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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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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01 02:55 조회1,527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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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98년 1-8월 충선왕이 잠시 즉위하였다가 밀려나는 등  충렬왕, 충선왕 부자의 극심한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한희유 등 충렬왕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원나라에 들어가 7년간을 지냈다.

   이때 아버지 김방경은 충렬왕과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1296년 충렬왕과 함께 원나라에, 1297년 충렬왕이 김방경의 집에), 아들 김흔, 김순을 비롯하여 조인규(*김흔 사돈), 홍규, 박전지(*김방경 처조카), 이진(*김방경 묘지명 찬), 이승휴(*동안거사집에 김방경 글) 등 충선왕 세력의 후원과 교유가 많았다.

   (김흔 50세) 1299년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고려사》 제33권 - 세가 제33 >

충선왕 1

충렬왕 24년 정월 갑진일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충선을) 왕으로 책봉하고 충렬왕은 일수왕(逸壽王)으로 임명하였다.

병오일에 왕이 충렬왕에게서 전위(內禪)를 받고 강안전(康安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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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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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일에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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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에 조인규(趙仁規)를 사도 시중 참지 광정 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 참지 광정 원사(左僕射參知光政院事), 홍규(洪奎)를 수 사도 영 경 영궁사(守司徒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 우복야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참지 광정 원사(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守國史參知光政院事)로, 인후(印侯)를 광정사 참지 기무(參知機務)로, 김흔(金渾)을 검교 수 사도 영 봉상시사로, 차신(車信)과 이지저를 모두 검교 사도 자정 원사로, 김지숙(金之淑)을 동지 광정원사 참지기무로, 안향(安珦)을 참지 기무 행 동경 유수집현전 대학사 계림부윤으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 겸권 참지 기무로, 최유엄을 검교 사공 사헌 대부로, 이혼(李混)을 검교 사공 서경 유수 평양부윤으로, 정개를 남경 유수 광릉 부윤(廣陵府尹)으로, 최충소(崔沖紹)를 동지 자정원사 행 중경 유수 개원(開元) 부윤 과의군(果毅軍) 도지휘사로, 박의(朴義)를 동지 자정원사로, 민지(閔漬)를 집현전 대학사 첨(簽)을 광정원사로, 원경(元卿)을 중경 유수 과의군 도지휘사로, 민종유(閔宗儒)를 전조상서(銓曹尙書) 숭복관사(崇福館使)로, 허평(許評)을 민조(民曹) 상서로, 윤보(尹珤)를 홍문관 학사 의조(儀曹) 상서로, 최감을 사림(詞林) 학사 승지 형조 상서로, 전승(全昇)을 숭문관 학사 병조 상서로, 유유(柳栯)를 병조 상서 응양군(鷹揚軍) 상장군으로, 오한경(吳漢卿)을 사림 학사 시(試)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로, 이진을 사림 학사 시 우산기상시로, 홍자한(洪子翰)을 금오위(金吾衛) 섭(攝) 상장군 겸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장석(張碩)을 광정 도승지 봉상경(奉常卿)으로, 김순(金恂)을 광정 부사 승지 성균 제주로, 조서(趙瑞)를 광정 승지 전객경(典客卿)으로, 이승휴를 사림 시독 학사 시(試) 비서감(秘書監) 좌간의대부로, 심봉길(沈逢吉)을 사헌 중승으로, 권영(權永)을 사림 시강 학사 시 위위경(衛尉卿)으로, 조간(趙簡)을 형조 시랑 우간의 대부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기해 25년(1299)

기해 25년(1299) 봄 정월 임진일에 태백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왕이 외원으로 가서 장경 도량을 베풀었다.

정유일에 만호 인후, 김흔, 밀직 원경 등이 상부의 승인 없이 자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와 상장군 이영주를 붙잡고 그들이 반역 음모를 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그리하여 무술일에 왕과 좌승 합산이 흥국사(興國寺)에서 한희유 등을 문초하였는데 이영주는 사실 아닌 자백을 하였으나 한희유는 끝까지 불복하였다.

계묘일에 세조(원나라 황제)의 기일(忌日)이므로 왕이 신효사에 갔다.

무신일에 인후, 김흔, 원경이 한희유가 자기 죄를 시인하지 않는다 하여 원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상소하려 하였으나 왕이 그것을 보류하고 그 의견에 좇지 아니 하였다.

2월 무오일에 합산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한희유, 이영주를 해도(海島)로 귀양 보냈다.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경자 26년(1300)

가을 7월

정축일에 왕이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였더니 황제는 이날이 황태자의 생일인 까닭에 인후, 김흔 등을 용서하여 주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중일영(日英)이 한희유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을 때 김흔은 인후(印候)와 더불어 군대를 출동시켜 한희유를 붙잡아다가 좌승(左丞) 합산(合散)에게 고발하여 문초케 하였다. 그러나 한희유 등은 죄행을 시인하지 않았고 일영도 또 달아나 버렸으므로 인후, 김흔 등이 장차 원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하소하려 하였는데 왕이 말리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왕도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한희유의 죄가 무고임을 판명케 하였다. 때마침 대사령이 내렸으므로 김흔 등도 죄를 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충렬왕(忠烈王)

1236(고종 23)∼1308(충렬왕 34)

고려 제25대왕

재위 1274∼1308

본관은 개성(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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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는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의 무리에 귀기울여 왕위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동조하여 1305년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이 커 원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짐으로써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실권은 세자에게 빼앗기고 1308년에 죽으니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


충선왕(忠宣王)

1275(충렬왕 1)∼1325(충숙왕 12)

고려 제26대왕

재위 1298, 1308∼1313

본관은 개성(開城)


1. 가계와 세자 때의 행적

이름은 장(璋). 초명은 원,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몽고명은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 비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몽고명은 보다시리(寶塔實憐)〕,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이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봉해지고, 1295년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 이듬해 11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혼인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297년 5월 병사하자 7월 문상하러 온 세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를 빙자, 세력을 떨치던 궁인 무비(無比)와 그 당류 최세연(崔世延)·도성기(陶成器) 등 40여명을 공주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참살, 유배하는 대숙청을 단행하고 이듬해 정월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2. 폐단척결과 인사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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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모는 즉위한 뒤에도 나타나, 즉위 직후(1298.1.) 곧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고려가 당면하고 있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함을 내용으로 하는 30여항의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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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제개혁과 그 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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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제개혁 속에는 반원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때맞추어 일어난 원공주 출신인 왕비의 질투로 인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은 세력가의 억압으로 인하여 신흥귀족의 공격 목표가 되고, 반원적 요소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어, 드디어는 즉위년 8월 원나라로부터 강제 퇴위를 당하여 원나라로 가게 되었으며, 이로써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가 왕은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6. 왕부자간의 갈등

원나라에 장기간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는 즉위 전부터 있던 왕 부자간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1299년 충선왕파로 여겨지는 쿠라타이(고려명 印侯)를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났고, 이어 충렬왕파에서는 왕유소(王維紹)·송린(宋麟)·석천보(石天補) 등이 주동이 되어 부자간을 이간시키며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고 왕위도 세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고 환국(還國)을 저지하는 운동도 일으켰다.

이 불화는 1305년 충렬왕이 전왕 폐위를 직접 건의하러 원나라로 감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성종(成宗)이 후계자 없이 죽어 황위쟁탈전이 일어나자 왕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하이샨(海山:武宗)을 도와 옹립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졌고 따라서 왕유소 일당을 처형하여 부자간의 싸움은 끝이 났다. 이로써 고려 국정의 실권은 왕에게로 돌아갔다.


7. 정치혁신의 무산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이해 7월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한 왕은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장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즉위교서에 필적하는 혁신적인 복위교서를 발표하여 또 한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던 관계로 곧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복위한 지 두달 후인 11월 제안대군 숙(齊安大君淑)에게 왕권 대행을 시키고 원나라로 감으로써 혁신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위기간에는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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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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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속되는 여름캠프 자료 연구에 감사합니다.

김태우(무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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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주회 아제 여름 캠프와 관련하여 올려 주는 글 관심있게 보고있읍니다. 한양대학교 경영학부 3학년에 다니는 둘째 여식이 내일 하얼빈 공대로 약 50일 예정으로 연수를 간답니다. 기숙사에 입소하여 정확하게 연락처 정해지면 아저씨 한테 연락할 텐데 잘 좀 부탁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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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하얼빈 공대는 저희 숙소에서 멀지 않습니다. 제 연락처는 하얼빈 도착해서 8251-9333, 혹은 8915-9332 입니다. 하얼빈 생활하면서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꼭 연락하도록 말씀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