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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일기 15---백두산 답사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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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6-16 19:29 조회1,48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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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8일 (수)


5시에 서둘러 일어났다. 오늘은 용정시내를 둘러보고 연길로 넘어가 하얼빈행 기차를 타야하는 날이다. 용정에 대해서는 준비된 일정이 없어서 새로 답사처와 교통편을 미리 알아 두어야 했다. 혼자서 2시간 가량 용정시내를 거닐었다. 용정제일중(옛 대성중), 용드레공원, 용정뻐스부를 찾아 보았다. 거리에는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이 지나가고, 용정의 하루를 시작하는 용정 사람들의 분주함이 시작되고 있었다. 택시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옛 영화에서 많이 보았음직한 삼륜거 라고 하는 발로 운전하는 인력거들이 용정거리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7시 호텔로 돌아와 식당에서 아침을 (?)공짜로 먹고, 호텔 로비에서 한글판 연변일보와 중국어판 연변일보를 번갈아 폼 잡으며 보다가 8시반 용정답사를 시작했다. 용정빈관에서 미식거리(먹자골목)을 지나 15분 정도 걸어가서 용정제일중 에 도착했다. 고풍기 찐한 옛 대성중학교 건물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서 있고, 2층에는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윤동주는 물론, 그의 스승이자 명동촌의 개척자였던 김약연 목사, 그리고 용정일대의 민족독립운동사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내가 일행의 연장자라는 핑계로 방명록에 서명하고 윤동주 추모사업을 위한 약간의 성금을 냈다. 윤동주 평전과 시집 한권을 구입하려 했으나 10시 넘어야 판매원이 출근한다고 했다.


바로 옆에는 <보재 이상설 기념전시관>이 서 있다. 몇 년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곳 용정에 1906년 8월, 서전서숙 이라는 학교를 세워 북간도 근대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독립군양성소로 운영하다가, 1907년 4월, 고종 황제의 밀명으로 헤이그에 파견되었던 애국지사였다. 용정실험소학교 교정에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그는 1870년생으로 나의 고향 충북 진천 태생으로 내 증조부와 비슷한 연배이기도 했고, 게다가 진천 세거 경주이씨로 처갓집으로는 멀지 않은 집안이 되기도 했다. 경주이씨인 아내가 항렬로는 ‘상’자 항렬이므로 동항렬 친척이 되는 것이다. (?)공짜로 아내에게 큰 인심쓸 기회가 생겼다. 기념관을 배경으로 아내를 모델로 디카 셔터를 아낌없이 팍팍팍...


이곳 용정의 유적지에는 현대의 한국인 손길이 가득함을 알수 있었다. 기념관 건물인 옛 대성중학 건물 복원도 그렇고, 윤동주 시비, 이상설 기념관도 한국인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이다. 그리고 맞은편 5층짜리 대형 교육관이 있는데 광주광역시의 모 학원에서 지원해 건립한 것이고, 용정거리 중심가에 있는 용드레공원도 경남 거제시에서 지원해 조성했다고 하고, 거제시에서 세운 비석도 둘이나 서 있었다.


용정제일중 앞에서 택시 3대를 전세 내어 일송정이 서 있는 비암산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등산을 해야했다. 8부 능선 쯤에 ‘一松亭’ 정자가 우뚝서 있다. 일제에 의하여 부수어졌다가 1992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정자 바로 앞에는 새로 심은 듯한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원래의 고목 一松은 일정시대에 고사하였다고 한다. 이곳 비암산과 일송정은 독립애국지사들의 집합처로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요, ‘선구자, 노래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일송정에 섰다.  용정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해란강이 용정시내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다. 바둑판처럼 평평한 드넓은 용정들판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종합경기장이 비암산 아래 보이는데 좌석에 커다란 한글로 ‘해란강 경기장’이라 적혀 있는 것이 산 정상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일송정 정자를 넘어선 30m 아래쪽에는 ‘일송정’ 글자를 새긴 대형 표지석과 용정의 노래, 선구자 가사 등을 새겨 넣은 작은 비석 두세개가 모여 있다. 우리 일행이 나타나자 옆에 즉석 좌판이 섰는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용정의 역사를 4권으로 나누어 실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1권 해란강반 편을 구입했다.


일송정(一松亭)은 충북 진천에 있는 나의 고향 동네이름이기도 하고, 내가 노래가사 거의 전부 아는 유일한 노래 ‘선구자’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오전내내 선구자 노래의 무대인 ‘일송정 푸른 솔’, ‘한 줄기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용문교’ 를 모두 둘러 보게 되었다.


아래 대기시켜 놓은 택시를 타고 용정뻐스부로 이동.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 가는 미니버스를 전세내어 출발했다. 운전기사는 조선족인데, 마침 명동촌 출신이라고 해서 가이드겸 여러 가지를 챙겨 주었다. 용정은 인구 26만에 조선족이 18만인데, 조선족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운전기사의 초등학생 아들이 작년인가 한국 연세대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해서 초청하는 해외영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서울에 갔다 왔다고 한국사람임을 강조하며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30분 거리에 있는 명동촌은 윤동주 생가 뿐만 아니라, 김약연 공덕비, 조선족최초 명동교회(현재 명동역사전시관), 명동학교 옛터, 윤동주와 동년배 고향친구였던 송몽규 생가, 문익환 목사 생가 등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이곳 용정에서는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여기는 마을이었다. 명동역사전시관에 들어가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내가 일행을 대표해서 방명록에 서명하고 약간의 성금을 내고,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는 처음 펴냈다는 윤동주 시집 한권을 샀다.


바로 아래 명동촌 들판을 내려다보는 앞자리에 윤동주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여느 생가와 마찬가지로 생가옛터 표지석이 서 있고, 건물도 당시의 모습대로 자연스러운데,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그를 추모하는 최근의 한국인의 발걸음이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우물, 난방시설, 방앗간 등도 살펴볼수 있었다. 난방시설이 집안 거실쪽에 있는데 이곳 용정은 겨울에는 워낙 추워서 난방도 집안에서 해결해야 했다고 한다. 


명동촌 입구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는 거대한 산바위가 압도하듯 서 있는데 안중근 의사가 한때 사격훈련을 하던 선바위라고 해서 미니버스를 세우고 사진에 담아 두었다.


---계  속---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연변의 풍광을 함께 하는 듯 합니다.
간도소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