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동 차 상 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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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작성일02-03-23 05:45 조회1,802회 댓글0건본문
우리나라 자가용 1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자가용을 탄 사람은 누구였는지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 바람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한말 왕족들과 총독부의
고관들이었다. 서기 1913년 부터 이들이 미국에서 자동차를 도입해 이땅에 자동차
시대를 개막시킨 2년 후인 서기 1915년 경에 민간인들도 자동차를 타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돈많은 부자들의 독점물이었다. 당시 광업계의 거두였던 박기효,대지주
배석환, 서울 갑부 김종성과 백명권씨 등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가용을 탄 마이카족
이었다. 그 외에 우리나라에 상륙했던 선교사 언더우드와 배재학당의 창설자인 아펜셀라
등이 자동차 바람에 가세했다. 한국의 갑부들은 그당시의 외국에서 들여온 차중에 가장
값이 쌌다는 당시 돈으로 4천원짜리 포드차를 탔고 외국의 선교사들은 희귀하고 값이
비싼 멕스웰, 오버랜드 등을 탔다.
전해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민간으로써는 제일먼저 자가용을 탄 사람은 제3대 천도 교조
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동경에 망명했을 때인 서기 1905년 이미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는데, 이때 일본에도 그당시 국내통털어 자가용이 20대 밖에
없었다 고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서기 1915년 일본에 천도교 관계로 볼 일이 있어
갔다가 공진회라는 국제 박람회를 구경하던중 출품된 미국제 자동차를 보고 두대를 구입
하여 귀국한 후 한 대는 자신이 타고 한 대는 고종께 진상했다. 의암은 얼마 후 자기 차가
고종의 차보다 좋은 것을 알고, 내가 어찌 임금의 차보다 좋은 차를 탈 수 있으리오,
하며 고종의 차와 바꾸었다고 한다.
잊지못할 서기 1919년 3 월 1일 전국에서 독립만세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독립선언
장소인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으로 의암이 영국제 고급차를 타고 갈 떼 이때 한국인 운전사
를 못 구해 중국인이 운전 했다고 한다.
이차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유리벽이 있어 의암의 이야기를 운전사가 듣지 못 하도록
되어 있는 오늘날의 리무진 차 였는데 행선지를 소리통으로 운전사에게 지시 했다고 한다.
고종이 한많은 생을 끝마친 때이기도 한 이해에 부산에 있던 일본의사 니시무라가 포드
차를 개조하여 우리나라의 첫 앰블런스를 탄생시켰다. ㅡ재원 ㅡ
▣ 고기가 - 무를만낸니더 할배요 마이마올리주소 멍석가러준어런들도 고맙꼬~~
▣ 멍석까러준~~ -
▣ 김영환 -
▣ 김항용 -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자가용을 탄 사람은 누구였는지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 바람을 일으킨 사람들은 구한말 왕족들과 총독부의
고관들이었다. 서기 1913년 부터 이들이 미국에서 자동차를 도입해 이땅에 자동차
시대를 개막시킨 2년 후인 서기 1915년 경에 민간인들도 자동차를 타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돈많은 부자들의 독점물이었다. 당시 광업계의 거두였던 박기효,대지주
배석환, 서울 갑부 김종성과 백명권씨 등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가용을 탄 마이카족
이었다. 그 외에 우리나라에 상륙했던 선교사 언더우드와 배재학당의 창설자인 아펜셀라
등이 자동차 바람에 가세했다. 한국의 갑부들은 그당시의 외국에서 들여온 차중에 가장
값이 쌌다는 당시 돈으로 4천원짜리 포드차를 탔고 외국의 선교사들은 희귀하고 값이
비싼 멕스웰, 오버랜드 등을 탔다.
전해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민간으로써는 제일먼저 자가용을 탄 사람은 제3대 천도 교조
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동경에 망명했을 때인 서기 1905년 이미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는데, 이때 일본에도 그당시 국내통털어 자가용이 20대 밖에
없었다 고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서기 1915년 일본에 천도교 관계로 볼 일이 있어
갔다가 공진회라는 국제 박람회를 구경하던중 출품된 미국제 자동차를 보고 두대를 구입
하여 귀국한 후 한 대는 자신이 타고 한 대는 고종께 진상했다. 의암은 얼마 후 자기 차가
고종의 차보다 좋은 것을 알고, 내가 어찌 임금의 차보다 좋은 차를 탈 수 있으리오,
하며 고종의 차와 바꾸었다고 한다.
잊지못할 서기 1919년 3 월 1일 전국에서 독립만세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독립선언
장소인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으로 의암이 영국제 고급차를 타고 갈 떼 이때 한국인 운전사
를 못 구해 중국인이 운전 했다고 한다.
이차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유리벽이 있어 의암의 이야기를 운전사가 듣지 못 하도록
되어 있는 오늘날의 리무진 차 였는데 행선지를 소리통으로 운전사에게 지시 했다고 한다.
고종이 한많은 생을 끝마친 때이기도 한 이해에 부산에 있던 일본의사 니시무라가 포드
차를 개조하여 우리나라의 첫 앰블런스를 탄생시켰다. ㅡ재원 ㅡ
▣ 고기가 - 무를만낸니더 할배요 마이마올리주소 멍석가러준어런들도 고맙꼬~~
▣ 멍석까러준~~ -
▣ 김영환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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