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흔 선조님과 같이간 인질(뚤루게(禿魯花) (1)박항의 아들 박원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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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8-10 14:40 조회1,977회 댓글1건본문
도첨의공 김흔 선조님께서는 충렬왕 5년(1279년) 대방공 징과 함께 당시 권문세가의 아들 25명과 함께
원나라에 뚤루게(독로화=인질)로 가셨습니다.
이때 같이 간 25명중 알려진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사기(韓謝奇 )의 사적에 보면...
同 5년 己卯 3월 丁巳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하여 독로화를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欣)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타)와 허공(許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 검(薛公 儉)의 아들 지충(之沖)과
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심(深)등으로서
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월등(越等)한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
여기에서 원전은 원부의 오자이며 박항의 아들 박원타는 박원굉의 오타이다 물론 김흔의 한문도 틀리나
고려때의 이름자는음만 같으면 통용되었는가 봅니다.(많는 자료에 이렇게 한자가 음만 같은 분이 나온다.)
박항은 춘천박씨의 시조인데 이분의 장남이 바로 박원굉입니다.
박원굉에 대하 역사기록은 찾지 못하고 이분으 비문을 찾았습니다.
高麗大匡門下平章事春川朴公元굉 先生神道碑
명하노니 이곳은 高麗大匡門下平章事春川朴公元굉 先生의 묘역이로서이다.
공께서 서거(逝去)하신 지 육백팔십(六百八拾)여(余) 성상이라 옛비문은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자획이 마멸되어 근독(謹讀)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더이다.
이에 다시 새로 신도비를 세움에 평소 친애하는 공의 후손이 소생에게 비문을 택하라 청하시니 다시 없는 영광이라 사양치 못하고 응낙하였으니 큰 걱정이 앞설 뿐이오이다.
본래 공의 묘소는 현재 묘소로부터 서남방 약 천여보지점 하마로민생원(下馬路民生原)이었으나 소양강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역 내에 주둔하던 육군 제3군단 사령부의 이전 기지로 확정됨으로 서기1972년7월24일(음6월14일)현재 위치로 예를 다하여 이장하였다 하더이다.
고려사 및 경려지(卿閭誌)와 춘천 보사연원(譜史淵源)의 기록을 살피노니 공(公)의 휘(諱)는 원굉(源 )이시며 후에 광정(光挺)으로 개명하셨다고 기록되었으며 고려 고종 33년(1246) 경 춘성군 장본(獐本)에서 탄생하시니 당시 충효가 특출하시었던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춘성부원군 文懿公 춘천 박씨시조박항 선생의 장남이시다.
공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경명왕의 칠남 강남대군의 십이세손이시니 혁거세왕의 사십일손이시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삼십여년에 걸친 침탈에 시달렸고 마침내 몽고는 1271년 국호를 원이라고 고치더니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로 하여금 많은 병력과 군기 군량을 조달할 것을 강요하였더이다.
원의 일본정벌은 해로 원정으로 1275년 1차 정벌에 실패한 후 2차 정벌을 계획하고 고려에 강요하는 물자와 병력의 확보를 보장받기 위하여 고려의 대가 자제를 달노화적로 하여금 인질로 원나라에 입조케 하였는데 충렬왕 오년(1279)3월 丁已年에 공께서는 김방경 장군 자 흔(子 )등 25인중 한사람으로 원에 입조하시었더이다.
이때 충렬왕은 이들에게 3등 벼슬(정이품직)을 초수하였더이다.
1281년5월에 원의 2차 정벌도 실패로 돌아가는 난세였으나 공께서는 부친을 도와 애국정도와 윤리도덕으로 이를 극복하시는데 생명불사로 헌신하였이다.
공은 홍자번등과 함께 충렬왕29년 오기(吳祁)는 사람이 아첨으로 왕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왕의 부자사이를 벌어지게하고 충성있고 선량한 자를 모함함으로 오기의 건의가 모두 부정한 계책들임을 왕께 고하여 이를 시정케 하였나이니다.
공께서는 선친의 충효유덕으로 왕을 충성으로 모시다가 조정을 떠나고저 하시니 문무를 겸비하신지라 왕이 당시 춘주군 속현인 인제 기린 지방에 만호로 임직케 하셨으니 동해안 양양 지방으로부터 침입하는 왜관을 물리쳐 오시다가 충선왕 2년(1310)경에 서거하시었더이다.
공은 문무를 겸전한 능관이시니 당세에는 나라에 충신이시며 서거 후에는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후세 사람들이 받들어 예경하니 묘소앞을 지나는 도로가 하마로(下馬路) 명명되었다 하오이다.
배위는 나주 정씨이시며 壁上三韓三重大匡文晴公 鄭可臣의 따님이시다. 자손으로는 아드님 안구께서 예문관판원사(대제학)를 지내셨고 孫居實께서는 사복사정(司僕寺正)을 지내셨으며 증손의공께서는 상서병부판사를 지내시는 등 후세에도 3대에 걸쳐 급제하고 입신양명 이현부모함이 끊이지 아니하였더이다.
공께서는 예조판사를 지내신 아우 원비(元庇)를 두셨으며(묘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 외숙으로는 고려판사를 지내시고 안효 김씨 시조이신 김지경,경주인학부원군 문충공익제현과 그의 여식 공민왕혜비(恭愍王惠 ) 開城인낙랑부원군왕수, 문화인문화군유진과 그의 아드님 영의정 유정현 등을 비롯한 많은 인걸들이 공의 후예들이시니 이는 필시 공의 훈덕을 이어 받았음이리라.
공의 은택이 후손에게 충만하게 내리실 것이며 후예의 창성함과 그 영광이 헤아릴 수 없으리라. 비문이 있고 없는 것이 공의 유덕과 유훈에 관계하리요마는 이는 金石에 새기어 지워지지 않을 진대 감히 소생이 부족한 글을 쓰게 됨을 송구(悚懼)하게 여기고 누가 될까 염려되오이다.
훼손됨이 없이 자손만대 보존되어 오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봉축하기를 기원할 따름이오다.
신라 기원 204년 庚午 6월 18일
국립 강원대학교 총장
경제학박사 李春根 謹撰
平章事公 30世 苗孫 光麟 謹書
단기 4323년(서기1990)7월5일
春川 朴氏 宗中(月橋派) 謹立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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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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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귀한 고찰 감사합니다.
뚤루게에 대한 고찰이 당시 사회.정치상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됩니다.