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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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02 18:37 조회1,410회 댓글2건본문
15) 1306년 한희유가 죽고 1307년 충선왕이 실권을 장악하자, 연경에서 7년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 삼중대광이 되었다. 충선왕 원년(1308년) 59세로 몰하였다.
(58세) 1307년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다고 한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흔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敍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충선왕에 의해서) 선친 김방경에게 선충협모정난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충렬공 諡狀文과, 찬서자 등 일체의 내용은 알수없다. 또한 김방경 신도비는 역사 기록상 최초의 신도비라고 하는데 신도비명문, 찬서자 등 일체의 내용을 현재 알수없다. 김방경과 교유가 많았던 문장가, 혹은 김흔, 김순과 절친했던 문장가가 지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대의 문장가이면서 우리 가문과 절친했던 이진, 민지, ... 등의 현재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문집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
(59세) 1308년 충선왕 원년에 나이 59세로 몰하였다. 1580년 경진보를 보면 배위는 알수없고, 딸 둘을 두었는데, 1녀는 민적(재신, *민종유의 아들)에게, 2녀는 조련(찬성사, *조인규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고려사》 제32권 - 세가 제32 > 충렬왕 5 >
충렬왕 정미 33년(1307)
정미 33년(1307) 봄 정월 병인 초하룻날에 왕이 원나라에 체재하였다.
계유일에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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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신묘일에 전왕이 동지밀직사사 김문연, 상호군 김유(金儒)를 보내 밤중에 순군부(巡軍府)로 들어가서 결재(批判)를 전달하였는바 그것은 최유엄을 도첨의 중찬 판 전리 감찰사사로, 유비를 도첨의 찬성사 판 군부사사로, 이혼을 도첨의 찬성사 판 판도사사로, 김심(金深)을 도첨의 참리 판삼사사로, 허평(許評)을 판밀직사사(密直司事)로, 김연수와 김태현을 지밀직사사로, 김문연을 동지밀직사사로, 윤보(尹珤)와 오한경(吳漢卿)을 밀직부사로, 박승공(朴承功)과 나윤재(羅允材)를 삼사 좌우사로, 조인규를 자의(資議) 도첨의사사 평양군(平壤君)으로, 인후(印候) 를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平陽君)으로, 김흔(金炘)을 자의 도첨의사사 찬성사로, 고세를 자의 밀직사사(咨議密直司事) 도첨의 참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자의 밀직사사 밀직부사로, 진양필을 자의 밀직사사 동지밀직으로, 최충소(崔沖紹)를 판도 판서 권수 찬성사(權授贊成事)로, 홍선(洪詵)을 상호군 권수 참리로, 민종유(閔宗儒)를 전법 판서 권수(權授) 판밀직사사로, 박전지(朴全之)를 판 비서시사 권수 밀직부사로, 허유전(許有全)을 감찰 대부 권수 동지밀직사사로, 정지연(鄭之衍)을 좌상시(左常侍) 권수 동지밀직사사로, 조간(趙簡) 을 우상시 권수 밀직부사로, 이연송(李連松)을 판예빈시사 권수 밀직부사로, 박선(朴瑄)을 군부판서 권수 밀직부사로, 이산을 판 사재시사(判司宰寺事) 권수 밀직부사로, 이진(李瑨)을 판 위위시사(判衛尉寺事) 권수 밀직부사로, 조서(趙瑞)와 김흥(金興)을 좌우 승지로, 야선단(夜先旦)과 홍승서(洪承緖)를 좌우 부승지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관직에 임명된 자가 80여 명이었다.
전 왕(충선왕)이 원나라 태자의 지시에 의하여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宋均), 김충의(金忠義), 최연(崔涓) 및 그 일당인 악한들을 (전 왕의) 저택에 잡아 가두고 왕을 경수사(慶壽寺)로 숙소를 옮기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왕(충렬)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게 되었고 국정은 모두 전 왕(충선)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고려사》 제33권 - 세가 제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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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덕 3년에 우리 나라에서 무뢰한들이 난을 꾸미려고 할 적에 만호 홀라대와 김흔 등이 미리 그 음모를 탐지하였으므로 능히 난을 방지할 수 있었으니 그 공로도 상을 줄 만하다. 특별히 기록하고 등용할 것.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당시에 한희유가 재상으로 있었으므로 김흔은 고려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연경에서 대략 7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ꡒ대덕(大德) 3년(1299년)에 우리 나라에서 무뢰한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을 때 김흔은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미리 그 사실을 알고 난을 평정하게 하였으니 그 공로를 포상하여야 할 것이며 그를 특별히 높은 관직에 등용할 것이다ꡓ라고 하였다. 충선왕 원년에 나이 59세로 죽었다. 김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자하였으며 특히 친척 가운데 곤궁한 자를 잘 구제하여 주었다.
<김방경 행장, 1350년 안진 발>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열전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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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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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79년 기미 대동보 중에 김흔 장군과 후손 부분을 보고 싶습니다. 답변으로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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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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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저희 집 기미보는 괴산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