립(崔#입01) 등 서인계열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인 및 훈구세력·영남학파와는 사상적으로 별 관련이 없었다. 그는 특히 양명학(陽明學)계열에 속하였는데, 이는 양명학을 그 집안의 가학(家學)으로서 내수(內修)해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에서 비롯된 양명학은 정제두(鄭齊斗)를 통하여 그에게 전하여졌다. 실제로 《계곡만필 鷄谷漫筆》·《학곡집 鶴谷集》을 통하여 장유를 접하였고, 《지천집 遲川集》에서 최명길과 대화하였으며, 정제두를 사숙하였다.



한편, 아버지 광사는 정제두의 학을 접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이사하였으며,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기까지 하였다. 강화도에서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양명학파를 ‘강화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학은 광사 이후 충익(忠翊)·면백(勉伯)·시원(是遠)·상학(象學)·건창(建昌)의 5대를 거치면서 이어져왔다.



그의 역사의식은 《연려실기술》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그는 고증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술이부작(述而不作)’·‘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으로 남인·북인·노론·소론 및 유명·무명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하였으며, 거의 국내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이 《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자료를 통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것과 대조된다. 우리의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에서 생명으로 다룬 것은 객관성·공정성·체계성·계기성 그리고 현실성이었다. 《연려실기술》의 찬술은 이러한 그의 사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역사서술에서 선현을 칭할 때 본명을 직서(直書)하지 않고 호나 자·시호 등으로 표시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역사서술의 공정성을 위해서도 성명의 직서를 강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실학을 연구한 고증학파 학자로서 조선사연구의 선구자이다.



저서로는 《연려실기술》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燃藜室記述의 分析的 考察―李肯翊의 歷史意識을 中心으로―(李存熙, 韓國學報 24, 一志社, 1981), 燃藜室記述의 綜合的 檢討(李存熙外, 震檀學報 61, 1986). 〈李存熙〉

















▣ 김재원 - 연일 좋은 자료 찾아서 올려주신데 감사 드립니다.

▣ 김태서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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