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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국가정보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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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2-03-21 21:39 조회1,5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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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첩보원이 아니라 국가의 정보원이 ?/span>







삼별초는 전형적인 권력동조형집단



그런데 삼별초를 만들게 된 데는 농민군 진압 이외에 정치세력 사찰이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사실 도적으로 표현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라면 야별초를 따로 조직할 필요는 없었다.



기존의 군사 지휘권만 확고히 장악한다면 관군에 비해 오합지졸인 농민군 정도는 쉽게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우는 군인 중에서 용맹하고 날쌘 장정들을 뽑아서 야별초를 조직하고, 이들로 하여금 국왕을 호위하고 자신을 보호하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정치세력이 국왕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정치사찰을 통해 정권 유지를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1961년 6월 박정희가 3,000명의 특무부대 요원을 토대로 중앙정보부가 만든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간다.



신의군은 야별초보다 이런 성격이 더욱 강했다. 신의군은 몽고와의 항전중에 포로로 잡혀간 전투 군인들을 데려다 만든 조직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군인들이라면 몽고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군제를 짰어야 했다.



그럼에도 다시 별초군에 합류시켜 좌·우별초와 함께 삼별초로 확장시킨 데는 역시 정권 유지라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의군이 조직될 무렵에는 문신들을 중심으로 출륙환도(出陸還都)에 대한 논의가 깊게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60여년을 이어왔던 최씨정권의 통치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약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출륙환도가 이루어지면 도방과 좌·우별초 사병체제로 유지되던 최씨정권은 그대로 공중분해될 게 뻔한 것이었다.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항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신의군을 삼별초에 편입시켜 정권 유지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최항은 부하였던 김준에 의해 살해되고, 그가 만들어 놓은 삼별초는 김준에 의해 접수되었다. 김준이 다시 임연 부자에 의해 제거되면서 삼별초는 또 다시 임연 부자의 손에 넘어갔다.



삼별초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던 무신들의 러브콜(Love Call)에 삼별초는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드러냈다. 정치학에서는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아노미 상태가 존재할 때 실력자와 손을 맞잡고 목표와 수단을 함께 하여 반대급부를 얻으려고 하는 집단을 '권력동조형집단'이라 한다.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대신 표를 몰아 주던 새마을운동협의회 같은 관변단체들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권력동조형집단의 예이다. 권력의 주변부에 있으면서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삼별초는 최항 이후 무신들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어차피 삼별초란 조직 자체가 권력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였고, 기존의 지위와 기득권만 확보할 수 있으면 누가 집권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몽고의 침입과 삼별초의 변신



이처럼 권력 동조형 집단의 성격을 지닌 삼별초가 우리에게 국난 극복의 화신으로서 강한 이미지를 남기게 된 것은 몽고의 침략 때문이었다.



당시 몽고는 만주 북쪽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칭기즈칸이 몽고 대륙을 통일하고 난 뒤 동쪽과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고려 땅에는 여덟 차례나 침입해 한반도를 철처하게 유린했다.



이때부터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친위대가 아니라 외세를 물리치는 전투병으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백성들을 이끌고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



유격전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병을 가지고 기마전술에 능한 몽고군을 상대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전술이었다. 따라서 호흡만 잘 맞추면 아무리 전투에 능한 몽고군이라 해도 싸워 이길 승산이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삼별초의 지휘에 따라 상당한 전과를 올리며 8차례나 되는 몽고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고, 삼별초 역시 이들 무신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무신정권은 여전히 삼별초를 권력동조집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삼별초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였다.





삼별초의 난은 최후의 자구책이었다



1270년 고려 원종은 몽고에 들어가 원의 쿠빌라이(世祖)와 맺었던 강화를 다시금 확인했다. 몽고와의 강화는 권력 관계의 변화를 의미했다. 고려 왕실을 비롯한 왕권파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낸 몽고와의 강화는 대외적으로는 종속 관계를 의미했다.



한마디로 고려는 몽고의 속국으로 살아가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몽고를 이용하여 실권을 지녔던 무신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는 문신세력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무신정권하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들은 몽고와의 강화를 통해 얻을 것이 없었다. 특히 군부세력과 삼별초와 같은 권력동조형집단들은 설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숙청의 대상이 될터였다.



이에 임연 부자의 군부정권은 삼별초를 움직여 다시 한번 항전 태세를 갖추고자 했으나, 임연 부자는 송송례 등에 의해 제거되고 삼별초 역시 혁파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의 명단이 원에 넘어감으로써 삼별초는 절대적인 존립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원나라와 강화를 맺은 친원파 왕실 세력과 문신 세력이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국내 정치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무신들의 수족으로 기능했던 삼별초를 제거하려 한 게 원인이었던 것이다.



뒤집어 놓고 보면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이나 노영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삼별초에 가담했던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몽고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와 삼별초가 된 신의군의 입장에선 몽고와의 강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 삼별초는 오랜 기간 동안 몽고와 전투를 치렀다. 몽고와의 오랜 전투를 통해 삼별초는 싸우는 법도 알고 있었다. 수전에 약한 몽고와의 싸움에서는 섬을 중심으로 진을 치는 게 승산이 높았다. 마침내 1270년 6월 3일 원종을 중심으로 하는 친원정권을 뒤로 한 채 삼별초를 실은 1천여 척의 배들이 진도를 향해 출발했다.



이 날의 남하는 이제 더 이상 삼별초가 권력동조형집단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였으며, 반원투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남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약 3년간 진도와 제주도에 거점을 확보한 삼별초는 남해안 지역의 농민과 천민들과 함께 친원정권과 원나라 군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마지막 남은 20여명의 삼별초군이 전멸당할 때까지 그들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재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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