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찾은 선조님 시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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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7-11 17:09 조회1,521회 댓글7건본문
은회씨의 도움으로 축은시집이라는 고서 한권을 입수했습니다.
축은집은 규장각, 국중도, 한국문집총간 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축은시집속에는 지금까지 제가 보지 못했던 선조님들의 시문이 다수 있어
가슴이 콩콩 뛰게 하고 있습니다.
먼저 축은은 누구인가?
역사상 알려지지 않은 분이어서 역사 정보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목은 이색이 쓴 축은재기가 있어 축은은 송문중인가 했더니
축은집에 성씨가 김해김씨라는 대목에서 막혔습니다.
이러저리 찾다 야은일고(전녹생문집)와 양촌집(권근)에서 겨우 찾아냈습니다.
야은일고 존모록
金方礪字汝用。號築隱。金海人。權陽村近嘗送公歸金海。有剛直多違世。懷藏自識時之句
양촌집
贈金中顯方礪詩序 權近
金海金君汶用號築隱。吾母黨族也。
축은은 김해김씨 김方礪 일 듯 싶습니다.
혹시 다른 분일 수도 있습니다.
축은, 퇴은, 담헌 같은 집안 사람입니다
아시는 분 연락 바랍니다.
이 문집은 축은,퇴은 담헌 의 세분의 시를 묶은 시집으로 제1권입니다.
2권이상 있을 듯 싶습니다.
우선 선조님 관련 자료 목록부터 옮겨 보겠습니다.
내용은 차근 차근 살펴 보기로 하구요
김제안 逢友 有感 贈 築隱
김제안 증 축은
김제안 譏談 증 축은
김사형 증 축은
김약재(김구용) 輓 축은
김약재 晩春 증 축은
김구용 代 李穡 증 축은
김구용 代 李行 증 축은
김구용 증 축은
김구용 증 축은-2-
김永旽 증 축은
挽김제안- 축은
증김구용使권양촌(권근) - 축은
증김제안 장형숙 -축은
摠 증김제안 황방촌 --축은
代 金永旽 증 축은--박상충
대 김영돈 증 축은---尹陟
확인할 사항
증 李益齋 永旽--축은(이익제 영돈이라는 분이 있는지 오식인지?)
위 김영돈 의 돈자의 변은 달월변도 있고 날일변도 있습니다
이익제 영돈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대강 살펴본 제목만 뽑아 보았습니다.
익원공의 시도 아직 제가 못본 시문이고요
문온공의 시도 척약재 집에는 없는 시입니다.
문숙공(돈 자가 틀림- 그러나 고려사에는 永旽라고 되어 있어 맞는 듯 합니다.)의 글도 처음입니다.
문숙공과 익원공의 시문은 전해오는 것이 많지 않아 특히 관심거리입니다.
물론 제가 과문하여 그런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저는 처음 대하는 글이어서
흥분되는 그런 글 입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시 원문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築隱 참고자료
야은일고 존모록
金方礪字汝用。號築隱。金海人。權陽村近嘗送公歸金海。有剛直多違世。懷藏自識時之句。
야은일고
先生歷官略
十二年癸卯閏三月乙酉。以典理摠郞。錄辛丑扈從
▶ 003_418a
功二等。 見麗史。下同。
按麗史。恭愍十一年。改吏部爲典理司。以侍郞爲摠郞。○按麗史。是年二月乙亥。王發淸州。壬午。還京師。甲申。賀還都。閏三月乙酉。錄功臣。先生以扈從功。錄前司宰令金暉下。典法摠郞權鑄上。嘗累轉左常侍
按。先生本傳云。錄功爲二等。累轉左常侍。然則自典理摠郞。至左常侍之間多歷他職。可知矣。是年。修聘浙東。
見陽村集
按。綱鑑會纂曰。時方國珍據台州。台州。屬浙東。○按。時築隱金公方礪爲副
양촌집
贈金中顯方礪詩序 權近
金海金君汶用號築隱。吾母黨族也。初仕柏堂。材出衆。癸卯之難。徵兵交州。大爲玄陵器重。其年。使宰相田公祿生。修聘浙東。君爲副。皆時之選也。浙東人稱其知禮。洪武十六年龍集癸亥良月胐。 出陽村集
축은재기(築隱齋記)
- 목은 이색
문생 송문귀(宋文貴)가 이름 자의 귀(貴) 자를 고쳐 중(中) 자로 하였는데 자(字)는 일창(日彰)이다. 판축(版築)의 축 자를 따서 그가 사는 집을 이름하여 ‘축은(築隱)’이라 이르고, 나에게 기문을 구하여 말하기를 “문중이 젊을 때에 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매우 사랑한다면 그 몸으로 하여금 세상에 현달하게 하고자 하였을 것이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세상에 현달하는 길이 세 가지가 있으니, 유학[儒]과 관리[吏]와 무관[武] 등이 있는데, 나의 기질이 유학에 가까운 까닭에 문귀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아,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을 깊이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중이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천작(天爵 사람에게 갖추어진 자연의 미덕)이 곧 그것이다. 천작을 닦아 인작(人爵 사람이 정한 관위(官位))이 따르는 것은 사군자의 크게 욕망하는 바이나, 곧장 인작을 구하고 천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우리 유학자의 일은 아니다.천작이란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 일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니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인 중도(中道)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 자로 고친 것이니, 중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각기 분립하는 바 되는 것으로써 그 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부모가 명명(命名)한 뜻에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내가 힘써야 할 바에 대해서도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으니, 하분(河汾)에서 학도를 모아 학문을 강의한 문중자(文中子)를 사모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건대 아울러 이를 기록해 달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중에 대한 뜻풀이는 《중용(中庸)》에 풀어 있다. 다시 무슨 말을 늘어놓으랴. 그러나 일창이 이미 중 자로써 스스로 명명하고, 그 사는 집을 축은이라 이름하니 내 이로 보아 일창은 뜻있는 사람임을 알았노라. 중(中)의 용(用)은 말할 때, 고요할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에 항시 드러나 보이며, 그 체(體)는 높아서 가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이에 집을 짓고 스스로 거함에 집안이 온통 소연하니 일창의 중용의 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띠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뜰을 쌓은 것은 상고의 성인이 그 중용을 쓴 것이요, 주옥으로 정자와 궁실을 호화찬란하게 장식함은 후세 사람이 그 중용을 잃은 것이니, 일창의 중용지도를 내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대부가 그 뜻을 얻어 처신함에 있어, 그 거처를 화려하게 하고 그 음식을 풍족하게 하여, 안으로는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밖으로는 그의 영달을 과시하면서도 날로 부족하게 여기나, 요행히 아들에게 전하고 또 요행히 손자에게 전하는 자는 아마 몇 사람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집을 옮기고, 벽도 마르기 전에 주인이 바뀌는 수도 있으니, 축은의 집은 이런 유가 아님이 명백하다.그러나 다만 깨진 독 아가리로 창(窓)을 내었던가, 문 옆에 홀[圭] 모양의 좁은 문을 내었던가, 노끈[繩]으로 문 지도리를 대용하였던가, 가시덤불로 사립을 했던가, 움집같이 되었던가, 토실(土室)같던가, 위로 비가 새던가, 옆으로 바람이 들어오던가는 알지 못하나, 하나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담소하는 자리에 당대의 석학들이 있을 것이요, 왕래하는 손님에는 이름 없는 백도(白徒)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일창이 그 가운데 편히 살면서 반드시 사모하는 바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부암(傅巖)땅의 부열(傅說)이 아니겠는가? 고종(高宗)이 꿈을 꾸고 않는 것은 또 하늘에 있는 것이니, 일창은 오직 중(中)의 도(道)만을 굳게 잡는다면 평생을 축은재에서 마친대도 미워할 바 아니요, 그 모형을 그려 널리 천하에 구한다 해도 또한 원할 바 아닐 것이니, 중의 도란 사람에게 있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것인가?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어지럽게 하는 자는 화를 입는 것은 그 유래가 명백하니, 천도(天道)는 스스로 어김이 없는 것이다. 일창은 그것을 더욱 힘쓸지어다.
원문
門生宋文貴改貴以中。字日彰。取版築之築。名其所居曰築隱。求予記曰。文中之少也。父母愛之甚。受之甚。則欲其身之顯于世。其心可知也。兄顯于世者三。
▶ 005_038c
曰儒。曰吏。曰武。而吾之氣質近於儒。故名曰文貴。嗚呼。父母愛子之心如是。可不深致其思乎。文中私自念日。人人之身有良貴。天爵是已。修天爵而人爵從之者。士君子之所大欲也。直欲求人爵。而不顧天爵。則非吾儒者之事也。天爵者。仁義忠信樂善不倦也。仁義忠信樂善不倦。一中而已也。故更以中。中。天地人所由立也。貴無對焉。則於父母命名之義不少反。而吾之所以用力者。亦有所據依矣。非有慕於河汾也。願倂記之。予曰。中之訓。中庸盡之。夫何庸贅。然日彰旣以中自命。而所居則曰築隱。予以是知日彰有
▶ 005_038d
志者也。中之用。著於語默。見乎行藏。其體則卓爾而莫可從也。於是。築室自居。環堵蕭然。日彰之中在焉。茅茨土階。聖人之用其中也。瑤臺瓊室。後世之先其中也。日彰之中。予益慕焉。今夫士大夫得志行已。華其居豐其食。內以適其欲。外以夸其榮。日惟不足。幸而傳之子。又幸傳之孫。蓋無幾也。至於席未暖而移居。壁未乾而易主。築隱之室。非此之類也明矣。但未知瓮墉歟。級歟。繩樞歟。蓽門歟。如陶復歟。如區脫歟。上雨歟。傍風歟。所可必者。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耳。日彰偃息其中。其必有所慕焉。非傳岩之野乎。高
▶ 005_039a
宗之夢與否。又在乎天矣。日彰惟中之是執焉。終身于築。非所惡。以形旁求。非所欲。中乎。在人乎。在天乎。福善禍淫。厥類惟彰。天道自不僭也。日彰其益勉焉。
송문중(宋文中)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무신.
1373년(공민왕 22) 6월 응거시(應擧試)로 급제하였으며, 그해 9월 정조사(正朝使)인 밀직부사(密直副使) 주영찬(周英贊)을 따라 명나라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풍랑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다시 밀직부사 장자온(張子溫)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가 회시(會試)를 보려고 하였으나 도착이 늦어 시험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호군(上護軍)·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389년(공양왕 1) 상호군 겸 사헌부집의로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 재임시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고신(告身:사령서)에 서명받지 못하였다.
그뒤 대사성을 지냈으며, 1391년에는 일본의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九州探題) 미나모토(源了浚: 今川了浚) 가 피로인(被虜人)남녀 68인을 송환한 데 대한 답례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서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로서 전에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그를 보좌한 공으로 대장군 조경(趙卿)과 함께 상을 받았다.
1396년 풍해도관찰사(豊海道觀察使)로서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공을 세웠다.
김영돈(金永旽)
?∼1348(충목왕 4).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녹사(江陵府錄事)가 되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 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조적(曺頔)의 난 때 시종한 공로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46년(충목왕 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김구용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등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어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귀양갔으며, 뒤에 여흥(驪興)으로 옮겨 강호에 노닐며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이라 이름하고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1381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떠날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다.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주관육익 周官六翼》을 찬하였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다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제안(金齊顔)
?∼1368(공민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중현(仲顯).
방경(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구용(九容)의 아우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364년(공민왕 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공(邊功)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어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하여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하여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郎)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하여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여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전녹생(田祿生)
1318(충숙왕 5)∼1375(우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野隱).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제주사록(濟州司錄)에 임명되었다가 들어와 전교(典校)·교감(校勘)이 되었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교감으로서 좌랑 서호(徐浩)와 함께 기황후(奇皇后)의 친척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의 죄를 다스리다가 그가 옥사하였으므로 잠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1357년(공민왕 6)에 왕이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니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서 우간의 이색(李穡), 우사간 이보림(李寶林), 좌사간 정추(鄭樞) 등과 함께 그 폐단을 논하여 염철별감을 파견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43년 전라안찰사로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왕이 남행하자, 왕을 호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좌상시(左常侍)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대사헌·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러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1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이색과 함께 진사를 선발하였다.
1373년에 서북면도순문사로서 충혜왕의 얼자(孽子)라고 칭하던 석기(釋器) 가 이안(李安)·정보(鄭寶) 등과 어울려 반역을 꾀하였다는 명목으로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1375년(우왕 1)에 간관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을 벨 것을 청하니 왕이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이들의 말이 박상충(朴尙衷)과 전녹생에게 관련되므로 최영이 이들을 심하게 국문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모두 가던 도중에 죽었다.
저서로 《무은집》이 있다.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이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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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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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상당히 귀중한 자료입수를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내용들이 궁금해지고 기대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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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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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귀한 서적 입수 축하드립니다.
내용이 정말 궁금합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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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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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축하드림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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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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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귀한 자료 입수를 축하드립니다.
永暾은 여러 문헌에서 永旽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이익재 영돈>만 보면 <익재라는 호를 가진 이영돈>이란 풀이로 볼 수 있는데 앞에 贈을 넣으면 이는 <익재(이제현1287-1367)에게 준 영돈(?∼1348) 의 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부디 처음 발견하는 글들이 나오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봅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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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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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귀중한 자료입수 축하드립니다.내용이 정말 궁금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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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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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구용 김제안 형제, 그리고 김영돈, 김사형 선조님을 포함한 1300년대 중반 우리 가문의 교류의 한 축을 새롭게 알수 있는 귀한 고문서입니다. 더군다나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본!!! 저도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김진회(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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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회(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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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자료 입수를 축하드립니다.
대부님 덕분에 안동김문의 역사를 배울수 있어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소자도 열심히 하나하나 배워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