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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자료집_04 전서공파 파조 묘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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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5-07-27 03:47 조회1,55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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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 묘역 일대

■ 전서공 휘 성목(成牧) 파조 묘역

- 충남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 학당골

 

◇ 장령공 휘 구(玖)

충숙공(휘 승용 : 1268~1329)의 2남(김후, 김구) 1녀(유지연에게 출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29년(충숙왕 16) 낭장(郞將)이 되었고, 감찰사 장령을 역임했다. 슬하에 2남(김성목, 김천순)과 딸을 두었는데, 큰아들(휘 성목)은 전서공파 파조, 작은아들(휘 천순)은 부사공파 파조이시다.

장령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는 아들 김성목, 손자 김휴의 묘역 상단에 설단하였다. 아버지 충숙공(휘 승용)께서 충숙왕 16년(1329년) 3월에 원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오시던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 병을 얻어 신안의 여관에서 돌아가셨다. 이때 형 김후와 함께 아버지의 오랜 벗 이숙기 공에게 부탁하여 충숙공의 묘지명(가로 38cm×세로 65cm, 글자 크기 1cm)을 지었다.

오늘날 전하는 묘지명은 대부분이 후대에 지은 것이나, 충숙공 묘지명은 당대에 지은 것으로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나 생활상 등을 유추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나, 발견 경위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전서공 휘 성목(成牧)

감찰사 장령 휘 구(玖)의 2남(김성목, 김천순) ○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말에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슬하에 정부인 한양조씨와의 사이에 1남 ○녀를 두었다. 묘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다. 1992년에 대대적으로 사초하면서 묘비를 새로 세웠는데, 원래 봉분을 그대로 두고 숯을 채우고 다시 봉분을 넓고 높이 세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묘 위쪽에 부친 장령공 김구(金玖)의 단비가 건립되었고, 묘 아래쪽에 아들 김휴(金休)의 묘소가 있다.

 

◇ 학당공 휘 휴(休)

전서공(휘 성목)과 정부인 한양조씨 사이에서 1350년(고려 충정왕 2년)에 출생하여 1430년 81세로 몰하였다. 자는 鍊父(연부), 호는 학당(學堂).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門下生)이다. 학당공께서는 고려 말에 사간을 역임하고(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하자 향리에 퇴둔하였다. 조선조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정절을 지켰다(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성장기와 청년기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檢校近侍(검교근시)에 올라 왕을 시종하였다. 35세 때 종숙 척약재(휘 구용)께서 중국 대리로 유배되시자 <정종숙척약재도배시운(呈從叔惕若齋島配時韻)를 지었다.

 

          呈從叔惕若齋島配時韻 종숙 척약재 유배 때 보낸 시

     大理島中叔是非 대리도에 계신 숙주(叔主)의 시비(是非) 때문에

     浮雲山下姪冠衣 부운산 밑에 있는 종질(從姪)은 의관(衣冠)이 잦습니다.

     島山千里相思夜 도산천리(島山千里) 떨어져서 서로 사모하는 밤에

     自獨無言不掩扉 스스로 홀로 말없이 사립문을 못 닫나이다.


◇여말선초의 충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호군(護軍)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김성목)를 모시기 위하여 사양하고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초야(草野)에 묻혀 학문을 닦아 학당공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 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학당공께서 은거하신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 학당리(學堂里)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위와 자녀

1430년 81세로 일기를 마쳤으며, 부인은 선산김씨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익정(益精), 익렴(益廉)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익정은 1425년 대사헌에 재임 중 노친을 모시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동생 김익렴과 함께 3년씩 6년간이나 시묘하였다.


◇사위 박안생(박팽년의 조부)

막내(둘째) 사위가 순천인 박안생(朴安生)으로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조부이다. 연기지역에 순천박씨들이 터전을 마련한 것도 안동김씨의 사위로 이 지역에 입향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김구 → 김성목 → 김휴(1350~1430년) → 김익정(1375?~1436년), 김익렴, 장녀, 차녀+박안생

◈박안생+여(부 김휴) → 박중림(朴仲林 1400~1456년)+여(부 김익생) → 박팽년(1417~1456년)

◈박안생(朴安生) : 의영고사(義盈庫使), 목사(牧使)를 지냈다.

◈박중림(朴仲林) : 한석당(寒碩堂 1400 ~1456년). 이조ㆍ형조판서를 지냈다.

◈박팽년(朴彭年) : 취금헌(醉琴軒 1417 ~1456년). 사육신. 시호는 충정이다.

◈박안생은 전의(全義)의 명족(名族)인 안동김씨 한성좌윤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둘째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가 근처로 이사하니 그가 살던 전의읍치 북쪽의 상(上), 중(中), 하대부리(下大夫里) 일대를 박동(朴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현재의 전의면 관정리(觀亭里) 일대이다. 상대부리는 전의읍치에서 7리, 하대부리는 5리 떨어진 곳이다. 전의읍지에 의하면 집 부근에 한석정(寒碩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있었다. 박중림은 외가가 있는 학당리에서 태어나 박동에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휴의 아들 김익정은 세종 15년(1433년), 하정사(賀正使)의 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누이의 손자인 박팽년의 외조부 김익생이 부사였다. 즉 누이의 사돈이 김익생이었다.

▲김휴 → 김익정 누이+박안생 → 박중림+여(부 김익생) →박팽년


박팽년은 결성면(현 충남 홍성)에서 학덕이 높았던 김대래와 교분이 많아(朴公彭年以公同年子。又作詩卷序) 세종이 집현전을 확충할 때 박팽년이 천거하였다고 한다.

▲김구 → 김천순 → 김담 → 김대래


김익정은 절제 김종서의 재종형이 되기도 하는데, 김종서의 조모가 김익정 모친의 고모이다.

▲조모 선산김씨 → 김추 → 김종서 / 김휴+선산김씨 → 김익정


세종17년(143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김익정이 돌아와 3월 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두만강변 4군 6진 개척)을 전담하게 하였다. 김종서는 또한 김연수(문온공파, 대사헌 역임)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문온공 김구용 → 김명리 → 김맹헌 → 김자정 → 김연수+여(부 김종서)


◇1819년 유허비 건립

전면 김휴 유허비(高麗檢校金公遺墟碑)는 숭정기원후사기묘(崇禎紀元後四己卯) 5월,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 1759~1838년)가 찬(撰)하였다. 후면 김휴 행장(書高麗檢校學堂金公狀錄後)은 외후손 삼주(三州) 이채(李采 1745~1820년)가 찬하고, 연안(延安) 김광(金鑛)이 서(書)하여 1819년(순조19, 崇禎紀元後四)에 세웠다. 이 유허비의 건립에는 후손으로 전의현감으로 부임했던 김규한(金奎漢)의 주선이 컸다. 그 후 후손 광순(光淳)이 1896년(고종 13년) 2월에 개각(改刻)하였는데, 의현(義鉉), 창묵(昌默), 국현(國鉉), 규노(奎魯), 효건(孝騫), 진필(鎭弼) 등이 참여했다.

이 유허비는 동지들이 세워줬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비의 내용은 김휴가 정몽주가 순절하자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길에서 떠나 향리로 내려와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金休 遺墟碑

[頭篆] 學堂金公遺墟碑

高麗檢校金公遺墟碑

全義縣東雲住山下學堂洞者高麗檢校金公屛居而自靖之地也公名休字鍊夫安東人公以京華世族登第仕于朝圃隱鄭先生死與崔晩六瀁出國門痛哭相別各退隱于鄕盖二公同受學於先生之門公旣絶當世之念惟以養親講學爲務我 朝受命 太宗屢徵以官終不出沒而葬于是世傳洞之名肇自公時而因公實蹟云鳴呼文献無徵公之始終固不能得其詳考諸 牒及邑誌所載有以見大節之偉然者則□可略也抑公師事大賢嘗以卓節至行見許而畢竟所成就如此其所講之學之正從可知也惜乎其泯泯無傳然公之後承多以忠孝蒙旌褒之典若外裔則平陽朴先生彭年貞忠貫日打愚李文穆公翔陶庵李文正公縡道學名世夫孰曰靈芝無根醴泉無源也哉公之諸後孫將立石以表其遺墟來請余識其陰者曰奎漢仁基也余以陋拙辭不獲略書此俾歸刻焉

崇禎紀元後四己卯五月 日嘉善大夫大司憲恩津宋穉圭撰


[後面題] 書高麗檢校學堂金公狀錄後

昔在麗季天眷聖人新服厥命一時豪傑之士孰不願攀附風雪以興明良之會而公獨乃棄富貴如土苴走窮山絶峽之中寧枯死嵁嵒而靡悔焉者則其志不食周栗也韓愈氏所謂特立獨行而不願者非斯人之儔歟余讀高麗檢校金公狀錄諱曰休學堂其號盖亦慕伯夷之風者早從圃隱先生學洎先生殉國遂屛于全義之雲住山朝廷屢徵不就豈不誠烈丈夫哉當是時有若吉注書徐掌令諸公皆沒身 跡爲萬世存大經君子義之紀于史銘于石垂四百餘年以壽其名夫子盖曰民皆有秉彛也故好是懿德然則公之所樹立如彼卓矣而世之尙論者獨未有揚抱何哉雖然公同門友崔瀁又以布衣避世相與作詩以示志痛哭于國門之南而去之後人稱爲晩六處士鳴呼誦公之詩百世之下猶可以想見其心而夷考其所與師友則所養又可知惜乎其事行之泯而不章也按全義誌公官漢城左尹不拜事親以孝訓子以方信於朋友惡聞人過是亦足以徵諸後也公家世崇顯雲仍又蟬聯不絶以忠孝旌者三於外裔盖多賢人名世者釆九世祖參判公配即公孫女公後孫佐赫奎漢以余得借彌甥謁爲文夫稱揚先祖之美而明著之後世者禮所勸也獨恨其不得於打愚陶庵之世而乃徵於余也遂書此以歸之

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三州李采撰

通政大夫行刑曹參議延安金鑛書

崇禎紀元後四□□月 日立

後孫光淳 丙申二月 日改刻

□□   義鉉

□□   昌默

國鉉   奎魯

孝騫   鎭弼


운암(雲庵) 김익정(金益精)

1375(?)~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호는 운암(雲庵).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50~1430), 외조부는 김효신(金孝信), 장인은 권담(權湛)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났다.


◈장원 급제

여말의 충절을 지킨 부친(김휴)과 달리 태조 5년(1396년) 근정전 친시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학식뿐만 아니라 인물도 빼어나게 잘생겨서 일찍이 태종의 눈에 띠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409년(태종 9년)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세종의 측근

1411년(태종 11년)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있을 때 청렴하고 학문을 진작시키는 데 공이 커서 오랫동안 칭송되었다. 1414년(태종 14년)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1418년(태종 18년)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발탁되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세종이 즉위(8월 8일)하자마자 좌부대언(左副代言) 즉 좌부승지가 된 다음 우대언(右代言),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거쳤다. 참찬관으로 경연에 참석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기를 청했다.

세종 4년(1422년) 12월 12일 파직될 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 좌석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侍宴)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되어 하찮은 일로 파직되기도 했다.


◈경자자 제작에 참여

세종 2년(1420년) 12월 9일 지신사(知申事) 즉 도승지에 올랐다. 세종 4년 이천과 남급이 주관하고 김익정(金益精) 등이 감독하여 계미자(1403년, 태종 3년)의 단점을 보완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다.

주조기간은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렸다. 14년 후인 1434년에 제작된 초주 갑인자는 이후 6차례(혹은 12차례) 개주되었다. 갑인자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백미로 군사공파 김돈 선조님께서 글자체 및 제작을 주도하였다.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의 별칭

세종 6년(1424년) 경창부 윤(慶昌府尹)이 되었다가 이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잇따라 예조 참판과 세종 7년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더불어 서로 잇달아서 대사헌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 일컬었다.

세종 8년에 예조참판, 중군 동지총제가 되고, 세종 9년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때 황희(黃喜)는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은 우의정, 김익생(金益生)은 좌군 동지총제, 김종서(金宗瑞)는 사헌 집의가 되었다.


◈6년간 시묘살이 마친 효자

대사헌에 재임 중 노친을 모시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학당공 휘 휴께서는 1430년 졸)

춘정 변계량의 문집인 춘정집(春亭集)에 ‘모친께 드리는 제문’이 전한다. 어머니의 지극하신 사랑과 그런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의 간절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명문이다.


◈재종 김종서와 더불어 북변확장

세종 12년(1430년) 예조참판,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해 5월에 사은사(謝恩使) 도총제 문귀(文貴)ㆍ부사(副使) 동지총제 김익정(金益精) 등이 표와 전을 받들고 떠나갔다. 8월 사은사 도총제 문귀(文貴)와 부사 동지총제 김익정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세종13년 특명으로 전 총제(摠制) 김익정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이어 인순부 윤(仁順府尹)이 되고, 세종 14년 이조 좌참판(吏曹左參判),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세종15년 10월에 이조참판 김익정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익생을 보내어 북경에 가서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세종16년 2월 정조사(正朝使) 이조 좌참판 김익정과 부사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익생 등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장전(帳殿)으로 불러들여 보았다. 이조 좌참판, 경창부 윤(慶昌府尹), 예조 좌참판, 호조 우참판, 한성부 윤을 거쳐 11월에 성절사(聖節使) 예조참판 김익정(金益精)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다.

세종 17년 3월에 절일사(節日使) 김익정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왔다. 3월 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삼아 북변확장을 전담케 했다. 이어 형조참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

1435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졸하였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전의를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소는 양주 고령산 고령사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의면 압곡에 설단하였다. 압곡에는 그의 효자정려가 있다.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사후 20여 년 후 효행정려

3년의 시묘로 효행이 출중하여 사후 20여 년 후인 세조 때 정려되었다. 1824년(순조 24년) 중건되었는데, 송치규(宋穉奎)가 찬했으며, 현감 유한지(兪漢芝)가 글씨를 썼다.

몇 해 전 앞마을(압실 : 양곡2리)에 있던 김익정의 정려 현판을 양곡리 입구(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에 있는 그의 현손 김사준의 효행정려로 옮겨와 합하였다. 이로써 쌍효자문이 되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16호이다.

<충청도 읍지>, <호서읍지> 중의 ‘전성지 인물조’(1895년), <대동신편(大東新編)>, <효자록>, <연기지>, <조선환여승람> 등에 그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 은암처사 김사준(金師俊)

1439년~1520년. 김익정의 현손으로 자는 명숙(明叔), 호는 은암처사(恩庵處士)이다.

형조참의(形曺參議)를 지낸 김구년(金龜年)의 5형제 중 2남으로 1439년(세종 21)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에 출사해서 정사를 보았고, 어머니 이씨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의성군 이채(議城君 李采)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녀요, 태종의 증손녀로 남달리 출중한 가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자랐다.

혼란 속에 있던 조정은 마침내 1455년(단종 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2세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정변을 일으켰고, 다음 해에는 피비린내 나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이 단행되었다. 부친(김구년)은 이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로 낙향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지만 벼슬은 물론 과거에도 일체 응하지 않고, 오직 효행과 덕을 쌓는 일에만 주력했다.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하자 연근을 구해 병을 낮게 했으며, 부친이 75세에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져 1469년(예종 1) 예종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능참봉(陵參奉)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전의 추하(楸下 : 현재의 양곡)에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힘쓰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명종대(1546~1567)에 이르러 “그의 출천지효(出天之孝)는 영세불망(永世不忘)이라” 치하하면서 명정했다. 양곡리 동구 밖에는 김사준을 기념하는 ‘효자거리(정문거리)’가 있다.


◇쌍효자정려

효자 김익정과 그의 현손 김사준의 정려. 전의면 양곡리 양지촌 285번지에 있다. 김익정은 세조조, 김사준은 명종조에 각각 정려를 받았다. 1820년에 중수하였으며, 2001년 5월 31일 연기군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열녀 김환 처 남양홍씨 정려

남양홍씨는 일찍이 가훈을 익히고 부덕을 쌓았으나, 출가하기 전에 양친을 잃고 남매가 의지하여 길쌈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모든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에 사는 김환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자 그 소문이 멀리에까지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1732년(영조 8) 6월에 남편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다.

남편의 병환에 동침하면 해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벌써 부인은 임신 4~5개월이었다.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 남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 하였으나 점쟁이의 말대로 남편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부인은 가장인 남편이 사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생명을 보전하겠는가 하고 급히 어린아이를 불러 울면서 젖을 먹인 후에 광속에 들어가 음독 자살하였다. 이후 이러한 부인의 열행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남편의 병이 차도가 있어서 살아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이는 분명 부인의 지성이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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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상석 대부님, 나머지는 출장 다녀와서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