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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국가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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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3-21 21:33 조회1,6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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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첩보원이 아니라 국가의 정보원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면서 "정보는 국력이다"는 새로운 부훈을 내걸었다. 한때 "한국 위의 한국"이란 소리를 들으며, 육법을 초월했던 국가안전기획부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안기부는 박정희 정권 때에는 중앙정보부로, 12.12사태 이후 집권한 신군부 아래서는 국가안전기획부로 불리면서 약 30년 동안 군부정권을 유지시켜 왔다.



안기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정보·사찰 기능을 담당한 국가 조직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안기부가 있는 곳에 정치 탄압과 인권 침해의 논란이 있었기에 늘 지탄의 대상이 된 게 사실이다.



안기부 개혁의 핵심은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정보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이란 팔레비왕조 때 정보기관이었던 사바크는 민심을 잃어 문닫았지만,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국민의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안기부의 발전 방향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바크처럼 독재권력에 협력했던 안기부가 모사드처럼 변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서도 '국가 지원 예산 호남 편중 주장 실태 및 평가 보고서'라든지, '안기부 국회 사찰 파동' 등에서 보듯 안기부의 환골탈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짐작케한다.



소수 정치엘리트를 위해 존재하는 의미로써의 안기부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국민을 위한 공적 조직으로 탈바꿈할 때만 신뢰를 받을 수 있고, 그때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국내정치에 관여하여 지배계층에 영합하는 안기부가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모사크같은 정보기관이 되어야 안기부가 존재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의 군사 조직이었던 삼별초는 안기부 개혁에 있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 무신 정권과 삼별초의 탄생



흔히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치 군인들은 실권을 확보한 후에는 지식인을 동원하여 '터닦기 작업'을 도모한다. 하지만 군사 정부에 있어 주요한 통제 장치는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물리력이다.



현대에 와선 군의 정치 개입이 간접적 지배이거나 민간인복으로 갈아입은 뒤 직접 나서거나 하지만, 그래도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물리적 힘으로 통제한다. 고려 중기 최씨 정권은 현대 정치 군인들에게 선례를 보여준 셈이다.



최충헌과 최우로 이어졌던 무신정권은 사병으로서 도방과 국가에서 봉급을 받았던 군사조직 중 일부를 사병화시켰던 삼별초를 통해서 물리력을 행사했다. 『고려사』 병지(兵志) 오군조(五軍條)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하면서 폭도들을 막게 하였음으로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뒤에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남에 별초를 나누어 이들을 잡게 했는데, 그 군사가 매우 많으므로 마침내 나누어 좌·우로 만들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 몽고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신의군이라 하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신들이 권세를 잡음에 과아(瓜牙)로 삼고, 그 봉록을 두터히 하고 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또 죄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이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권신들이 마음대로 부렸으며 그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위에서 말한 도적은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생존권 차원에서 일어났던 농민과 천민들이었다는 점이다. 무신정권 이후 무인들이 쿠데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하나의 토지에 수조권자가 2중, 3중으로 나타나 세금을 거둬들이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패가 만연함에 따라 농민들은 집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하였다.



일부 농민들은 무리를 지어 도적질을 하였고, 그중의 상당수는 반란 집단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하루 빨리 정국을 안정시켜야 했던 최씨 정권에게 이들은 골치거리였다.



때문에 자신의 사병인 도방 이외에 군인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날쌘 장정들을 뽑아 군사 조직을 만들어 반란군을 제압하고자 야별초를 편성한 것이다.



그런데 반란의 무리들이 전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남에 따라 최씨정권은 야별초를 보다 조직화시켜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 농민 진압 작전에 동원시키게 된 것이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재원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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