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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공파 연기군 유적지(쌍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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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13 13:27 조회1,9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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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www.yeongi.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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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ow1.gif 소재지 : 전의면 양곡리 양지촌 285번지
arrow1.gif 시 대 : 세조조.명종조 명정. 1820년 중수
arrow1.gif 지 정 : 연기군 향토유적 제 16호(2001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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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정은 김휴(金休)의 아들로 호는 운암(雲庵)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난 그는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에 재임 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각각 3년씩 6년간을 시묘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 전라, 경기의 관찰사를 지냈다.

후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25년 대사헌, 1431년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고, 1435년 경상관찰사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복창군(福昌君)까지 봉하여졌다. 전의를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는 경기도 양주군 고령산 고령사(高嶺寺)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의면 양곡리 압실에 설단하였다. 익정은 영월군사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고 한다.

『충청도 읍지』,『호서읍지』「전성지 인물조」(1895),『대동신편(大東新編)』,「효자록」,『연기지』,『조선환여승람』에 그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김익정의 현손(玄孫)인 김사준(金師俊, 1439~1520)의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은암처사(恩庵處士)이다. 1439년(세종 21)에 형조참의(形曺參議)를 지낸 김구년(金龜年)의 5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에 출사해서 정사를 보았고 어머니 이씨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의성군 이채(議城君 李采)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녀요, 태종의 증손녀로 남달리 출중한 가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자랐다. 혼란 속에 있던 조정은 마침내 1455년(단종 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2세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정변을 일으켰고, 다음 해에는 피비린내 나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이 단행되자, 그의 부친은 이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로 낙향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서 사준은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어려서부터 김사준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벼슬은 물론 과거에도 일체 응하지 않고 오직 효행과 덕을 쌓는데만 노력했다. 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하자 연근을 구해드려 병을 낮게 했으며, 부친이 75세에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져 1469년(예종 1) 예종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능참봉(陵參奉)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전의 추하(楸下,현재의 양곡)에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힘쓰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명종대(1546~1567)에 이르러 ‘그의 출천지효(出天之孝)는 영세불망(永世不忘)이라’ 치하하면서 명정했다고 한다. 양곡리 동구 밖에는 김사준을 기념하는 ‘효자거리(정문거리)’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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