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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 자료---전서공파7 (김익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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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25 11:38 조회1,5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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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

대사헌의 직을 맡고 있던 중 노친을 모시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부모가 사망하자(부친 김휴는 1430년 졸)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고 한다.


김익정(金益精)이 모친께 드리는 제문 (제공 郡/김태영 2002/09/10)

아, 본성이 착한 분이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입니까. 곧고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나 스스로 근검을 힘써 실천 하였습니다. 17세에 부친의 배필이 되어 훌륭한 부도를 갖추시고 집안 살림을 법도에 맞게 하였습니다. 시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방도가 있으시어 어리석은 저를 또한 장성하게 하셨습니다. 족친에게 은혜롭게 하고 이웃 마을에 까지 사랑이 미쳤으며 노소의 비복(婢僕)들을 두루 어루 만지고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옛적 약관의 나이가 지난후, 벼슬에 나가 영화롭게 봉양할 뜻을 두어 책을 끼고서 학문에 종사하여 대과에 급제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판(仕版)에 올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노력하여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음식을 봉양하고 안부를 여쭙는 일을 일찍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멀리 계신 어머니를 뵙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한순간도 떨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지낼 뿐이었으므로 마음이 매우 슬펐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면 곁에서 모시고 저의 직분을 다하여 여생을 위로해 드릴 날이 꼭 있을 것이라 생각 하였으니, 간절한 이 회포는 실로 하늘이 살펴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난해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받드니, 지난날 잘못을 후회하여 깨닫고 이제야 옳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번 편찮으시더니 쾌차하지 못하시고 그길로 이렇게, 길이 어긋나 저에게 영원한 슬픔을 품게 하였습니까.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저의 허물입니다. 효도 할날은 짧고 충성을 바칠 날은 길다는 예전 사람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조모께서 오히려 당에 계시니 기거 안부를 살피는 부지런함을 어머니의 뜻에 이어 실추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수 한잔 술을 떠서 영전에 바치고 제문을 읽습니다. 영령께서는 곁에 계실 터이니, 아. 흠향하소서.


아, 어머니께서는

저를 길러 장성하게 하셨으니

고생 고생 저를 기르시며

영화로운 봉양 보리라 여겼습니다.

하늘이 저를 불쌍이 여기지 않아

홀연히 어머니를 잃게되니

나가서는 안부를 물을곳이 없고

돌아와서는 이를데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욱 아팠으니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던 일

꿈속 같은데

저의 이 생이 마치도록

다시 할수 없습니다.

어머니 께서 만들어 주신 옷이

아직까지 저의 몸에 있는데

지금 후한 녹을 받기에 이르러

어머니께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덕을 갚을지

하늘을 우러를 따름입니다.

아, 아름다운 우리 임금께서

저를 공신이라 일컫고

어머니의 작호를 내리시어

한국부인이라 하셨습니다.

(춘정 변계량의 춘정집(春亭集)에서)


6) 세차례의 사행길, 재종 김종서와 더불어 북변확장

세종12년(1430년) 예조 참판,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고, 5월에 사(使) 도총제 문귀(文貴)·부사(副使) 동지총제 김익정(金益精) 등이 표와 전을 받들고 떠나갔다. 8월 사은사(謝恩使) 도총제 문귀(文貴)와 부사 동지총제 김익정(金益精)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세종13년 특명으로 전 총제(摠制) 김익정(金益精)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이어 인순부 윤(仁順府尹)이 되고, 세종14년 이조 좌참판(吏曹左參判),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세종15년 10월에 이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익생(金益生)을 보내어 북경에 가서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세종16년 2월 정조사(正朝使) 이조 좌참판 김익정(金益精)과 부사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익생(金益生) 등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장전(帳殿)으로 불러들여 보았다. 이조 좌참판, 경창부 윤(慶昌府尹), 예조 좌참판, 호조 우참판, 한성부 윤을 거쳐 11월에 성절사(聖節使) 예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다.

세종17년 3월에 절일사(節日使) 김익정(金益精)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왔다. 3월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을 전담하게 했다. 이어 형조 참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7) 김익정과 박팽년과 김종서

김익정은 세종15년(1433), 하정사(賀正使)의 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누이의 손자인 박팽년의 외조부 김익생이 부사였다. 즉 누이의 사돈이 김익생이었다.(김휴---김익정 누이+박안생---박중림+여(부 김익생)---박팽년)

   박팽년은 결성면(현 충남 홍성)에서 학덕이 높았던 김대래(김구---김천순---김담---김대래)와도 교분이 많아(朴公彭年以公同年子。又作詩卷序) 세종이 집현전을 확충할 때 박팽년이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익정은 절제 김종서의 재종형이 되기도 하는데, 김종서의 조모가 김익정 모친의 고모이다.(조모 선산김씨---부모---김종서, /김휴+선산김씨---김익정) 세종17년(1435)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김익정이 돌아와 3월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두만강변 4군6진 개척)을 전담하게 한다. 김종서는 또한 김연수(문온, 대사헌 역임)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문온공---김명리---김맹헌---김자정---김연수+여(부 김종서))


8) 말년의 시문

송추(送秋) <제공 김은회 2003/10/22>

西風吹欲盡(서풍취욕진) : 서풍이 불어 다하려는데

白日向何歸(백일향하귀) : 여름은 어디를 향해 돌아가는가

?下?音斷(체하공음단) : 섬돌 아래 벌레소리 끊이고

天涯雁影稀(천애안영희) : 하늘 가에는 기러기 그림자도 드물다

山應臨別瘦(산응림별수) : 산은 응당 가을을 보내기에 파리하고

葉爲送行飛(엽위송행비) : 나뭇잎은 가을을 보내고 나르는구나

來往光陰變(래왕광음변) : 오가는 세월이 변해가니

衰翁也獨悲(쇠옹야독비) : 쇠한 늙은이야 홀로 슬퍼하노라


송추(送秋) <제공 郡/김태영 2002/08/08>

서풍이 불어 다하려 하는데,

흰 날 어디를 향해 돌아가는고.

뜰 밑에는 벌레소리 끊이고,

하늘 가에는 기러기 그림자가 드물다.

산은 응당<가을을> 이별하기에 파리하고,

잎은<가을을>보내 노라고 나르네.

오가는 광음(光陰)이 변하니

쇠한 늙은이 홀로 슬퍼 하노라.


정대사(呈大使) <제공 김은회 2003/10/22>

欲歸歸未得(욕귀귀미득) : 돌아가려도 돌아가지 못하여

人事苦相牽(인사고상견) : 사람의 일이란 괴롭게도 서로 끌린다

回互路何遠(회호로하원) : 돌고 돌아 길은 어이 그리도 먼지

玄黃馬不前(현황마불전) : 머뭇 머뭇 말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秋風催落葉(추풍최락엽) : 가을 바람은 지는 나뭇잎 재촉하고

白髮報殘年(백발보잔년) : 흰 머리털은 쇠잔한 나이를 알린다

兩地相思恨(량지상사한) : 두 땅에서 서로 생각하는 마음의 한

難成一夜眠(난성일야면) : 하룻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정대사(呈大使) <제공 郡/김태영 2002/08/08>

돌아가려도 돌아가지 못하노니

사람 일이 괴롭게 서로 끌리네.

돌고 돌아 길은 어이 그리 멀어,

머뭇 머뭇 말(馬)은 가지않네.

가을 바람은 지는 잎을 재촉하고

흰털은 쇠잔한 나이를 알리네.

두 땅에서 서로 생각하는 한(恨)으로

하룻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9)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전의를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소는 양주 고령산 고령사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였다. 그리하여 전의면 압곡에 설단하였고, 압곡에는 그의 효자정려가 있다.


《 세종 071 18/01/26(임진) / 형조 참판 김익정의 졸기 》(제공 김윤만 2003/10/08)

  형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이 졸(卒)하였다. 익정의 자는 자비(子斐)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을과(乙科) 제 1등에 합격하여 여러 번 천직(遷職)되어 습유(拾遺)·헌납(獻納)·장령(掌令)·지사간(知司諫)·대언(代言)에 임명되고, 나가서 충청·전라·경기 삼도(三道)의 감사를 지내고, 들어와서 동지총제(同知總制)·경창부 윤(慶昌府尹)·대사헌, 이조·예조·형조 삼조의 참판을 거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갔다.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사를 내렸다. 아들 둘이 있으니 김숙(金潚)과 김형(金泂)이었다.


10) 사후 20여년후 효행정려

3년의 시묘로 효행이 출중하여 사후 20여년후(세조) 정려되었고, 1824년(순조24) 중건되었는데, 宋穉奎(송치규)가 찬했으며, 현감 兪漢芝(유한지)가 글씨를 썼다. 몇해전 앞마을(압실-양곡2리)에 있던 김익정의 정려현판을 양곡리 입구(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 있는 그의 현손 김사준의 효행정려에 옮겨와 합하여 쌍효자문이 되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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