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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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6-29 11:20 조회1,526회 댓글0건본문
11) 연기, 공주, 죽전 등지에서 합단적을 섬멸, 판밀직사사, 판삼사사, 지도첨의사사
(41세)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고려사》 제30권 - 세가 제30 > 충렬왕 3 >
충렬왕 경인 16년(1290)
2월
을해일에 중군 만호 정수기(鄭守琪)를 금기산동(禁忌山洞)에 주둔시키고, 좌군 만호 박지량을 이천(伊川)에 주둔시키고, 한희유를 쌍성에 주둔시키고, 우군 만호 김흔을 환가에 주둔시키고, 나유를 통천(通川)에 주둔시킴으로써 단적(丹賊)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5월
무신일에 김흔, 나유, 정수기 등이 “합단이 해양(海陽) 지경에 침입하였다ꡓ고 급보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합단(哈丹)이 습래하여 왔을 때 김흔은 환가현의 경계 지방에 주둔하여 그들을 방어하게 되었다. 적들이 장차 철령(鐵嶺)에 이르려 할 때 방수(防守) 만호 정수기(鄭守琪)는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철령의 길은 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뿐이었으므로 적들은 말에서 내려 고기를 꿰미에 꿴 것처럼 하나씩 줄을 지어 올라왔다. 이때 적들은 심히 굶주리고 있었는데 정수기가 내버리고 간 식량을 얻게 되자 며칠 동안 실컷 먹고 기운을 내어 북을 울리면서 전진해 와서 영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에 깊이 침입하였다. 김흔이 역시 달아나서 적들과 싸우기를 피하였으므로 양근성(楊根城)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황제는 설도간을 보내 합단적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김흔은 우군장(右軍將)으로 설도간과 함께 목주(木州)에 주둔하고 있었더니 나졸(邏卒) 고문려(高文呂)가 보고하기를 적들이 연기현(燕岐縣)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노적(木奴赤) 등 28명을 고문려와 함께 보내 정찰하게 하고 밤중에 제군(諸軍)이 목주를 떠나서 동이 틀 무렵에 연기에 이르렀다. 적들은 정좌산(正左山)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제군이 갑자기 포위하자 적들은 크게 놀라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싸울 예정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대들이 양쪽에서 협격하니 적들은 정면과 후면에서 제압 당하여 말을 버리고 숲속 나무 사이에 숨었다. 우리 군대의 선봉으로 나가던 자 두 명이 화살에 맞게 되니 군사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를 못하였다. 김흔이 꾸짖고 명령을 내리기를 ꡒ감히 후퇴하려는 자가 있으면 베어 죽이겠다ꡓ라고 하였더니 이에 보병 5백 명이 앞을 다투어 올라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게 되었다. 이석(李碩), 전득현(田得賢) 등이 돌진해 나가서 적의 선봉으로 나왔던 장대한 군사 2명을 베이고 그 승리한 기세로 크게 부르짖으면서 대군의 힘을 합하여 공격하니 적들은 형세가 궁하게 되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었다. 이것을 추격하여 공주강(公州江)에 이르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 리 사이에 깔리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심히 많았다. 적들 중 정예 부대인 기병 천여 명이 강을 건너 도망치니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부녀자들, 가지고 다니던 의복, 안장, 보물 그릇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노획하였으며 사람을 시켜 왕에게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또 김흔을 죽전(竹田)에 보내 남은 적들을 추격, 토벌케 하고 판 밀직 사사의 벼슬을 주었으며, 황제는 그에게 활, 화살, 안장, 옥띠, 은 1정(錠)을 주었다.
전공에 대한 표상이 있게 되자 그를 판삼사사로 승직시켰으며 얼마 후 지 도첨의사사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56권 - 지 제10 > 지리 1 >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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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현(燕岐縣)은 원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연산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본 목에 소속시켰고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후에 목천(木川) 감무로 하여금 겸임케 하였다. 이 현에 원수산(元帥山)〔충렬왕 때에 한희유(韓希愈), 김흔 등이 현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합단 침략군을 크게 격파 하였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부대가 주둔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원수산이라 하였다고 한다〕이 있고 웅진(熊津)〔즉 신라 때의 서쪽 개천인 웅천하(熊川河)인바 중사(中祀)에 기록되어 있다.〕이 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 내 기록 내용> (2003. 4. 25. 윤만(문) 제공)
▣ 제3권 p96<연기현 산천(山川) ; 김흔(金忻)>
--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 고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이 침범해 왔다. 왕이 구원병을 원(元) 나라에 청하니, 세조(世祖)가 평장사(平章事) 설도간(薛闍干)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고, 왕이 한희유(韓希愈)ㆍ김흔(金忻) 등으로 하여금 3군(軍)을 거느리고 원 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의 군병과 더불어 본현 북쪽 청주 경계에 위치한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니, 땅에 깔린 시체가 30여 리까지 연하였으며, 벤 머리와 노획한 병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래서 세속에서 지금까지도 그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부른다
충렬왕(忠烈王)
1236(고종 23)∼1308(충렬왕 34)
고려 제25대왕
재위 1274∼1308
본관은 개성(開城)
1. 가계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춘.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비는 원세조(元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齊國大長公主, 몽고명 忽都魯揭里迷失公主), 구비(舊妃)는 시안공 인(始安公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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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여당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와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할 것을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이 싸움은 1년반 만에 원병의 협력으로 끝났는데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에까지 침입하였으며, 이때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이 컸다. 이밖에도 야인(野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다.
원나라의 압력 밑에서도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여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부함으로써 생긴 동녕로(東寧路)를 원세조에게 직접 환부요청을 하여 1290년 돌려받아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고,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고에 함락되어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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