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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김주문집 독자서평 쓰기 자료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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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6-14 14:08 조회1,48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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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유집> 발문  (김용주)

 

적선지가(積善之家)는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했던가. 본인의 16대조이신 문단공(文端公) 우암(寓庵) 선조님(花山君, 諱 金澍)께서 중국[明]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가셨다가, 국가의 중대임무를 완수하시고 그곳 객관[玉河館]에서 52세를 일기로 몰(歿)하신 지 442년이 지난 오늘, 공께서 남기신 올곧은 공명정대정신(公明正大情神)은 우리 문중의 가풍(家風)으로 남아 찬연(燦然)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공(公)의 후손이 약 5천여 명으로 번성해 있는 것은 정녕 선조님에 의한 우리 후손들의 경사(慶事)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공께서는 진사(進士)를 거쳐 28세(중종 34. 1539년)에 별시문과에 장원(壯元) 급제하시고 이조좌랑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신 뒤 이조정랑․부교리․부승지좌승지․도승지가 되셨고, 대사간․대사헌․대사성이 되셨다. 이어 42세에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다녀오셨고, 이․호조참판을 거쳐 전라․황해도 관찰사가 되셨다가 52세(명종 18, 1563년)에는 예조참판이 되셨으며, 조선 왕조의 명예회복을 위한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 겸 진하사(進賀使)로 중국에 가시어 공무를 완수하시고 그곳에서 몰하셨다. 그 후 27년 뒤(선조 23, 1590년)에는 광국공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追封)되셨고 다시 200년 후(정조 14, 1790년)에는 문단(文端)의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또한 공은 당대 8문장의 한 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문장(文章)과 경학(經學)에 출중하셨는데 당시의 명인(名人)이었던 이황․김인후․정유길․임형수․심수경․오상 등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특히 초서(草書)를 잘 쓰셨다고 전한다. 본인과 우리 후손들은 이토록 훌륭하신 공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에 깊은 감사와 높은 자긍심(自矜心)을 지니며 살고 있다.

지명(知命)을 넘어 이순(耳順)을 목전(目前)에 둔 본인은 얼마 전 선조님의 업적과 사상, 인간적 서정(抒情), 그리고 그 삶 속에 용해되어 있는 각종의 희로애락 등을 살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살폈다. 그런데 여기서 공에 대한 폄하(貶下)의 글을 발견하고는 놀람과 분노가 크게 일어났다. 이때부터 공에 대한 연구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공의 글을 모은 최초의 󰡔우암선생유고(寓庵先生遺稿)󰡕는 7책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은 이 귀한 공의 문집을 불태우고 말았으니 이 애통(哀痛)을 어찌하랴! 1789년(정조 13) 4월, 공의 몰(歿) 후 226년 만에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공(公)의 6대손 휘(諱)(禾來)와 종질인 공의 7대손 휘(諱) 득현(得顯)은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공의 각종 글들을 찾아내는 엄청난 희생적 작업을 한 뒤, 공의 시장(諡狀)을 지으신 쌍계(雙溪) 이복원(李福源) 선생의 서문을 받아 드디어 7권 1책의 󰡔우암선생유집󰡕 초간본(初刊本)을 발간하였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이 초간본은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각 1권씩 소장되어 있고 문중인(門中人) 영환(榮煥-문온공파) 종친께서 1권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매 이 초간본에 실리지 못했던 각종의 유고(遺稿)가 또다시 발견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기시던 공의 12대손 문연(文演)님께서는 제가(諸家)의 문집과 명산(名山)의 비장(秘藏) 등에서 공의 기록들을 찾아내었고, 공의 12대손 주연(冑演)님과 연하(演夏)님 등의 적극적 활동으로 초간본 발간 145년 뒤인 1934년 3월에 6권 3책의 중간본(重刊本)을 발간하였다. 이 속에는 초간본에 누락되었던 서(書), 소차(疏箚), 계(啓)가 새로 들어갔고, 시(詩)와 명(銘), 논(論)의 일부가 추가되었으며, 부록으로 묘표음기(墓表陰記)와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새로 들어가고, 유사(遺事)가 증보되었으며, 연표(年表)가 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에도 서독(書牘), 잠(箴),(頌) 등이 누락되어 발간 후 문연(文演)님께서는 못내 애석해 하셨다. 이 중간본은 현재 성균관대학교와 중앙도서관에 각 1질씩 소장되어 있고 일부 문중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다.

문중인들의 간절한 󰡔우암집󰡕 국역사업 안건은 2004년 1월, 문단공(文端公) 문중회 이사회에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동년 2월, 15인의 문집 발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추진위원:태영, 우진, 태훈, 용주, 태웅, 창식, 상용, 성회, 상진, 홍식, 기원, 영식, 형남, 흥식, 용목). 태영(泰榮-우암공 14대손) 회장님은 󰡔우암유집󰡕 초간본을 간행한 휘(諱)(-우암공 6대손) 선조님의 8대손이시다. 그리고 본 사업의 추진위원이신 영식(永植)․흥식(興植) 두 분 형제 또한 휘(諱) 득현(得顯-우암공 7대손) 선조님의 8대손이시며, 본 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의 책임을 맡은 본인 역시 초간본 간행을 담당했던 휘(諱) 득현(得顯-우암공 7대손) 선조님의 9대손이 된다. 기원(基源-우암공 15대손) 종친님은 중간본을 발간하신 주연(冑演)님의 증손(曾孫)이시다.

우리 문단공 문중회의 원로 한학자이신 우진(祐振-우암공 14대손) 종친님께서도 춘추(春秋) 9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시고, 뜨거운 열정으로 본 사업에 참여하시어 조언과 교정과 감수를 맡아 주셨다. 이 분들의 적극적 참여와 협조가 있었기에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가능해 진 것이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번역은 훌륭하신 한학자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의 심경호(沈慶昊) 교수님이 맡아주셨다. 교수님은 일찍이 우리나라 명인들의 문집을 다수 번역한 바 있었는데, 우리의 열정과 문단공의 큰 덕(德)과 공업(功業)에 감탄하시고는 이 국역 작업을 쾌히 응락해 주셨다. 심 교수님의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번역 작업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중간본에 있는 왕조실록 전재(轉載)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의 한자와 일일이 비교해가며 번역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또 일반인의 편리한 이해를 위해 쉽고도 자세한 주석(註釋)을 덧붙였다. 매일매일 밤샘 작업이 일쑤였다. 단순히 번역 일을 맡은 역자(譯者)로서가 아니라, 후손보다도 훨씬 더 공의 마음과 정신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 가셨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교수님은 다른 분의 차운시(次韻詩) 5편과 공이 올린 차자(箚子) 3편을 찾아내어 본 국역본에 번역․소개해 주셨다. 3월부터 12월말까지 10개월의 작업, 이제 한문본 󰡔우암유집󰡕은 󰡔국역 우암김주문집(國譯 寓庵金澍文集)󰡕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번역된 초고는 문중의 여러분께서 교정해 주셨다. 김우진(金佑振-우암공 14대손, 한학자) 종친님, 김재갑(金在甲-문중인, 군사공파, 한학자) 종친님, 김익수(金益洙-문중인, 제학공파, 한학자,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 종친님 등 3분께서는 원문 해석과 주석 및 해설상의 교정을, 그리고 김항용(金恒鏞-문중인, 제학공파) 종친님께서는 역문의 윤문(潤文)과 맞춤법 교정을 성심으로 살펴주셨다. 특히 제주도의 김익수 종친께서는 진행하고 계신 많은 번역 작업도 제쳐두고 세밀하고 철저하게 교정하고 감수해 주셨다.

번역과 교정 작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편집회의도 진행되었다. 역자와 추진위원 및 자문위원 중 일부로 구성된 이 회의는 약 10여 회를 거치면서 발간 전반에 관한 진지한 토의를 하였다. 경험도 없고 이런 일에는 문외한(門外漢)이었던 나는 여러분의 도움 없이는 본 사업을 성사(成事)시킬 수 없었다. 특히 김영환(金榮煥-문중인, 문온공파), 김성회(金聖會-문중인, 안렴사공파), 김주회(金柱會-문중인, 안렴사공파), 김태훈(金泰勳-우암공 14대손), 김항용(金恒鏞-문중인, 제학공파), 김상용(金相容-우암공 16대손) 종친님들의 편집 및 발간 전반에 관한 지도 조언, 김발용(金勃鏞-문중인, 군사공파) 종친님의 각종 사진 촬영 협조 등에 힘입어 이 사업은 완성될 수 있었다. 또한 본 국역본에는 안사연(안동김씨 사이버학술 연구회)의 김태영(金泰榮-문중인, 군사공파) 종친님, 김항용(金恒鏞-문중인, 제학공파) 종친님께서 최근 새로이 발견한 공의 친필 서찰 2편을 추소개하였다. 공의 초서(草書)와 일상생활의 모습을 직접 살필 수 있도록 해주신 두 분께 지면(紙面)을 빌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본 우암집 국역과 병행하여 몇 가지 사업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2004년 4월에는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개수(改竪)하였고, 동년 7월에는 공의 영정(影幀)을 제작하여 재실에 봉안(奉安)하였다. 이 또한 본 문중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문집 발간 추진위원 여러분들의 협조와 노고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제 본 󰡔국역 우암김주문집(國譯 寓庵金澍文集)󰡕이 세상에 나오게 됨으로써 선조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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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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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