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06 (金希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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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4 04:55 조회1,922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06 (金希壽1)
서운관정공파이신 김희수(金希壽) 선조는 1475(성종 6)∼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이고,
할아버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고, 아들 김로, 손자 김홍도와 더불어 대대로 서예의 명가를 이루었고, 또한 사위 노우명, 외손자 노직 또한 글씨를 잘 써서 일가를 이룬 분입니다.
김희수 선조께서는 碑文을 많이 써서
[근역서화징]에 16점
[신고 한국서예사]에 20점이 소개되어 있고
필적을 모간한 것이 [초로관주]에 실려있다 하고
필적으로 [김희수 김로 2가서법] 1책이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1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점이 소개되어 있고,
[비문으로본 양주의역사]에 2점 (박건 신도비 篆書, 성희안 신도비 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1996년에 서운관정공파종회에서 1996년 발간한 [국역 석릉세보] 에 보면
(서운관정공파) 金圭台 종친께서 識한 기록중에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侍講院印이 찍힌 二家書法인 [戒酒文]과 가람 古754-D13의 [大東書法]에
김희수, 김로 두분 조상의 문장과 필적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각각 전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도
[槿域書彙]에
두분 조상의 글과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고
그리고 [한국미술전집11 서예]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귀중본인 [金石淸玩]에 실린
悠然齋공 (휘希壽)의 시문(필적)이 복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유연재공이 쓴 [簡易 ? ?方序]가 비도서 자료실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제되어 있다.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 75. 金希壽 (김희수)
자는 夢禎(몽정). 호는 悠然齋(유연재), 본관은 안동, 세조10년을유 (1465)생, 중종2년정묘 (1507)에 문과하고 벼슬은 대사헌
해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대동운부군옥)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해동호보)
글씨를 잘 썼다. (만성보)
양주의 영의정 申用漑(신용개)의 비
영춘군 李仁(이인)의 비
우윤 洪深(홈심)의 비
해평의 鄭眉壽(정미수)의 비
풍산의 沈膺(심응)의 비
광주의 정랑 成景溫(성경온)의 묘갈
연창의 金勘(김감)의 비
판서 李蓀(이손)의 비
雲山君(운산군)의 비
과천의 烏川君(오천군)의 비
양천의 원정 梁淑(양숙)의 비
용인의 대사간 李禮堅(이예견)의 비
통진의 남원 梁誠之(양성지)의 비
회덕의 成東汝(성동여)의 비
진천의 삭녕 梁治(양치)의 비 (★양치는 김희수의 처부, 즉 장인)
익산의 蘇自坡(소자파)의 비를 썼다. (해동금석총목)
이손의 비 행서는 살지고 익숙하다. (동국금석평)
필적모간 (초로관주)
⊙ 93. 盧友明(노우명)
자는 君亮(군량), 호는 信古堂(신고당), 본관은 풍천, 유연재 김희수의 사위, 성종2년신묘 (1471)생, 연산군4년무오 (1498)에 진사합격, 벼슬은 참봉
해서법이 힘차고 굳세었다. (영남인물고)
⊙ 220. 盧稷(노직)
자는 士馨(사형), 본관은 교하, 신고당 노우명의 아들이며 유연재 김희수의 외손, 인종원년을사 (1545)생, 선조17년갑신 (1584)에 문과급제, 벼슬은 판서
글씨를 잘 썼으니 전서와 예서가 모두 뛰어났다. (국조문과방목)
정경세가 지은 묘표에 이르기를
"본래 재주가 많고 특히 글씨를 잘 썼으니 전서와 예서에 모두 뛰어났다. 아들 盧竝俊(노병준) 역시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진사에 합격하여 동궁관으로 31세에 죽었다." (국조인물고)
▣ 신고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 제8절 제2기 최후를 빛낸 명필 金希壽
이조 서예사 제2기 (중종대까지)의 최후를 장식한 대가는 金希壽이었다. 그가 남긴 대량의 중요한 碑書가 또한 그의 서예의 질적 우수성의 증거품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김희수 이하 제2기 말의 書家들을 살펴 보기로 한다.
⊙ 金希壽의 碑書群
김희수 (1495-1527)는 본관이 안동, 관찰사 金自行의 손자, 金叔演의 아들로서 자가 夢禎(몽정), 호가 悠然齋(유연재).
중종2년 (1507)에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고 지평, 장령을 역임하였다. 1523년에 도승지에 승진, 대사헌에 이르렀다.
1527년에 관찰사로서 과로 순직하였는데 사후에 동래의 낙안서원에 제향되었다.
글씨는 각체를 다 잘 썼으나 楷書체를 가장 잘 썼다.
[중종실록] 권2에 "중종이 2년정월16일에 素屛을 홍문관에서 箴辭(잠사)를 지어서 쓰도록 하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최숙생, 성몽정이 君德과 治道에 관한 글의 9箴을 짓고 김희수가 書進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금석] [서화징]에 기록된 그의 碑書만도 다음의 20碑에 달하여 그가 당대에 얼마나 인기 書家였던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양주의 영상 김수동 비 (★익원공파 김수동)
영상 성희안 비
우상 신용개 비
이판 양성지 비
찬성 정미수 비
찬성 김감 비
찬성 이손 비
대헌 권민수 갈
지추 이병정 갈
영춘군 인 비
우윤 홍심 비
심 풍산 응 비
정랑 성경온 비
운산군 비
오천군 비
양 원정 숙 비
용인의 이 대간 예견 비
회덕의 성동여 비
진천의 양 삭령 치 비 (★양치는 김희수의 처부, 즉 장인)
익산의 소자파 비
그밖의 많은 碑碣을 썼다.
[동국금석평]에 "이손비행서 비숙"이라고 평하였다.
필적으로 [김희수 김로 2가서법] 1책이 있다.
⊙ 盧友明의 왕희지체
노우명 (1471-1541)은 본관이 풍천,
< 행적 생략 >
그는 음운학에 造詣(조예)가 깊었고 楷書(해서)에 精妙(정묘)하였다. 후세(숙종27)에 함양의 도곡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장인이 명필 金希壽였으므로 서예는 그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비문으로본 양주의역사 1권 (1998, 양주문화원)
○ 박건 신도비 (장흥면 일영리) (★김희수의 외손자인 노직의 처부는 박간, 즉 사위 노우명의 사돈)
-진천군 진주 강혼이 글을 짓고,
-예조판서 고령 신용개가 쓰고,
-대사헌 안동 김희수가 篆을 쓰디,
○ 성희안 신도비 (장흥면 일영리)
-신용개는 글을 짓고
-조산대부 행의정부검상 겸춘추관기주관 승문원교리 김희수는 글을 쓰다
▣ 국역 석릉세보 (1996,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 金圭台 識 -
② 휘希壽 및 휘魯의 기록과 필적
[지봉유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다 글씨를 잘 쓴 사람으로는 金希壽, 金魯를 들 수 있다" 하였는데
侍講院印이 찍힌 二家書法인 [戒酒文]과
가람 古754-D13의 [大東書法]에
김희수, 김로 두분 조상의 문장과 필적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각각 전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도 [槿域書彙]에
두분 조상의 글과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미술전집11 서예]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귀중본인 [金石淸玩]에 실린
悠然齋공 (휘希壽)의 시문(필적)이 복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유연재공이 쓴 [簡易 ? ?方序]가 비도서 자료실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제되어 있다.
특히 [簡易 ? ?方序]는 석릉세적에 내용문이 없고 東皐공 (휘魯)의 글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防疫을 위한 전염병 관리 지침서의 序文]으로서 훈민정음으로도 쓰여져 있다.
▣ 디지털 한국학 홈페이지
⊙ 김희수(金希壽){1}
1475(성종 6)∼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할아버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1507년(중종 2)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검열 권벌(權#벌02), 봉교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에 대해 논계(論啓)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또, 왕은 천륜에 따라 덕치정치를 행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측근의 신하들이 필요하고 간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1509년에 정자·박사가 되고, 이어 지평·검상이 되었다.
1514년 장령을 지냈으며, 1517년 집의·참찬관 등을 거쳐 1520년 우부승지,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1524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과 경상도감사로 나갔다.
그때 그곳의 사송(詞訟)이 적체되었다 하여 중앙에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52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로는 〈계주문 戒酒文〉·〈영상김수동비 領相金壽童碑〉·〈영상성희안비 領相成希顔碑〉등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李存熙〉
<도> 김희수 필적
⊙ 문과방목
김희수(金希壽) 중종2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희수(金希壽)의 성명(姓名)
김희수(金希壽) 중종20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로(金魯)의 부(父)
김희수(金希壽) 명종3년 별시에 입격한 김홍도(金弘度)의 조부(祖父)
김희수(金希壽) 선조2년 알성시에 입격한 노직(盧稙)의 외조부(外祖父)
김희수(金希壽) 선조6년 알성시에 입격한 김수(金<수0x6759>)의 증조부(曾祖父)
김희수(金希壽) 선조9년 별시에 입격한 김첨(金瞻)의 증조부(曾祖父)
김희수(金希壽) 선조17년 별시에 입격한 노직(盧稷)의 외조부(外祖父)
김희수(金希壽) More Info.
중종(中宗)2년(1507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3(丙科2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75년, 을미
자(字) 몽정(夢禎)
호(號) 유연(悠然)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숙연(金叔演)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자행(金自行)
증조부(曾祖父) 김질(金<질0x73DE>)
외조부(外祖父) 김증(金增)
처부(妻父) 양치(梁治)
자(子) 김노(金魯)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92(임자)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참봉(參奉)
품계(品階)
관직(官職) 대사헌&(大司憲&)
▣ 김재원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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