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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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03 01:19 조회1,388회 댓글4건본문
16) 아들 승고(承固)
김흔 장군은 슬하에 1남(承固) 2녀(민적, 조련에 출가)를 두었는데(*1580년 경진보에는 무남 2녀), 1남 承固는 평리 상호군 行숭복도감 판관에 추봉되었고, 딸 하나만을 두어 의성인 김태권에게 출가시키고 무후하였다.
문영공(김순)의 사위인 정책의 둘째아들 정포가 지은 [贈佐郞舅詩幷序] 가 <동문선>에 실려있고, 정포의 <雪谷集>에 [永嘉。同諸公過金佐郞 承古 舅山莊] 가 실려 있다. 이를 보면, 1342년경 정포의 舅(외숙) 중에 佐郞 承古라는 분이 복주(안동) 전나무골(회곡동) 山莊에 한가로이 살면서, 서울(개성)을 왕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舅(?외숙) 중에 (김선의 아들) 자, 承用(*1328졸), 承澤, 承祐, (김흔의 아들) 承固, (김순의 아들), 영돈, 영휘, 사순, 영후가 있는데, 1342년경 생존하면서 좌랑 정도 벼슬을 할 분은 承祐, 承固, 영휘 정도인데, 承固가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인 규명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동문선 제11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좌랑 외삼촌에게 드리는 시[서문도 함께 싣다] [贈佐郞舅詩幷序]
정포(鄭?)
지정(至正) 2년 가을에, 내가 형님 사겸(思謙)과 함께 남쪽으로 귀양왔다가 10월에 일이 있어 복주(福州)에 모여 닷새 동안을 머물렀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이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사는데, 어느 날 사겸형과 나를 청하여 놀고 유목사(柳牧使)와 양통판(梁通判)이 자리를 같이하여 주안(酒案) 사이의 담소(談笑)의 즐거움이 평시(平時)와 같아 하루 종일을 놀고 갔었다. 그 다음해 여름에 이르러 교지(敎旨)가 내려 나를 복주에, 사겸형을 청주읍(淸州邑)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는데, 막상 이르러 본즉 유목사와 양통판이 다 사직하여 갔고 외삼촌 또한 계시지 않아, 황량(荒凉)한 여사(旅舍)에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 강산 천 리에 생각만 아득히 되풀이하였다. 한 달 남짓 있노라니 외삼촌이 서울서 돌아와 내가 유락(流落)해 있음을 불쌍히 여겨, 나를 위로할 길을 생각하여 날마다 즐거운 놀이를 벌여 산에 오르고 물에 놀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마음이 헌칠, 정신이 흐뭇하여 영욕(榮辱)을 다 잊어 버리고 숫제 자신이 한인(閒人) ㆍ 은사(隱士)나 된 듯, 귀양살이의 신세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아아, 인생의 모였다 헤어짐이 모두 수(數)가 있으니, 이제 내가 이곳에 귀양와 있음에 유(柳)와 양(梁)은 다 가고 홀로 외삼촌만이 계심은 어찌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예서 상종(相從)하게 함이 아니랴. 감탄이 그지없어서 이 시를 짓는다.
천리 밖에 이 몸이 귀양을 와서 / 千里身仍竄
금년에 신수가 더 야릇해라 / 今年數更奇
떠도는 신세 어디다 의탁할 것인가 / 飄零何所托
몸과 그림자만이 붙어 다닐 뿐 / 形影只相持
유학을 닦았으나 어디다 쓰리 / 儒術將安用
빈 말은 마침내 베풀 길 없네 / 空言竟莫施
세상의 웃음 살 줄 내 알았거니 / 自知爲世笑
남의 충고 듣기도 안 좋아하네 / 又不喜人規
곧은 도는 삼출주D-001을 만난다더니 / 直道連三黜
여생에 백 가지 어려움을 만났네 / 餘生遇百罹
친한 벗은 멀리서 서신도 없고 / 親朋無遠信
타관에 아는 사람 적네 / 羈旅少相知
반가울사, 내 외숙 한 분이 있어 / 好事逢吾舅
청담은 곧 나의 스승 / 淸談郞我師
성미가 피차에 서로 맞으니 / 風襟自有契
내왕도 저절로 무시로 하네 / 來往亦無期
좌상에 술병은 늘 가득하고 / 座上樽常滿
등 앞에 자리를 다시 옮겨서 / 燈前席更移
기쁨을 찾으니 마음이 흐뭇하고 / 覓歡心袞袞
체모를 생략하니 즐거움이 그지없어 / 省事樂熙熙
초목에도 화기가 뜨고 / 草木浮和氣
계산도 고운 모습 나타내는데 / 溪山有令姿
먼 마을을 나란히 말타고 가며 / 聯?村巷遠
나직한 수정에 잔 들고 앉아 / 把酒水亭卑
어초하는 늙은이와 짝을 짓기도 / 却伴漁樵老
사냥하는 젊은일 좇아가기도 / 閑追射獵兒
느낀 회포에 노래 부르고 / 感懷歌正冽
보이는 물색에 눈물 흐르네 / 覽物淚空垂
옛일을 생각하니 산간주D-002 같아서 / 憶昔同山簡
한창 겨울 습지에서 취했었네 / 方冬醉習池
파연곡 부르며 잔치 끝난 뒤 / 笙歌淸?後
등불을 들고 돌아올 그때 / 燈火夜歸時
모였다 헤어짐이 꿈과도 같아 / 聚散還疑夢
슬픔과 기쁨은 시에나 싣네 / 悲歡只有詩
가엾은 내 신세 위로되는 건 / 蹉?猶可慰
늙어도 정정한 이 몸 / ??未全衰
[주 D-001] 곧은 도는 삼출 : 춘추 때 유하혜(柳下惠)가 곧기 때문에 세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 났으나, 버리고 가지 않으므로,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곧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면 어디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으리오. 굽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어 하필 부모의 나라를 버릴 것이냐.” 하였다.
[주 D-002] 산간 : 진(晋) 나라 산도(山濤)의 아들.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면서 나가 놀기를 좋아하여, 흔히 경치 좋은 습가지(習家池)에 가서 술에 취해서는 백접리(白接?)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돌아오는 등 풍류 기화(奇話)를 많이 남겼다.
19 한국문집총간 雪谷集
정포 1609 - - - -
雪谷先生集
詩
永嘉。同諸公過金佐郞 承古 舅山莊
鞍馬悤悤閱數州。夕陽携手更登樓。謫來未厭湖山好。事去空驚歲月?。半壁殘燈孤館夜。傍?疏樹故園秋。欲知別後相思意。天際長江??流。
청주정씨 가문과 우리 가문
○정해---정책+女(부 김순)---<정오>, 정포---정공권(=정추)---정총, <정탁>---女+김오문
○김순---<女+정책>, <女+별가불화>, <1김영돈>, 4김영후---김천---2김사렴, 3김사안, 4김사형
○김흔---김승고
○김선---김승택---김묘---<1김구용>, 3김구덕---<명빈+태종>, 김오문+女(부 정총)---김중엄, <휘빈+문종 세자>---김뉴+女(조부 조준)
**정해는 김영돈의 지공거
**정오, 정포 형제와 金佐郞 承古 舅의 교류
**별가불화 가 정포 를 원나라 임금에게 추천
**정공권(=정추)와 김구용의 교류
**정공권(=정추)와 김사렴의 신돈 탄핵
**정총의 <복재집>에 김사안 관련 글 ‘敎全羅道都觀察三司右使金 士安 書’
■ 문영공 묘지명 (1321년 민지 찬)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入內侍 中正大夫 親禦軍大護軍) 정책에게로 출가하고
■ 김순처 허씨 묘지명 (1332년 이제현 찬)
장녀는 대광 청하군 鄭 (정책)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 안동김씨 족보 (1580년 경진보)
---여 백이정(白이正) 宰臣에 출가
---여 별리불화(別里不花) 무후에 출가
---여 정책(鄭책) 청하군에 출가
---자 영돈(永旽) 小字 나해(那海)
---자 영휘(永暉) 宰臣
---자 사순(思順) 삭발 宗慈
---자 영후(永煦)
■ 고려사 (2003. 8. 27. 태서(익) 제공)
6월 찬성사 정해(鄭?)가 졸하였다.
해(?)는 의(?)의 손자로 처음에는 필도치(必?赤)가 되어 이혼(李混)ㆍ윤보(尹珤)와 이름을 나란히 드날렸다. 뒤에 전주(銓注)를 맡아서는 법을 지키고 공정하여, 비록 왕의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는 자가 왕의 뜻이라 하여 청탁하여도 듣지 않았다. 이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장자빈(張子贇)ㆍ한종유(韓宗愈)ㆍ★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그가 뽑은 사람들이다.
학사연(學士宴)에서 왕이 글씨 족자를 내렸는데, 해가 기뻐서 펴보니, 그 한 연구에, 모든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몸은 문득 죽네 / 萬事不成身便死 하였다. 해는 얼굴빛이 변하고 좌객은 소스라쳐 놀랐는데, 얼마 안 있다가 졸하였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 영가지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 안동시청 홈
청주정씨
'영가지'에 의하면 청주정씨가 안동에 살기는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진 ★정오와 우간의대부를 지낸 그 아우 ★정보 형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정책이 궁궐도감으로,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왕(충숙 왕)을 도운 공으로 청하군에 봉해지고 판도판서를 역임했는데, 이는 ★김방경의 아들인 상락군 ★김순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한 설헌 정오, 설곡 정보은 바로 이의 아들이다. ★설헌은 문과급제로 공민왕의 사부, 첨의평리를 지내고, 그 아우 ★설곡은 진사, 문과로 충혜왕때 우간의대부를 지냈다.
'영가지' 방리편 회곡촌조에 '마을 어귀에 남향으로 된 큰 밭이 있으니, 예로부터 전하기를 ★충렬공이 여기서 살았는데, 설헌과 설곡형제도 외가로하여, 와서 살다'라고 했음을 보아, 설헌 형제가 이곳 회곡에 입향하게 되기는 그 외가의 반연이었음을 알수 있다.
■ 디지털한국학
●정오(鄭#오74){2} ***김순의 외손자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찬성사 해(#해15)의 손자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책($책01)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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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포(鄭#포33) ***정포는 김순의 외손자, 별가불화는 김순의 3사위
1309(충선왕 1)∼1345(충목왕 1).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해(#해15)의 손자로, 판선공(判繕工) 책(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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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임금에게 추천하였으나, 그뒤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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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권(鄭公權)
1333(충숙왕 복위 2)∼1382(우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溥)의 아들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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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원재집 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총(鄭摠)
1358(공민왕 7)∼1397(태조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정당문학(政堂文學) 추(樞:일명 公權)의 아들이며, 조선개국공신 탁(擢)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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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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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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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이메일 주소 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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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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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바빠서 홈에 못들어왔습니다.
무더위에 몸 건강하십시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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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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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넓은 연구에 감사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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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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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메일은 전과 같습니다. <a href=mailto:kimjoohoee@cb21.net>kimjoohoee@cb21.net</a>
다만 이메일 편지함에 종사자료가 가득차 있어서 용량이 꽉 찰 경우 수신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연락 주시는 데로 비워 놓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