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김주문집 독자서평 쓰기 자료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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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14 14:05 조회1,463회 댓글1건본문
역주 후기 (심경호)
우암은 조선 중기에 문장과 경학으로 명성이 있었고, 귀척(貴戚)의 전횡을 막고 문정대비 등의 불교 숭상을 비판하여 조선 사림(士林)을 보호하였던 명신 가운데 한 분이다. 또한 이른바 종계변무와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명나라의 인준을 받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국가 공신이기도 하다. 우암의 평생사업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상소문과 계차 등을 통해서 잘 살필 수가 있다. 그 글들을 읽어보면 간관으로서의 강매한 풍모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가 있다.
다만, 문학과 경학의 저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화 때 잃어버린 것이 많았던 듯하다. 초간본 우압유집이나 중간본 우암집에도 그다지 많은 편수가 실려 있지 않다. 그 뒤로 새로운 저술을 발견한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우암이 문학과 경학에 뛰어났다는 사실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당대에 이미 팔문장으로 꼽힐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오상(吳祥)의 문집인 부훤당집(負暄堂集)에 보면,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서 김 아무개,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선발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라고 하였다. 대개 명종 15년(1560, 경신) 7월에 명종은 문장으로서 명망이 있는 신료를 선발하여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우암은 문장양망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우암은 49세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 때 문장양망에 선발된 사람은 윤춘년(尹春年) 등 13명이라고 한다. 우암은 그 해에 정유길(鄭惟吉)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망되기도 하였다.
한편 우암이 경학에 밝았다는 것은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서연(書筵)의 빈료(賓僚)를 지냈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우암이 서연에서 진언한 말들은 일부가 노수신의 서연강의(書筵講義)에 나온다. 우암은 이미 36세 되던 명종 2년(1547),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전경문신(專經文臣)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즉, 그 해 3월 17일에 경회루에서 전경 문신을 대상으로 강경(講經)을 할 때 우암은 서전(書傳)에서 통(通)의 성적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볼 때 우암의 문학과 경학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더구나 우암집에 실린 시와 논변류의 글을 보면 문학적 상상력이 탁월하고 입론이 명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참된 의(義)를 중시한 그의 사상은 현대인에게도 매우 신선하게 여겨질 것이다.
우암집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우암의 후손들에 의해 착실하게 편찬되고 간행되었다. 초간본을 편찬하여 간행한 김래(金䅘), 중간본을 편찬하여 간행한 김문연(金文演)님은 우암의 관련 시문을 편언척자(片言隻字)라도 남김없이 수집하였고, 근거 있는 시문과 기록만을 선별하였다. 그 분들의 편집 태도가 그토록 근실하였기에, 그 바탕 위에서 감히 역주(譯註)를 시도할 수가 있었다.
이번의 역주본 간행사업은 우암의 직계 후손이신 김용주(金容周)님이 주재하였다. 김용주 님은 문집의 역주가 단순히 조상을 현창하는 일로 끝나지 않고 널리 학계에 보익되는 바가 있도록 지침을 정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우암의 집안과 아무런 연분이 없지만 이 역주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부디 이 역주본을 통해 조선중기의 지성사와 문학사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2005년(癸酉) 정월 초하루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심경호(沈慶昊)는 삼가 적는다.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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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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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