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07 (金希壽김희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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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5 03:35 조회2,004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07 (金希壽김희수2)
金希壽 [1475(성종 6)∼1527(중종 22)] 선조의 書畵 기록이 실려있는
-대동서법
-대동운부군옥 (권문해)
-근역서휘 (오세창)
-금석청완 (조속) 관련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 대동서법 大東書法 古 754.3-D13
- 해당 사이트 링크 : http://kyujanggak.snu.ac.kr/BA/SGP-129-015837.htm
편자미상(李志定 ?), 연기미상.
1책(42장), 탁본, 34.7 x 23.5cm.
우리나라 역대 名家의 글씨를 木刻, 탁본하여 만든 法帖이다. 李志定이 엮은 것으로 전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편찬연대는 미상이다.
본 소장본은 표지에 "戊戌 秋7月 18日 加衣"라는 문구가 있어 帖裝本임을 알 수 있다. 목록 1장과 본문 4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 수록된 탁본 자체는 원본이 아니라 後刷한 것인 듯하다.
신라 金生부터 17세기 전기까지 모두 51인의 글씨가 수록되어 있다. 金生, 崔致遠, 柳公權, 李 , 李齊賢의 차례로 필적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 49인째에 본서의 편자라고 전하는 李聽蟬(志定)의 글씨가 실려 있다. 서체는 해서.행서.초서이며, 내용은 대부분 詩文類 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古今歷代法帖≫이나 ≪海東歷代名家筆譜≫ 등의 목각 법첩에 비해 刻法이 양호하며 글씨의 선택도 대체로 정선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刻帖으로 우리나라 역대 명가의 필적을 살필 수 있는 서예사 자료이다. (김영심)
⊙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
조선 중기의 한학자인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편저의 백과서(百科書).
구분 : 목판본
저자 : 권문해
시대 : 조선
목판본. 20권 20책. 편찬 직후 선조에게 바쳐 나라에서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중단되고, 1798년(정조 22)에 저자의 7대손인 진락(進洛)이 정범조(丁範祖)의 서문을 받아 초판을 펴냈다.
단군 이래 선조까지의 사실(史實) ·인물 ·문학 ·예술 ·지리 ·국명 ·성씨 ·산명(山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동물명 등을 총망라하여 원(元)나라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예에 따라 운자(韻字)의 차례로 배열 ·서술하였다.
참고한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한국 서적 176종,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중국 서적 15종으로 모두 191종이나 된다. 개인의 저작으로는 양과 질에서 방대하고 뛰어나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을 아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초판의 판목(板木)이 저자의 후손 종가(宗家:예천군 용문면)에 현존하며, 최남선(崔南善)의 광문회(光文會)에서 1913년에 9권까지 간행하였다가 중단되었으나, 1957년에 정양사(正陽社)에서 영인(影印)하여 색인을 덧붙여 간행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권문해(權文海)
1534(중종 29)∼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祉)이다.
1560년(명종 15)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의 고금문적(古今文籍)을 널리 참고하여 단군시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한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과 문집으로 《초간집》이 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草澗集, 新國語學史(金敏洙, 一潮閣, 1980). 〈崔範勳〉
▣ 근역서휘 槿域書彙
오세창(吳世昌)이 엮은 한국 서화가의 서첩(書帖).
구분 : 첩장본·서첩
저자 : 오세창
소장 : 서울대학교 박물관
3책. 첩장본(帖裝本).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실려 있는 서첩들은 주로 고려 말기에서 대한제국 말기까지 서화가들의 필적으로서 국왕을 비롯하여 중인·천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필적 가운데에는 서명이 없는 것도 있다.
오세창은 이 서첩 이외에도 《근묵(槿墨)》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도 엮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근묵 槿墨
고려 말에서 한말까지의 여러 명사의 시와 서간을 모아 엮은 서첩.
구분 : 서첩
저자 : 오세창(吳世昌)
시대 : 1981년
소장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3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세창(吳世昌) 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81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상·하 2권으로 영인,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이용(李瑢:安平大君)·김시습(金時習)·민영환(閔泳煥)·이도영(李道榮)·안중식(安中植) 등 1,306인의 친필로 된 시와 서간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
오세창(吳世昌)이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의 사전.
구분 : 활자본
저자 : 오세창(吳世昌)
시대 : 1928년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오세창(吳世昌)
1864(고종 1)∼1953. 서예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위55#창02). 서울출생.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고종 23)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동란중 피난지 대구에서 죽어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한묵생활(翰墨生活)로 은거하며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이다.
그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 槿域畵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고격하게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書畵人名辭書(金榮胤, 藝術春秋社, 1959)
韓國現代書藝史(任昌淳, 通川文化社, 1981). 〈李龜烈〉
⊙ 금석청완 金石淸玩
한국 역대 금석문(金石文)의 탑본집.
구분 : 탑본
저자 : 조속(趙涑)
시대 : 조선(1655년)
탑본(탁본), 4책이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 부여의 백제탑비를 위시하여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의 유명한 금석문 120여 점을 탑본하여 부분적으로 떼어 모은 것으로 조선 후기의 서화가 조속(趙涑)이 1655년(효종 6)에 완성하였다.
비문에는 그 비의 명칭을 적어넣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고 이 가운데는 현재 그 원비(原碑)가 없어진 것도 많다. 책머리에 조경(趙絅)의 서문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조속(趙涑)
1595(선조 28)∼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취병(醉病).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저서로 《창강일기 滄江日記》가 있으며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때로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함에도 구애치 않았으며,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梅)·죽(竹)·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水禽)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에서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이 분야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明代)의 수묵사의화조화가(水墨寫意花鳥畵家)인 임량(林良)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국특유의 정취 짙은 서정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화풍은 그의 아들인 지운을 비롯하여 전충효(全忠孝)·이함(李涵)·이하영(李夏英) 등에게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 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남종화풍이 깃들어 있는 〈호촌연의도 湖村煙疑圖〉와 같이 주목되는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미법(米法)을 기조로 하여 다루어진 〈호촌연의도〉는 조선시대 남종화(南宗畵)발전의 초기단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역대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을 보여 그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의 수집활동을 시작한 이 방면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와 〈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 梅鵲圖〉 등이 있다.
참고문헌
止庵遺稿,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韓國의 美 11―山水畵 上―(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韓國浙派畵風의 硏究(安輝濬, 美術資料 20, 1977)
韓國의 花鳥畵(洪善杓, 韓國의 美 18, 中央日報社, 1985). 〈洪善杓〉
▣ 김영환 - 대동운부군옥은 제게 있는데 ..현재 이사중이어서 서고를 정리하면 볼 수 있겠네오.. 고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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